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고

창조와 언약에 대하여

메르시어 2023. 4. 30. 10:07

창조와 언약에 대하여

2013-05-04 14:34:03


1. 창조의 목적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위대한 선언으로 시작된다. 이 선언은 하나님의 최초의 자기계시이다.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분으로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이 하나님의 자계시는 하나님의 모든 자계시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신 목적은 무엇인가?  창세기 장1절의 위대한 선언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없다. 그러나 천지 창조라는 하나님의 위대한 행동에 이유와 목적이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왜 천지를 창조하셨는가? 라는 질문은 정당한 질문이고 동시에 위대한 질문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 질문을 기뻐하시며 적극적으로 대답해 주실 것이다. 창세기 1장 1절의 위대한 선언이후에 이어진 성경 계시는 모두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성경은 창조의 목적이 무엇이며 하나님은 이 창조의 목적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가 그리고 인간은 이 창조의 목적에 어떻에 관련되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인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계시가 먼저 주어진다.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신 후에 마지막 창조행위는 인간 창조였다. 인간이 마지막으로 창조된 것은 인간창조가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중심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간 창조에 대해서는 다른 만물 창조와 달리 특별한 계시가 주어진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으셨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반영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무엇인지 성경은 말하지 않지만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인간을 다른 만물과 구별지는 유일한 준거점일 것이며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유일한 정체성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 존재를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있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간의 특별한 관계에 대한 분명한 계시인 것이다. 인간은 다른 만물과 달리 하나님의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 특별한 피조물로 창조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특별한 피조물로 창조된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왜 자기 형상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신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인간 창조의 목적이었고 바로 이것이 인간의 존재이유인 것이다.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신 목적은 인간의 다스림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다스림'이라는 키워드로 하나님과 인간과 만물은 상호관계를 맺고 있다. 하나님과 만물사이에 인간은 중보자로서 서있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표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이며 동시에 만물을 대표하여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존재인 것이다. 결국 '다스림'은 긍극적으로 인간의 다스림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다스림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반영되지 않는 다스림은 이미 진정한 다스림이 아닌 것이다. 이어지는 선악과 금령은 바로 인간의 다스림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이루어져야 함을 계시한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간이 만물을 다스리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사고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천지창조 목적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중심이며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는 주체인 것이다. 인간은 창조목적을 이루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세워진 존재인 것이다.

 

 

2. 창조 언약 

 

  창조 언약이란 무엇인가?  창조 언약이란 창조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언약이다. 하나님은 만물과 언약을 맺으신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과 언약을 맺으셨다. 창조 언약은 창조 목적을 이루기 위한 언약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여 하신 언약적 행동은 무엇이며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해야할 언약적 행위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먼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여 하신 언약적 행동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지으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언약적 존재로 지으신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지 않았다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수 없을 것이다. 만물이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그것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당사자가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과 언약의 당사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만물을 다스리는 지위에 두셨다.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언약적 존재로 지으신 것과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언약적 사역을 하게 하신 것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에서 존재와 사역은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보게된다.

 

  그 다음에 우리는 생각할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해야할 언약적 행동이란 무엇인가하는 점이다. 이어진 선약과 사건은 이것에 대한 분명한 계시일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요구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과 금령은 주신 이유는 인간에게 순종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임이 명백하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할 존재임을 선약과 금령은 보여준다. 그러므로 선약과 금령에 인간의 죽음에 대한 경고가 덧붙여진 것은 위협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에게 불순종할 때 그 존재의미를 상실한다는 엄중한 진리를 계시한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순종을 요구하신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다스림의 권세와 관련된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에는 당연히 조건이 붙어있는 것이다. 인간이 만물을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는 것이므로 인간은 반드시 만물을 자기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약과 금령을 통하여 바로 이 진리를 가르치시려고 했던 것이고 아담은 이 교훈을 배웠어야만 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해야 할 언약적 의무요 책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선악과 금령을 통하여 마땅히 배웠어야 할 이 교훈을 배우지 못했고 이것은 아담 이래 인류 역사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하고 말았다. 아담의 실패는 인간의 모든 실존적 문제의 뿌리가 되었고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죄란 매우 언약적인 표현이다. 그것은 언약 배반을 가르키는 것이고 하나님 인간간에 이미 존재하는 언약을 전제하는 것이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죄란  인간이 하나님과 맺은 창조 언약을 배반한 것을 가르킨다.  아담의 실패가 하나님의 무능이나 인간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담의 실패는 인간의 순종이 얼마나 자발적이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며 둥시에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오직 인간의 자발적 순종을 퉁하여 이루어짐을 보여주는 것이다. 불순종할 가능성이 없는 순종이란 엄밀한 의미에서 이미 순종이 아닌 것이다.

 

 

3. 이스라엘의 역사와 언약

 

   아브라함으로 부터 시작되는 이스라엘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씨의 번성과 그 씨가 땅을 차지할 것을 약속하여 주셨는데 이 약속은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과 그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함으로써 성취되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이 약속을 통상 아브라함 언약이라고 부른다. 아브라함 언약의 내용은 아브라함에 하신 하나님의 이런 약속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아브라함 언약을 창조 언약을 반영하고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씨와 땅의 약속은 창세기 1장28절에서 아담에게 하셨던 생육과 번성의 축복 그리고 땅을 정복하고 만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반영한다. 이것은 정확히 창조언약에서 아담을 향해 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의 내용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일 뿐만 아니라 약속하신 하나님에 대한 순종일 것이다. 당시에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이  처한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보였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믿었는데 아브라함의 이 믿음이 바로 아담에게 가르치시려고 했던 순종이었고 이것은 창조언약에서 아담이 하나님을 향해 해야 할 언약적 의무를 그대로 반영한다.

 

  이어지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등장하는 본격적인 언약이 바로 시내산 언약이고 시내산 언약의 갱신으로서의 모압언약인데 이 두 언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공동체가 맺은 언약이다. 시내산 언약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이후 광야에서 맺은 언약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이유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한 것이었고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땅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씨의 약속은 애굽 400년의 세월을 통하여 이루어졌고 이렇게 충만해진 아브라함의 씨가 가나안 땅을 차지할 때 땅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충만해진 아브라함의 씨들과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이 바로 시내산 언약이었다. 시내산 언약에서는 법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십계명이다. 십계명은 곧 하나님의 뜻, 이스라엘이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 구체적으로 법으로 나타난 것이다. 시내산 언약에서 이미 전제된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가지고 있는 관계였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씨로서 하나님과 떨어질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가진 존재였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형상을 지음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특별한 언약적 존재였던 것을 반영한다. 그 다음에 시내산 언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사실이 언급되는데 이것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을 해방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이었다. 그리고 시내산 언약의 긍극적 목적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광야에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했을 때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시내산 언약의 목적이었다. 하나님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형성하시고 애굽에서 건지시며 광야에서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요구된 것은 순종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앞에 드려야 할 순종을 성경은 언약을 지키는 것이라고 표현하였고 그것은 불순종이 곧 언약배반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순종이 아브라함에게는 단순히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표현되었다면 시내산 언약에서는 구체적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뜻인 십계명에 대한 준수로 표현된 것이다. 이렇게 시내산 언약 역시 그 내용은 창조 언약을 반영하고 있다. 시내산 언약의 갱신이 모압언약은 언약의 당사자들인 출애굽 1세대에서 2세대로 바뀌었을 뿐 언약의 내용은 전적으로 동일하다.

 

  이스라엘의 역사의 구체적인 목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땅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는 것이었다. 시내산 언약의 목적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죄로 얼룩지고 더러워진 땅에 들어가 자신들이 먼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뜻대로 그 땅을 다스려야 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사명이었고 이스라엘 백성의 존재이유였으며 이스라엘 역사의 목적이었다. 이것 역사 아담에게 주어졌던 만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야 하는 언약적 의무와 동일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실패하였고 이스라엘 역사의 실패 또한 아담의 실패의 역사를 정확히 반영한다.

 

 

4. 그리스도와 새 언약

 

   아담이 실패하였듯이 이스라엘의 역사는 실패하였다. 아담이 불순종하였듯이 이스라엘은 불순종하였고 땅이 아담의 다스림을 거부하였듯이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을 토해내었다. 이스라엘은 앗수르와 바벨론에 잡혀갔고 비록 그들의 부분적인 고토 귀환이 이루어졌지만 초라한 식민지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고단한 역사가 끝없이 이어진다. 이러한 이스라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메시아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던 희망없는 시대에 메시아가 오신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줄기차게 주어졌던 메시야 약속이 성취된 것이다. 성경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이스라엘의 변방 갈릴리 지방에서 자라고 살아온 예수라는 인물이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이시라고 증언한다. 이스라엘은 메시야를 고대하였지만 예수는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메시야가 아니었다.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면서 종종 자신을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듯한 말을 하는 예수는 그들에게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는 죄인이었을 뿐이다. 더구나 예수기 당시의 권력자들에게 잡혀 무력하게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사건은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메시야를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것과 함게 제3일에 다시 살아날 것도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깨닫지 못하였고 묻기도 두려워 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살아나셨고 제자들은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예수의 부활은 아담의 실패이후 인간 역사에 드리워진 죽음의 굴레가 벗겨진 것을 의미하며 인간이 잃어버린 다스림의 권세가 회복된 것을 의미한다. 이제 죽음은 더 이상 인간을 압제하지 못하며 인간에게는 창조시에 아담에게 주어졌던 다스림의 권세가 다시 주어질 것이다. 예수님에게 주어진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두가지 타이틀은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창조언약을 회복하는 중보자의 직무를 의미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은 창조언약의 회복으로 인간에게 다시 주어질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의미하는 것이다. 아들이란 생물학적 의미가 아니라 법적인 상속자, 법적 통치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활후에 하신 소위 ' 대사명"의 말씀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라는 말씀은 바로 인간에게 원래 창조목적을 이루기 위해 주어졌던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가 회복된 것을 가르킨 것이다.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가진 유월절 식사에서 새언약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언약의 피란 예수님이 세우시는 새언약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인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언약적 즉음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역사 언약적 부활이었다. 새언약에서도 언약의 양당사자는 물론 하나님과 인간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언약의 양 당사자사에서어 언약을 중보하는 언약의 중보자였다. 그러니까 새언약이란 바로 창조언약의 회복이고 예수님은 바로 창조 언약을 회복하는 언약의 중보자인 것이다. 그런데 '언약의 피'란 표현이 가리키듯이 예수님이 언약을 중보하는 방식은 자신의 죽음이었다. 언약의 중보자란 언약 양 당사자를 대표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인간을 향하여는 하나님을 대표하였고 하나님을 향하여는 인간을 대표하는 분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언약적 행동이었던 것이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으로서의 십자가 죽음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자기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과 언약적 사랑의 표현일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의 중심이며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룰 유일한 주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포기하실 수 없으며 인간을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동역자로 다시 부르시고 세우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인 것이며 동시에 창조목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창조경륜인 것이다.

 

  그 다음에 인간의 언약적 행동으로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예수의 죽음은 인간을 대신하고 대표한 대속적 죽음이었다. 왜 그것이 대속적 죽음이냐 하면 인간을 대표한 언약적 중보자의 죽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죽음은 예수의 죽음이 아니라 예수가 대표한 인간의 죽음이었다. 원래 창조언약을 배반한 인간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굴레였다. 그것은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언약을 배반한 인간 존재의 무의미를 증거하는 것이었다. 선악과 금령에서 보듯이 언약 배반의 결과는 죽음이었다. 그 결과 모든 인간에게 죽음의 굴레가 씌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은 언약을 배반한 인간이 언약 배반의 책임을 지고 죽은 것을 의미한다. 언약은 언약을 배반한 자가 죽어야만 그 언약이 유효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곧 언약을 배반한 인간의 죽음이었다. 이제 예수의 죽음으로 언약은 다시 살아났고 창조 언약의 당사자인 인간은 다시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렇게 새언약이란 창조 언약의 회복인 것이다.

 

 

5. 언약과 하나님의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죄사함과 개인 구원의 범주에 국한 시키는 것은 편협하고 부분적인 시각이며 성경의 계시를 왜곡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창조의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창조경륜이고 창조 목적을 이루시려는 언약적 행동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떠난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새창조 혹은 재창조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창조시에 아담에게 주어졌던 창조목적과 관련된 것이다. 이미 창조언약에서 보여졌듯이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나타난 언약에서 보듯이 언약은 창조목적을 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세우신 새언약도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아담이 실패했던 창조언약이  두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언약에 참여한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시어 창조목적의 동역자로 일하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란 인간이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을 다스리는 나리이다. 다시 말하면 창조목적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을 떠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할 수 없듯이 동시에 인간이 배제된 하나님의 나라를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인간의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신 새언약은 바로 순종하는 인간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이신 것이다. 그래서 아담이 실패했던 창조언약이 회복되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힙입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목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뜻대로 자신들을 다스려 주는 것이고 그래서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존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