창조의 맥락에서 본 조직신학
창조의 맥락에서 본 조직신학
2013-06-08 17:28:19
루이스 뻘콥의 조직신학에 나타나는 구조는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이다. 신론에서는 하나님의 본질, 속성, 작정, 섭리, 창조, 삼위일체를 다룬다. 인간론에서는 원시상태의 인간, 죄의 상태에 있는 인간, 은혜언약안에 있는 인간을 다룬다. 기독론에서는 그리스도의 명칭과 본질, 신분, 직무, 속죄를 다룬다. 구원론에서는 성령의 작용, 부르심과 중생, 회심과 믿음, 칭의, 성화, 성도의 견인을 다룬다. 교회론에서는 교회의 성질, 교회의 정치와 권세, 성례, 세례, 성찬을 다루며 종말론에서는 육체적 죽음과 사후의 문제, 그리스도의 재림, 부활과 심판을 다루고 있다. 이것이 전통적인 조직신학의 구조이며 이것은 구속사적 신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의 계시를 바탕으로 조직신학의 구조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특별히 성경의 계시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으로 이루는 창조경륜의 전개라는 시각에서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우선 신론의 문제이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계시는 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나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통하여 나타난다. 이런 것을 떠난 초월적이고 비역사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셨고 특별히 그리스도안에서 자신을 충만하게 삼위일체로 계시하셨다. 이렇게 볼 때에 우리는 기독론을 떠난 신론을 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한 신론, 이것이 성경의 계시방식에 충실한 조직신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신론과 기독론은 본리할 것이 아니라 통합되어야 한다.
두번째는 인간론이다. 전통적 조직신학은 인간론에서 죄를 중심으로 타락전 인간과 타락후 인간 그리고 죄의 용서를 받은 인간을 다루는 것으로 건조하게 끝난다. 그러나 인간론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따나서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론에서는 죄의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어야 할 인간 존재로 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인간 그리고 그 인간이 이루어야 할 창조목적에 이르기까지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인간 개인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사명을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전통 조직신학의 인간론, 구원론, 교회론은 분리될 것이 아니라 통합되어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종말론은 별도로 다루어지는 것이 정당하다. 다만 그 내용이 인간의 죽음, 부활, 심판 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목적 완성의 맥락에서 종말론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은 하나님나라가 완성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이루어지는 차원을 논하여야 할 것이다. 신론이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무슨 일을 하시는 가를 논한 것이라면 인간론은 인간은 누구이며 어떤 일을 하여야 하는 가를 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말론은 하나님이 인간을 통하여 이루시는 하나님의 나라 곧 창조목적에 대하여 다루어야 할 것이다. 종말은 단순히 인간 역사가 끝장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역사의 목적이 완성되는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는 순간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등장이라는 창조경륜을 준비하는데 이천년이라는 장구한 이스라엘 역사가 필요했던 것 처럼 종말이라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이루어지는데 그리스도 오신 이후의 장구한 인간 역사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창조맥락에서 조직신학의 구조를 생각해 본다면 신론, 인간론, 종말론이라는 3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며 이 세가지 논의의 지향점은 창조목적의 완성으로서의 하나님나라가 되어야 할 것이다.
창조와 창조신앙
2015-05-01 22:33:07
성경의 첫머리에 시작되는 창조 이야기는 뒤이은 모든 성경의 이야기의 배경이 된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세상이라는 주제는 기독교 신앙의 근원적 출발점이다. 그러므로 창조신앙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중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창조는 비과학적이며 현대 사회의 과학적세계관과 양립하거나 공존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다. 이런 분위기가 형성된데는 기독교인들이 무리하게 시도된 성경해석을 마치 과학적 사실인양 과도한 주장을 펼친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예를 들면 성경을 근거로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한 것이나 아담의 창조 연대는 주전 4천년경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과학의 발전에 따라 이런 주장은 잘못된 것임이 밝혀지면서 기독교가 주장하는 창조 신앙 자체가 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성경해석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라 신학책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를 말하지만 창조의 연대, 창조의 방식, 창조의 기간에 대한 과학적 진술을 하는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은 만물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자의 실체, 하나님과 창조세계의 관계, 창조의 목적, 만물의 존재의미와 같은 신학적 설명을 하려는 것이다. 성경은 우주 생성의 원리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누가 왜 만들었는가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과학은 우주생성의 방식, 연대에는 관심이 있지만 우주를 누가 왜 만들었냐는 질문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주제는 과학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창조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가? 성경은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조물주의 존재에 대해 증언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선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플라톤이 주장하는 것처럼 기존에 존재하던 어떤 물질에 질서와 형태를 부여해주는 그런 창조가 아니라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였으며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만든 창조였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인가? 성경은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이 말은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하거나 필요해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만물의 존재가 하나님께 의존하여 있으며 그 존재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란 의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피조물에는 그 존재와 그 활동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창조신앙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온 우주와 만물의 주권자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창조신앙은 그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온 세상의 주권자이시며 자신의 뜻대로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또한 믿는 것이다. 창조와 통치는 분리될 수 없는데 이것을 분리하는 것이 이신론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창조와 분리될 수 없으니 하나님은 창조하신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도록 그들을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창조목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통치행위로서 이해할 수 있고 이럴 때 창조와 구원은 분리되지 않고 결합된다. 나아가 창조신앙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하는 것은 창조된 만물이 그 자체로 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의 우열을 구분하고 차별하는 이원론적 관점을 성경은 반대한다.
창조신앙은 하나님의 지음을 받은 모든 피조물은 일종의 공생관계를 갖고 있으며 서로 상호의존하는 존재들임을 인식하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을 볼보시는 것뿐 아니라 다른 피조물들도 돌아보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다른 피조물을 보호하고 보존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만물의 회복을 지향하며 이것을 곧 하나님의 창조목적의 성취를 의미하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사람의 죄로 인하여 만물이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지만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만물을 회복하고 창조목적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목적을 향하여 계속적인 재창조 행위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창조신앙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심을 믿을 뿐 아니라 창조목적을 이루시려고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믿으며 그분의 다스리심에 순종하려는 믿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