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고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메르시어 2023. 4. 30. 10:36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2013-06-08 16:10:48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시의 정점이요 총화라는 명제에 대하여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리스도를 누구로 아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하느냐? 는 소위 기독론적 질문을 하셨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베드로가 가진 기독론은 이어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계시 앞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그가 가진 기독론으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결코 파악될 수 없는 계시였던 것이다.

 

   종교 개혁의 후예인 우리는 일차적으로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이해하는데 익숙하다. 개인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과 개인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중보자로서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시의 정점과 총화인 그리스도의 존재의미가 개인구원으로 국한된다는 말이 된다. 그리스도를 이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충분하고도 바르게 받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리스도는 구약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역사가운데 등장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이해하기 위하여는 신약에 기록된 모든 계시는 물론 신구약을 통합한 성경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특별히 구약과 신약의 상관관계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구약에서 준비되고 예언된 분이며 신약에서 역사가운데 등장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계시의 순서상 구약적 맥락에서 신약계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신약이 구약계시의 성취라면 당연히 신약의 모든 사상들은 구약 사상을 이어받은 것이며 신약의 계시들은 구약계시의 흐름속에서 꽃을 피운 것이기 때문이다. 식물에 비유컨데 구약이 씨라면 신약은 이 씨가 성장하여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나 부분적인 시각은 성경에 대한 오해나 부분적인 시각으로 부터 나오는 것이다. 특별히 우리가 오랫동안 익숙했던 구속사적 시각으로 성경을 바라보는 것은 그리스도를 인간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분으로 국한시키는 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과연 인간의 구속사에 대한 것인가하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물론 성경은 인간의 구속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성경이 정작 말하려는 대 주제는 인간 구속을 뛰어넘은 창조의 웅대한 계시인 것이다. 창조-타락- 구속으로 요약되는 구속사적 시각은 인간의 구속을 하나님의 계시의 중심에 놓고 하나님의 모든 사역의 목표를 인간 구속으로 바라보려고 한다. 인간 구속은 물론 성경의 중요한 계시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이 말하여는 궁극적 주제는 아닌 것이다. 구속사적 시각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이해하고 개인의 구원을 성경 역사의 주제로 바라본다. 그러다보니 구속이 궁극적 목적이 되고 구속을 받은 후에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부족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구약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는 구약의 역사를 통하여 준비되신 분이시다. 이스라엘 역사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스라엘 역사는 이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모판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신약의 계시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오해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심지어 신약의 맥락으로 구약을 해석하려는 성경읽기 태도는 계시의 순서에 반하는 심각한 오류이다. 구약적 맥락없이 신약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이해하려는 태도에서 헝성된 시각이 바로 구속사적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구약적 맥락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우리는 먼저 구약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어야 한다. 첫 부분은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 나타난 인류역사의 출발과 종말의 계시이고 두번째는 창세기 12장 부터 아브라함의 등장으로 시작된 이스라엘의 역사와 그 종말이다. 이 부분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첫부분은 하나님의 창조와 창조경륜을 배반한 인간의 종말의 기록이다. 두번째인 이스라엘 역사는 첫부분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경륜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전개되는 기록이다. 그러니까 구약 전체의 대주제는 하나님의 창조와 창조 경륜의 역사적 전개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런 배경을 가지고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구약적 맥락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는 것을 바로 하나님의 창조와 창조목적을 이루시는 경륜의 전개라는 시각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때가 차매 구약 역사를 통하여 준비된 그리스도는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로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신다.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인 예수님의 첫 선포가 하나님나라의 임박한 도래였던 것을 보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하나님나라와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나라는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가 아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나라 역시 구약적 맥락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당시  1세기 유대인들에게 하나님나라란 용어는 이미 잘 알려진 개념이었다. 장차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 곧 그리스도가 오실 것인데 그는 다윗의 위를 이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 오실 것이다. 바로 이 메시야가 다스리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그 메시야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요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영광스러운 나라가 될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나라 개념이다.

 

  이 하나님나라 개념은 구약의 대주제인 창조와 창조경륜의 전개라는 맥락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 자신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창조목적이 성취되는 나라 곧 하나님의 뜻대로 창조세계가 다스려지는 나라인 것이다. 물론 1세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스라엘에 국한하여 생각했지만 그 나라는 이스라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 창조세계에 미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역사의 의미가 역사 가운데 창조경륜이 구체적 전개되는데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는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수단적이고 과정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세상에 오셨지만 그 분이 다스리는 나라는 이스라엘에 국한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는 개인의 구주이시기 이전에 하나님의 창조경륜을 따라 창조목적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그래서 우리는 구속의 맥락이 아니라 창조의 맥락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는 하나님나라도 당연히 창조의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죽어서가는 하늘나라가 신앙의 궁극적 목적이 되는 비역사적 태도를 극복하려면성경을 보는 시각을 구속의 맥락에서 창조의 맥락으로 관점 이동을 하여야 한다.

 

  창세기 1-11장의 구약의 첫 부분도 하나님이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계시한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순종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이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특별하게 지으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떠나서 하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는 구체적 역사가운데 존재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창세기 12장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도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씨와 땅의 약속을 하신다.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성취되는 역사였다. 이것은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있는 것들을 다스리라는 창조 경륜과 동일한 약속이었다. 아담을 통하여 이루시려던 창조경륜이 이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전개하시는 것이다. 과연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의 후손은 번성하여 큰 민족을 이루었다. 씨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땅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런데 땅의 약속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이다. 먼저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들어가야 하였다. 출애굽 1세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길 거부하였을 때 그들이 광야에서 소멸된 것을 보면 땅의 약속을 이루지 않는 씨는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엄중한 사실을 보여준다. 결국 이스라엘 민족의 사명은 가나안 땅에 들어감으로 하나님의 땅의 약속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결국 출애굽 2세대는 순종함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그러나 땅의 약속이 아직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이유는 단순히 땅을 차지하는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이유는 다른 민족들 보다 그들을 편애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다스리길 원하신 것이다. 가나안 족속들의 더러운 행위로 더렵혀진 가나안 땅을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림으로 더러운 땅을 깨끗하고 새롭게 할 책임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목적이었다. 이렇게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되 특별히 자기 형상을 따라 만드시며 그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 하나님의 창조경륜을 정확히 반영한다. 아담을 통하여 나타날 하나님나라는 온 세상에 이르지만 이스라엘을 통하여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는 가나안 땅에 국한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다스림은 가나안 땅에 국한되지 않고 아담에 그랬듯이 온 세상에 이를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아담이 이루지 못했던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두번째 아담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다. 사실 아담이야 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이유는 바로 아담이 원래 가지고 있던 하나님 아들의 신분을 다시 되찾으시고 아담이 실패했던 창조목적을 다시 이루시려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그리스도를 창조의 맥락에서 다시 이해하여야 한다. 이것은 성경을 구속사가 아닌 창조경륜사로 읽을 때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인간 구속 역시 하나님의 창조경륜의 한 부분인 것이다. 출애굽이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듯이 인간 구원도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기 위한 창조경륜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고난과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 이어진 성령의 오심 그리고 심판과 종말의 도래 이 모두가 하나님나라라는 창조목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창조경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