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의미와 성격
구원의 의미와 성격
2011-12-31 11:05:44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개인 구원의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구원을 받은 자인가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고 또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구원을 과거적 사건으로 국한하고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려는 설교가 인기를 끌고 있으며 그 첨단을 달리는 현상이 구원파로 통칭되는 교파의 등장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구원이란 먼저 죄의 용서를 받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며 그 결과로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보호와 복을 받고 살다가 죽어서는 심판을 면하고 천국에 가게된다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구원관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구원관인가하는 점이다. 물론 성경이 구원과 관련하여 죄의 용서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죄와 죄의 용서의 의미는 개인적 차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우주적인 차원인 것이다. 셩경은 죄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떠난 것이며 그 결과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용서를 단순히 개인의 죄책을 면제해주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목적의 성취와 창조질서의 회복이라는 의미에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죄의 용서 혹은 죄사함이란 하나님의 칭조목적의 성취와 창조질서의 회복의 수단인 것이다. 그러므로 죄사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로 회복되었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성경이 구원을 창조목적의 성취와 창조질서의 회복의 수단으로 보는데 그렇다면 구원의 근본적인 성격은 관계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로 말미암아 깨어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다른 피조물의 관계가 회복될 때 비로서 창조목적의 성취를 행하여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원은 일차적으로 관계의 회복이며 궁극적으로 창조목적과 질서의 회복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원은 과거적이고 일회적인 사건으로 국한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하다. 왜냐하면 관계란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자들도 구원이 과거, 현재적, 미래적 성격을 다 포괄하고 있음을 동의하고 있다. 결국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그 자체이며 그 결과로 나타나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다른 피조물의 관계의 회복인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의 확신과 관련하여서는 우리가 현재적으로 누리는 하나님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관건인 것이다. 왜냐하면 관계는 사실 늘 현재적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관계를 추억하거나 미래의 관계를 희망한다고 할지라도 현재적 관계를 누리지 못한다면 그 관계는 분명히 깨어진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우리가 현재적으로 누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 관계로 부터 유발되는 다른 두가지 관계 즉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피조물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 누림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누림과 인간과 피조물과의 관계 누림으로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깨어짐 그리고 인간과 다른 피조물의 관계 깨어짐은 바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깨어짐인 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사함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깨어짐이 회복된다면 죄의 결과로 야기된 인간과 인간관계의 께어짐 그리고 인간과 다른 피조물의 관계 깨어짐도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우리는 구원의 실존적이고 역사적인 차원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구원은 개인이 복을 받고 살다가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비 공동체적, 비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공동체적이며 지극히 역사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누림으로 출발하여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누림 그리고 인간과 피조물의 관계누림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회복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첫째로 하나님과의 관계누림에 힘써야 하며 그 다음에 반드시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누림 그리고 인간과 피조물의 관계 누림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와 이 땅 가운데 임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난 세가지 관계누림이라고 요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세가지 관계 누림은 그 순서는 있으며 구별되기는 하지만 분리될 수 없는 불가분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이중에 어느 하나에 국한 시킬 수 없으며 구원의 실제는 이 세가지 관계누림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드도인이 역사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소중한 통찰을 얻게되는 데 첫째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 누림인 공동체 형성이다. 이 공동체 형성은 단순히 사회적인 커뮤키티나 모임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에게서 그 형상이 회복되는 것이며 인간 존재의 하나됨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와 너는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공동체 형성의 활동인 것이다. 두번째는 인간과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누림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창조목적인 바 인간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다스리는 문제인 것이다. 여기에는 자연보호 환경보호, 동물 보호를 포함하여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성취하는 모든 활동이 포함될 것이다. 예컨데 우리는 어떻게 돈을 벌고 사용할 것인가? 우리는 가난한 자와 약자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 주식투자나 부동산 투자를 할 것인가 말것인가? 등 소위 기독교 윤리와 문화를 다루는 실천신학의 제문제들이 여기에서 도출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런 것들과 관계없이 개인적 차원과 비역사적 차원의 구원관에 머물러 있는다면 교회는 무능과 부패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이 땅과 역사 가운데 임한 하나님나라는 우리를 통하여 증시되지 못할 것이다.
[추기] 2012. 1. 10
우리는 흔히 구원을 우리의 외부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선물이나 은혜의 개념으로 이해하지만 사실 구원의 개념을 관계적 차원으로 보는 것이 더욱 풍부한 성경적 지지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인하여 창조목적을 떠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이루는 것이 구원이라면 당연히 구원의 목적은 창조목적으로 돌아오는 것이이어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구원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궁극적인 목적인 창조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임이 명확해 진다. 또한 구원을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라고 볼 때 구원은 매우 역동적인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구원을 하나님과의 관계로 볼 때 구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포괄하는 전시간적이며 동시에 쌍방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는 자는 이미 구원을 받았고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시점이 있으며 또한 현재적으로 구원을 누리고 있으며 즉 하나님과의 현재적 관계를 누리고 있는 것이며 나아가 미래적으로 구원을 소망하는 것 즉 하나님과의 미래적 관계발전을 기대하게되는 것이다. 두번째로 구원이 쌍방적인 성격을 가진다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주고 받음을 통하여 그 관계는 발전될 수도 아니면 위기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의 이런 두가지 성격은 바울이 가르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교훈의 의미가 무엇인자 잘 설명해준다. 구원은 관계이기 때문에 전시간을 포괄하며 동시에 쌍방적이므로 우리는 늘 두렵고 떨림으로 그 관계를 유지 발전 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법적 요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야 하는 도덕적 행위도 사실 이 관계로 부터 나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실 근거가 없는 것이며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야 할 법적 의무를 가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것이라면 우리는 행위로서 이미 맺은 관계를 유지 발전 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행위가 관계의 유지 발전에 어떤 공로적 기여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행위의 문제는 관계로 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행위로서 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관계 자체에 어떤 문제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구원을 이미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행위 자체는 이미 받은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행위의 문제는 하나님이 이미 주신 구원이나 은혜에 대한 감사나 보답으로 생각되어서도 안된다. 이런 생각은 반드시 믿음과 행위의 이원론을 낳게 되며 행위를 필수적이 아닌 선택 사항으로 간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안다든지,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운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 진리를 단순 명쾌하게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