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이중적 의미- 균형잡힌 십자가 신학을 위하여
십자가의 이중적 의미- 균형잡힌 십자가 신학을 위하여
2012-11-18 19:43:19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특별히 종교개혁 신학의 중심이었다. 특히 루터에게 십자가 신학은 기독교신학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루터가 자신의 십자가 신학에서 강조한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로서의 십자가였고 거기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이 사람은 (행위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 사상이었다. 종교 개혁의 전통아래 있는 우리도 십자가는 하나님편에서 인간을 향하여 일방적으로 베푸신 은혜와 사랑으로 주로 이해하고 있다. 물론 십자가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십자가를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으로만 해석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벌어질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의 의미를 해석할 수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 내어줄 정도로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이 바로 온 세상을 심판하시어 불신자와 악행자를 영원한 형벌에 던지시는 바로 그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종교개혁의 전통은 십자가를 인간을 향한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하나님의 행동으로만 이해한다. 그 결과 우리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하며 그것외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향하여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하여는 잘 알지 못하게 되었다. 물론 신자는 십자가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감사가 하나님을 향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강력한 동기가 되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감사하는 삶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잘 알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십자가의 이중적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첫번째는 십자가가 과연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만인가? 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십자가가 과연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이기만 하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성경이 강력히 증거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동시에 십자가가 하나님의 엄위로운 진노의 표현인 점도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십자가는 흔히 예수님이 친히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진 사건으로 해석된다. 이는 구약의 제사제도에서 사용된 짐승의 희생제물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희생제물이 되시어 영원한 제사를 단번에 하나님 앞에 드리셨다는 의미인 것이다. 구약에서 짐승들이 희생제물이 되어 죽임을 당하고 피를 흘리는 제사제도는 물론 장차 예수님이 사람의 죄를 대속하여 죽임을 당하실 십자가 사역의 그림자요 모형일 것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런 끔찍한 모습의 제사규례를 예수님의 대속의 모형으로 제정하신 것인가? 상상컨데 구약의 성전뜰은 그야말로 허구한 날 짐승들이 울부짖고 피가 낭자하며, 피비린내와 짐승들의 태워지는 냄새가 진동하는 살벌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구약의 제사제도에서 짐승들의 그런 끔찍한 죽음과 피흘림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두려운 진노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었고 언약을 맺을 때 피뿌리는 예식을 하였는데 이것은 쌍방이 생명을 걸고 그 언약이 참여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만일 언약의 어느 일방이 언약을 배반하면 죽음으로서 그 책임을 감당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고대 근동의 종주권 조약의 형식을 빌어 표현된 언약이었는데 그만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은 심각한 것이었다. 하나님편에서는 인간의 수준으로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맹세해주신 것이고 사람편에서는 그 언약이 사람과 맺은 언약이 아니라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었기 때문에 언약배반의 댓가는 죽음외에는 없는 위험한 언약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후에 주어진 제사규례는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언약을 훼손하였을 때 이스라엘은 죽음으로써 그 책임을 감당하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고 이것이 제사규례에서 보여진 희생제물들의 끔찍한 죽음과 피흘림의 의미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구약의 제사제도에 나타난 희생제물의 규례는 일차적으로 언약을 배반한 인간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언약적 진노를 드러낸 것이며 이차적으로는 인간들이 죄의 책임으로서의 죽음의 형벌을 피할 길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기이한 언약적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동시에 자기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나타남인 동시에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나타남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가진 것이다. 구약의 제사제도에서 나타난 희생제물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그림자요 모형이었다면 균형잡힌 십자가 신학은 하나님의 사랑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심판의 이중적인 면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두번째는 십자가가 과연 하나님편에서의 일방적인 행위였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가 동시에 나타난 삽자가가 하나님편에서 인간을 향한 일방적인 행동이었는가 하는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 이미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구약의 제사제도에 나타난 언약사상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았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언약배반에 대한 책임을 지고 죽는 언약적 죽음이었고 또한 인간을 대신하여 죽는 대속적 죽음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세상을 위하여 내어주신 사랑의 행동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시다. 그 분은 완전한 신인으로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시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은 예수님은 한분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보자라고 증거한다. 성경이 사용한 중보자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이유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중보하기 위한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미 중보해야할 관계가 있다는 것과 동시에 그 관계가 깨어져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성경의 언약사상에 의하면 그 관계는 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관계이고 그 언약관계가 인간의 범죄로 깨어졌다는 것이다. 깨어진 이 언약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바로 중보사역이고 예수님은 이 사역을 감당하신 중보자이신 것이다. 그런데 이 중보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은 언약의 쌍방인 하나님과 인간을 대표할 위치에 계셔야만 하는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인간이 되시어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인간이신 신비한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되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신비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언약의 중보자로서 하나님 편에서 행하신 중보사역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이 언약적 자비를 베푸신 일이었다.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른 십자가 신학은 주로 이 부분만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언약의 중보자인 예수님이 인간편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행하신 중보사역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그것은 언약 배반에 따른 죽음의 형벌을 당하는 것이었다. 이 죽음의 형벌은 인간으로서 당하는 것이며 인간을 대표하여 당하는 형벌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공의를 만족시키는 언약적 희생의 행위였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은 언약 쌍방을 대표한 언약적 죽음인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유일하신 중보자이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인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언약적 충성이라는 점을 주목하여야 한다. 십자가의 이런 쌍방성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중대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구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을 때 짐승의 피를 뿌림으로 생명걸고 언약에 참여한 것 처럼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단순히 십자가에 나타난 죄사함의 은혜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넘어 예수님의 피를 뿌림으로 생명걸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하나님과 생명을 건 언약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십자가의 이중적 의미를 이해할 때 우리는 수동성과 능동성을 겸비한 균형잡힌 십자가 신학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의 이중적 계시
2013-12-25 22:06:48
1.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가 동시에 나타나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대속적 죽음이라는 측면에서 십자가에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나타나있다. 그러나 사람의 죄를 대속하는 방식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라는 사실에는 인간의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엄중한 진노가 나타나 있다. 이렇게 십자가에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죄인에게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충만하게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함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청난 진노를 동시에 발견하여야 한다.
2. 십자가로 상징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인을 위한 대속적 죽음이었으며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인을 위한 죽음일 뿐만 아니라 죄인의 죽음이기도 하다. 예수를 믿는 신자는 그의 죽음을 통하여 죄의 용서를 받을 뿐 아니라 그와 함께 십자가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다. 전자가 죄책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라면 후자는 죄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전자가 칭의(의의 전가= imputation of righteousness) 라면 후자는 중생(의의 분여= impartion of righteousness ) 일 것이다.
십자가에 나타난 인자와 공의
2014-01-08 15:27:40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두가지 대조된 태도가 나타나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나타낸다.
동시에 그 죽음을 통하여 베풀어지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람이 나타나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완벽하게 동시에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만이 아니라 죄인에게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동시에 말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보고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금찍한 죄인이며 그 죄의 형벌이 얼마나 크고 두려우며
하나님이 얼마나 죄인을 끔직히 싫어하시고 분노하시는지 알아야 한다.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의 죄를 깊이 자각하고 죄를 회개하여야 한다.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은 바로 이런 자들을 위한 것이다.
자기 죄를 자각하고 깊이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죄의 용서를 베푸시는 것이다.
죄를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죄의 용서란 무의미한 것이다.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죄에 진노하시는 두려운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죄를 회개하게 된다.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죄를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복음을 믿게 된다.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 이것이 바로 회심이다.
중생은 성령의 역사이고
회심은 중생의 열매이며 결과이다.
중생없이 회심이 없듯이
회심없는 중생도 없다.
중생없는 회심은 가짜이며
회심없는 중생도 가짜이다.
1.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가 동시에 나타나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대속적 죽음이라는 측면에서 십자가에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나타나있다. 그러나 사람의 죄를 대속하는 방식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라는 사실에는 인간의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엄중한 진노가 나타나 있다. 이렇게 십자가에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죄인에게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충만하게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함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청난 진노를 동시에 발견하여야 한다.
2. 십자가로 상징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인을 위한 대속적 죽음이었으며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인을 위한 죽음일 뿐만 아니라 죄인의 죽음이기도 하다. 예수를 믿는 신자는 그의 죽음을 통하여 죄의 용서를 받을 뿐 아니라 그와 함께 십자가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다. 전자가 죄책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라면 후자는 죄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전자가 칭의(의의 전가= imputation of righteousness) 라면 후자는 중생(의의 분여= impartion of righteousness )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