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민수기

민수기 6장 나실인 규례

메르시어 2023. 2. 12. 17:34

민수기 6장 나실인 규례

Tolle Rege/민수기

2011-06-12 01:40:46


나실인 규례는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미 성막에서 섬길 수 있는 자는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엄격하게 제한이 되었고 일반인이 함부로 성막에 가까이 하면 레위인에게 죽임을 당할 정도였다. 그런데 나실인 규례는 평민이 자발적으로 성막에서 섬기는

헌신의 서원을 할 수 있는 제도이다. 그 헌신의 기간도 본인이 자발적으로 정할 수 있고 심지어는 여자에게도 나실인 서원이 허용되고 있다. 제사장 그룹과 레위지파에게만 허용된 성막봉사의  특권이 일반인에게도 열린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나라에서 자발적인 헌신이 얼마나 중요시 되는지는 보여주는 것이다. 레위기에서 제사 규례가 주어질 때도 자발적이고 전적인 헌신을 의미하는 번제가 제일 먼저 소개된 것도 동일한 의미를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

 

우선 남녀를 막론하고 나실인 서원을 하면 먼저 서원한 기간동안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멀리하고 포도주나 독주로 만든 초를 마시지 말고 포도즙도 마시지 말고 심지어는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아야 한다. 서원의 기간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 조차도 먹지 말아야 한다. 두번째는 삭도를 머리에 대지 말고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두어야 한다. 세번째는 부모형제가 죽었어도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부모나 형제나 자식이 죽었을 때 죽은 자를 만짐으로 부정하게 되는 것이 허용된 제사장의 규례보다도 엄격한 것이다. 나실인은 자기의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 여호와께 거룩한 자이므로 그 거룩함을 엄격하게 유지하여야 한다. 그리고 자기 몸을 하나님게 구별하여 드리는 상징은 그 머리에 있었다. 그러므로 혹시 부득이하게

죽음을 접하게 되어 머리를 더럽힌 경우 그는 즉시 머리를 밀고 일곱째 날에 다시 머리를 밀며 8일째에 비둘기로 속죄제와 번제를 드려 머리를 정결하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미 몸을 더렵혔으므로 서원의 지나간 기간은 무효가 되고 새로 서원기간을 다시 정하여야 한다. 이때 그는 일년된 숫양을 가져다 속건제를 드려야 하는데 이것은 서원기간을 무효로 만들어 하나님께 끼친 손해에 해한 배상의 의미일 것이다.

 

나실인의 서원기간이 끝나게 되면 그는 숫양으로 번제를 어린 암양으로 속죄제를 무교병의 소제를 더하여 숫양으로 화목제를 드린 후 성막문에서 자기의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제물 밑의 불에 사른다 그리고 나실인이 화목제물을 여호와 앞에 요제로 흔들어 드리고 제사장에게 돌림으로 나실인의 봉사직무가 완료되는 것이다.

여기서 나실인 서원이 끝나고 드리는 제사는 규모가 크고 매우 값이 비싼 제물이 드려지고 있는데 이것은 나실인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특별한 헌신이므로 서원을 마치는 제사도 그에 걸맞게 특별한 제사가 힘에 넘치게 드려지는 것 같다.

 

나실인 규례는 아주 특별하고도 획기적인 규례인 만큼 거룩을 유지하기 위한 상당한 노력과 세심한 주의가 필요항 것이엇다.  5장이 부정적인 차원에서 진의 정결을 위한 규례였다면 나실인 제도는 매우 긍정적인 차원에서 진을 정결하게 하는 규례라고

볼 수 있다.  나실인 규례에 이어서 제사장의 특별한 축복이 주어지는 것도 나실인 규례의 긍정적인 차원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하나님은 이렇게 힘에 넘치도록 자신을 구별하여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신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러므로 이 제사장의 축복은 단순한 축복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언약적 헌신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의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기시를 원하노라 "

 

이 특별한 제사장의 축복의 핵심은 다른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얼굴을 표현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적 샬롬인 것이다. 여호와가 그 백성에게 얼굴을 감추지

아니하사고 얼굴을 비추시며 얼굴을 항하여 드시는 것 이것이 바로 언약백성에게 

최고의 축복인 것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이 내게 복이라고 노래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