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칭의를 말하다 - 톰라이트

메르시어 2023. 4. 29. 22:16

칭의를 말하다 - 톰라이트

2011-08-27 22:17:42


 서문

  먼저 칭의에 관한 논란은 부분적으로 구원의 성격과 범위에 대한 것이다. 서구의 기독교인들은 지난 수세기 동안 구원을 죽을 때 천국에 가는 것이라는 의미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부적절하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하나님께서 이세상으로 부터 자기 백성을 구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통하여 이 세상 자체를 구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번째 질문은 구원의 수단, 즉 어떻게 구원을 얻게되는가에 대한 것이다. 존 파이퍼와 그로 대변되는 전통에서는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얻게 되는데 이 은혜는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작용하며 오직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적용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절대적으로 옳은 이야기이며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서 놓치고 있는 존재가 있다. 성령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인가? 칼빈은 성령의 사역이 아들의 사역만큼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파이퍼가 주장한 구원의 등식에 성령을 덧붙인다면 더이상 지금과 같은 형태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을 통하여 간청하려는 내용중 하나는 우리가 성령의 사역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세번째 질문은 칭의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칭의를 구원과 바꾸어 쓸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성경에서 이 두 용어는 바꾸어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칭의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보시기에 옳다고 선언하는 하나님의 행위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선언이 포함하는 내용은 무엇이며 이 선언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존 파이퍼는 칭의란 예수 그리스도의 의(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으로 획득한 의)가 죄인에게 전가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바울이 칭의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방식은 존 파이퍼의 방식과 다르다. 바울에게 칭의교리는 다음 네가지 주제가 하나로 모이는 場이었다. 그러나 파이퍼는 이 사실을 어떻게든 무시하거나 경시하려고 한다.   먼저 바울의 칭의교리는 이스라엘의 메시야인 예수의 사역에 관한 것이었다. 두번째로 바울의 칭의교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족속을 통하여 전세계를 구원하시려고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에 관한 것이었다.  세번째로 바울의 칭의교리는 하나님의 법정에 그 촛점이 있다. "의롭게하다"라는 말은 이런 법정 은유를 기초로 한다.  네번째로 바울의 칭의교리는 종말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모든 내용들의 기초는 바로 바울의 서신이다.

 

 제1부 개관

 

1. 칭의는 무엇에 관한 내용이며 왜 중요한가?

  나에게는 칭의논쟁의 현재 모습이 지동설과 천동설의 논쟁으로 느껴진다.  내가 칭의 논쟁을 지동설과 천동설로 비유한 이유는 이 논쟁이 상징하는 바가 '성경에 대한 신선한 이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외부에서 발췌한 이론들을 성경에 부과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루터와 칼빈의 책을 읽었을 때 그들이 말하는 내용 전부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들이 진술하고 실천한 성경읽기의 방식만은 나의 것을 만들겠다고 다짐했었다. 그 방식이란 나 자신을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된 구약성경과 그리스어로 된 신약성경안에 푹 담그고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성경이 나의 혈액을 따라 흐르게 함으로써 내가 교회와 세상에 성경을 신선하게 가르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종교개혁자들에게 표해야 할 가장 위대한 경의는 그들에게 오류가 없다고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행한대로 우리도 행하는 것이다.   내가 칭의 논쟁을 지동설과 천동설로 비유한 두번째 이유는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것인데 이것은 이 논쟁을 포함한 다른 논쟁들에서도 중대하게 취급된다. 천동설이 상징하는 신학적 주장은 '나와 나의 구원'이 기독교 신앙 전체의 중심이라고 믿는다는 뜻이다. 구원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우주의 중심은 아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많은 경건한 기독교인들이 '나와 나의 구원'을 기독교의 핵심으로 설교하고 그렇게 살아왔다. 이 문제는 개혁주의 교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서구 교회의 중세로 부터 시작된 문제로서 카톨릭과 개신교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고교회와 저교회 모두를 전염시켜왔다. 문제는 성경은 그와는 다른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는 것이다. 칭의 논쟁에서 정말로 중요한 점은 인류의 구원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더 큰 목적의 일부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은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에서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담당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목적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만약 종교개혁 전통이 바울서신들 만큼 복음서를 중요하게 취급했다면 이러한 실수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태는 일어나 버렸고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여야만 한다. 기독교인들이 이신칭의의 교리를 알게된 후 보이는 특징적인 반응은 이제는 자신들이 아무것도 해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맺는 나의 관계' 그리고 '나의 구원'이야 말로 우주의 중심에 있는 정점이라는 생각은 뱀의 속삭임이 신학안으로  침투했으며 심지어 선하고 상식적이며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개혁주의 신학에까지 들어온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바로 나이다. 예수조차도 내가 처한 곤경에서 나를 도우려고 무대에 등장하는 조연일 뿐이다.

 

  성경을 그 가치에 합당하게 읽는 일이 도처에서 실패하고 있으며 지구중심적인 신학과 경건이 우리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관점, 옛관점, 신선한 관점 그리고 어떤 이름을 붙이든지 그 모든 담론들을 뒤로하고 내가 주장하려는 바는 다가올 위험천만한 미래세계 안에서 교회에게 사도바울의 전체적인 신학, 바다위에 솟아 오르는 아침 태양처럼 우리를 황홀하게 만들 사도바울의 우뚝솟은 장엄한 신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서구사상계의 고질적인 독법, 즉 부분적이고 자아중심적인 독해법이나, 문백에서 분리된 본문들과 이차적인 이론들의 그물망속에서 스스로 뒤얽혀버린 구원론으로는 그러한 바울신학을 제대로 대접할 수가 없다. 이제는 새관점을 뛰어넘어 역사적인 면에서, 주해의 측면에서, 신학적인 면에서 그리고 목회적인 면과 선교적인 면에서도 바울을 좀 더 정당하게 다룰 수 있는 아주 다른 관점을 개발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칭의교리에 관한 여러 책들을 읽으면서 반복적으로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저자들이 성경본문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보이면서도 바울의 교리에서 핵심적인 요소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 언약, 그리스도와 연합, 부활과 새창조,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됨, 역사를 통해 지속된 하나님의 목적이 이끄는 계획이라는 의미에서의 종말론 특별히 성령과 기독교적 인격의 형성, 이런  핵심적 주제들이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바울신학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두개의 퍼즐조각이 있는데 첫번쩨 조각은 바울이 구약성경을 풍부하고 절묘하게 사용하고 있는데 그는 단순히 인용하는 구절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절이 속한 전체도 언급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인용된 구절이 속한 장을 반복해서 살펴보면 풍성한 빛이 바울의 실제적인 주장으로 비쳐들어온다. 두번째 조각은 내가 보기에 바울 이해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주제인데 그것은 사도바울이 이스라엘과 전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단일한 연속된 내러티브로서 이해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 내러티브가 메시아 예수 안에서 그 절정에 달했고 이제 역사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언제나 의도했었던 신선한 방식으로 전개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것은 제2성전 유대교 사상의 특징이었지만 새관점에서는 전혀 두드러진 요소가 아니었다. 제2성전 시기의 많은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바울도 그의 머리와 마음속에 위대한 창조와 언약의 이야기, 하나님과 그의 세계와 그의 백성의 이야기, 단일한 내러티브안에서 진행되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그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진정으로 바울은 역사를 하나의 연속된 선으로 생각했으며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에 이르기까지 단절되지 않고 진행되어 예수 자신과 그의 사역을 통하여 교회의 사역에까지 연결되는 그 역사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했다. 아브라함으로 시작되어 모세가 전해준 토라아래에서 진행된 이스라엘의 전 역사가, 실제로는 아담으로 부터 시작된 인류의 전 역사가 손꼽아 기다리던 그 순간이 바로 하나님께서 메시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스라엘과 세계의 역사 안으로 대격변을 일으키면서 침입해 들어오신 사건인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 세계와 인류를 구원하시려 했던 단일한 계획이 언제나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 단일한 계획은 이스라엘의 소명을 구심점으로 삼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 소명이 이스라엘의 대표자인 메시아 안에서 열매를 맺는 모습을 바울이 보았다는 사실, 이런 사실들이 바울에게는 핵심적인 것이었지만 옛관점과 새관점 그 외의 관점들 모두에서 거의 완전히 무시되어 왔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16세기의 문제들과 19세기의 시각들을 가지고 성경을 읽어왔다. 이제 우리는 21세기의 문제들과 1세기의 시각을 가지고 성경을 읽을 때가 되었다.

 

2. 교전수칙(Rules of Engagement)

 성경은 성경 자체가 제기하는 질문이 아닌 다른 질문에 대해서 권위있는 대답을 제시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로마서는 창세기와 이사야서와 더불어 성경전체에서 가장 명백하게 태양중심설을 주장하는 책일 것이다. 만약 우리가 성경 구 자체에 일차적인 관심을 두려한다면 서신 자체의 흐름과 그 맥락과 어떤 순간에서의 특정한 주장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핵심이다. 우리는 연속되는 각각의 서신에 대해 각각의 단락에 대해 그리고 각각의 문장과 단어에 대해 기본적으로 바울이 말하는 주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끌어안고 본문 속으로 들어가서 그 문제의 답을 찾아내려고 노력할 때, 그런데 본문 자체는 그와 별개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보다는 우리 자신의 목소리가 본문 속에서 메아리치는 것을 듣게될 위험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성경 자체가 열렬하게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핵심내용을 놓치고 우리 자신의 의미를 찾기위한 끊임없는 탬색 가운데 그 내용을 무시해 버리게 되는 치명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특별히 성경이 실제로 이야기 하는 내용은 반드시 교회의 전통과 창조적인 대화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그런데 개신교 전통에 속한 보수적인 교회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성경적아라고 주장해왔지만 그들은 바울신학에 새관점이 등장하였을 때 성경이 아닌 전통을 주장하여 저항하려고 한다.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물론 끝이 없는 탐험이지만 모든 세대의 기독교인들은 새롭게 그 탐험을 하도록 부름받는다. 성경 그 자체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신약을 그것이 기록된 1세기의 맥락속에서 읽어야만 한다. 우리가 1세기 유대교에 대하여 그리고 그 당시의 그리스 로마 세계에 대하여 그리고  고고학과 사해문서등에 대해 더 많이 알수록 원칙적으로 더 굳건한 맥락에 우리의 성경해석의 기반을 두게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방대한 시대착오적인 자기 해석에 휘둘리고 사색적인 주해만을 하게될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입증하려는 것은 서구 개신교 전통에서 일상적인 해석으로 간주해온 많은 해석들이 바울이 실제로 기록한 내용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사실 1세기의 의미로 접근하는 것을 막아버리면 완전히 다른 세기로 부터 유래한 개념들과 논쟁점들이 그 자리를 대체해 버리게 된다. 그런데 파이퍼가 1세기가 아닌 16세기 유럽의 기독교 갱신운동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하는 것은 우려할만한 일이다. 그가 그 시대를 복음주의의 역사적 뿌리를 제공했다고 묘사하는 것은 심각하게 혼란을 조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참된 복음주의는 성경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성경이 증언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에 기초하고 있지 그 외의 어떤 것도 복음주의의 뿌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에 대한 어떤 논의에 있어서도 교전수칙은 다음과 같아야 한다. 무엇보다고 주해를, 그것도 역사적인 도구를 총동원해서 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목적이 본문이 원래 갖추었던 모양에서 변형되는 방식으로 본문은 왜곡하거나 압박하려는 것이 아니라 본문에 민감한 해석을 지원하고 조명하는데 있어야 한다.

 

3. 1세기 유대교 : 언약, 율법 그리고 법정

  예수와 바울의 시대에 모든 유대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큰 흐름은 바로 희망의 물결이었으니 그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다 시 한번 행동을 하실 것인데 드디어 아브라함과 그의 족속에게 하셨던 약속이 마침내 실현될 것이며 선지자들이 꿈꾸었던 비젼이 그 궁극적인 성취를 보게될 것이라는 희망의 물결이었다. 특별히 많은 1세기 유대인들은 약속을 성취하는 이 신적행위가 당대에 일어나길 소망하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가 바울 신학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지 세가지 내용을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는 1세기의 많은 유대인들은 역사의 시초부터 고대 예언자들의 시대를 거쳐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구원의 절정의 순간을 향해 뻗어가는 연속적인 내러티브안에 그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성경은 아직 그 끝에 다다르지 않은 거대한 규머의 통제적 내러티브로 간주되었다. 즉 그들에게 성경은 단순한 교리나 경건의 지침서가 아니라 성경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드라마의 이전 장면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두번째는 당시에 다니엘 9장에 기초하여 이 연속되는 내러티브가 지속되는 유배상태를 가로지르는 긴 통로로 간주되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지만 상황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선지자들의 위대한 예언들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으며 특별히 여호와 자신이 성전으로 아직 귀환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유배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1세기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살고있는 시기가 유ㅣ대한 성경 내러티브가 연속되어 진행되는 시기라고 믿었으며 그들 자신이 다니엘9장의 지속되는 유배기의 후기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대 서구의 기독교인들에게 1세기 유대인들의 이러한 세계관은 매우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 자신이 하신 약속을 역사 가운데 행하실 것인가하는 질문을 한다면 그들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하나님의 세계와 그의 백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하실 일이 아닌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주된 내용이 되는 비역사적인 구원론으로 돌아가 버릴 것이다. 다니엘 9장에 의하면 하나님이 유배라는 저주로써 이스라엘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 정당한 이유는 그의 속성 즉 '하나님의 의' 때문이다. 그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똑같은  속성, 즉 '하나님의 의'에 의지하여 언약적인 회복도 역시 간청할 수 있었다. 이렇게 언약과 법정은 하나의 세트이다.

 

  파이퍼는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관심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파이퍼의 제안에 의심을 표시하는 다섯가지 관찰을 제시하려고 한다. 첫째 히브리어 '체다카 엘로힘' 혹은 그리스어 '디카이오쉬네 떼우'를 파이퍼식으로 생각하는 학자는 아무도 없다. 오히려 폭넓게 지지받는 관점은 언어적으로는 '규범에의 순응'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의' 라는 맥락에서 사용할 때 가장 개연성이 높은 의미는 하나님 자신이 세운 규범, 즉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충실함'인 것이다. 성경에 대한 바울의 해석안에서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펼치는 수단이 바로 이스라엘과 맺으신 그의 언약이었다. 그리고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하나님의 단일 계획은 곧 그 일을 이루심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신다는 것이다. 두번째 파이퍼의 해석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전가(imputation)교리의 체계안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한 그의 특이한 정의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불분명하다. 만약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관심이라면  이 의가 믿는 사람에게 전가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창세기 15장의 언약체결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아브라함의 의는 그 언약 안에서 올바른 태도를 취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에 신실하시다는 변치않는 헌신을 의미한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통하여 전세계를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단일한 계획 이것이 바로 내가 바울에 관한 글을 쓰면서 사용하는 언약이라는 단어의 의미이다.  세번째 파이퍼는 로마서 3장과 4장이라는 폭넓은 문맥의 의미와 씨름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의'로 부터 언약적 신실함이라는 개념을 떨어뜨리려는 그의 시도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의미이다. 파이펴는 내가 제시한 기본적인 제안, 즉 '하나님의 의'는 그 언약 , 구체적을 얘기하면 창세기 15장에서 체결한 아브라함 언약에 대한 그의 신실함을 의미하며 하나님께서 메시아 예수의 신실한 순종의 죽음을 통하여 죄의 문제를 처리하신 이유가 이 언약때문이라는 나의 제안을 전혀 다루지 않는다. 아마도 파이퍼는 언약의 요점은 언제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하여 전세계를 축복하실 것이라는 내용과 거리를 두려고 했거나 아니면 그 내용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불충성'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전세계를 축복하시려는 약속을 하셨지만 이스라엘이 그  위임에 충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파이퍼에 반대하여 로마서 3장 5절의 '디카이오쉬네 떼우'를 '언약적 신실함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유이다. 네번째 파이퍼는 그의 전체논의에서 법정적인 비유의 중요성을 격하하는데 이는 극히 설득력이 없다. 구약에서 '의'와 관련된 언어는 보통 법정상황을 그 배경에 두고 있다. 법정에서 재판관이 누군가를 의롭다고 판결할 때 자신의 특정한 의를 그에게 건네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죄라고 선고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가 바울에 대한 주해와 신학의 전반적인 영역에 걸쳐 완전하게 만족스럽게 그리고 철저하게 작용하고 있다. 다섯번째 파이퍼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 자신의 영광에 대한 그의 관심으로 본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가 보통 적용되는 상황은 하나님의 관심이 특별히 그의 언약백성에게 행할 때이다. 물론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에 대한 관심과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 외부를 향하여 그의 창조와 치유와 사랑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신적 나르시시즘의 형태와 구별되는 것은 하나님, 특별히 삼위일체 하나님이 무자격한 피조세계를 향하여 풍성한 사랑을 쏟아붓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이렇게 피조세계를 향한 언약적 사랑과 신실하심에 풍성하신 분임을 설명해주는 개념인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성질 혹은 속성이다. 따라서 그의 '의의 행위'는 그의 언약적 신실하심의 외연적 표현으로서의 행동인 것이다.

 

  그렇다면 유대교의 율법, 즉 토라는 이러한 내용들 안에서 어디에 자리를 잡고 있는가? 루터는 율법은 정죄의 기능외에는 없는 것으로 생각한 반면에 칼빈은 모세의 율법을 이미 구속받은 백성들에게 삶의 방식으로 주어진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흥미롭게도 샌더스가 유대교 내부의 율법준수에 대하여 주장한 내용의 핵심을 담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언약적 율법주의(Covenental nomism)이다. 만약 계몽주의 시대 이래로 200년간 성경신학계를 주도한 것이 바울과 율법에 대한 루터주의의 견해가 아닌 개혁주의의 견해였다면 새관점은 팔요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난 100년간 진행되어 온 구원론에 있어서의 참여주의와 법정주의 사이의 양극단적 논쟁도 없었을 것이라고 상상해본다. 유대교가 악하다는 비방은 전통적인 기독교를 자처하는 많은 종파에서 자주 나타났고 이는 칼빈주의보다는 루터주의에서 더 고질적이었다. 하나님은 이미 언약안으로 불러들인 백성들, 가가 이제 노예상태로 부터 구출한 백성들을 위한 삶의 방식으로서 이스라엘에게 토라를 주었다. 그후에 율법이 요구하는 순종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반응이라는 문구아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샌더스는 바울 당시의 유대교가 토라를 지키는 것을 가장 앞세운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에 참여하는 자격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표현하고 유지하려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유대교는 수 세대의 학자들과 설교가들 그리고 일반 기독교인들이 상상해왔던 '율법적인 행위로 의를 얻으려는 종교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결론이 가져온 충격과 그리고 루터파가 소중히 간직해왔던 많은 내용들을 명백하게 약화시켰다는 사실로 인하여 샌더스의 주장은 결과적으로 거대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게 된다.그러나 파이퍼는 샌더스의 주장이 기초하고 있는 제2성전 유대교의 자료에 대한 해석에 대하여 신뢰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같은 자료들로 부터 유대교가 율법적이며 행위로 의를 추구하는 종교였다는 사실을 주장할 수 있는가? 제2성전 유대교의 본문을 여기서 다룰 수는 없지만 나는 바울이 자신이 과거에 추종했던 유대교안에서 진행된 대화의 기초로서 '언약적 사고'라는 체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이 사고 체계안에서 토라의 위치에 대하여 광범위하게 진술하였다고 생각한다. 당시의 유대교가 직면하였던 핵심문제는 개인의 구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온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것이었다. 제2성전 유대교의 자료에 의하면 장차 하나님께서 언약에 대한 자신의 신실하심을 나타내실 것인데 그 때 이스라엘의 정당함이 인정될 것이며 장차 올 시대를 유업으로 받게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받게될 이스라엘은 오직 충성되이 토라를 지킨 이스라엘이 될 것이다. 토라는 이스라엘이 달고 있었던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식이었다. 신명기 30장은 토라 자체가 언약의 갱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약속을 간직하고 있다.

 

4. 정의들과 난제들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칭의는 바울의 서신 안에서 자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로서 사용되는 수많은 개념 가운데 하나이므로 이 개념 하나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특징을 적절하게 설명할 수도 없으며 그렇게 하는 것은  그에 대한 풍성한 성경적인 이해를 고갈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맥그래스의 이 말은 엄청나게 중요하다. 그의 연구 결론은 교회가 실제로는 바울이 말했던 관점과는 빗나간 각도에서 논의를 시작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어거스틴이래로 칭의라고 불려온 문제에 대한 논쟁이 복잡하기는 해도 궁극적으로 바울이 실제로 얘기했던 내용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는 주장을 정당화해준다. 맥그래스의 말대로 칭의 교리가 어거스틴 이래로 지향해온 방향이 있지만 바울을 바울 자신의 맥락에서 진지하게 읽게되면 그가 그와는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게된다. 칭의에 관한 바울의 이해는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말하는 구약을 통해서 확고하게 해석되어야 하며, 이 신실하심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붛활을 통하여 놀라운 방식으로 하지만 분명한 방식으로 확증되었다.

 

  그렇다면 칭의는 무엇에 대한 것인가? 현재 진행중인 논쟁에 있어 난점은 이미 맥그래스가 지적했듯이 칭의라는 단어에 인류를 자신과 화해시키려는 하나님의 행위전체를 묘사하는 책임을 부과해 왔다는 것이다.'의'를 가리키는 디카이오스 어근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인류가 구원을 받는다는 전체주제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체 사상 흐름의 외연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주장을 옹호하려 한다면 필연적으로 바울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온갖 부가적인 의미들을 발명하여 가져다 붙이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다카이오스 어근은 그러한 전체적인 사상의 흐름 내부에 하나의 특정한 측면 혹은 특정한 순간의 외연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법정이라는 맥락속에서 '의'는 어떤 의미인가? 법정이라는 맥락속에서 '의'는 그 법정이 누군가의 손을 들어주었을 때 그가 지니게 되는 상태를 지시한다. 주목할 점은 '의'는 이 지극히 중요한 법정이라는 맥락속에서 그들이 가지게 될 것으로 추정되는 도덕적인 특징 혹은 그들의 행동을 지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법정이라는 상황에서 '의'가 법정이 판결을 내린 후에 승소한 사람의 상태를 가리킨다면 우리는 어거스틴이 '의롭게 하다'를 '의롭게 만들다'로 해석한 것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그 오래된 문제를 일거에 날려버릴 수 있다. 어거스틴과 그 후계자들에게 '의롭게 만들다'가 의미하는 바는 칭의 안에서 하나님이 작고 예비적인 방식이기는 해도 그 사람의 인격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디카이오 '의롭게 하다'라는 동사를 분석해온 사람들이 정당하게 강조했듯이 바울 자신이 사용하는 이 언어의 핵심 의미는 그 말이 어떤 사람을 변화시키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어떤 상태를 부여하는 선언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것은 '칭의'라는 행위에 의해 변화되는 것은 그 사람의 상태이지 인격은 아니다.

 

  하나님이 가진 목적에 대한 바울의 관점은 창조자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하여 이 세계를 곤경으로 부터 구출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부르셨다는 것이다. 이엇이 모든 이야기의 기초이다. 이러한 사상이 바울신학안에 소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한다. 이것을 무시하는 순간 바울의 주장이 기초하고 있는 기반을 무너뜨리게 된다. 메시아 안에서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바울이 이해한 내용은 이 단일한 계획인 언약이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열매를 맺었다는 것이다.죄의 문제를 처리하는 것, 죄로부터 인류를 구원하는 것, 이모든 것이 창조로 부터 시작되어 이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된 단일한 언약의 목적이었다. 하나님의 계획안에 이스라엘을 위한 자리가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며 그 사실이 바울에게 핵심적이었다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제2성전기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목적이 자신들을 넘어서 전 피조세계에 이른다고 생각한 것은 언약적인 사고이다. 이 하나님의 목적의 촛점은 아브라함의 이야기에 있는데 특별히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수립하신 것, 창세기 17장의 할례, 신명기 27-30장의 언약적 축복과 저주에 나타나 있다 제2성전기 유대인들에게 이 아브라함 내러티브는 본질적으로 중단되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단원을 향하여 진행되고 있다는 인식이 있었다. 바울은 이런 인식을 공유하였으며 그가 그 내러티브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메시아 예수의 빛 아래서 그 이야기를 다시 해석한 것이다. 즉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루어질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단일 계획, 즉 언약이 대단원을 이룬 인물의 인격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본 것이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언약체결에 관한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언약'이란 단어를 '의'라는 단어로 대치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구약과 제2성전 유대교 모두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한 면밀한 주해가 기르키는 바는 '하나님의 의'의 의미는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함' 이 가장 유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언약적인 틀과 법정적인 의미의 틀은 어떻게 서로 딱 들어맞게 되는가? 그것은 언약의 성취가 하나님의 법정에서의 종말론적 심판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언약이란 세계를 바로잡으시려는 하나님의 선책된 수단이기 때문에 언약 역사는 법적인 틀 안에서 이해되고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종말론적이다.

 

  바울의 칭의교리는 종말론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다. 이 종말론은 법정과 언약의 차원과 밀접하게 한 세트로 묶여있다. 이 두 차원이 종말론 없이 이해될 수 없듯이 종말론도 이 두차원없이 이해될 수 없다. 바울은 당시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창조주 하나님의 단일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의 구속과 전 셰계의 궁극적 구출이라는 명백한 목표를 향해 전진하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바울은 기독교를 믿지 않은 동료 유대인들과는 달리 하나님이 세우신 그 명백한 목표가 메시아 예수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믿은 것이다. 요약하자면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온세계를 위해 하실 것으로 계획하신 그 일을 예수를 통해서 행하셨다고 믿었다. 하나님은 예수로 하여금 죽음을 극복하게 하고 장차 도래할 시대의 생명으로 나아가게 함으로써 그 일을 행하셨다고 바울은 믿은 것이다. 종말론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선언이며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성취된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법정은 예수가 옳았음이 인정되었다는 것이고 따라서 예수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옳았음이 인정된 것이다. 바울에게 종말, 언약, 법정은 셋이 아니라 하나였다. 어거스틴으로 부터 지금까지 그 위대한 전통이 가진 문제점은 칭의라는 단어가 미치 은혜에서 영광에 에 이르는 전과정을 설명하는 것처럼 사용됨으로써 바울이 칭의에 관해 실제로 말한 내용들을 가지고 터무니 없는 말이나 이단적인 내용 혹은 양자 모두가 되지 않게 하면서도 그 전과정을 설명하는 가능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 성실한 바울 해석자들로 하여금 고심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바울이 예수님에 대하여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사용할 때 그 안에는 메시아라는 유대교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때는 나단의 신탁에 나타난 다윗의 후손이라는 의미 그리고 예수가 처음부터 그 아버지와 함께 있었고 지금은 그로부터 보냄을 받은 존재라는 이 두가지 사실이 포함이 되어 있다. 또한 바울이 주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예수는 메시아로서 만물위에 높임을 받았으며 창세기1장과 시편8편의 내용처럼 태초부터 인류의 지위로 정해져 있던 피조세계에 대한 통치권을 획득한 분, 따라서 예수는 지상의 왕들이 모방하려고 했던 바 그 실체였으며 놀랍게도 야웨(YHWA)를 표상하는 경외의 단어인 히브리어 아도나이에 해당하는 퀴리오스를 의미하였다. 바울이 크리스토스로 메시아 예수를 지칭할 때 그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장구한 역사를 정해진 목적으로 이끌어 가는 인물이다. 이스라엘을 통한 세계를 위한 단일계획은 메시아안에서 그 절정에 이를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따라서 메시아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 메시아 안에서 집결되는 인물로서 그에게 적용되는 내용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메시아가 아브라함의 씨인 것은그가 하나님의 이스라엘 계획의 목적으로서 그 자신안에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이 메시아의 직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리지 못했던 순종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는데 단일계획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메시아의 신실하심을 통해서 세상에 드러났다는 것이다. 메시아의 신실한 순종은 메시아가 그의 백성을 대표하여 적절한 방식으로 그들을 대신하여 죽음을 자신이 감당한 것인데 메시아는 자기 백성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자기 백성을 위한 대속물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바울에게 메시아의 부활은 전체적인 새창조의 시작이며 예수에 대한 옹호였으며 그들 죽음으로 내몰았던 법정에 대한 분명한 정죄후에 선고된 칭의였다. 바울에게 부활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라는 의미였다. 이어서 바울에게 아들의 영, 메시아의 영이 메시아의 백성들에게 부어지고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이 그러한 존재라고 이미 선언한 그 존재로 실제로 변화된다. 이 사실은 성령과 떼어놓고 완전한 칭의교리를 구성하려는 시도에 경고를 던진다.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성령에 대한 믿음을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바울에게 예수의 메시아성은 그를 마지막 날의 재판관으로 자리 매긴다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이 최종적 심판이 믿음에 기초하여 내려진 현재의 칭의와 일치되는가 하는 것이다. 바울에게 예수의 메시아 이야기는 창조주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의 장구한 역사에서 종말론적 절정이었으며 기독교인의 정체성이 그 안에서 발견되는 내러티브였고 법정에서 우호적인 판결이 내려지는 근거였고 그리고 이 모든 것들에 더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강하고 압도적인 사랑에 대한 전적인 확인행위였다.

 

 

제2부 주해

 

1. 갈라디아서

바울은 어떤 한 곳에서 모든 것에 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그는 유사한 주제를 다룰 때도 그 때마다 약간 다른 각도에서 접근한다. 왜냐하면 바울의 서신들은 특별한 상황을 위하여 기록되었고 그 상황에 맞는 특정한 종류의 반박과 반응을 요구하는 특정한 공격과 질문들을 향하여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의 모든 내용은 그 서두인 1장 3-5에 다 들어있다. 하나님의 단일 계획, 종말론적인 틀, 그 안에 함축된 법정적 맥락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기독론, 이 모든 것은 찬양과 영광의 대상이 된다. 이후로 전개되는 내용은 모두 이 전형적으로 압축된 형태를 띤 인상적인 서두의 연설을 풀어낸 것이다.갈라디아 교회에서 사건의 발단은 메시아 예수안에서 가진 자유를 엿보기 위하여 몰래 숨어들어온 가짜 구성원으로 인하여 발생했다. 여기서 의미하는 자유는 이방인 기독교인이 이방인 기독교인으로서 남아있을 자유 곧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기 위하여 유대인이 될 팔요가 없다는 자유이다. 이 자유와 율법의 문제가 핵심단락인 2장 11-21의 가장 두드러진 내용이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사실은 바울이 처음으로 그리고 아마도 예리하게 이신칭의를 언급한 것이 바로 이 지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칭의교리를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방인 가독교인들과 식탁교제를 중단한 베드로의 행동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바로 선동자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강요했던 바로 그 내용과 동일한 것이었다. 바울이 주장하려는 것은 복음안에서 인종적 정체성이 해체되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했던 요소들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했다. 우리는 바울의 이신칭의 구절을 오직 이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맥락은 인종적인 경계를 넘어 함께 식사하는 것에 대한 금기사항의 문제와 직면해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롭게 되는 것은 값없이 죄의 용서를 받는다거나 하나님 앞에 옳다고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으로 인정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에게 칭의 개념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이라는 하나님 자신의 선언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이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메시아 예수의 구성원으로 신실하게 하나가 된다는 특정한 의미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런 맥락에서 사람이 의롭게 될 수 없는 율법의 행위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유대인이 이방인과 식탁교제를 하지 않음으로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분짓던 행위들이었다. 이것은 종교개혁 전통이 열렬히 거부해온 도적적인 선행들이 아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율법의 행위들로 의롭게 되지 않는다면 이제는 어떻게 의롭게 되는 것인가?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피스티스 예수 크리스투'로 시작되는데

이는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의 신실함을 통해' 의롭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메시아의 신실함이란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오래된 단일계획애 대한 그의 신실함이다. 칭의라는 사건이 발생케하는 도구이자 궁극적인 대리자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 신실함이다. 다른  말로 하면 메시아의 신실한 죽음이 하나님의 백성을 재정의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재정의가 적용되는 방식인데 그것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믿음이 하나님의 백성에 속한 표시가 된다는 것이다. 즉 율법의 행위들이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제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메시아의 신실함을 통하여 재정의 하셨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2장 17절의 질문과 대답 역시 16절과 마찬가지로 2장 11-14절의 상황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바울은 왜냐하면으로 19절을 시작하는데 이는 19절-20절이 이전에 말한 내용에 대한 더 상세한 설명임을 보여준다. 이 내용은 소위 '사적인 종교체험"에 대한 묘사가 아니다 바울의 요점은 메시아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일어난 사건이 토라에 의해 정의되는 옛 정체성에 대하여 죽고 메시아에 의해 정의되는 새 정체성으로 다시 사는 사건이라는 사실이다. 즉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의 백성을 재구성하여 그들을 토라의 지배아래에서 건져내어 하나님 자신이 새롭게 창조하는 세계로 데려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메시아는 하나님의 단일한 구원계획을 그 궁극적인 결말로 이끌어 가는 신실한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을 위한  메시아의 죽음에 함께 참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도출되는 중요한 결론은 '디카이오쉬네'가 어떠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지 도덕적인 특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란 점이다.

 

갈라디아서 3장 1절- 4장 11절은 본질적으로 위대한 하나의 주장으로 뭉쳐 있으며 그 안에 3장 6-29의 꽉짜인 구조가 속해있다. 이 단락 전체에 걸쳐 바울은 전세계를 위한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단일계획에 기초하여 주장을 펴고 있다. 그래서 모든 단락이 아브라함이 먼저이고 율법은 나중이며 이 연속적인 사건들을 완성하기 위하여 메시아가 왔다는 역사적 순서에 의존하고 있다. 그렇다면 메시아의 십자가 죽음은 도대체 어떤 문제에 대한 해답인가? 그것은 메시아가 신명기에서 지시한 바 우리를 위하여 나무에 달리는 저주를 받음으로 우리는 그 저주를 통과하여 반대편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여셨다는 것이다.그 반대편이란 이방인이 마침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편입되고 유대인은 믿음을 통해 언약의 갱신, 즉 약속된 성령을 받을 수 있는 갱신의 시대의 도래를 말한다.

 

 

2. 간주곡: 빌립보서, 고린도서, 에베소서

 

3. 로마서

 

 

4. 결론

  교리라는 것은 삼위일체 전체와 연관된 전 성경을 통해 확립되는 것이지 성경에 대한 불완전한 해석이나 어느 한 위격의 사역에 의지한 불균형적 설명에 의해 확립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고 성령에 대한 그림에 좀 더 촛점을 맞추어 보면 내가 언약신학이라고 언급했던 내용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언약신학이란 창조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족속을 통하여 전세계를 죄와 죽음의 저주로 부터 구출하여 새창조의 축복과 생명을 누리게 하시려고 아브라함을 불러 언약을 맺으셨다는 내용이다.하나님께서 전 세상을 바로잡으려고 마련하신 수단이 언약이며 우리는 그 언약안에서  지속적인 법정 은유를 발견하게 된다. 성경의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궁극적으로 세상을 바로잡으셔야 한다는 의미에서 판단을 하셔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역사의 한 가운데에 언약을 성취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안으로 이 판단을 가지고 오셨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죄의 문제를 처리하셨고 그의 부활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셨으며 그의 성령을 보내어 인류가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한 사람들 모두를 의롭다(무죄하다)고 공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개정판 서문]

2016-11-24 15:25:10


   나는 내가 이 책을 쓰게 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2007년, 존 파이퍼의 책 『칭의 논쟁』(The Future of Justification: A Response to N. T. Wright)이 출간되었을 때, 선도적인 미국의 설교자들과 작가들이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을 보고 우쭐한 마음도 들었지만, 파이퍼가 (그 책의 초안을 나에게 보내 논평을 부탁했음에도) 내가 한 말을 여전히 이해해지 못하는 것으로 보여 실망감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주교직으로 바빠서 시간을 내기 힘들었고, 나 자신이 시간을 따로 내 그 책에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파이퍼의 책을 언급하면서 마치 그 책이 관련 논란을 종식했다는 듯이 말하는 것을 듣고는, 말하자면 사람들이 여전히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이라 부르는 이 곤란한 주제(이제는 그 당시에 비해 덜 “새로운” 관점이지만)는 진정한 바울 복음을 왜곡한 위험한 내용이니 제쳐놓아어도 좋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서 남는 시간이 많지는 않았지만 무거운 마음으로 최소한 그런 태도에 대해 반응을 무엇이라도 보이는 게 낫겠다고 결정했다. 나는 이 책 대부분을 2008년 봄의 한 주 동안 집필했다. 그 후로는 책을 마무리할 더 이상의 시간을 내지 못하다, 램버스 회의(10년에 한 번 전 세계의 성공회 주교들이 모이는 회합)가 한창이던 7월의 한 주말에야 시간이 나서 캔터베리에 있는 한 교실에서 혼자서 이틀 동안 책을 완성할 수 있었다.

   너무 짧은 시간에 책을 집필했다는 사실(그리고 거기에 뒤따르는 필연적인 위험인데, 내가 원하는 만큼 세심하게 모든 내용을 풀어 설명하지 못했을 위험)은 그리 염려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바울에 관한 훨씬 더 긴 책을 구상하던 중이었고, 본서는 그 책을 미리 보여주는 각주 정도였기 때문이다. 2009년 가을에 가졌던 안식 기간에 프린스턴에 머물면서 그 거대한 책의 실질적인 개요와 부분적인 초고는 완성된 상태였지만, 막상 2013년 가을에 『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Paul and the Faithfulness of God)이 내 책상에 턱 하니 내려앉기까지는 내 직장도 바뀌고 이사도 하고 더 집중적인 연구도 진행하는 등 많은 일이 벌어졌다. 훨씬 더 거대한 그 책과, 그 책을 뒷받침하는 세 권의 부록(Pauline Perspectives, Paul and His Recent Interpreters, The Paul Debate)에서 나는 이 작은 책에 포함된 날카로운 논의를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맥락화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첫째, 나는 현재 북미의 칭의 논쟁이 바울 관련 논의나, 바울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해석하고 설교하는 최선의 방식과 관련된 논의 같은 더 큰 학문 영역에서 단지 한 주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했다. 둘째, 더 중요한 내용인데, 나는 바울이 칭의에 관해 한 이야기가 전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과 이스라엘과 맺으신 그분의 언약에 관한 바울의 더 큰 전체적인 이해 안에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 보여주려 했다. 이런 주장을 하려면 바울 당시의 유대 및 비유대적 배경을 자세하게 풀어 설명하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본서에서는 그런 설명을 제시할 여유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바울 서신에 포함된 관련 자료 전부를 세심하게 조사하는 작업 역시 이 책에서는 불가능했다.

   이 두 가지 맥락화에 관해 몇 마디 더 하는 게 도움이 될 것 같다. 첫 번째, “새 관점”으로 불리는 내용에 존 파이퍼 등이 보인 반응을 이해하고자 할 때, 반드시 신학적, 교회적 측면은 물론이고 문화적, 정치적 측면에서 북아메리카에서 벌어지는 더 큰 논쟁을 배경에 두고 이해해야 한다. “옛 관점”(이 관점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바울과 칭의에 관한 더 전통적인 해석에 붙인 이름)은 그보다 더 큰 하나의 꾸러미, 하나의 삶의 방식을 구성하는 요소여서, 옛 관점을 공격하거나 훼손하는 행위는 단순히 유명한 교리 하나가 아닌 그보다 훨씬 더 큰 어떤 실제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된다. 물론 이 말은 “새” 관점과 “옛” 관점 중 하나는 분명히 틀린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저 특정 사안이 쉽게 치명적인 논쟁거리가 되고 마는 더 큰 세상의 어떤 측면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특히 이 모든 논의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말인데, “새 관점”이라 부를 수 있는 어떤 단일한 일관된 실체라는 것이 애초에 없었다는 사실을 강조해야겠다. 사람들은 종종 샌더스(Ed Sanders)와 던(James Dunn)과 내가 마치 공동전선을 형성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의 집단이나 하나의 운동이었던 적도 없고, 함께 만난 적도, 함께 어떤 계획을 세운 적도 없으며, 서로 간에 늘 심각하고 의미심장한 의견 차이가 존재했다. 게다가, 그 후로 오랜 시간 동안 바울 학계에서도 수많은 일이 진행되었고 변화를 겪었다. 한편으로는 마틴(J. Louis Martyn), 다른 한 편으로는 믹스(Wayne A. Meeks)의 작품이 불러일으킨 매우 다른, 그리고 매우 중요한 논의들은 “옛” 관점이나 “새” 관점 어느 쪽에도 깔끔하게 들어 맞지 않으며, 그들도 이 사실을 다 같이 인식하고 있다. 더 큰 비전이 필요한 시점이다. 본서(나는 여전히 이 책이 핵심 요소 일부를 간결하고 날카롭게 진술한 중요한 책이라고 믿는다)는 내가 『바울과 그의 최근 해석자들』(Paul and His Recent Interpreters)에서 제시한 더 넓은 바울 학계의 논란을 배경에 두고 이해해야 한다.

   두 번째, 나는 더 많은 주해와 신학 작업을 통해 의견이 수렴될 가능성을 감지한다. 나는 특히 2010년 휘튼 신학학회(Wheaton Theology Conference)에서 발표한 밴후저(Kevin Vanhoozer)의 탁월한 논문을 언급하고 싶다. 그 논문에서 밴후저는 바울의 칭의 교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연합”이라는 더 큰 틀 안에 포괄하려고 시도하면서, 서로 다른 “편”에서 이야기해 온 다른 내용을 적절한 성경적인 균형 아래 포괄할 수 있는 하나의 틀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 내용이 바로 내가 개진하려고 노력해 온 입장인데, 내 이전 책들에서는 이런 입장이 그다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나보다. 그 입장이 이제 내가 『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10장에서 풀어 설명한 내용이다. 그 장의 구조 자체가 이미 핵심 내용을 보여준다. 그 장은 고대의 성경 및 유대교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교리가 메시아와 성령을 통해 철저하게 갱신되었음을 설명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칭의와 구원 양자 모두를 이해하는 최선의 틀이라고 주장한다. 그 장은 먼저 죽음까지 감당한 메시아의 신실함(피스티스, pistis)을 통해 달성된 구원의 업적을 다루는데, 이 사건은 복음을 통한 성령의 사역을 떠받치는 기반을 제공한다. 다음으로 성령의 사역을 다루는데, 성령의 사역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일으키시고 그를 메시아와 주님으로 높였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피스티스, pistis)을 낳고, 그 믿음을 공유하는 모든 사람을 메시아의 백성으로 구분한다. 이렇게 그 주장의 형태 자체에 중요한 이중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칭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며, 성령의 사역으로 인해 일어난다는 것이다. 많은 전통적 칭의 교리가 지닌 가장 중요한 오류는 이러한 주제들이 암시만 되어 있고 설명은 되어 있지 않은 로마서 1-4장을 가지고 완벽한 교리를 추출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이다. 사실은, 내가 다른 글들에서 자세하게 보여주었듯이, 칭의에 관한 설명은 로마서 5-8장까지 계속 이어지며, 이 5-8장에서는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이 모든 내용을 묶어주는 요소가 언약에 관한 신선한 이해다. 언약 역시 메시아와 성령을 중심으로 재고된 유대적인 틀이다. 내 주장에 관한 비판적인 논의 가운데 가장 강력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다양한 학자들이 반복해서 이야기했는데) 언약이 어쨌든 작은 부차적인 주제(어떤 작가는 “어리석은 하찮은 개념”이라고 표현했다)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적 약속이 메시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개념을 어떤 주제에나 가져다 붙일 수 있는 부가적인 내용처럼 치부한다. 솔직히 말해, 이런 반(反)언약적 충동의 기원이 어디인지 나도 확실히 모르겠다. 하지만 일부 루터주의자는 언약이 개혁주의의 개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언약에 의심에 눈초리는 보내는 반면, 오늘날의 개혁주의 사상가들은 (그들 자신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언약 개념이 계몽주의 이후 서구 기독교의 개인주의 중심이 아닌 공동체 중심의 하나님 백성 이해를 중시한다는 이유로 언약 개념을 싫어하는 듯하다. 늘 그랬듯이 여기서도 나는 전통보다 성경에 호소할 것이다. 이 성경 중심 원칙은 루터주의와 개혁주의 역시 주장하는 바다. 그리고 실제 논의가 벌어져야 할 지점이 바로 성경이다.

   결국, 세상의 창조주께서 세계의 문제를 바로 잡는 것(여기에 정의, 바로 잡음의 개념이 있다)에, 더 구체적으로는 그 일을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을 통해 하시는 것(여기에 언약 개념이 있다)에 전념하신다는 신념을 종합하기 위해 핵심 용어인 의(즉, 히브리어 어근 tsdq와 헬라어 어근 dikaios)를 사용하는 것은 결국 성경 자체다. 따라서 언약과 정의는 하나님의 목적에 관한 성경적 비전 안에서 불가분하게 얽혀 있어서, 이런저런 단어와 구절, (더욱더 중요하게는) 하나님의 체다카(tsedaqah) 혹은 디카이오쉬네(dikaiosynē) 개념을 중심으로 삼는 단락 전체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보통 이 단어에는 윤리적인 함의도 담겨 있었지만(당연한 이야기지만 특히 칠십인역의 디카이오스[dikaios] 어근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는 세계에서 사용되었다면 말이다), 그 의미도 한편으로는 “법정” 및 “정의”와 관련된 의미, 다른 한편으로는 “언약”과 관련된 의미를 배제한 의미가 아니었다. 사태를 바로잡는 법정의 직무와 올바른 삶을 촉구하는 윤리적 도전 사이에는 분명한 연관성이 존재하며, 고대 히브리 재판관에게는 소송을 공정하게 처리하고 무력한 자를 돌보는 등의 소명 같은 윤리적 차원이 존재했다. 이스라엘의 언약 헌장이 다름 아닌 토라였기 때문에, 언약과 사람의 행동 사이의 연관성도 마찬가지로 명백했다. 때때로 히브리 성경에서 윤리적 의미는 언약 위에 있거나 심지어 윤리적 의미는 언약을 배제한다는 주장이 시도되기도 하지만, 증거나 학자들의 논의들을 따져보면 윤리에도 “관계 안에 있음” 혹은 “올바른 관계” 개념이 강하게 들어있으며 성경에서 이 개념은 늘 기본적으로 언약 및 법정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다양하게 등장할 때마다 이 단어 “의”는 세심한 독자들로 하여금 그 굴곡지고 장구한 언약 내러티브로 시선을 돌리게 한다. 제2성전기의 유대인들은 신명기 27-32장과 다니엘 9장을 다양한 방식으로 동원해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유배가 초래되었고 그 유배의 시간이 오백 년으로 연장(다니엘 9:24)되었음에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셔서 사악한 나라를 심판하고 자기 백성을 신원하실 것이라는 내용이다.6) 바울이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의롭다 하실 것”임을 설명할 때, 그 의미가 통하는 맥락이 바로 이 내러티브가 보여주는 세계다. 사실 나는 칭의를 언약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에 대한 반대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단일한 긴 이야기가 그 목적에 도달했다는 개념 전체(나는 이것이 바울의 관점이라고 믿는다)에 대한 반대인 것으로 의심한다. 기독교의 다른 분파에 속한 많은 사람이 이와는 매우 다른 관점에서 성경을 이해하는 일에 빠져 있는 듯하다. 말하자면 그들은 마치 복음 안에 제시된 구원이 이스라엘의 이야기와는 별로 관계가 없거나 있어 봐야 먼 관계인 것처럼 접근한다. 부드럽게 표현하자면, 나는 이런 태도가 심각한 실수라고 믿는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곧 다시 이야기하겠다.

   이 맥락화의 또 다른 측면 역시 내가 파이퍼의 책에 반응을 보인 후 8년의 세월 동안 나에게 더 분명해졌다. 그 시간 동안 나는 하나님의 궁극적 미래에 관한 성경의 비전을 주제로 한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Surprised by Hope)를 집필했다. 그 책에서 나는 성경 자체가 말하는 궁극적인 미래는 물질을 벗어난 천국도 아니며, 육체를 벗어난 영혼들이 거주할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우리에게 약속된 것은 부활, 즉 “새 하늘과 새 땅”(요한계시록 21:1)인 새 창조 안에서 살아갈 갱신된 육체다. 이 사실을 지적하면 많은 사람이 놀라겠지만, 성경은 죽은 후에 천국에 갈 것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세상을 떠나 메시아와 함께 있는 것”(빌립보서 1:23)을 말하고, 예수는 “낙원”(누가복음 23:43)과 “내 아버지의 집”(요한복음 14:2)을 말하며, 요한계시록은 “제단 아래”에 있는 “영혼들”을 묘사한다(요한계시록 6:9). 그런데 바울과 누가, 요한과 (특히) 요한계시록에서 궁극적인 기대는 속량 된 인간이 새로운 육체를 입게 될 완전히 갱신된 창조 세계에 대한 기대다. 이런 이야기는 현재의 창조 세계에도, 현재 우리의 육체에도, 그리고 역사 자체에도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런 중요성은 다른 신앙 틀에서는 부여하지 않는 의미로서, (특히 미국의) 기독교 일부에서 나중에 휴거가 일어나 사람들이 하늘로 들려 올려질 것이라고 배우는 곳에서는 특히 그렇다. 휴거 관련 가르침을 이상한 잘못된 해석이라고 올바로 이해하는 곳에서도, 많은 사람이 여전히 신앙의 핵심은 단지 죽을 때 천국에 가는 데 있는 것처럼 말하고 노래하고 기도한다. 이러한 생각은 서구 기독교의 DNA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으며, 심각한 오해를 일으킨다.

   방금 언급했듯이 나는 이 모든 내용을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에 자세히 설명해 두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했던 내용이 있다. 궁극적 미래에 대한 대중적인 오해(본질상 플라톤주의의 관점으로, 무시간적이고 비물리적인 “영원”으로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개념)가 구원과 칭의에 관한 대중적인 잘못된 생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당신이 목적지를 더 확실히 알게 된다면, 여행을 시작한 방식에 대해서도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 내용은 지난 십 년 간 진행된 수많은 논의를 통해 내가 절실히 깨닫게 되었고 내 생각으로는 나와 존 파이퍼 사이의 논쟁 핵심에 근접한 요소일지도 모르는 또 다른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파이퍼가 대변하는 전통이, 그리고 마찬가지로 다른 전통들이, 구원에 관한 성경의 설명에서 칭의의 핵심은 새 창조를 위해 인류 전체를 구출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천국을 위해 영혼을 구출하는 것이라고 별다른 토론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이 내용은 인간의 곤경(구원과 칭의에 관한 성경 및 바울의 교리들은 이 곤경에 대한 해답으로 생각된다)이 소위 “행위 언약”(covenant of works)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는 신념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전의 책을 쓸 때 이 내용을 더 핵심적인 관심사로 삼았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내가 반박하려 했던 입장에서 이 내용이 굉장히 강력한 토대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이 내용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겠다.

   “행위 언약” 개념은 적어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대략 다음과 같은 줄거리를 가진 성경 내러티브와 관계가 있다. (나는 여기서 대중들 안에서 확인되는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당연히 전문적인 신학자라면 이 내용 중 일부를 다른 식으로 표현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는 것은 그 내용이 실제 교회에서 찬양 등으로 표현되는 방식이다.)  첫째, 하나님은 자신과의 사귐을 위해 사람을 창조하셨다. 둘째, 이 교제의 조건으로 엄격한 윤리적인 조항이 붙었다: 사람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규칙에 부응해 살아야 한다. 셋째, 그들은 실패하고 죄를 지었고, 따라서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단절되었다. 넷째,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셨고, 우리 나머지는 실패한 상황에서 예수는 그 규칙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순종하는 완벽한 삶을 살았고, 순종하는 구원의 죽음을 감당했다. 그의 죽음은 우리가 받아야 할 처벌에서 우리를 구출하며, 그의 완벽한 삶은 “의”로 여겨지고 이어서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는 우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님과의 사귐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예수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없었던 “행위”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렇다면 이 설명의 모든 지점에서 목표는 기준을 충족시키는 데 인간이 실패함으로써 망가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에 있다. 그 기준은 선한 윤리적 행동(행위)과 그 행위를 수행한 결과인 의로운 상태였고, 변함없이 계속해서 그 기준이다. 그런데 이제야 (우리 나머지가 아닌) 예수가 그 행위와 의를 제공한 것이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여전히 “천국”이다.

   솔직해 말해, 대체로 세속화되어 신을 믿지 않는 현대 사회에서 살다보니 나도 사람들이 하나님과 예수, 구원의 약속, 거룩한 삶의 윤리 등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보다는 앞서 말한 내용이라도 믿는 편이 훨씬 좋다. 또한, 내가 방금 제시한 모든 내용을 독실하게 믿으며 날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예수를 따르는 분들은 그들 자신도 복을 받을 것이며, 주변의 다른 사람에게도 복을 전할 것이다. 그런데 주변 사람에게도 복을 전한다는 바로 이 개념에서 우리는 이 구원의 틀 전체에 누락되어 있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지점에서 이 구원의 틀은 성경의 그림을 왜곡하고 있는데, 사실 “칭의”가 유일한 피해자인 것은 아니다. 이제 나에게 더 성경적인 대안으로 보이는 내용을 제시해보겠다.

   첫째,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이 주제는 성경의 다른 곳을 보면 “왕적인 제사장”(출애굽기 19:6, 베드로전서 2:9, 요한계시록 5:10을 보라)의 관점에서 설명된다. 바울은 이 표현 자체를 사용하진 않으나, 이 주제는 그의 서신에 강력하게 존재한다. 예를 들면, 로마서 5:17에서는 속량된 “왕 노릇”을 말하며, 로마서 12:1에서는 참된 제사를 드리는 것을 말한다.

   둘째, 달리 말해, 하나님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 사람을 만드셨다.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를 다스리는 대리 통치자가 되어, 그들 자신의 예배와 찬양을 통해 창조 세계 전체의 예배와 찬양을 집약해야 했다. 이것은 “행위 언약”이 아니라, 소명 언약(covenant of vocation)이다. (이런 내용에도 반대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주신 소명에 관한 성경의 비전에도 반대하는 사람이 일부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개념 자체가 마치 하나님이 실은 그들 자체로 그들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들을 동원하려는 목적 때문에만 사랑한다는 의미인 것처럼 이해한다. 이런 이해는 냉소적이고 부당한 반응으로, 이사야 49장 같은 본문으로 대응할 수 있겠다. 이사야 49장을 보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흘러넘치는 사랑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달성하시려는 비범한 목적에 압도당하는 게 아니라, 그 목적과 균형을 이룬다.)

   셋째, 그렇다면 인류의 죄는 그 모든 차원을 고려하면 단순히 하나님과 그들의 사귐이 깨졌다(물론 그것은 사실이지만)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하시겠다고 염두에 두셨던 목적들이 좌절되었다는 의미다. 피조물이 사람의 예배를 통해 창조주를 예배하고 사람의 청지기직을 통해 번성한다는 계획이 원래 계획대로 전진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어떤 면에서 그 계획은 여전히 전진했지만, 적어도 가시와 엉겅퀴로, 부패와 죽음으로 왜곡되어 버렸다. 실상 인류는 살아계신 한 하나님 대신 피조물에 속한 요소들을 예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들의 권세를 피조물들에 양도해버렸으니, 궁극적으로는 그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후대에 “사탄”이나 “고발자”로 불린) 어두운 세력에게 양도해버린 셈이었다. 따라서 복음이 하나님의 답변인 그 문제는 사람들이 종종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복잡하며 더 많은 측면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이 문제에는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과 죄에 합당한 처벌은 죽음이라는 사실도 포함된다. 하지만 이 내용도 더 큰 전체를 구성하는 핵심 내용에 불과하다. 그 전체적인 틀에 포함된 또 다른 요소로서, 악의 세력도 정복되어야 하고, 사람의 원래 소명도 회복되어야 한다.

   넷째, 신약의 나머지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바울에게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그저 좌절된 “행위 언약”이 제기하는 문제 정도가 아닌 이 복잡한 사안들 전체에 관한 답변이었다. 바울은 그의 구원론 중 많은 내용을 요약하는 로마서 5장에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사귐을 묘사하기 위해 제사장직과 성전 언어를 동원하는데(로마서 5:1-2), 이 내용은 로마서 8:26-27에 기술된 중재 사역과 12:1-2에 나오는 “산 제사”와 “영적인 예배”를 내다본다. 이어지는 로마서 5:17에서 바울은 의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의 “왕 노릇”을 이야기하고, 이 개념을 5:21에서 의를 통한 은혜의 통치로 더 풀어 설명한다. ‘의를 통한 은혜의 통치’란 이 표현은 이제 하나님께서 은혜롭게도 마침내 의롭게 된 자기 백성을 통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줄임말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내용은 로마서 8장으로 연결된다. 로마서 8장을 보면, 의롭게 된 백성에게 약속된 영광은 (대부분 주석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듯이) 천국이 아니라, (바울이 반영하고 있는) 시편 8:5-6이 말하듯이 주권적인 통치다. 하나님의 원래 목적에 포함된 내용처럼, 인류는 이 통치를 통해 다시 한번 창조세계를 돌보고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표로 그 세계를 인도할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행위는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같은 행위 관련 개념으로 포착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 자신의 독특한 “왕적인 제사장직”의 관점에서 요약하는 게 낫다(물론 이 개념 역시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말하자면, 예수는 인간의 죄와 그로 인한 치명적인 결과를 자신의 몸에 지셨고, 생명의 피를 흘려 자기 백성을 모든 부정함에서, 즉 죽음의 악취를 풍기거나 우상 숭배와 죄로 죽음을 부추기고 자초하는 모든 것에서 정결케 함으로써 악의 권세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는 관점에서 그의 행위를 정리해야 한다.

   다섯째,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의 마지막은 새 창조다. 즉 “새 하늘과 새 땅”이 영원히 완벽하게 하나로 합체하는 것이다. 더는 죽음이 없을 것이다. 속량 된 인류가 드디어 하나님이 늘 의도하셨던 그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공유하고 간직한 모습, 구출되어 왕적인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모습이 될 것이다. 당연히 이 모습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모든 사귐이 그렇듯이, 하나님과의 사귐도 목적이 있는 사귐이다.

   이처럼 구원 자체에 관한 성경의 관점을 크게 수정하면, 당연히 칭의에 관한 우리의 관점도 크게 수정될 수밖에 없다. 칭의는 적어도 바울의 사고 안에서는 여전히 그 비전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나는 이전에 쓴 책에서는 말하자면 아래로부터의 접근법을 취했다. 그래서 바울이 실제로 칭의에 관해 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에 주목하고 그 내용을 토대로 논의를 전개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든든한 배경으로 두고, 그 영역을 되돌아보면서 전체적인 더 거대한 그림을 스케치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내가 그동안 칭의에 관해 이야기해 온 모든 내용은 그 큰 그림 안에 포함된 것으로, 나는 내가 제시한 그림이 통상적인 설명들보다 훨씬 더 성경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이제껏 칭의와 관련된 내 작업을 달갑지 않게 생각해 온 사람들의 경우는, 내가 제시한 큰 그림이 그들이 그동안 진리라고 받아들여 온 통상적인 그림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인식했기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결국, 이런 책의 목적은 단순히 특정 교리에 관한 다른 관점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 목적은, 성경 자체가 우리의 일부 전통이 이야기하는 방식과는 미묘하게 다르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을 독자들에게 알려줌으로써, 칭의 교리의 의미가 제대로 드러나는 더 큰 성경적인 비전을 볼 수 있도록 눈을 열어주는 데 있다.

라이트(N. T. Wright)
세인트앤드루스 대학
2015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