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고

씨뿌리는 자의 비유

메르시어 2023. 4. 30. 09:47

씨뿌리는 자의 비유

2012-11-04 20:54:47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다시 생각해 본다. 특별히 이 비유는 예수님이 하나님나라의 비밀이라고 하시면서 주신 비유이므로 하나님나라에 대한 중대한 계시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이 주시려고 하셨던 하나님나라에 대한 중대한 계시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 제자들이 나아와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느냐고 물었을 때 대답하시기를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는 알쏭달쏭한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란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그들에게 깨닫지 못하게 하시려고 한 것일까? 그것은 이사야의 예언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아직은 하나님이 볼 눈과 들을 귀를 주시지 않았다는 것이고 후일에 때가 이르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볼 눈과 들을 귀를 주신다고 하신 것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러니까 비유는 그들의 이해를 돕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이해를 방해하는 셈이 된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하나님나라를 보는 눈과 들을 귀를 주셨으니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과 의인들도 보지 못하였던 하나님나라를 제자들은 보는 복을 누리게 된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설명하시는데 씨를 뿌린다는 것은 천국 말씀, 곧 하나님나라에 대한 계시의 말씀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계시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 마치 뿌려진 씨를 악한 자가 와서 빼앗는 것 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즉시 기쁨으로 받지만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란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는 즉시 넘어지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들도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앞의 세가지 경우와는 달리 말씀을 듣고 깨달아 풍성한 결실을 맺는 자가 있다고 한다. 결국 이 네가지 경우는 두 가지 경우 즉 결실을 맺는 경우와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경우로 요약될 것이며 여기서 결실이란 하나님나라의 계시에 합당한 결과를 드러내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씨를 뿌리는 자가 기대하는 것 혹은 요구하는 것은 결국 결실일 것이다. 씨를 뿌리는 자는 결실을 기대하고 씨를 뿌리는 데  만일 땅이 결실을 내지 못한다면 그 땅은 아무 소용이 없는 무익한 땅이 될 것이다.

 

  씨 뿌리는 비유에 대한 해석에 이어 주어진 가라지 비유는 말씀을 듣고 결실치 못하는 경우에 대한 비유일 것이다. 즉 말씀을 듣지만 결실하지 못하는 자들은 가라지와 같은 자들이고 추수전에는 곡식과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비슷해 보이지만 추수기에는 가라지의 본색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는 결실하지 못하는 자들의 위선을 암시하는 말이며 결실여부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엄중한 비유인 것이다. 이어지는 겨자씨나 누룩의 비유 역시 말씀을 듣고 결실하는 자의 풍성함에 대한 설명일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세상에서는 가장 미미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온 세상을 덮을 만한 위대한 결과를 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더해진 보화와 진주의 비유는 말씀을 듣고 결실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를 해명해주는 비유이다. 보화와 진주 비유의 공통점은 모두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보화가 감추인 밭을 사거나 발견한 진주를 산다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헌신된 반응이 결실 여부의 관건이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즉 하나님의 계시는 은혜로 많은 사람들에게 값없이 주어지지만 그에 합당한 결과를 내는 사람과 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고 합당한 결과를 내려면 반드시 헌신된 반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오직 은혜로" 대한 왜곡된 이해를 따라서 오직 은혜만을 부르짖는 무책임하고 위선적인 한국교회에 중대한 일침을 가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는 것이고 하나님이 주시기 전에는 인간이 받을 수 없는 것이지만 일단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 후에 은혜에 합당한 반응을 하여야 할 책임이 인간에게 있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헌신된 반응으로 임한다는 것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주는 교훈이 아닐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적인 것이다. 이 말은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합당한 반응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이유를 우리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오직 믿음으로" 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그것은 행위가 필요없는 무책임하고 위선적인 믿음이 아니라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고 혹은 극히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 자기 소유를 다 팔아 사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의 전적인 헌신으로서의 반응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시려던 하나님나라의 비밀이 아닐까?    지금까지 이 비유를 통하여 이런 진리를 보지 못했다면 그것은 두렵게도 마음이 완악하여 눈이 멀고 귀가 막혔다는 이사야의 예언이 우리 시대에 임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