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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스 스킬더의 문화관- 변종길

메르시어 2023. 4. 30. 10:33

클라스 스킬더의 문화관- 변종길

2013-06-07 23:57:31


개혁 교회의 정로(허순길 박사 은퇴기념 논문집), 고려신학대학원 출판부, 1999, pp.99-117에 기고한 논문.

  

클라스 스킬더의 문화관

(Klaas Schilder's view on culture)

 

 

 종 길

  

 

클라스 스킬더(Klaas Schilder, 1890-1952)는 아브라함 카이퍼 이후 화란의 출중한 신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카이퍼의 여러 사상들을 날카롭게 비판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카이퍼의 언약론, 중생전제설, 교회론, 일반은총론 등 여러 분야에서 카이퍼 추종자들(소위 카이퍼리안들)과 충돌하였다. 그 결과 마침내 1944년 화란개혁교회 총회에서 축출되고 교수직이 박탈당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화란개혁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는 분열되고 말았다.

이런 복잡한 신학적, 교회적 갈등 가운데서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문화에 대한 스킬더의 견해이다. 그는 1947년에 나온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책에서 카이퍼의 일반은총론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카이퍼의 일반은총론이 너무나 허용적이고 낙관적이어서 그리스도인의 책임 의식을 약화시키고 그리스도인의 문화와 세상의 문화 사이의 구별이 분명하지 못했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그 당시 개혁교회 성도들이 너무 방만해지고 나태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새로운 문화관을 정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논문에서 스킬더의 문화관을 개관해 보고 그 특징들과 문제점들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문화관이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에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겠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I. ‘일반 명령으로서의 문화

 

스킬더는 무엇보다도 카이퍼의 일반 은총’(gemeene gratie)이라는 개념을 비판하고 있다. 카이퍼의 문화론의 출발점은 타락 후에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다. 이에 대해 스킬더는 카이퍼의 문화론이 타락 이후의 역사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우리에게 허용된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비판한다. “‘은혜에서 출발하는 일반은총론은 문제의 출발점을 타락 후에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에서 찾는다.” 이러한 출발점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잘못을 가지고 있다고 스킬더는 지적한다. 1) 타락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 잘못이 있다. 2) 우리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것, 허용된 것에 중점을 두므로 인간중심적이다. 3) 문화낙관주의적 색채를 띠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사명감보다는 허용된 것을 즐기는 자기만족에 빠질 우려가 있다.

따라서 스킬더는 일반 은총’(gemene gratie)라는 말 대신에 일반 명령’(gemene bevel) 또는 일반 소명’(gemene roeping) 또는 일반 사명’(gemeen mandaat)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간단히 말해서, 문화는 당위’(moeten)의 문제이다. , 문화의 문제는 타락 이전에 이미 주어진 과업’(taak)의 문제이다.

 

II. 낙원에서의 문화 활동

 

그리하여 스킬더는 우리의 문화적 사명을 타락 이전의 낙원에서 찾고 있다. 그는 물론 타락 이후에 일어난 일에 대해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타락 이전에 주어진 일로 돌아가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래서 처음으로 돌아가자!”(terug naar het begin)는 것이 그의 표어였다.

스킬더는 낙원에서의 아담의 문화 활동을 직분’(ambt)으로 이해하고 있다. 모든 피조물은 과업’(officium)을 부여받았지만, 이것이 사람에게는 (천사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직분’(ambt)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 직분자가 되도록 지음 받았다. 그는 큰 세계 기구의 한 부분으로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임명받고 그에 대해 책임지는 운영자로서 지음 받았다.” 이 사실이 아담의 모든 활동과 관계를 규정하게 되며, 나아가서 그의 특성들도 결정짓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가 직분자’(ambtsdrager)로 활동하도록 그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담은 어린아이나 순진한 원시인’(naïeve oer-mens)이 아니라 하나님의 동역자’(medearbeider van God)로서 낙원이라는 원래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스킬더는 성경의 첫 몇 페이지는 문화에 관한 말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동산을 갈라. 땅을 충만케 하라. 번성하라는 말들은 다 문화 활동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성경의 첫 몇 페이지는 문화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왜냐하면 창조주는 문화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문화라는 용어에 대해 설명한다. ‘문화’(cultuur)는 라틴어 꼴레레’(colere)라는 동사에서 온 단어인데 그것은 짓다, 돌보다를 뜻한다. 밭을 가는 농부는 문화 활동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적’(persoonlijk) 피조물인 사람을 그냥 피조된 생명들 가운데’(in) 두셨을 뿐 아니라 그들 위에’(boven) 두셨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피조물이란 책에 있는 글자’(letter)일 뿐 아니라, 동시에 이 책을 읽는 자’(lezer)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읽어 주는 자’(vóórlezer)이다.

그래서 스킬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따라서 사람은 인격적-영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부름 받은 일꾼과 세움 받은 봉신왕으로서, 모든 씨를 발견하고 뿌리는 것을 통해, 그 밭에서부터,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끄집어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 계발이 필요하다고 한다. “자기 문화, 자기 계발, 자기 발전, 긍정적인 의미의 금욕’, 즉 우리 안에 있는 피조물적인 것들의 훈련은  좋으며 허용된다.” 여기서 우리는 스킬더에게도, 우리에게 주어진 잠재적인 것을 최대한으로 계발하고 발휘해야 한다는 계발 사상’(ontluikingsgedachte)이 강하게 나타남을 보게 된다. 그의 이런 사상은 그의 낙원에 대한 다음과 설명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낙원 세상은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 시작에, 원칙적으로, 잠재적으로 있어야 할 모든 것이 주어져 있었다. 이는 낙원 세상을 완전한 질서의 완성된 세상, 곧 하나님의 도성으로 자라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낙원이 완성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세기 동안의 역사 과정이 필요하다.

 

III. 스킬더의 문화 정의

 

그리고 나서 스킬더는 낙원에서 주어진 동산을 갈라는 명령을 설명해 나가는 가운데 문화에 대해 유명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 부분은 너무 어렵고 복잡해서 다우마 교수가 쉽게 풀어서 설명해 놓은 정의를 여기에 번역해 보기로 하겠다.

 

문화는 인류 총합의 노동 총합을 향한 노력이다. 이 노력은 모든 창조능력들을 발견하고, 계발하고, 그것들을 가깝고 먼 이웃에 봉사하도록 하는 것을 과업으로 삼고 있다. 이것은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의 규범들을 따라 실행되어야 한다. 그것의 목표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섬김을 위해 그 결과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 섬김을 위해 점점 더 많이 준비된 사람과 함께 그 결과들이 하나님의 발 앞에 놓여진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고, 모든 피조물이 그의 주를 찬양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나서 스킬더는 이 정의에서 문화에 관한 중요한 요소들이 다 들어 있다고 하면서 다음 다섯 가지를 말하고 있다.

 

1) “동산을 갈라” - 이것은 구체적인 문화과업을 의미하는데,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uit de wereld halen, wat er in zit)을 뜻한다.

2) “번성하여 충만하라” - 이것은 증가하는 인류 총합을 의미하는데, 이는 시간의 모든 부분에서, 그리고 지리적 영역의 모든 지역에서 이들을 계속해서 문화 계명,  문화에 대한 의무’(plicht tot cultuur) 아래 두기 위함이다.

3) “땅을 정복하라. 지배하라” - 이것은 피조물인 문화인이 자기 자신의 위치에 세워진 것을 뜻한다. 그는 곧 봉신왕’(onderkoning)이다.

4)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 - 이것은 문화활동이 자발적’(spontaan)이어야 함을 뜻한다. 곧 하나님의 상위권위의 대리인’(representant)으로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필요한 자질들이 인간에게 부여되었다. [따라서 이 섬김] 곧 미래를 발견하는’(uit-vinden) 가운데 하나님을 되찾고’(terugvinden)  찾게 하는’(doen vinden) 것이다.

5) 마지막으로 사람은 윤리적’(zedelijk) 계명을 받는다. - 그는 그의 모든 것과 함께 그의 문화활동 속에서 그의 창조주에게 종속된다. 그의 모든 문화활동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며 그 모든 결과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엎드려야 한다.

 

그러면서 스킬더는 문화와 종교가 분리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죄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문화는 종교로부터 분리되었으며, 서로 날카롭게 대립되고 말았다. 그러나 원래는 그렇지 아니하였다. 왜냐하면 종교란 삶에 있어서 한 영역’(provincie)이 아니며, 전체 흐름에서 떨어진’(aparte) 한 기능이 아니며, ‘고립된’(geïsoleerde) 도덕적 인간 모임을 세우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religie) 종교성’(religiositeit)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dienst van God)이다. 따라서 낙원에서는 문화 활동이 종교(하나님 섬김)이다.” 여기서 우리는 스킬더가 낙원에서는 문화 활동 종교가 일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IV. 타락 이후의 문화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통일성은 파괴되고 분열 과정’(ontbindingsproces)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부분들을 전체와 관련하여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것들을 하나님 아래 두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사람은 그의 일반화하는’(katholiserende) 관심을 특수화’(specialiserende)하고 세분화’(detaillerende)하는 관심으로 바꾸고 말았다. 그리하여 종교와 문화가 분리되고 말았다.

이러한 과정은 더욱 심화되어 하나님이 주신 다양성’(veelvormigheid) 분열성’(verdeeldheid)이 되고, 개인적인 차이는 일면성’(eenzijdigheid)으로 왜곡되고, ‘차이들’(differenties) 대립들’(antithesen)이 되고 말았다. 진지함은 놀이 앞에 밀려나고 말았으며 놀이문화’(spel-cultuur)가 판을 치게 되었다. 문화는 각각의 전문 집단의 명령에 따라 각기 자기의 벙커 안으로 기어든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이제 창조주와 분리된 피조물에 대한 애착으로 바뀌고 말았다. 통일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추구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통일성이 발견될 수 있는데, 하나님은 이제 원수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윤리 법칙’(zedelijke wet)을 버리고 대신에 자연 법칙’(natuurlijke wet)을 붙들었으며, 이러한 윤리 없는 문화 속에서 사탄의 문화 스타일을 추구하게 되었다. 사탄은 하나님이 주신 세상을 온갖 힘을 다해 윤리적으로 부패시키려 하고 있으며, 역사 속에 이미 사탄주의’(satanisme) 문화 스타일이 존재했었다.

따라서 타락 후에도 문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일반 은총’(algemene genade)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스킬더는 카이퍼와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의 일반은총론에 대해 근본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는 먼저, 죄가 억제되고 있으며’(weerhouden) 저주가 이 세상에 완전히 쏟아지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순종’(gehoorzaamheid)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만일 저주의 억제를 은혜’(genade)라고 부른다면, 축복의 억제’(weerhouding)도 또한 심판’(oordeel)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용어의 어느 것도 학적으로’(wetenschappelijk) 근거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들은 기껏해야 실재에 대한 비학적인 묘사에 불과하다.

스킬더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그의 독특한 논리를 전개한다. 물론 억제’(weerhouding)가 존재한다. “그러나 억제는 시간에 고유한 것이다”(Maar weerhouding is eigen aan de tijd). 이것은 스킬더의 문화론에 있어서 가장 특징적인 주장이라 할 수 있는데, 그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철학적 논리를 전개한다. “아무것도 더 이상 억제되지 않는 곳에서는, 모든 것을 동시에 완전히 소유하게 되거나 또는 모든 것을 동시에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Waar niets meer ,,weerhouden” wordt, daar is een possesio tota simul òf een  privatio tota simul). 여기서 스킬더는 중세 철학자 보에티우스(Boëthius) 하나님의 영원에 대해 내린 정의를 사용하고 있다. 보에티우스에 따르면, 하나님은 완전하고도 모든 것을 동시에 소유하는 삶 곧 무한한 삶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삶이 항상 유한하다. 인간은 시간 속에서 그의 삶을 완전히 소유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의 소유는 동시에 모든 것을 완전히’(tota simul)가 아니다. 그러나 영원에서는 (나름대로) 완전하며 (나름대로) ‘동시에 모든 것을 완전히 소유하는 삶을 가진다. 그 때엔 더 이상 성장이 없다. 이러한 보에티우스의 개념은 문제성이 있는 개념인데, 스킬더는 이러한 보에티우스의 개념을 빌어서 그의 문화관을 전개하고 있다.

스킬더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하자면, “억제가 없는 곳에는 더 이상 시간적 존재가 없다. 거기에는 영원이 있다”(waar geen weerhouding is, daar is geen tijdelijk bestaan meer; daar is ,,eeuwigheid”). 그러면서 그는 낙원에서도 억제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만일 하나님의 영이 아담에게 억제함이 없이’(onweerhouden) 주어졌다면, 그에게는 타락의 가능성이 배제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전은 시간에 고유한 것이라고 한다. ‘부패도 마찬가지다. 발전과 부패는 시간에 속한다. 완전히 발전된 것과 완전히 부패된 것은 영원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시의 은사들이 계발된다는 것은 은혜’(genade)가 아니라 자연’(natuur)이다. 시간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운동과 아기를 잉태하고 낳는 것은 다 자연에 속한다. 소위 일반은총론자들이 은혜라고 부르는 것들은 스킬더에 의하면 그저 자연일 따름이다.

따라서 문제의 근본은 시간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달려 있다. 스킬더는 타락 후에도 시간이 연장되는 것을 은혜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본다. 일반은총론자들은 우리는 타락 후에 즉시로 지옥 불에 던져져야만 했는데도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은혜라고 말하지만, 만일 하나님께서 정말로 우리를 타락 후에 즉시 지옥 불에 던져 넣으셨다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두 사람만이 저주를 받고 끝났을 것이다. 따라서 시간의 연장은 은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지옥을 정해진 수만큼 많은 사람들로 채우기 위해서는 시간이 연장되어야만 했으며, 또한 결혼관계가 맺어져야만 했다. 경제적인 요소도 또한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다. , ‘문화가 있어야만 했다. 문화는 하나님의 모든 역사의 조건이다. 이것은 지옥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옥뿐만 아니라 천국도 존재한다는 사실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수만큼 많은 사람들을 천국에 채우기 위해서도 시간의 연장은 필요하며, 부모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필요하며, 따라서 경제적 조건과 지리적 조건과 함께 문화 활동이 필요하다.

따라서 시간의 연장과 전개는 은혜가 아니며, 저주나 심판도 아니다. 그것들은 은혜와 저주에 대한 필요불가결의 조건’(conditio sine qua non)이다. 그것들은 그 둘에 대한 하부구조’(substraat)이다. , 문화란 자연적인 것이다. 문화 활동 자체에 은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은혜는 먹고 마시고 아이를 낳는 것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경건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먹고 마시고 아이를 낳는다면 거기에 은혜가 들어 있다. 그러나 불경건하게 먹고 마시며 아이를 낳는다면 거기에 저주가 들어 있다. 따라서 반립(antithese)은 자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사용 곧 문화에 있다. 신앙으로 하는 문화 활동과 불신앙으로 하는 문화 활동 사이에 반립이 있다. 따라서 공동 은혜’(commune gratie)는 있지만 일반 은혜’(algemene gratie)는 없다. 따라서 아브라함 카이퍼의 구도는 잘못이다. 또한 공동 저주’(commune vloek)는 있지만 일반 저주’(algemene vloek)는 없다. 그리하여 스킬더에게는 결국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나누는 일반 은총은 없고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에게만 주어지는 특별 은총만 있다. 그 외의 모든 다른 사람들은 공동 저주 아래 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스킬더는 신자와 불신자에게 공통으로 주어지는 일반 은총을 부인하고 있으며, 신자의 문화와 불신자의 문화 사이에 날카로운 대립을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V. 그리스도의 사역과 문화 활동

 

타락 후에 즉시로 그리스도가 등장한다. 그는 아직 육신이 되기 전에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타락한 세상에 은혜의 역사를 이루고, 구원과 저주의 토대를 놓기 위해 등장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구원자이며 또한 심판자로서 역사 속에 등장한다.

두 번째 아담인 그리스도는 역사 속에서 처음’(begin)으로 향하며, 처음에 주어진 원리들’(beginselen)로 향한다. 그는 하나님의 존전에서 그의 직분을 수행함으로써 기초로 돌아가는’(terugkeer tot het abc) 대개혁작업을 시작한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두 가지 사역을 하신다. 첫째로, ‘법적 투쟁’(rechtsstrijd)으로서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화해시키신다. 이를 위해 그는 수동적 순종 능동적 순종을 완수하신다. 둘째로, ‘능력적 투쟁’(krachtsstrijd)으로서 그는 성령을 통해 역사의 진행 속에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진노를 위해 땅의 포도를 준비하며, 다른 한편으로 그는 성령을 통해 구속받은 하나님의 노동공동체’(arbeidsgemeenschap) 직분공동체’(ambtsgemeenschap)를 노동과 하나님 섬김을 위해 준비시킨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온전하고 깨끗하고 원래의  이상적인 인간’(de gave, schone, oorspronkelijke,  ,,ideale” mens)이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원칙적으로 온전한 인간을 다시 창조하신다. 그는 사람들을 처음에’(in den beginne) 있었던 상태로, 곧 하나님의 사람들로 다시 만드신다. 그는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다시금 원칙적으로 순수한 인간 형태를 만드신다. 그들은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원칙적으로 다시금 존재하게 되었다. 이들의 숫자는 증가하여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성화된 무리가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위해 세상을 정복하는 신적 행동이 시작된다. “정복은 회복이다. 소유는 다시금 원소유자에게 올바른 관계로 되돌려진다(그것이 영원 전부터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다면). 그리스도는 세상의 시작을 마지막과 연결시킨다. 곧 시초역사를 종말역사와, 제일 처음의 것들을 제일 나중의 것들과, 알파를 오메가와 연결시킨다. 

 

VI. 교회와 문화

 

이러한 문화 활동의 중심과 원동력은 교회이다. 스킬더는 이것을 에베소서 1 10절을 가지고 논의를 전개한다. 여기에 보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통일되게 하다’(ajnakefalaivwsqai)는 단어는 머리’(hoofd)라는 뜻의 케팔레’(kefalhv)에서 온 것이 아니라, 로마서 13 9절과 히브리서 8 1절에서 보듯이 요약, 핵심, 총합’(hoofdsom)이란 뜻의 케팔라이온’(kefavlaion)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

만물의 총합은 그리스도에 의해 다스려지지만, 교회에게는 그가 머리로 주어졌다. 그리스도는 만물 가운데 하나의 작은 우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물 위에 통치자로 세워졌다. 교회의 머리 안에서 만물의 총합이 다스려진다. 따라서 교회 자체가 문화국가라고 하거나 또는 문화국가가 될 수 있다는 이론은 무너지고 만다. 말씀의 봉사는 직접적인 문화 강의는 아니다. 말씀의 봉사는 전체 삶을 약속과 규범 아래에 둔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사람이 위로부터 능력을 받는 난로’(vuurhard)가 된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에 의해 얻어진 은혜의 보물들을 나누어 주는 교회로부터 하나님의 사람들이 삶의 모든 방면으로 나가서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나라를 부르짖어야 한다. 교회로부터 순종의 난로가, 또한 순수한 문화의 광채가 세상으로 뻗어 나가야 한다. 만약 교회를 치워 버리면 하나님의 나라는 안개 속을 헤매고 만다. 만약 하나님의 나라를 안개 속에 둔다면 그리스도는 문화 속에 파묻히고 만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한 자녀들을 생산하는 곳이다. 신자들의 어머니인 교회만이 새 사람들을 낳을 수 있으며, 이들은 또한 문화 활동의 측면에서도 온 세상의 짐을 짊어지는 자들이다. 오직 교회만이 이들을 나눌 수 없는 공동체로 묶어 주며 모든 삶의 관계에 대한 규범들을 가르친다.

교회가 강하였을 때 기독교 예술이 번창했으며, 문화도 사람들의 얼굴을 하늘로 향해 들어올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문화는 저질스런 영화와 연극, 신문과 드라마 등으로 타락하고 말았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적 문화 곧 의미 있는 문화를 위해서, 모든 힘을 다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교회를 치워 버리면 참된 인간성이 사라지고, 대신에 황폐함을 뽐내는 인본주의가 돌아온다. 교회와 그 신앙고백을 치워 버리면, 겸손을 가장한 문화적 교만이 들어오며, 온갖 형태의 내재주의적 범신론이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교회의 붕괴를 통해 교인들의 시체 위에 마지막 때의 독재자 적그리스도의 강단이 세워질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자기의 체계를 가르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참람한 체계이다. 교회는 결코 가장 작은 직접적인 문화 영역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가장 큰 간접적인 문화 능력이 되어야 한다.

 

VII. 신자의 문화와 세상의 문화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신자의 문화와 불신자의 문화는 어떤 특징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이 점에 대해 스킬더는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이루어지는 긍정적 의미에서의 문화 건설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획득된 순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문화’(colere)는 원래 건설하는 것’(bouwen)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죄는 파괴하는 것’(breken)을 뜻한다. 하나님의 원래의 계시 사전에는 문화’(cultuur)란 항상 건설적’(constructief)이다. 그러나 죄는 파괴적’(déstructief)이다.

따라서 스킬더는 이 세상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그 문화’(,,de” cultuur)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왜냐하면 문화 추구의 통일성’(een eenheid van cultuurstreven)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순수 이성’(reine Vernunft)이나 순수 이성 일반’(reine Verstand überhaupt)은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순수한 문화’(reine Kultur)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자연’(één natuur)이 있지만, 거기에는 하나 이상의 자연 사용’(natuur-gebruik) 또는 자연 활용’(natuur-bewerking)이 있다. 의지’(willen)가 인간에게 창조되었으며 문화적 의지도 창조되었는데, 이것은 자연에 속한다. 그러나 문화적 추구’(streven)는 의지 이상의 것이다. 여기에는 장기간의 목표설정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반립’(antithese)과 죄로 말미암는 저주’(vloek)에 부딪히게 된다. 곧 깨뜨림과 흩어버림의 저주이다. 세상은 지금도 바벨탑을 꿈꾸고 있지만, 지금도 그 큰 일터에는 언어가 혼동되고 있다. 신앙으로 짓는 문화는 단일적’(einheitlich)이지만 수많은 불신자들의 방해에 부딪혀 문화를 가능케 하는 재료들의 파편들’(fragmenten)만을 점유할 따름이다. 불신자들의 문화도 마찬가지다. 불신자의 세상은 점점 모든 문화 수단들을 점유하게 될 것이지만 그들의 죄악된 성격으로 인하여 거의 모든 문화영역에서 문화 파편들’(cultuur-fragmenten)을 산출할 따름이다. 신자들에게는 작업의 하나됨’(eenheid van werk)은 있지만, 단지 작업장들의 파편들’(fragmenten van werkplaatsen)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불신자들에겐 작업장의 하나됨은 존재하지만, ’작업에 있어서 파편들이 존재한다. 이것들은 파편들과 토르소(몸통 조각)들이며,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아니한 것이며, 상호모순되며, 스스로를 배제하며, 결코 통일성을 이룰 수 없는 상이한 노력들과 경향들의 형태들이다. 왜냐하면 전체주의적인 적그리스도 국가에 의해 강제로 부과된 통일성은 잠깐 동안만 지속될 것이며, 이 사이비 통일성도 또한 다시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자들과 불신자들은 쉰우시아’(sunousia, 共在)를 가지고 있지만 코이노니아’(koinonia, 交際)는 없다. 왜냐하면 참된 코이노니아는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쉰우시아란 신자들이 불신자들과 하나의 자연, 하나의 재료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의 작업장과 하나의 문화충동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참된 코이노니아는 동일한 자연을 동일한 욕구를 가지고 동일한 목표를 향해 행해질 때 가능하다. 따라서 문화적인 코이노니아는 그 근본에 있어서 신앙의 교제’(geloofsgemeenschap)이다.

 

VIII. 스킬더의 문화관에 대한 평가

 

그러면 이제 스킬더의 문화관의 몇 가지 특징을 지적하고 간단한 평가를 내려보도록 하자. 스킬더의 문화관은 깊고 원대하며 종종 예언자적인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그리스도와 문화란 책은 비록 많은 부분에 있어서 시적이고 함축된 어려운 용어들의 사용으로 인해 평범한 독자들의 이해를 가로막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신학 사상과 통찰이 폭넓고 깊이 있게 서술된 걸작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그의 문화관을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한다는 것은 쉽지 않으며 매우 난해한 작업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논문을 마감하면서 필자가 나름대로 이해하고 생각하는 바를 적어 보고자 한다.

 

1) 이상에서 우리는 스킬더의 문화관에는 반립’(反立, antihtese)이 상당히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킬더에게는 축복이냐 저주냐, 천국이냐 지옥이냐, 선택이냐 유기냐, 구원이냐 심판이냐의 반립이 계속해서 중요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노르트만스(O. Noordmans) 같은 사람은 스킬더에게는 천국과 지옥만 있고 땅이 없다고 비판하였다. 그 근본 이유로 스킬더는 결국 변증법적 신학’(dialectische theologie)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았다. 스킬더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비판했던 변증법적 신학의 영향을 다소 받았는지 여부는 쉽게 판단할 수 없으나, 그에게서 천국과 지옥, 축복과 저주, 구원과 심판의 반립(反立)이 아주 강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아마도 근본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하는 스킬더의 영적 통찰력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을 듯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인간의 문화활동에 대해 지나치게 반립적으로 바라본 것은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 따라서 스킬더에게는 신자와 불신자에게 골고루 주어지는 일반 은총이 설 자리가 없다. 그에게는 오직 은혜냐 저주냐, 둘 중의 하나만 존재하며 그 중간은 없다. 따라서 스킬더에게 있어서 은혜는 특별 은총을 뜻할 따름이다. 이처럼 일반 은총이 부정되는 것을 우리는 스킬더의 문화관의 큰 단점이라고 생각된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비록 지나치게 문화적극주의로 흘러버리고 만 잘못은 있지만, 그래도 일반 은총을 인정하고 그 일반 은총에서 오늘날 세상 문화의 근거를 찾은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또한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시는 은혜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5:45). 따라서 불신자들에게서도 선한 것이 발견되며 유익한 재주와 능력이 발견되는 것은 사탄의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부인하면 안 된다. 만일 우리가 일반 은총을 부인하면 이 세상에서 신자가 불신자들과 함께 하는 문화 활동 일체를 부인하는 것이 되고 만다. 이러한 것은 이 세상에서의 신자의 삶을 너무 부정적이고 소극적으로 만들며, 그리스도인들을 이 세상에서 고립된 단체로 만들 위험성이 있다.

물론 스킬더의 입장은 신자가 이 세상에서 문화 활동을 피해야 한다거나 소홀히 하자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참된 문화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문화도피적 경향을 보이는 재세례파와는 분명히 구별되며, 오히려 문화적극주의 경향을 띠는 카이퍼와 입장이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카이퍼가 일반 은총을 인정하고 그 토대 위에 그리스도인의 문화 활동을 주장한 반면, 스킬더는 일반 은총을 부인하고 특별 은총에 근거한 문화 활동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스킬더는 문화를 절대화하고 있다고 하는 비난을 받고 있기도 하다. 어쨌든 스킬더가 일반 은총을 부인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신자가 불신자들과 함께 하는 문화의 영역을 부인하고 있으며, 참된 문화는 오직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한정시키고 있다. 이것은 문화 활동의 동기와 목적, 근원과 목표를 잘 나타내고 있기는 하지만, 불신자들에게서 발견되는 문화 활동도, 비록 피상적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넓은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부정하는 것이 되고 만다. 스킬더는 우리의 문화 활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기에서 나오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루어지는 문화이어야 함을 강조한 장점이 있는 반면, 죄인들과 불신자들에게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크고 넓은 은혜를 간과한 단점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세상 문화 속에는 사탄주의적 요소가 침투해 들어오고 있다는 스킬더의 지적은 옳으며 우리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경고이다. 이런 점에서 불신자들의 문화 활동 전체를 긍정적으로 본 카이퍼의 문화적극주의는 지나친 것이요 잘못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3) 이런 맥락에서 스킬더는 역사가 계속 진전되는 것, 죄가 억제되는 것은 은총이 아니고 자연이라고 보았는데, 이것은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사상이며 중세 보에티우스(Boethius)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인간의 타락 후에 역사가 계속 진행되는 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죄를 당장에 심판하시고 역사를 끝내시려고 하셨다면 그렇게 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당장 죽지 않게 하시고 자녀를 낳게 하시고 역사를 연장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즉시 임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2:4). 이 세상의 모든 역사의 주관과 운행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고백할진대, 그것을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 자연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부인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무시하는 것이 되고 만다. 우리는 야고보와 같이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온다고 고백해야 한다( 1:17).

 

4) 스킬더에 의하면 참된 문화는 신자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낙원에서 주어졌던 문화적 사명을 수행할 임무를 받으며, 이 문화적 활동은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전개된다고 강조하였다. 이런 점에서 스킬더는 교회의 문화적 사명을 일깨우고 문화적 활동을 고취시킨 공로가 있다. 그렇지만 스킬더는 결코 교회 문화를 혼동하지는 않았다. 교회 자체는 문화 국가가 아니며, 말씀의 전파는 문화 강의가 아니다. 교회는 신자들이 문화활동을 위해 능력을 받는 난로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스킬더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사회 각 분야에서 문화 활동을 열심히 하도록 촉구하였으며, 이것은 실제로 화란개혁교회 안에서 올바른 기독교 문화 창달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5) 스킬더에 있어서 문화’(cultuur)의 개념은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 행위까지 다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예를 들어 그의 그리스도와 문화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가정 심방을 잘 수행하는 지혜로운 장로는 문화 활동을 잘 수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포괄적인 문화 개념은 일상적인 언어사용과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앙과 문화 사이의 구별이 모호해지며 혼동을 초래한다. 물론 타락 전에 낙원에서는 인간의 모든 활동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가운데 행해지는 행동이었으므로,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신앙 행위와의 구별이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 때에는 모든 것이 온전한 믿음과 사랑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느냐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느냐 정도의 차이가 존재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는 스킬더가 지적한 대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문화 활동이 나누어지고 분리되어서 신앙 없는 문화 활동이 양산되고 잘못된 문화가 범람되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죄 많은 이 세상에서는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과 인간이 행하는 문화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의 일상적인 언어사용에 있어서 신앙과 문화는 대개 구별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언어사용 관례를 무시해 버린다면 커다란 혼란이 생기게 된다. 물론 우리의 문화 활동이 신앙에 기초해서 신앙으로 행해져야 하지만, 그렇다고 문화 활동 그 자체를 신앙이라고 부른다면 우리의 모든 활동이 신앙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도 신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결과가 되고 만다.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하지만(고전 10:31), 먹고 마시는 것 그 자체가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친 것이요 건전한 구별을 폐하는 것이 되고 만다.

 

6) 스킬더에게 있어서도 아브라함 카이퍼에게서와 마찬가지로 계발 사상’(ontluikingsgedachte)이 강하게 나타난다. 계발 사상이란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잠재적으로 넣어 두셨던 것들을 다 끄집어내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사명은 인간의 타락 이후에도 계속 유지된다고 보는 점에서 스킬더는 카이퍼와 동일하다. 오히려 스킬더에게 있어서 이 사상이 더 강하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카이퍼에게는 이것이 가능하고 허용되었던 것이 스킬더에게는 직분자의 사명으로 부과되기 때문이다. 곧 스킬더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직분자로서 이 문화적 사명을 완수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직분자들로서 처음으로, ‘처음 원리들로 돌아가서 이 사명을 완수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아브라함 카이퍼에 의해 강조되었던 문화적극주의가 스킬더에 의해 다시 살아나고 있음 알 수 있다.

그러나 물론 이 두 사람의 문화적극주의에는 차이가 있다. 카이퍼는 불신자들의 문화를 포함해서 인류의 문화 전반에 대해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생각을 가졌던 반면에, 스킬더는 불신자들의 문화의 불완전함과 죄악됨을 예언자적 통찰력을 가지고 예리하게 관찰하였다. 그래서 스킬더는 불신자들의 문화에 대해서는 비관적이며 이 세상의 문화 전반에 대해서는 비관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신자들의 문화에 대해서는 교회를 중심으로 적극적인 문화 활동을 펼쳐나갈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스킬더는 문화 활동에 있어서 교회의 중요성과 신앙의 중요성을 간파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7) 문화적 사명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우리로 하여금 성경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근본적인 반성을 요구한다. 스킬더는 우리가 처음으로’, ‘타락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 주장은 물론 일리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문제점도 많이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는 타락 후의 세상에 살고 있으며, 결코 타락 전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오늘날 우리는 타락 전에 아담이 처했던 상황과는 다른 상황에 처해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타락 전에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문화적 사명을 아무런 여과 없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주위에는 죄로 말미암아 죽어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이들을 멸망에서 건져내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은 타락 전에는 결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타락 후에는 복음 전파 사명이 제일 중요한 사명으로 주어지게 되었다. 물론 이 말은 오늘날에는 문화적 사명이 폐지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창세기 1장에 주어졌던 문화적 사명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믿지만, 상황의 변화로 말미암아 우선순위와 그 적용에 있어서 중요한 변화가 초래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오늘날 타락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복음 전파 사명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가운데 문화적 사명을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서 단순하게 타락 전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무분별하며 구속사의 흐름을 무시한 것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이상 타락 전에 살고 있지 않으며 타락 후의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에는 아름다운 에덴 동산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불타고 있는 세상이 있다. 이러한 죄의 현실을 무시하고서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타락 전의 에덴 동산에 살고 있다면 한가히 밭을 갈며 동산을 지키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불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기 때문에 먼저 불을 끄고 사람들을 건져내는 데 주력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밭을 갈고 정원을 가꾸는 일을 포기하라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이 일도 열심히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도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사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성실히 감당하는 가운데 복음을 전하며, 또한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우리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래서 사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복음 전파 사명과 문화적 사명이 각각 별개로 존재한다기보다도 서로 어우러져서 함께 존재한다.

어쨌든 타락 후에 일어난 이러한 현실을 무시하고서 타락 전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은 이러한 상황의 변화를 무시한 것이요 구속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것이 되고 만다. 오늘날 우리가 창세기 1장에 주어진 사명을 깊이 생각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는 것은 필요하며 좋다. 그러나 우리가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면 이것은 잘못이다. 이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구속사의 흐름을 되돌리려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구속사의 시간은 창조로부터 종말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지, 종말에서 창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창세기 1장을 읽고 이해하되, 우리가 창세기 1장의 상황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해하면 안 되며, 우리는 지금 타락 후의 죄 많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서, 그리고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고 우리도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가운데 창세기 1장을 읽고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곧 구속사의 시간을 바로 인식하면서 성경을 읽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여기서 다시금 죄의 심각성을 생각하게 된다. 개혁주의 신학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인간의 전적 부패와 타락을 믿는 것이다. 곧 죄의 심각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에서 강조되고 신학의 여러 분야에서 깊이 고려되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문화론에 와서는 이것이 그만 잊혀지고 마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카이퍼나 스킬더에게 동일하게 발견되는 현상이다. 다른 곳에서는 인간의 전적 부패와 타락을 강조하다가도 문화론에 와서는 그만 이것을 잊어버리고 낙관주의 문화관에 빠지고 마니, 참 이상한 일이다. 이것은 칼빈의 문화관을 따른 것이 아니라 19세기와 20세기 전반의 시대상황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이 아브라함 카이퍼의 경우에는 분명했지만 클라스 스킬더의 경우에는 불분명하였다. 스킬더의 경우에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복잡하게 섞여 있으며, 창세기 1-3장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현대신학자들에 대한 반동과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철저한 순종 등이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지만, ‘계발 사상의 경우에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잠깐 잊어버리고 죄의 심각성을 고려하지 않는 실수를 범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점에 있어서는 스킬더도 카이퍼와 마찬가지로 문화낙관주의에 빠져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 있어서 우리에게는, 다우마 교수가 잘 지적한 대로, 성경과 칼빈이 가르치는 바를 따라 문화에 대해 조심성 있는 태도’(bescheidenheid)가 요구된다고 하겠다.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vreemdeling) 순례자’(pelgrim)로 살아간다. 그러나 단지 천국만 바라보고 이 땅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뱅이 순례자가 아니라 이 땅에서 주어진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며 걸어가는 일하는 순례자이다. 말하자면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전도하면서 다른 한 손에는 호미를 들고 밭을 갈면서,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는 순례자이다. 우리는 단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기억하면서, 죄 많고 타락한 세상 가운데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는 할 일 많은 순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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