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와 사도신경
하나님나라와 사도신경
2011-07-20 01:34:12
교회전통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면서도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신앙고백은 사도신경일 것이다.그렇다면 성경의 핵심 메시지인 하나님의 나라를 사도신경은 어떻게 반영하고 고백하고 있을까?
1.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이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믿는 고백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권능자이심을 믿는 신앙이 기장 근본적인 것임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믿는 것이 중요한데 사도신경이 이 첫 고백으로 시작된 것은 우리 신앙의 모든 출발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고 고백하는데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메시지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선포로 시작하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것은 그분이 전능하심을 고백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분이 바로 온 만물의 주인이시며 특별히 그렇게 고백하는 자신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주인이시며 왕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천지와 만물의 주인이시며 특별히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이심을 시인하는 믿음의 고백,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출발이며 모든 것이 아닐까? 결국 죄라는 것은 이 고백을 부인한 것이며 구원이란 것도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고 그분의 다스림에 순종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이 되어 다스리시는 하나님나라 사상의 근본이요 출발점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고백하는 신앙이 아닐 수 없다. 이 세상의 어떤 종교와도 구별되는 기독교의 독특한 신관이 바로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할 때 동시에 고백하는 자신은 그의 피조물임을 시인하는 것이며 이것은 동시에 하나님앞에 진정한 겸손을 표하는 것이며 인간중심적인 모든 종교의 거짓됨을 고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도신경이 창조의 사역의 주체를 오직 삼위하나님의 한 위격이신 성부께만 돌린다는 점이다. 이것은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창조사역을 하나님의 한 분 위격이 독점적으로 행하신 것이 아니라 삼위하나님의 공동사역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것을 창조사역은 하나님의 공동사역이지만 특별히 성부 하나님의 주도적인 사역이므로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하려 하지만 궁색한 변명으로만 들린다. 왜냐하면 사도신경의 고백은 성부의 사역, 성자의 사역 그리고 성령의 사역을 고백하는 삼위일체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그 첫 시작이 성부의 사역으로서의 창조사역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도신경은 분명히 창조사역을 성부하나님의 고유한 사역으로 고백하고 있음이 분명하고 이것은 사도신경의 성부론의 한계요 약점이 아닐 수 없다. 사도신경의 이런 고백은 성부하나님이 누구이시며 그 분의 독특한 사역이 무엇인지에대한 교회의 부족한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성자론이 전통적으로 교회신학의 주류를 이루었고 20세기 들어서는 성령론이 크게 대두되었지만 성부론이 제대로 논의된 적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제 21세기에 활발하게 나타난 하나님나라 신학을 위해서는 하나님나라의 주인이신 삼위일체 신학의 정립이 중요하고 그렇다면 특별히 그동안 소외되어 온 성부론에 대한 바른 신학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AND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그 다음에 사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긴 신앙고백을 시작하는데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사도신경의 가장 중심적인 고백인 것을 보여준다.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세가지로 고백하는데 그 첫째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로서의 아버지의 외아들로 그 다음은 그의 직분으로서의 그리스도 곧 메시아되심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분의 독자적 지위로서의 主로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로 오신 분이신데 인간 메시아가 아니고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신 신적인 분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신적인 메시아로서 세상의 주가 되신 분,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사도신경의 고백인 바, 이것은 예수님이 만유를 다스리시는 주인이시며 통치자이심을 믿는 고백인 것이다. 이렇게 사도신경은 예수님이 구약에서 기디리던 메시와이시며 세상의 주인이심을 고백함으로써 그가 하나님나라의 주인이라는 진리를 분명하게 선언해 둔 셈이다.
3.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GHOST, BORN OF THE VIRGIN MARY
여기서부터는 예수님의 성육신의 신비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그 신비는 두가지인데 하나는 그 분이 성령으로 잉태하신 분이시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동정녀의 몸에서 나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성육신이 보통출생법이 아닌 특별한 신적방법으로 인간이 되신 것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나라가 역사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만일 하나님나라가 역사초월적이라면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은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4.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예수님에 대한 세번째 고백은 그가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사실인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사도신경은 설명하지 않는 점이 특이하다.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는 간단한 내용이지만 사도신경이 예수님에 대해 고백하는 중요한
내용인 것이 분명하다. 바로 고난과 죽음은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후 행하신 첫번째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예수님에 대한 첫번째 고백인 주와 그리스도로서 그가 행하신 첫번째 사역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주와 그리스도로서 성육신 하신 분이 주와 그리스도로서 그의 사역을 행하신 첫번째 일이 바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사건이라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첫번째 사역의 의미는 단순히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사건이지 이전에 하나님나라의 주와 그리스도로서 그의 백성을 새롭게 창조하는 새창조의 사건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사도신경은 본디오 빌라도라는 인물을 구체적으로 거명하며 그가 예수님에게 고난을 주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장본인으로 지목하며 그것을 고백의 내용에 포함시켰다. 사도신경이 본디오 빌라도 라는 인물의 이름을 굳이 거명하여 고백에 포함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 공적인 책임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이 사건의 주도적인 인물은 사실 그가 아니라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아니었던가? 이렇게 보면 사도신경의 역사의식은 어느정도는 피상성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5.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시며
,DEAD AND BURIED.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사도신경의 예수님에 대한 네번째 고백은 그의 다시 살아나심이다. 장사한지 사흘만에 라는 수식어는 그의 죽음이 확실한 것임을 나타내려는 것이며 따라서 그의 살아남은 기적적인 사건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에 이 부활사건은 십자가 죽음 사건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로서 행하신 사역이며 이 사역의 목적은 하나님나라의 왕으로서 자기 백성을 새롭게 창조하려는 것이었다. 즉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요약되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결국 그가 다스릴 하나님나라의 백성을 새롭게 창조하는 사역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나라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자기 백성 창조사역이 그의 죽음으로 시작되었 그의 부활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6.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HE ASCENDED INTO HEAVEN, AND SITTETH on THE RIGHT HAND IF GOD THE FATHER ALMIGHTY
예수님의 승천사건은 그가 왕으로 등극한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가 승천하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은 이제 자기 백성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왕권을 가지고 다스리고 계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주와 그리스도로서 이 세상에 오셨으며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자기 백성을 창조하시고 이제 그분은 왕으로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고 계신 것이다.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의 왕으로서 현재적으로 자기 백성을 다스리고 계시다는 위대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 나라는 실재하며 그 나라의 왕이 그 나라의 백성을 다스리고 있다는 고백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가 죽어서 가는 극락세계가 아니라 현재 역사와 이 땅 가운데 실재하는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방식은 바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인 것이며 이것은 그 나라의 백성으로 왕이신 예수님의 통치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예수님의 왕되심이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드러날 것이며 그 때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 가운데 임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예수님 승천하사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우편에 앉아계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왕권의 출처가 바로 보죄에 앉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왕권인 것을 보여준다. 즉 예수님의 왕으로서 다스리심은 일종의 위임된 왕권이라는 사실이다. 영원한 神人이신 예수님이 취하신 왕권은 하나님을 대신한 왕권이 아니라 하나님이 위임하신 왕권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후 그에게 만물을 다시리는 왕권을 부여하신 것처럼 예수님에게 부여된 왕권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에게 부여된 왕권을 또한 그의 백성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활후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 라는 위대한 선언은 자신의 왕권이 위임된 왕권임을 보여주시는 것이며 " 이어진 대 사명 곧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삼위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 는 말씀은 자신의 왕권을 그 사도들에게 또한 나누어주신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7.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그것에로 부터 온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그런데 이 심판은 당연히 그분의 왕권의 행사인 것이다.
심판 사역을 왕권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스림의 가장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가 판단하고 재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심판의 주체는 예수님이 아니라 왕권을 위임하신 하나님 아버지이시며 예수님은 그 분이 하시는 심판에 참여하여 심판 사역의 일부를 위임받아서 하시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성부론의 요체는 바로 심판사역에 있음을 알게된다. 심판사역은 이버지 하나님의 고유한 사역이며 성자와 성령은 성부의 심판 사역을 집행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론의 요체는 창조사역이 아니라 심판사역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의 3대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이 신약에서 유월절이 성자사역으로 오순절이 성령사역으로 이미 성취된 것같이 장막절이 장차 성부의 심판사역으로 성취될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의 심판 사역에 대한 고백이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고백으로 긑날 것아 아니라 성부의 고유사역으로 고백되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이미 창조사역을 성부의 고유사역으로 고백하고 시작하였기 때문에 심판사역을 성자사역으로 국한시키게 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심판사역은 왕권 행사의 연장이지만 이것은 단순한 왕권행사가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심판이전까지는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서 통치권을 행사하셨는데 이것이 어느 정도는 제한적이고 소극적인 위임된 왕권의 행사라면 심판사역은 이제 전면적이고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왕권의 행사일 것이다. 심판으로 나타나는 왕권의 행사는 예수님에게 위임된 왕권의 행사가 아니라 이제 성부 하나님께서 나서서 직접적인 왕권을 행사하시는 것이다. 그 심판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시작되지만 그 심판의 주인은 예수님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심판 사역의 의미는 하나님나라의 왕권이 충만하게 드러나는 것을 의미하며 이제 위임된 통치가 아닌 삼위하나님이 왕이 되시어 직접 다스리시는 통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판사역은 하나님나라가 충만하게 드러내는 사역이며 하나님나라가 역사를 초월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8. 성령을 믿사오며
I BELIEVE IN THE HOLY GHOST,
이제 사도신경은 성자에 대한 고백을 마치고 성령에 대한 고백을 시작하는데 그 고백은 성자에 대한 고백에 비하면 간단하기 짝이 없다. 이것은 교회전통에서 성자론에 비하여 성령론이 매우 빈약했던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그분의 사역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교회는 잘 알지 못했다는 것이고 특별히 예수님의 왕적 통치가 성령을 통하여 시행되다는 것을 교회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은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16세기 종교개혁의 관심도 사실 성자론에 집중되었지 성령론에 대하여는 새롭게 더한 것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19세기 들어 오순절 성령운동으로 터져나온 성령에 대한 새로운 조명과 관심은 오랜시간 전통교회에 의해 무시되고 이단시될 수 밖에 없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도신경이 "성령을 믿사오며"라는 간단한 고백이라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9.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사도신경이 성자와 성령에 대한 고백에 이어서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는 고백을 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일 것이다. 왜냐하면 거룩한 교회란 성자의 사역의 기초로 세워진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며 그 교회를 실제로 이루시고 다스리시는 분이 성령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신경의 고백이 교회와 성령 사역의 관계를 얼마나 인식하고 이런 고백을 하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어지는 성도의 교통에 대한 고백은 사도신경이 성도의 교통을 거룩한 공회의 중요한 특징으로 보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거룩한 교회의 보편성은 성도의 교통으로 나타난다는 것일 것이다, 오늘날 현대교회는 가시적 교회의 보편성을 믿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개인구원신학으로 무장된 현대교회에서 성도의 교통은 교회의 중요한 특징으로 더이상 간주되고 있지 않고 그 중요성이 간과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거룩한 보편교회, 하나님나라의 가시적 공동체의 중대한 특징이
성도의 교통이라는 이 고백이야 말로 현대교회가 귀기울여야 할 진리가 아닐까?
10.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THE FORGIVENESS OF SINS
개인구원신학으로 무장된 현대교회라면 가장 먼저 나와야할 고백이 바로 죄를 사하여주시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죄사람의 고백은 성자사역의 중심 사역으로 고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신경에서 죄사함의 고백이 거룩한 보편교회와 성도의 교통에 대한 고백이후에 나타난다는 것은 현대교회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죄사함이 가시적 보편교회와 성도의 진실된 교통을 떠나서 초역사적이고 개인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강력히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소위 이신칭의라는 16세기 종교개혁의 교리는 신앙을 매우 개인적이고 초역사적인 차원으로 왜곡시킨 감이 없지 않다. 교회를 떠나서 공동체와 관계없이 오직 개인의 믿음으로 주어지는 죄사함이란 사실 성경의 교훈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리고 사도신경의 고백이 의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성자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 아닌 성령에 대한 믿음이 고백이후에 죄사함에 대한 고백이 나오는 것은 죄사함이 실제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성자사역을 적용시키시는 성령사역인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죄사함이 궁극적인 목적이요 기독교 신앙의 최고의 가치인것 처럼 오도되고 있는 현대교회에게 사도신경의 이 고백은 죄사함의 정당한 자리를 되찾아 주는 것이 아닐까?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게 하기 위한 것이고 죄사함이란 이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며 시작일 뿐임을 현대교회는 알아야 하지 않을가?
11.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THE LIFE OF EVERLASTING
사도신경의 마지막 고백이 부활에 대한 소망과 영생에 대한 확신으로 마치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특별히 부활에 대한 소망이 약화된 현대교회는 이 고백을 귀기울여 들어야 할 것이다. 다시는 죽지 않고 영원한 산다는 영생에 대한 소망은 몸이 다시 사는 부활의 소망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몸의 부활이 없다면 영생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는 마치 몸과 분리된 영혼이 극락왕생하는 곳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 사도신경은 그런 하늘나라를 알지못한다. 사도신경은 다시는 죽지않는 육체를 입는 소망과 그 육체를 가지고 영원히 사는 하늘나라를 고백하는 것이다. 역사를 초월한 하나님의 나라가 몸과 육체를 가지고 사는 것이라면 역사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찌 몸과 무관한 영혼 구원만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이 우리의 몸과 영혼을 함께 지으셨듯이 예수님의 성육신이 영혼과 몸을 가진 인간이 되셨듯이 하나님이 다시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몸과 영혼이 모두 구원을 받고 몸과 영혼이 모두 영원히 사는 나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