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하나님의 나라- 존 브라이트

메르시어 2023. 4. 29. 20:52

하나님의 나라- 존 브라이트

2011-05-18 13:47:31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살면서 험난한 세월을 보낸다고 한다. 좌절하고, 낙심하고, 두려워하고 암담해하는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 해결책은 하나님께 있으며, 믿음의 눈으로 잠잠히 기다릴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궁극적인 하나님의 승리는 곧 우리의 승리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 승리는 이미 얻은 것으로 우리에게 임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하였고 또한 임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다. 역사는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향해 흐르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사명, 개인의 사명은 오직 이 하나님의 나라의 전파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겠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삶의 자세가 더욱 요청되는 것 같다.

 

 

서문 

 

실제적인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 나라 개념은 성서의 메시지 전체를 포괄한다. 그 개념은 단지 예수의 교훈 안에서만 두드러지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형태로 - 적어도 우리가 그 개념을 신약성서의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다면 - 성서 전체, 즉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성(城)? (히 11:10. 참조, 창 12:11이하)을 찾아 여행을 떠났던 아브라함으로부터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계 21:2)로 끝나는 신약성서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기까지 성서 전체 속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는 것은 성서의 구원에 관한 복음의 핵심에 대단히 가깝게 접근하는 것이다.

성서의 통일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대답이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참되다는 것은 앞으로 진행해 나가면서 명백해 질 것이다. 신약성서 신앙에서는 모든 성서뿐 아니라 모든 역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 중심점을 찾는다. 이 책은 지금까지 언급한 문제들에 관한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 이 책은 성서의 복잡성은 결코 최소화되어서는 안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위적으로 강요되지 않은 하나의 통일 주제가 성서를 꿰뚫고 있다는 신념에서 쓰여졌다. 그것은 구속의, 구원의 주제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도록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사상, 그리고 거기에 수반하는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의 사상 주위를 맴도는 개념들 속에 부분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제 1장 하나님의 백성과 이스라엘 왕국

하나님 나라는 모든 유대인들의 어휘 가운데 들어 있는 말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이미 이해하고 있는 것이었고 또 간절히 고대하던 것이었다. 그 개념이 예수의 입술에서 급진적인 변화를 겪을 때, 그것은 이미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그리고 이러저러한 형태로 구약과 신약 모두 안에 편재하고 있었다. 그 개념은 하나님의 그 백성에 대한 통치라는 전체 사상, 특별히 역사의 마지막 때 영광 중에 나타날 그 통치와 백성에 대한 신념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이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나라였다. 신약성서가 예수는 그의 나라를 세우러 온 메시아였다고 선포할 때 우리는 즉시 구약성서로 되돌아가 이스라엘의 메시아적 소망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특별히 다윗의 혈통을 따른 왕이 오리라는 소망을 고전적 형태로 만든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는 모세 자신의 유산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스라엘의 소망의 시작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주전 13세기 후반부에서 시작하여야겠다. 당시의 세계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라메세스 2세의 긴 통치는 말기로 접어들었고 애굽 제국의 위대한 시기는 오래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위대한 라메세스가 죽자 그의 후계자들이 다스리는 가운데 애굽의 영광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애굽 사람들이 ?바다 민족?이라고 부른 이상한 떼거리들이 리비아로부터 침략 통로를 따라 애굽 땅을 압박하여 왔다. 비록 애굽은 자신을 구출할 수 있었지만, 내적으로 병이 들어 있었다. 끊임없는 전쟁으로 피를 많이 흘렸고, 군대는 더욱 더 용병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애굽을 수세기 동안 유지시켜 왔던 추진력은 고갈되어 갔다. 수세기 동안 팔레스타인은 애굽에 속한 지방이었으며 어떠한 정치적 통일성도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주전 1250년 이후 수십년 동안 심각한 재앙이 팔레스타인에 덮쳤다.가나안 사람들은 일련의 강습을 당해 결국 팔레스타인과 수리아 지방에 있는 그들 영토의 10분의 9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것이 여호수아서의 눈을 통해서 우리가 볼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유혈이 낭자한 전쟁의 이야기이다. 마을을 태우는 연기와 살이 썩는 아구치가 여호수아서 지면 위에 머물러 있다. 그 이야기는 이스라엘 종족들이 이미 동부 팔레스타인의 아모리 족속들을 물리치고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요단강 가에 자리잡고 있을 때부터 시작된다. 갑자기 그들은 발을 적시지도 않고 그 강을 건넜으며 나팔 소리에 여리고 성벽은 무너져 버린다 가나안 사람들의 마음은 공포로 녹아 내린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들이 누구였는지 알고 있었을까? 아마도 가나안 사람들은 그들을 그들 이전에 극소에 이주했던 다른 사람들과 같은 히브리인들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 사람들과 나란히 이스라엘 사람들은 함께 살아야 했다. 그러므로 팔레스타인 정복은 적어도 다윗에 전 영토를 병합할 때까지 계속된, 부분적인 흡수 과정이었다.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의 고향이 된 것은 그때였다. 이 정복의 극적인 양상에 대해 여호수아서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그 이야기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한 백성으로서의 그 역사를 시작하였다. 모세 종교의 정확한 성격은 물론 다루기 어려운 문제이다.

1. 이스라엘의 신앙은 여러 면에서 독창적인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은 유일신론적이었다. 한분 하나님밖에 없다. 그리고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는 명령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른 어떤 신을 섬기는 것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더욱이 이스라엘의 신앙은 반 형상적이었다. 즉 그들의 하나님은 어떤 형태로든 묘사되거나 형상화될 수 없었다. 제2계명의 말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어떤 고대의 이방 종교도 그러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이스라엘 신앙의 특징은 구약성경의 전체 증거와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점, 많은 면에 있어서 가장 놀라운 것이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은 그들의 하나님이 역사의 사건들을 지배할 수 있고 또 지배하였으며, 그 사건들 가운데서 하나님 자신의 의로운 심판과 구원의 능력을 계시하셨다는 사실을 믿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하나님 지식은 이스라엘 안에서 늦게 발전된 것이 아니라 아주 고대적인 것이다. 성서 기록이 뒤돌아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더라도 우리는 자연과 역사 위에 능력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가족들의 운명을 결정하시며 아브라함을 불러 그를 섬기도록 하신다.

2.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 보이지 않으시고,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자연과 역사의 통치자이신- 한분 하나님으로서 우리 앞에 서 계시며, 그러한 하나님은 고대 세계에서는 전적으로 독창적인 분이었다. 그들은 이 하나님이 역사적 행동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과 계약을 맺고 그들을 그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확신하였다.우리는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그들이 야웨의 선택된 백성이었다는 것을 믿지 않았던 때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애굽의 기억은 미래의 모든 시대의 국가 의식을 넘어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결코 잊을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의 예가 있었다. 거기서 하나님은 유아 이스라엘을 어린 아이처럼 인도하셨다. 거기서 그분은 계약 의식을 통해 이스라엘과 혼인하셨고 그들의 충성을 영원히 요구하셨다. 애굽에서의 기사와 표적들, 바닷물을 가른 바람, 바로 군대로부터의 구원, 이 모든 것들은 그 은혜의 예증들이다. 그것은 은혜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그들의 공적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출애굽은 스스로 한 백성을 선택한 후에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선택케 하려는 한 하나님의 행동이었다. 그러므로 시내산에서 맺어진 계약은 히브리 신학에서는 오직 은혜에 대한 하나의 응답으로서만, 즉 하나님의 hesed에 대한 인간의 hesed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3. 이 사상들은 굉장히 역동적이고 창조적이었다. 한편으로 하나의 깊은 도덕적 특징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자기 위치에 대한 이스라엘의 인식에 침투되었다. 모든 예언자적 설교가 여기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출 19:5). 멸망을 예고하는 예언자들의 설교와 그리고 종말론적 소망을 말하는 그들의 설교, 그둘 모두의 씨앗이 이 문장 가운데, 그리고 이 문장을 산출한 믿음 가운데 들어 있는 것이다.

특별히 그 계약은 hesed를 요구하였다. 즉 그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계약의 하나님께 완전한 충성을 드려야 했고 모든 다른 신들은 배격하여야 했다. 또한 그 계약은 계약 공동체 안에 있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지켜야할 계약법에 대한 엄격한 복종을 요구하였다. 그로므로 미래의 위대한 것들을 기대하는 것이 처음부터 이스라엘 신앙의 본질 가운데 들어 있었음이 강조되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이 역사 가운데서 그의 뜻을 펼치시는 여갓의 주님이라면, 그리고 그가 그의 목적을 위해 섬기도록 이스라엘을 선택하였다면, 그는 분명히 그 목적을 성취하실 것이다.

 

1. 팔레스타인에서의 초기 시절의 이스라엘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면에서의 국가가 아니었음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 반대로 이스라엘은 하나의 지파 동맹이었고 같은 하나님 예배를 중심으로 서로 느슨하게 연합되어 있는 연합체와 같은 것이었다.

지파들의 중심은 법궤를 모신 성소였는데, 그것은 이리 저리 옮겨 다니다가 마침내 실로에 안착하게 되었다(삼상 1-4). 축제일이 되면 사람들은 이곳에 오여 하나님의 임재를 찾았고,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충성을 새롭게 하였다. 위기가 닥쳐오면 야웨의 영이 급히 임한(삿 3:10; 14:6), 사사라고 불리는 영웅이 일어난다. 그는 주위의 지파들을 소집해 적과 대적한다. 승리를 얻어 그는 큰 명성을 얻게 되지만, 결코 왕이 아니었다. 이러한 유형의 권위는 카리스마라고 불려 왔는데 그것은 적절한 것이었다. 그리고 카리스마는 이스라엘의 원시적 신정 정치를 잘 나타내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은 그가 세운 대표를 통해 그의 백성을 직접적으로 통치하셨던 것이다.

2. 이 지파적 신정 정치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완고하고 끈질진 유형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의 지파 동맹으로, 한 종족절(초기 이스라엘과 같은 그러한 뒤죽박죽을 한 종족으로 부를 수 있다면)그리고 종교적 단위로 남아 있었으며, 그것은 결코 지형적 정치적 단위가 아니었다. 지도력의 원칙은 계속 카리스마였다.

3. 만일 새로운 위협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상황은 막연하게나마 그대로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 위협은 블레셋이었다.

블레셋 사람들은 카리스마를 새롭게, 그리고 심각하게 시험하였다. 이스라엘의 정복은 인간적으로 말해서, 가나안의 소 국가들이 연합된 저항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었다. 비록 삼손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국경 지역의 분쟁이 수 년간 계속되었지만, 삼상 4장에 나타나 있는 결정적 타격은 주전 1050년에 일어났다. 그것은 완전한 패배였다. 이스라엘은 분쇄되었다. 계약 동맹의 거룩한 상징인 법궤를 빼앗겼다. 그후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 심장부에 주둔하였고, 이스라엘은 무장 해제되었으며 전쟁 수행 능력은 상실되었다. 카리스마는 실패하였고 아웨의 백성은 부서져 버렸다.

4.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국가로 나아가는 쟨번째 단계가 이해진 것이다. 그것은 마지 못해

치해졌고, 실패로 끝났다. 이 긴장의 빛에서 볼 때 우리는 사무엘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사울의 후원자로 등장하지만, 그후 상당히 그를 꺼리게 되고, 사울이 제멋대로 행할 때 그를 버리고 그와 관계를 단절한다. 사울은 매력적인 인물이다. 장대하고 수려한 외모를 가졌으며, 뛰어난 용기를 가졌고, 겸손하였으며, 관대한 정신을 가졌다. 그러나 정신적 감정적 불안전성의 티가 있었으며 그것이 결국 그의 파멸의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사울이 길보아 전장에서 자상을 하였을 , 그의 모든 노력도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다윗은 그의 백성을 구원하고 극적으로 그들의 운명을 반전시키고, 그들을 그들이 꿈꾸지 못했던 영관의 절정으로 인도한 사람이었다. 사울이 죽었을 때 다윗은 블레셋의 동의롤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완이 되었다. 결국 이스바알이 제거되었을 때, 그는 전 이스라엘의 완이 되 다. 다윗과 함께 새롭고 다른 이스라엘이 출현하였다.

1. 다윗도 옛 전통에 속한 사람이었다. 즉 그는 카리스마의 살함이었다. 그의 혁혁한 공적들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야웨의 영이 그와 함께 한다는 증거였다. 다윗은 옛 질서로부터의 하나의 변화를 대표한다고 우리는 충분히 말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개인 군대와 자신의 정치적 총명함의 도움을 받아 하나의 선출 과정을 통具새 왕으로 추대된 카리스마적인 사람이었다.

2. 다윗은 왕이 되자마자 이스라엘을 완전히 바꾸는 과정의 행동을 취한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통일국가가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의 정책은 사울가에 대해 다윗을 내세워 ?분열시켜 통치?하는 것이었다. 이스바알이 죽고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되자, 블레셋은 곧 이스라엘을 공격해 . 그러나 승리는 다윗에게로 돌아갔다. 결국 블레셋은 정복되었고 이스라엘의 조공국이 되어 . 그후 그들은 다시는 심각한 위협이 되지 못했다.

다윗은 승리에 승리를 거듭했다. 국가를 통일할 필요성을 느끼고 다윗은 예루살렘을 새로운 소도로 삼는데, 예루살렘은 그때까지 비 이스라엘 도성이었으며, 어느 지파의 소유도 아니었고, 또 북쪽과 남쪽 사이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다윗성?이라고 불렀다. 뒤이어 그는 고고학이 보여주는 대로 그때까지 이스라엘에 대항하였던 다른 가나안 도성들을 하나 하나 정복해, 그들을 그의 국가에 병합시켰다.

 

3. 다윗의 정복으로 인해 전례 없던 경제적 번영의 기틀이 놓여졌다. 그리고 솔로몬은 그것을 이용할 줄 아는 천재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이제 애굽에서 북쪽으로 이르는 통상로와 뵈니게 해안 지방에서 내륙지방에 이르는 통상로, 그리고 다메섹으로부터 요르단을 거쳐 헤댜즈에 이르는 통상로를 지배하였다. 솔로몬은 동맹 정책을 시행하였다. 보통 동맹들은 결혼을 통해 맺어졌는데, 이 때문에 솔로몬의 아내들은 놀랄 만한 숫자가 되었다. 그의 모든 동맹들 중 가장 유익했던 것은, 이미 다윗 때 맺었던 두로 완 히람과의 동맹이었다. 그 가나안 국가는 (희랍 사람들은 뵈니게라고 부른다) 뵈니게의 재료들과 건축사들이 솔로몬의 건설 계획에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은 전무후무한 부로 넘치게 되었다. 애굽과 길리기아 사이의 말과 병거 무역은 왕궁 금고를 살찌우게 했다. 성서는 솔로몬 왕궁의 부와 호화스러움을 싫증 나지도 않는 듯 잘 말해 주고 있다.

 

야웨의 백성은 이스라엘 왕국이 되었고 다윗 국가의 시민이 되었다.

1.옛 질서 중 남은 것은 거의 없었다. 지파 동맹은 왕 중심의 국가에 길을 내주었다. 다윗이 그 땅의 가나안 도성들을 정복하여 그 주민들을 이스라엘의 구조에 병합시키고, 계속해서 여러 나라 말이 토용되는 제국을 다스리게 되었을 그러한 발전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2. 이스라엘은 생존에 급급하고 느슨하게 연합되어 있었던 지파 동맹에서 세계적으로 중요한 이미를 갖는 한 통일국가로 변화되었다 ?약속의 땅?으로 생각되었던 그 땅의 대부분이 이제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수중에 있었다. 이스라엘은 그것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문학과 문화가 번성하였고, 전례 없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주전 10세기경 이스라엘 사람이 되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다윗 국가는 잊을 수 없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운명은 이제 다윗 국가 안에서 꿈을 넘어 현실이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약속,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는 약속이 성취되었고 하나님은 그의 기름 부은 자의 통치하에서 평화 가운데 그의 왕국을 실제로 설립하셨다고 그들응 생가하였다. 어찌되었든 이제부터 우리는 ?다윗 사상?을 고려해야만 하게 되었다. 미래에 어려운 시기를 달하게 될 때 사람들 마음 속에는 다윗이 다스리던 그 ?좋은 옛 시절?을 바라보는 향수가 자라게 되었다. 다윗의 시대는 상실된 황금시대 그 이상이 되었다. 유다 사람으로서 앞으로 올 메시아를 다윗의 재생, 새로운 다윗으로 생각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다윗과 솔로몬이 국가의 종교적 감정을 시온산에 집중시켰을 때 이것 은 더욱 강화되었다. 솔로몬이 지은 거대한 성전은 단지 국가적 신앙의 집합소, 야웨가 지상에서 거하는 거처로서의 예루살렘의 명성을 보태주는 역할을 하였을 뿐이었다. 이스라엘의 모든 소망이 예루살렘으로 용접되는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3. 그러나 이것은 치명적인 위험을 가져왔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하나의 공적인, 국가의 지원을 받는 종교가 창설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존재할 때 곧 그 종교는 전적으로 국가를 섬기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국가를 신성시하게 되는 엄청난 위험을 수반하게 된다.

그러나 불가피하게 국가와 제의는 서로 통합되었다. 우리는 시온산 성소는 왕이 세운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다윗이 그것을 세웠고 솔로몬이 국가의 모든 부와 명성을 아끼지 않고 그것에 쏟아 부었다. 다윗 자시느이 아들들이 그곳의 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

미래에 대한 강한 신념, 이스랑레을 일이켜 약속의 땅을 향하게 한, 그리고 그들 영혼 속에 쓰여진 - 그들 자신은 몰랐을지 모르지만 - 손으로 만들어진 도성이 아닌 한 도성에 대한 환상을 좇게 한 그 신념은 예루살렘 성으로 만족하고 솔로몬이 제공하는 물질적 풍요로 만족할 것인가?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은 다윗 왕국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생각하고 그 다윗 왕국 안에서 하나님이 그의 왕국을 확립하셨다고 상상할 것이가?

그것이 이스라엘의 질문이었다.

제 2 장 심판에 처한 왕국

 

하나님은 참으로 그의 백성을 확립하셨고 그들을 위대하게 만드셨다. 이것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남겼다: 이스라엘의 모든 소망과 그들의 모든 운명 의식은 다윗 국가로 정의되었으며 그 국가 안에서 모두 성취된 것인가? 요컨대,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 왕국과 동일시될 것인가?

 

이스라엘의 유산은 특수한 것이어서 그들은 결코 그러한 동일시에 만족하여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1. 솔로몬이 왕권 밑에 권력을 강화하였을 때, 족벌정치, 정실 정치가 생겨남은 당연하였다.

대중 정서와는 단절된, 그리고 사람들은 몸과 정신 모두 소유될 수 있는 피지배자라는 사상에 물들은 특권층이 자라났다. 다윗은 정복한 사람들로부터 빼앗을 수 있는 약탈 물과 공물로 국가를 유지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솔로몬 때에 국가는 확장을 멈추었다. 아무튼 솔로몬은 그의 백성에게 무거운 부담을 안겼다. 의심할 바 없이 다윗의 인구조사에 근거해서 솔로몬이 그 땅을 재조직한 것은 그때까지 이스라엘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것들, 즉 세금 징수와 징병을 목적한 것이었다. 또한 솔로몬의 국가는 종교적으로 이스라엘의 이상이 될 수 없었다. 국가 종교에 대해 아낌없는 후원을 베풀었지만, 솔로몬 왕국은 이방 세계에 많이 적응하였고, 또 관대하였다. 물론 후손들은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를 위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은 것을 기억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 왕국은 상업 정책을 추구하면서 넓은 세계를 향해 문을 열고 많은 외국 사람들과 계약과 동맹을 맺었다. 솔로몬의 동맹들은 대부분 결혼으로 맺어졌고, 솔로몬은 그의 고귀한 태생의 아내들에게 예루살렘에 들어오자마자 그들의 고유 종교를 버리도록 강요하지 못했다. 그것은 참으로 아주 어리석은 정치였으리라!그 반대로 그는 국가적으로 그들 종교들을 후원하였다.

 

2. 어찌되었든 우리는 솔로몬의 국가에 대항한 폭력적 저항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는다. 그 왕국에는 긴장이 떠나질 않았다. 그러나 긴장은 계속되었으며 솔로몬의 억압 정책은 결국 그것을 폭발시켰다. 그러나 북쪽에는 그들이 다윗가로부터 심각하게 소외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폭 넓게 퍼져 있었다.

여로보암을 머리로 하는 북쪽 지파들이 르호보암에게 그들의 짐을 감해 줄 것을 요청하는 탄원을 냈다. 이것이 모욕적으로 거절되었을 때 그들은 왕국으로부터 탈퇴하였다. 역군 감독 아도람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

우리는 예언자 실로의 아히야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먼저 여로보암을 부추겨 그 모든 일을 하게 한 것을 기억한다. 요컨대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솔로몬 왕국을 이스라엘 운명의 성취로 볼 수 없었다.

 

3. 나라에 안정을 가져오기 위해 여로보암은 왕조를 창설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북쪽은 왕조를 원했던 것 같지 않다.

더욱 나빴던 것은 여로보암이 예루살렘과 경쟁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의 국가 제의를 세울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여로보암은 지파 동맹의 성스러운 법궤를 모셔 두고 있는 솔로몬 성전의 엄청난 명성을 인식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가 그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지 않으면 그의 백성들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베델에 경쟁이 될 성소를 세웠다. 그 성소는 (28절의 언어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의 성전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장식한 금송아지들은 우상이 아니라 - 예루살렘 성전의 그룹들처럼 - 보이지 않는 야웨의 보좌를 위한 받침대였다.

그러므로 북쪽 나라는 새로운 질서와 단절하는 데 있어서 전혀 성공하지 못했다. 다윗 왕조로부터 떨어져 나왔지만, 끊임없이 새 왕조를 창설하려는 시도를 멈출 수 없었다.

 

1. 그러므로 북쪽 나라에는 멸망할 때까지 옛 질서와 새 질서 사이의 긴장이 있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위험은 심각하였다. 우리가 가나안의 이방 종교를 더 알게 되면 될 수록 이것은 더욱 분명해진다. 이것은 가장 저질의 이교였다. 그 신들과 여신들 - 바알, 아스다롯, 아세라, 아낫 등 - 은 대부분 비옥함과 관계 있는 자연의 힘과 기능들을 나타내는 것들이다. 그것의 신화는 자연의 죽음과 재생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그것의 제의는 의식을 수단으로 자연의 힘들을 지배하여 땅과 짐승과 사람에게서 원하는 다산을 얻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모든 종교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남성과 여성 성창, 그리고 다른 가장 혐오스러운 종류의 퇴폐적으로 무아적인 종교 관행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야웨냐 아니면 바알이냐 하는 문제는 분명 사소한 것이 아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그것을 일종의 교파적인 싸움으로 보고 또 바알에 적대적이었던 그 예언자를 광적이고 편협한 사람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한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는 야웨가 그들을 불러 그들과 계약을 맺었고, 그의 의로운 율법에 복종해 살도록 불렀으며, 그리고 그의 백성으로서의 ldnsaud 의식을 그들에게 심어 주었다는 그들의 확신에 근거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와는 반대로 바알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바로 그 신앙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물론 바알의 위협은 이세벨로 인해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정복 이후, 즉 이스라엘이 처음 가나안의 우월한 물질적 문화와 직면하였을 때부터, 그리고 그 땅을 취하고 그 땅의 농경 생활방식, 그들의 도서으, 그들의 신전들을 취했을 때부터 줄곧 있어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이세벨이 가져온 위기의 중대함을 희석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그녀는 처음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힘으로 공개으로 이방 종교를 강요한 것이었다.

 

2. 엘리야는 길르앗 사람이었다. 즉 예 질서가 아직 살아 있는 사막 변두리 지역의 사람이었다. 그의 외모는 털옷과 가죽띠의 나실인 복장을 하고 있었던 세례 요한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는 아합과 그의 이교 국가, 그의 이교 왕비와 그녀의 이교 신에 대해 성전을 선포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기에 엘리사는 강한 지주와 같아서 사람들은 그를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라고 불렀다 - 즉 군단 병력과 견줄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 전통은 아주 국수적인 것이어서 외국의 방식들과는 결코 거래를 하려 하지 않았다.

 

3. 그러면 그 숙청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었고 하나님이 백성으로서의 그들의 운명으로 회복시켰는가? 아니다! 아무리 전체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정치적인 행동으로는 그러한 것을 이룰 수 없다. 더욱 나빴던 것은 그 숙청은 실제로 정화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바알로 넘어가는 것으로부터 구출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후는 이스라엘을 정화하는 데 진정한 열의를 갖고 있지 않았던 기회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바알 제의의 최고 여신의 상징인 아세라가 사마리아에 남아 있었다. 외국의 이교는 피를 말리게 되었지만 그 땅 존래의 다양한 종교는 방해를 받지 않고 번성하였다.

 

주전 9세기 후반부는 이스라엘에게는 어둠의 시절이었다.

 

1. 가공할 새로운 세계 강대국이 새로 무대에 등장하였는데 그것은 앗수르였다. 앗수르는 고대 국가의 하나였다. 853년에 살만에셀은 오론테스강변에 위치한 카르카르에서 시리아 팔레스타인 왕들의 동맹군을 맞게 되었는데 그들 중에는 위험을 앞두고 잠시 그들 사이의 싸움을 제쳐 두었던 다메섹의 벤 하닷과 이스라엘의 아합도 포함되어 있었다. 살만에셀은 늘 그랬듯이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 자랑하였다. 그러나 앗수르의 그림자는 여전히 서쪽에 드리워져 있었다. 805년에 앗수르는 되돌아 왔다. 이번에는 아닷 - 니라리 3세의 휘하였으며, 수 년 내 아람은 패배하고 그 정복자의 조공국을 전락하였다. 그가 전쟁을 일으킨 지 50년이 지났을 때 앗수르는 쇠약기에 접어들었고 그 동아 앗수르는 유프라테스강 서쪽의 전초 기지를 거의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섭리로 보였다. 즉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구하고 그들의 적을 벌하기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신 하나님의 도구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이기 문이다.

 

2. 어찌되었든 이것은 이스라엘의 재기의 신호였다. 요아스가 그것을 시작하였다. 그는 비틀거리는 아람을 덮쳐 세 번의 승리를 통해 그의 아버지 여호아하스가 잃었던 모든 영토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오랜 치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다시 영광의 절정으로 올려놓은 것은 여로보암 2세였다. 또한 솔로몬 이후 최고의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솔로몬이 접하였던 통상로는 다시 이스라엘의 수중에 들어 왔다. 홍해의 엘랏 항(에시온게벨?)이 회복되었고, 아마도 남쪽과의 해상 무역이 다시 번성케 되었다.

 

3. 그러나 솔로몬 때처럼 다시 사회가 병들었다. 그러나 지금의 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었다. 아모스서를 읽어보면 독자들은 모든 구절에서 사회의 분열을 읽을 수 있다. 돈으로 살수 있는 모든 종류의 사치로 가득 찬 전대미문의 부가 있었지만, 그러나 쓰리고 절망적인 빈곤이 있었다. 양심을 모르는 탐욕과 무절제가 있었다. 그리고 재산을 사람과 하나님 보다 위에 올려놓았다. 종교 역시 병들었다. 이것은 분명한 국가의 치명적인 질병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미래에 대한 자기 만족적인 확신이 번성하였다. 의심할 바 없이 이것은 영광스러운 국가의 국력에 대한 자부심으로부터 그리고 근시안적인 사람들이 그 이상을 보지 못하고 현재에 만족하고 있는 그 정치적인 상황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미래를 확신을 가지고 직시했고 그리고 감히 야웨의 날을 갈망하기까지 하였다. 왜냐하면 그날은그들의 승리의 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모스는 이 번영과 질병에 대해 말을 한 것이었다.

제사장이나 직업적 예언자가 아니었던 그의 유일한 자기 인증은 그에게 임해 선포하라고 요구한 야웨의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옛 사사와 같은 카리스마의 사람이었다.

 

1. 아모스의 메시지는 독자들에게 평범하고 그리고 스릴 있는 것으로 들린다. 그것은 고전적인 유리적 저항이었다. 그것은 고전적이다. 왜냐하면 아모스 이후 모든 예언자가 그것을 따를 것이지 문이다. 그러나 아모스는 사회악이, 부정직함과 탐욕보다 훨씬 중대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 사회악은 안락함을 인간 존재 위에 두는, 사치를 사랑하는 마음이요 사회 질서 가운데 짚이 자리 잡은 분열에 대한 무관심이었다.

그렇게 깨어진 사회는 종교로 치유될 수 없다. 모든 정의를 조롱하는 사람들의 종교는 아무리 번창한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사회는 비판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때였다. 그러나 기존 종교가 그 비판을 하지 못하고, 또 자기 자신도 비판하지 못하고 있을 때 저항은 기존 종교 밖에서부터 올 수밖에 없었다. 상태는 악화될 대로 악화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모스 메시지의 의도는 얼굴에 주먹 한 방을 날리는 것과 같이 평이한 것이었다. 모든 시대에 타당한 메시지였다고 주장할 필요도 없다. 명예보다 이익을 구하고 하나님보다는 생활 수준을 택하는 그러한 사회는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다. 사회를 꾸짖지 못하는 교회, 의로운 행동 이전에 아낌없는 지원을 요하는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고 가짜 교회일 뿐이다.

 

2. 아모스의 메시지는 거의 구제 받지 못할 파멸에 관한 것이다 .그가 회개를 요구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말했다. 그러나 회개를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 파멸은 확실하고 동시에 곧 이를 것이다. 이스라엘은 실제로 그들이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것에 대해 깨우침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 반대로 그것은 그들에게 하나의 고정된 사상이었다. 야웨는 그들의 하나님이고 그들은 그의 백성이다. 그러므로 야웨는 극들을 축복하셨고 계속 그렇게 하실 것이다. 야웨 자신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미래를 맞이할 수 있고 확신을 가지고 야웨의 날, 야웨가 역사에 개입하여 그의 적들을 심판하고 지상에 그의 통치를 확립할 그날을 기대할 수 있다.

요컨대, 계약과 선태그이 전체 사상이 기계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깊은 더덕적 특성은 얼룩졌으며 어두워졌다.

아모스는 계약에 대한 이런 기계화된 사상을 전적으로 거부하였다. 선택받았다는 것은 제 마음대로 사랑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고 아모스는 말한다. 그것은 이중적인 책임을 짊어지는 것이다. 은혜의 빛에 대항해 죄를 짓는 것은 악이요 가장 큰 범죄이다. 이스라엘을 포함해 모든 나라들이 동등하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 애완 국가도 엘리트 종족도 없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서 아모스는 사실 왜곡된 계약 사상에서 올바른 계약 사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에 불과하였다. 하나님의 백성은 계약의 하나님과의 결속으로 말미암아 서로 결합된 공동체이다. 아모스는 모든 탐욕과 비도덕성과 사회 불의를 계약의 하나님에 거역하는 범죄로 보고 액망한, 평범하고 단순한 계약의 사람이었다. 그는 사회 분열에 대한 어떤 치료도 제시하지 않았다. 단지 이스라엘 사회가 맨 처음 창조하였던 그 계약의 형제애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3,.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 사상에 대한 아모스의 엄청난 공헌이 나타난다. 아모스와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나라를 이스라엘 국가와 일치시키는 신성 모독적인 일이 그 전모를 드러내었다. 앞에서 말한 대로 그러한 동일시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왕국은 하나님의 질서가 아니고 그리고 비록 관용할 만하고 필요한 질서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질서와 조화되어야 한다는 느낌은 이미 옛적인 것이다.

때문에 아모스는 야웨의 날, 야웨가 역사에 개입하여 그의 통치를 확립하고 그의 적들을 심판할 날에 대한 대중적 갈망을 공격했다. 이스라엘은 그날로부터 기대할 아무런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자신이 야웨의 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모든 8세기 예언에 있어서 가장 충격적으로 새로운 특징이 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버릴 수 있고 또 버릴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아모스의 메시지를 한 마디 말로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이되지 않을까?: 이스라엘 왕국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이스라엘은 그 나라가 될 수 없고 또 그것을 물려받을 수도 없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라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조롱하고 계약의 형제애를 파괴하였기 때문이다.

4. 아모스의 말들이 옛날의 말들이라고 생각지 말자. 그것은 대단히 현대적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말해지고 있고 또 우리의 관심을 끌어당기고 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나라를 오랫동안 고대해 왔다. 그리고 어두운 날들이 그 소망을 더욱 간절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 우리가 고대한 것과 옛 이스라엘의 소망, 즉 하나님의 백성이 언젠가 그의 통치하에 확립될 것이고 평화와 번영 가운데서 살게 될 것이라는 소망 사이에는 별로 차이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아모스의 사회 고발이 어느 정도 우리에게 적용되는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 대답은 명백하다. 즉 그것은 오늘날에 도 전적으로 타당하다. 우리의 사회가 고대 이스라엘 사회처럼 아모스가 질책하였던 불의와 탐욕, 비도덕성, 쾌락 추구, 무절제와 같은 범죄들로 들끓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어떤 기술도 혹은 대단히 날카로운 양심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는 아모스가 이스라엘 왕국의 소망에 퍼부었던 우뢰와 같은 거부를 우리 사회에 직접2적으로 적용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기독교의 원칙들 위에 세워진 나라이다. 우리의 정치적인 제도들과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에 대한 우리 나라의 강령들은 그 원칙들로부터 자라난 것이다. 우리는 아주 많은 교회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교회들은 많은 활동적인 교인들을 가지고 있어서 분명 우리는 기 교 국가라고 주장할 수 있다. 우리의 사회는 지금까지 있어 왔던 어떤 사회보다도 살기 좋은 사회이다. 확실히 우리는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도록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이 정의로우신 분이라면 분명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지지하실 것이요 적들(그분과 우리의)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이다. 왜냐햐면 우리는 그의 선한 크리스천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 세계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 그리고 그의 왕국의 승리를 위해 노력하고 기도할 것이다. 지상적인 나라는,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이 보증하시고 그의 목적들과 동일시되는 그런 나라가 아니다 .아무리 선한 것이라 할지라도 지상적인 질서는 참된 하나님의 질서를 세우는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확립된 의로운 질서에 대한 소망을 갖기 전에 우리는 이스라엘처럼 우리의 질서는 하나님의 질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배워야 한다.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국가가 현명한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아모스는 정치적인 현실에 대해서가 아니라 도덕적 현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심판 선언은 유효하다. 즉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을 조롱하는 사회는 결국 그의 사회가 될 수 없고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인간 앞에 남 아있는 선택은 이것이다.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에 새롭게 들어가 그의 통치하에서 그의 백성으로서 사느냐 - 아니면 끝없는 역사의 심판이냐.

이스라엘은 야웨의 날, 하나님 나라의 승리의 날을 열망했다. 우리는 매주 이렇게 기도한다. ?나라의 임하옵시며.? 잘하는 것이다.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적절한 기도이다.

 

제 3 장 남은 자가 회개할 것이다

 

이스라엘 국가는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행동을 통해서는 결코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아모스가 선포한 파멸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찾아 왔다 .주전 8세기 후반에 전체적인 재앙이 이스라엘에 임했다. 북쪽은 완전히 파괴되고 남쪽은 갈기갈기 찢긴 채 남아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소망이 변형되고 결정적인 형태를 갖게 된 것은 바로 이 시대의 예언자들 - 특히 이사야 -을 통해서였다.

1. 이스라엘의 와해는 슬픈, 그러나 매우 짧은 기간이다. 746년 위대한 여로보암 2세가 죽은 2 25년만에 북 왕국은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져 벼렸다.

 

2. 국외 상황보다 더 위헙적인 것은 이스라엘 내부의 부패였다. 호세아서는 그것에 대한 가정 좋은 주석서이다. 그는 그때의 정치적 지녹상태, 권력을 위한 광란적 음모, 법과 질서의 붕괴, 더 이상 생명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무정부 상태를 생생하게 그린다. 더욱 나쁜 것은 마음은 종교적 신앙으로 청소를 하면서 도덕적으로는 완전히 부패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제사장들은 도덕적인 책망은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이 장려하고 부추기는 관습들을 통해 스스로 종교를 부패시키는 기회주의자들이었다. 참된 종교 안에 있는 교훈은 소멸되었고 그것과 함께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지식도 소멸되었다. 명백히 호세아와 그러한 나라 사이에 평화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호세아의 공격은 아모스의 공격과는 조금 달랐다. 같은 신학으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호세아는 다른 점을 지적하였다. 그의 공경의 목표는 우상 숭배, 바알 숭배, 배교였다. 이것이 그 질병, 모든 죄를 구성하는 그 죄, 그 국가 안에 있는 독의 자리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킨 것이고 그 나라의 모든 재앙의 원인이었다. 배교한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이스라엘을 그들의 하나님에게 묶은 계약의 관계에 대해 호세아가 사용한 공식이었다. 계약은 결혼 관계이다. 그 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결혼?하였고 그를 그의 ?아내?로 삼았다. 이스라엘이 행한 것과 같은 다른 신들을 숭배하는 것은 ?간음?이다. 그리고 만일 진지한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종말은 ?이혼? - 국가적 파멸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헤세드, 즉 하나님의 헤세드, 그의 계약의 사랑에 대한 적절하고 유일한 응답인 전적인 충성을 요구하였다.

그는 한 연약한 피조물과 결혼하였는데, 그녀는 그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창녀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때 괴로움 가운데서 호세아는 그의 고통을 통해 그가 말해야 할 것을 배우도록 하나님이 그에게 이 여자와 결혼하도록 명령하신 것을 새롭게 깨달았다.

비록 호세아는 어느 나라가 그 파멸의 도구로 사용될지 확신하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실은 도덕적으로 확실하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성취의 감격은 완전히 이스라엘 나라로부터 분리되었다. 호세아는 하나님을 믿었기 문에 그는 하나님이 달리 행하시리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인간의 헤세드는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헤세드는 결코 실패할 수 없다! 그가 이스라엘을 안전히 끝장내지 않을 것임은 바로 그분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문이다.

 

3. 이제 우리의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므나헴의 아들을 암살함으로 왕위를 탈취한 베가는 재앙을 향한 행진을 시작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반 앗수르 감정의 물결을 타고 왕위에 올랐고 그의 정책은 유다와의 전쟁을 촉진시켰다.

주전 733년에 그의 군대는 물밀 듯이 넘어 들어와 아람을 거쳐 이스라엘로부터 해안 지방은 물론 모든 갈릴리 지방과 요르단 지방을 탈취했다. 이들 지방들은 앗수르 제국에 병합되었다. 그 다음해에 다메섹이 정복되었고 그 지역은 앗수르 지방으로 병합되었다. 호세아는 곧 항복을 하고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쳤다.

주전 721년에 사마리아는 함락되었고 북왕국은 멸망하였다. 주민의 노른 자위는 - 27,290명 - 메스포타미아 윗 지방으로 끌려가 거기에서 결국 그들의 정체를 상실해 버렸다. 반면 바빌론과 그 밖의 지방에서 끌려 온 사람들은 사마리아에 남아 있는 주민과 뒤섞이게 되었다.

 

1. 이제 하나님 백성의 모든 소망은 유다에게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유다는 비록 물리적인 재앙을 피하였지만,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아하스는 그의 자유를 포기해 버렸다. 아하스를 구해 주고 앗수르가 취한 대가는 왕하 16:7-8의 언어가 분명히 밝혀 주듯 엄청난 것이었다. 아하스는 꼭두각시가 되었다. 또한 유다는 이스라엘을 파괴하였던 도덕적 부패에서 멀리 떠나 있지 않았다. 미가서를 읽어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는 이스라엘을 도살했던 그 칼이 유다도 넘어뜨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2. 아하스가 죽고 그의 아들이 히스기야가 그를 계승하였다. 그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 아하스가 앗수르에게 굴종하는 길을 택한 반면 히스기야는 독립과 국가주의 정책을 취했다.

아하스의 정치적 굴종이 종교적으로 혼합주의를 의미했던 것처럼 히스기야의 국가주의는 개혁으로 나아갔다. 종교적으로도 유다를 유다 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가 모든 이방 제의의 성물들과 고나습들을 제거하고 그리고 어는 정도 예루살렘으로 예배를 집중화시키려고 철저한 노력을 기울였음은 분명하다. 다윗의 보좌하에 이스라엘을 재건하려는 꿈이 포기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찌되었든 히스기야는 진지한 야웨 신앙자였고 이사야가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었다.

3. 그러나 사르곤이 죽고 그 아들 산헤립이 보좌에 오르자 유다 백성의 불같은 애국심은 더 이상 억제할 수 가 없었다.주전 701년에 앗수르 군대는 ?양 우리를 덮치는 늑대처럼 들어와? 무섭게 보복하였다. 성서와 산헤립의 비문들을 통해 알 수 있는 산헤립의 침략에 대해 많은 논란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여기에서 다 논할 수는 없다. 왕하 18-19의 이야기가 하나의 전쟁을 다루는 것인지 아니면 두 전쟁을 다루는 것인지 논쟁이 되고 있다. 앗수르의 거대한 전차들이 엄청난 힘으로 밀고 들어 왔는데 아무것도 그것을 말을 수 없었다. 예루살렘에 ?새장에 갇힌 새처럼? 갇힌 히스기야는 항복해 산헤립이 부과한 무거운 세금을 지불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결국 무조건적인 항복이 요구되었고, 그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었다. 히스기야는 싸우다 죽기로 결심하였다. 예루살렘은 절망적인 곤경에 처했다.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이사야의 태도는 참으로 놀랄 만한 것이었다. 그의 이전의 행동으로 볼 때 우리는 그가 ?내가 뭐라고 했느냐??라면서 항복할 것을 조언했으리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왕과 백성 앞에 용기의 탑으로 우뚝 선다. 그는 말한다. 용기를 가지라. 두려워 말라! 앗수르는 교만으로 하나님을 모독하였고 때문에 위축될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을 취하지 못할 것이요 두 다리 사이에 꼬리를 감추고 절름거리며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앗수르 진영에 ?여호화의 사자가 나가서? 많은 사상자를 냈다. 앗수르 군대는 물러갔다. 야웨는 참으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신 것이다! 자유를 위한 히스기야의 용기는 그의 백성에게 형헌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다 주었다.

 

놀라운 일이지만 메시아 왕국에 대한 구약성서의 소망이 가장 웅변적인 표현과 또한 가장 결정적인 형태를 갖게 된 것은 바로 이 용기와 괴로움의 때 - 어떤 소망도 단지 사치품으로 여겨질 수 있었던 때 - 였다. 이것을 우리는 특별히 이사야서와 미가서에서 볼 수 있다.

1. 이사야서를 읽어보면 독자들은 즉시, 거절과 파멸이 영광스러운 소망과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그것은 아모스와 심지어 호세아에서보다도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는 아모스 못지 않게 재산을 사람과 하나님 위에 두는 탐욕을 참지 못했다.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의 힘에 만족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삶을 처리하고자 하는 교만을 미워하였다. 그 교만이 바로 죄의 본질이다. 이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러한 행동을 용납치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만일 그들이 평이한 히브리어로 말해지는 그 교훈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그때 하나님은 그것을 앗수르 언어로 가르치게 될 것이다!

교만한 사람들에 임하는 야웨의 날이 가까왔다. 그의 분노의 손은 펼쳐졌으며, 그 손에는 징계의 매 - 앗수르 - 가 들려졌다! 하나님의 도움을 거부했던 이 나라에게는 애굽의 도움으로 자신을 구하려는 계획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전체적인 파멸을 선언하지 않았다. 그는 - 북왕국에 대한 아모스의 심판 선언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 그의 나라가 완전히 파괴되리라고 믿지 않았다. 그는 다윗의 계통이 계속될 것이라고 믿었고, 그 계통의 통치를 영원히 확립할 미래의 왕이 올 것을 기대하였다. 어찌되었든 하나님은 시온을 구할 것이다 - 왜냐하면 여기에 하나님의 백성이 있고, 하나님의 기름 부은 왕, 하나님의 왕국이 있기 때문이다. 후 세대에서 이사야의 말이 정확히 그렇게 이해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2. 예언자들이 국가적 죄에 대해 선포한 정죄분 아니라 그들이 가졌던 소망도 그들이 믿었던 하나님의 본성 그 자체에, 그리고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함께 묶었던 계약 관계에 대한 그들의 느낌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다. 만물은 그 창조주의 손 안에 있다. 역사의 사건들 가운데서 그분은 그의 목적을 이루어 가신다. 역사에서 발생하는 것들 역시 그의 것이다. 역사는 그의 승리를 향해 움직이고 있으며 그의 백성에 대한 그의 통치는 확실하게 확립될 것이다.

이사야는 더욱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 하나님을 그보다 더 대담한 필치로 그려낸 사람은 없었다. 그 하나님은 그의 소명 환상에서 본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이다. 그때 성전을 가득 채우고 또 성전으로부터 폭발해 성전을 뒤흔들었던 그분의 영광은 명백히 손으로 마든 어떤 성전에도 가두어 둘 수 없는 것이다.

히스기야는 정치적으로는 현명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용감하고 선한 사람이었고 전적으로 정죄만을 하는 것은 옳지 않는 그러한 사람이었다. 이샤야는 그 나라에는 ?거룩한 씨?, 분리해 낼 수만 있다면 하나님이 통치하실 수 있는 좋은 요소가 있다는 확신을 결코 잃지 않았다. 어두운 재앙이 다윗가를 잘려진 나무로 버려둘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그루터기에는 즙이 있었고, 그리고 그것은 언젠가 열매를 맺는 큰 나무가 될 ?한 가지?를 낼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그 나라에 대해 완전한 파멸의 심판을 결코 말할 수 없었다.

3. 남은 자가 항상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사야가 현존하는 국가나 그 안의 어떤 그룹을 하나님이 그의 통치를 확립하실 참 하나님 백성과 동일시할 수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다(이점은 거듭 강조되어야 한다).

확실히 남은 자와 정화에 대한 사상은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나온 것이다 .결국 다윗과 솔로몬의 영광 - 특별히 동경의 추억 속에서 이상화된 그 영광들 - 과 비교해 볼 때 히스기야의 왕궁은 하나의 남은 자, 한 가엾은 남은 자였다.

유다는 남은 자였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대로 이사야는 초토화된 그 국가를, 그 소망하던 ?남은 자?와 단순하게 동일시할 수는 없었다. 그는 계속 이어지는 전화 모두가 그의 백성을 정화하는 데 필요한 훈련이 되어 그들이 다시 하나님에게로 돌아올 수 있기를 희망하였던 것 같다. 이제 남은 자 thakdd은 그 실제 나라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남은 자는 하나님이 미래에 세우실 이상적 국가 안에서 그 실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소망은 현존하는 국가를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 미래적 소망은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향수적 응시와 연결된다. 언젠가 나오게 될 이 남은 자를 다윗 계통의 메시아 왕이 다스리게 될 것이다. 다윗의 시대는 이스라엘의 황금 시대였다. 그러므로 그 미래의 축복은 하나의 변형된 다윗의 통치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이사야의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사상?은 단지 ?다윗 사상?이 낳은 것으로만 설명되어선 안된다. 그것은 이스라엘 신학의 주류로부터 솟아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가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다윗 왕조 이데올로기를 사용한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현재 존재하는 국가를 훨씬 넘어서는 것임이 명백하다. 그것은, 모든 역사가 그것을 향해 움직이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거기에서는 정의가 통치할 것이요 평화가 깨어지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서 이스라엘은 마침내 모든 세상에 복의 근원이 되는 그의 운명을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이 그 왕국의 실제적인 통치자이다. 다윗 계통의 왕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며 그 영으로 통치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 자신의 카리스마의 사람이다. 그는 우리 앞에 사나운 전사로서가 아니라 한 어린 아이로 서 있으며,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그,의 통치 안에 세움을 받는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복종을 통하여 변화된 백성을 다스린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 성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왕국의 이미지는 변화된다. 그 왕국은 다윗의 변형된 시대가 아니라 잃어버린 에덴의 축복의 회복으로 묘사된다. 에덴 동산의 평화가 온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4. 이스라엘의 메시아적 소망은 그러므로 다윗 왕조, 예루살렘 그리고 성전에 확고히 연결되었으며 결코 없어지지 아니할 한 형태를 갖게 되었다. 그것과 더불어 아무것도 깨뜨릴 수 없는 강력한 신앙이 창조되었다. 우리는 우파으로 또 다른 하나의 인물, 볼품은 없지만 그래도 왕의 모습을 지닌,?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은 인물, ?나귀를 타고?을 낮은 왕에 대해 더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한 가지 점이 더 있다 즉 이사야의 남은 자 교리 가운데 하나님 나라 소망은 현저하게 국가 이슬라엘로부터 그 나라 안의 ?교회?로 옮겨가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물론 이샤야가 신실한 소수와 악한 다수 사이의 구별을 인식한 최초의 사람이었다고 상상할 수 는 없다.

우리가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신약의 교회는 자신을 바로 이 새 이스라엘로 이해한 것이었다.

 

우리는 대단히 현대적이어서 이사야에 대해서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도 듣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피라 수는 이성도 그 갈망은 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평화의 세계, 도덕적 세계질서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는 상호 상쇄하는 수천 가지의 방식을 통해 그것을 실현코자 노력한다. 왜냐하면 만을 우리가 그것을 성취하지 못하면, 혹은 최소한 극서을 닮은 것이라도 성취하지 못하면 우리는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우리가 잊어버린 것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을 말해준다. 도덕적 세계 질서는,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생각할 수도 없고 불가능한 것이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는 그들 아무도 해함을 받거나 상함을 얻지 않을? 그때는 참으로 올 것이다. 믿음은 그렇게 확증한다. 그러나 그것은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 때에 올 것이다. 사람의 평화는 하나님 나라이며 그밖에 다른 평화는 없다. 때문에 우리는 지금 현재의 우리의 상태로써는 그 평화의 지배를 산출할 수도 또 그곳에 들어갈 수도 없다.그러나 우리에게 좋지 않게 보이는 시대가 좋게 보이는 시대보다 더 유익한 목적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갈망하는 좋은 시대는 혼란과 괴로움으로부터 자유한 시대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안락과 풍요함을 누릴 수 있는 그러한 때이다. 우리는 그러한 때를 좋은 시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은 육체의 안락함이나 우리의 이익을 보존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참으로 그의 백성이 되도록 우리의 영혼을 훈련시키는 것이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참으로 그의 은혜에 의해서 지금 여기에서 그들은 그것을 이미 받았고 또 그 나라에 들어갔다.

 

제 4 장 깨어진 계약과 새 계약

 

주전 8세기 후반에 북왕국이 멸망했고 8세기에서 7세기로 넘어갈 즈음 유다는 산헤립의 손에 거의 전멸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당시 활동했던 예언자들을 통해 재앙의 혼편으로부터 하나님이 축복하실 한 의로운 남은 자가 일어나리라는 생생한 소망이 어떻게 발생하였는가 보아 . 이것과 더불어 우리는 영원히 지속될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대해 의롭고 평화로운 토레를 확립하실 다윗 계통의 왕 메시아가 올 것을 기대하는 고조된 열망을 관찰하였다. 이제 우리는 한 세리를 뛰어 넘어 - 너무 빠르긴 하지만 - 유다가 마지막으로 붕괴되고 예루살렘이 함락하는 시기로 넘어가야 하겠다.

 

1. 유다는 아숫르의 조공국이었고 그 상태는 100여 년 동안 지속되어 . 비록 히스기야가 자유를 위해 용감하게 깃발을 들었지만 유다는 전체적인 파괴만 잠시 유보되었을 뿐 결코 독립을 얻지 못하여 . 시스기야는 앗수르의 봉신으로서 생애를 마감하여 . 앗수르으 졸개였던 므낫세 치하에서 유다는 전례없던 배교의 늪으로 깊이 바져들었다. 이것은 단지 우연이 아니어 . 좋게 말하면 그것은 단순한 정치적 핑요성이었다. 왜냐하면 그대 세계에서는 정치적으로 종속되면 언제나 종주국의 신들을 최소한 명목적으로라도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열왕기서를 기록한 역사는 므낫세를 예루살렘에서 왕좌에 앉았던 사람 중 가장 악한 통치자였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그의 죄는 결코 용서될 수 없는 거승로, 그것만으로도 그 나라는 명망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선포한다.

2. 그러나 앗수르 제국도 겉으로는 강력하게 보였지만 건강한 상 항은 아니었다. 종속된 백섣들을 통제하기 위해 필요한 계속된 군사 행동들은 앗수르에 대한 증오를 증가시켰고 그 문에 앗수르도 피곤함을 이미 느끼기 시작했음에 틀림이 없다. 내부적인 긴장들도 있었다. 그것들 중 하나는 내전으로 발전, 재앙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제국을 뿌리부터 흔들었다. 아수르바나발의 죽음 후에 지나치게 피로해진 그 제국은 그 불가피한 결과를 더 이상 연기할 수 없었다. 앗수르는 쉽게 죽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칼에 의해 살았던 앗수르는 결국 칼에 의해 죽는 것을 택했다. 반면 유다는 요시야라는 어린이가 왕위에 올랐다. 배교자 므낫세의 손자였던 그는 그의 아버지 아몬이 암살 당하자 640년경 8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Ⅱ.

요시야 왕의 개혁은 이스라엘의 삶에 있어서 신기원을 이룩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1. 그것은 모든 종류의 이교를 철저히 정화하는 것이었다. 그 개혁은 성전을 수리하는 가운데 발견된 한 율법책에 의해 방향이 주어진다. 이 율법책이 신명기 법전의 어떤 형태였다는 것은 오랫동안 일반적으로 인정되어 왔다.

2. 우리는 이 상황에서 처음으로 예레미야를 만나게 된다. 요시야가 그의 정치 프로그램을 북쪽에까지 확대하였을 때 예레미야의 가슴에는 에브라임이 곧 양 우리 안으로 돌아오고 유다처럼 시온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리라는 생생한 소망이 생기기까지 하였다. 그것은 최소한 예레미야가 그 왕의 정책에 동정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그의 백성에게 계약의 관계는 단지 외적으로 회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는 제의적 율법 만을 분주하게 지키는 그들을 책망하였다. 그는 율법의 겉으로부터 율법의 심장으로 들어갈 것을 호소하였다. 예레미야는 국가의 멸망이 곧 끝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소망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없었지만 그는 소망을 잃지 않았다. 하나님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 5 장 포로기와 새 출애굽

참으로 포로기는 일반 백성들의 기대를 시들게 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신앙은 다른 때에도 그래왔던 것처럼 그 안에 생존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였다.

 

1. 포로기는 그 작은 나라에게는 전체적인 재앙이었고 유대인의 삶에 끼친 그 영향은 결코 최소화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 땅은 황폐되었다. 바빌론 사람들에 의해 파괴된 모든 요새화된 도성들과 예루살렘과 그 성전은 폐허로 남아 있었다.

2. 그러므로 바빌론의 유다 정복은 전체적인 재앙이었다. 나라는 멸망했고 사람들은 흩어졌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심각한 영적인 위기, 말하자면 신학적인 위기를 가져왔다. 국가와 성전의 파괴와 함께 일반 백성들의 자만심도 무너졌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상실하였다.

3. 그러나 이스라엘의 신앙은 그 도전을 상대하기 위해 일어났다. 이스라엘 안에는 남은 자가 있었다. 아무리 많은 다수가 그 신학을 오해하였을지라도 오해하지 않았던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포로기는 이스라엘 신앙의 무덤이 아니라 위대한 영적 생명력의 시기가 되었다.

4. 또한 외적인 요인들에 의해서도 기대감이 증대되었음은 의심할 바 없다. 561년 여호야긴이 감옥에서 석방된 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유대 왕국의 실제적인 재건의 꿈을 심어 주었을 것이다. 도한 바빌론 제국이 극도로 불안정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 소망은 더욱 불붙게 되었다.

구약성서의 위대한 예언 중 하나가 바로 이 상황 속에서 그 시대의 모든 절망과 또한 일깨워지기 시작한 소망과 더불어 선포되었다. 그것은 이사야서 후반부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적 신앙의 하나님이 마치 거대한 발걸음으로 걷듯 우리의 눈 앞에서 움직이는 것 같다. 즉 한 분, 전능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이 구속하시기 위해 움직이신다.

 

1. 고레스가 등장하여 바빌론을 붕괴시킨 것이 이 소망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2. 이스라엘은 새로운 출애굽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출애굽을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라의 시작으로 여겼다. 이 ?새로운 것?안에 모든 이스라엘의 소망들이 집중된다. 그 안에 다윗 형통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모든 기대들이 성취될 것이다. 그 안에서 예레미야와 에스겔이 고대하였던, 심령이 깨끗게 된 한 백성에 대한 기다림이 실현될 것이다.

3. 이것은 영광스런 환상이며 영광스런 소망이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적 영광에 대한 이스라엘의 꿈의 변형 그 이상의 것인가?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즉 오직 한 하나님 밖에 없다. 눈에 보이는 국가 이스라엘과 결코 동일시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 가운데 오직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에게 복종하는 사람들만을 복종시킨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승리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그 승리는 확실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역사를 지배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 과정의 마지막에 모든 세상에 대해 그의 지배를 확립하시는 것이 그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를 의미로 채운 이 승리의 신학의 빛에서 그는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그들의 운명으로 부른 것이다.

 

1. 종의 모습은 예언서 전체에 걸쳐 많은 곳에서 나타난다. 참으로 종은 그 자신의 생명을 다른 사람들의 죄악을 위해 희생제사로 드렸다. 그것은 완전한 굴욕이요 패배였다. 왜냐하면 고난은 그 사명을 성취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2. 죄는 속죄를 요구한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죄 없는 짐승의 피를 받아 주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면 죄인의 생명이 바쳐져야 할 것이다.

3. 그러면 그 종은 누그인가? 종의 모습은 개인과 그룹 사이를 오간다. 그 책 전체 많은 곳들에서 종은 단지 이스라엘이다. 그러나 항상 종은 개인적인 측면에서 묘사한다. 그리고 때로 이 인물은 명백히 이스라엘, 참 이스라엘, 이스라엘 안의 어떤 개인으로 묘사되는 그 모든 것들을 넘어서 한 이상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그는 말하자면 곧 시작될새 출애굽의 ?새 모세?이다. 그는 이스라엘이다. 그는 종된 백성의 지도자가 될 위대한 종이다. 이스라엘은 종을 따르고 그 종의 십자가를 지고 그 종의 구원의 사명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4. 고난은 단지 고난의 사명의 결과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승리는 종의 대속적 희생을 통해 성취되는 것이다.

 

종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구세주를 고백한다. 그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처음부터 줄곧 기독교 신앙의 주류에 속해 있다. 교회의 과업은 종의 과업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하도록 하자

 

제 6 장 거룩한 자치국과 묵시적 왕국

 

이스라엘은 선교적 사명을 다하는 수고로, 그리고 땅 끝가지 하나님의 통치를 확립시키는 그의 일꾼이 되려는 자발적인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이 땅위에 모든 나라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해야 한다.

 

회복기가 제2이사야가 확장시켰던 그 작열하는 약속을 성취시키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확실히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대로 고레스의 칙령은 그 성취의 시작인 것처럼 모였을 수도 있다. 그레스의 공식 정책은 피 정복 백성들로 하여금 그 제국의 틀 안에서 가능한 대로 자기 자신들의 삶을 살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고레스는 이 개화된 정책을 비빌론 사람들에게도 베풀었다. 어찌되었든 성전이 재건되기까지 20년 이사이 걸렸다. 이스라엘은 그의 운명으로부터 도망해서는 않된다. 아무리 그 일을 싫어한다고 해도 만국에 참 하나님을 선포하는 사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방인들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교는 결코 실제로 선교적 종교가 되지 못했다. 하나님을 위해 개종자들을 얻으려고 애썼던 신실한 유대인들이 많이 있었음은 틀림없지만 한 종교로서의 유대교가 개종자들을 만들기 위해 집중적인 노력을 하였다는 증거는 없다.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완전하게 참여시킨다는 사상, 그리고 그들을 얻기 위해서는 고난의 사명이 따른다는 사상은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포로기 이후의 예언은 점차 사라져 갔다. 그 대신 묵시 문학이라고 알려진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묵시는 ?계시?를 뜻한다. 특별히 그것은 위대한 종말의 사건들에 대한 계시인데 그 계시는 암호와 같은 언어에 담겨있다. 예언자들은 그들의 모든 종말론적인 소망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초점을 맞추어 현재의 죄를 공격하고 현재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현재 다가오고 있는 사건들을 통해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였다. 비록 다니엘서가 구약성서에 나오는 완전한 형태의 유일한 묵시문학이지만 그와 비슷한 경향을 보이는, 그래서 성격상 묵시문학적이라고 불릴 만한 많은 다른 저작들이 있다. 참으로 묵시문학의 핵심인 다가오는 종말에 대한 관심은 포로 이후시대 전체의 특징이다. 신앙은 본질상 끊임없이 그 성취를 갈망해야 한다. 좌절과 실망은 그 열망을 더 강화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현 상황이, 온 세상이 계속해서 모든 소망을 거부한다 하더라도 소망은 그 세상을 넘어가 하나님의 결정적인 개입을 기대하는 처절한 열망이 되었다. 현재의 상황이 절망적이기만 할 때, 악의 세력이 인간의 힘으로 깨뜨리기에는 너무 강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승리는 확실하다는 신앙이 살아 움직인다. 하나님은 역사의 사건들을 주관하신다. 그는 앞으로 임할 그 왕국의 하나님이시다. 또한 묵시문학 안에는 우리가 쉽게 무시해버리는 대단히 건전한 동기가 있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창조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신앙은 묵시문학 못지않게 중요한 또 다른 하나의 발전을 낳았는데, 즉 율법 준수에 근거한 거룩한 자치국의 건설이 그것이다. 계약이 백성에게 부과한 두 가지 중요한 의무는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것과 그리고 계약 공동체 안에서 계략의 법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이었다. 거룩한 자치국을 형성하는 데 한 몫을 담당한 모든 사람들 중 단연 뛰어난 사람은 서기관 에스라였다. 그의 사업은 긍정적으로 말해서 오경의 율법을 그 공동체에 그 존재의 헌장으로서 부과한 것이었다. 특별히 도성문에 세운 나무 강단에서 에스라는 율법책을 사람들에게 읽어 주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율법을 드높이는 일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율법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으로 주장되었다. 율법은 모든 일에 관해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진술하고 있다. 율법은 하나의 위대한 이상을 간직하고 또 표현하였으며 그리고 그것을 실제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시도하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그의 통치를 확립할 수 있는 하나님의 참 백성을 창조하고자 하였다. 율법의 목적은 규칙 자체를 위해 규칙을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목적은 곧 하나님이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참으로 묵시문학과 율법은 하나님 나라 사상에 있어서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역설을 가리키고 있다. 전자는 그 나라가 인간의 행함 너머에 있는 것임을 확증하고 후자는 그 나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모든 것을 요구한다고 대답한다. 즉 율법은 하나님은 오직 복종의 백성, 의로운 백성만을 통치하신다는 깊은 확신을 표현한다.

어찌되었든 낸담한 관찰자에게 율법 공동체는 편협되고 광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가장 심각한 시험을 겪게 되었을 때 그것은 그 안에 생존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4세기 말경 입장이 갑자기 바뀌었다. 그리고 바사는 혜성처럼 나타난 마게도니아의 알렉산더의 등장에 직면하게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3, 4년이 지나 그 젊은 영웅은 인더스 강둑에 서서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 울었다고 한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제의 제국은 역사 가운데서 가장 짧았다. 323년 잇수수에서 그의 대승 이후 10년이 지나 알렉산더는 사망하였다. 그의 제국은 결국 그의 네 장군들 사이에 나뉘어졌다. 몇 번의 변화가 있은 후 팔레스타인은 4세기 말경 톨레미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비록 셀류커스 왕조가 지배권 주장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또 그것을 차지하려는 노력도 포기하지 않았지만 팔레스타인은 백년 이상 톨레미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톨레미 왕가의 권력은 안티오커스3세가 셀류커스 왕좌에 올랐을 때 끝이 났다. 이 왕은 다시 팔레스타인 지배권을 주장하였다. 이제 유대인들은 안디옥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동양 전역에 걸친 헬라 문화의 파급, 이것이 이제 더욱 급속히 진행케 된 것이다. 유대교는 그 문화 충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그들의 히브리어를 잊고 희랍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었다. 예루살렘 거리에는 희랍사람들처럼 옷을 입은 사람들이 활보하였고 체육관에는 유대인 젊은이들이 모든 종류의 희랍 스포츠에 접하였다. 아티오커스는 알렉산더와 그 이전의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올림푸스의 제우스 신의 가시적 현현이라고 선포하고 자신에게 예배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유일신론적인 유대인들, 천여 년 이상이나 우상 숭배가 금지되어 있는 그들에게 제우스에게 절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제우스에게 제사드리는 것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그들의 자녀들에게 할례를 베풀었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죽음을 당했다. 처음에는 수동적으로 그러나 영웅적인 완고함으로 안티오커스의 요구에 저항한 사람들 중 유명한 사람들이 핫시딤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바리새파의 조상들이라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안티오커스의 정책에 대항한 사람은 제사장 마타디아스였다. 그는 아들들과 함께 게릴라전을 펼쳤다. 점차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그들의 깃발아래 몰려들었다. 계속해서 싸운 그들은 승리했다. 유다는 400년만에 처음으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아닌 하스모니안 왕조를 세운것이다. 그것은 음모와 살인과 이기적인 계략으로 가득찬 별로 사랑스럽지 못한 국가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싸워서 쟁취될 것이 아니다.

 

제 7 장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 메시아 예수

 

지금 우리는 구약성서에서 신약성서로 옮겨간다. 지금우리는 ?때가 차매?그리스도라고 불리는 나사렛 예수 앞에 서 있다. 하나님 나라라는 성서적 개념에 대한 우리의 논의는 정점의 국면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이 예수가 바로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메시아요, 그 안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소망은 성취되고 현재적 사실이 되었다는 것이 신약성서의 일치된 주장이기 때문이다.

 

신약성서는 그리스도를 중심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그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많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복음, 가장 초기 교회의 이 선포가 신약성서 안에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형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신약성서는 구약과 단절되지 않고 연결되며 모든 성서 신학은 서로 묶어진다. 예수는 메시아다 라고 확증하는 가운데서 신약성서는 구약성서 신앙이 갈망해 왔고 가리켜 왔던 모든 것이 그 분 안에서 주어졌다는 것을 확증하였다. 참으로 그리스도는 기존의 도덕성의 방향을 급진적으로 재정립하였다. 그러나 그는 단지 유대교에게 더 높은 윤리를 가르치기 위해 온 것이 아님을 거듭 강조해야겠다. 확실히 신약성서는 반복적으로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대조하고 있으며 새 언약을 더 좋은 것으로 선포한다. 구약 성서는 다가오는 왕국의 소망에 의해 조명을 받는다. 그리고 그 동일한 왕국은 신약성서의 심장에 놓여 있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승리는 항상 미래였고 참으로 종말론적인 것이었고, 그리고 언제나 미래 시제로 말해져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 우리는 변화를 만난다. 시제가 현제 서술형으로 되어 있다. 그 나라는 여기 있다. 그리고 그것은 참으로 대단히 ?새로운 것?이었다. 그것은 복음이다. 하나님이 이미 행동하셨다는 좋은 소식이다. 모든 신약성서 기자들에게 있어서 그 나라가 현재적 사실이었다는 것은 참으로 실제적이고 또 전적으로 중심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 들였지만 유대인들은 그를 그렇게 간주하지 않았다. 참으로 그들은 곧 바로 그를 거부하였고 그래서 그를 죽이기까지 하였다.

확실히 그는 로마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을 지도할 메시아, 혹은 유대인들의 지상 왕국의 통치자로서 등장할 메시아를 기대하였던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어찌되었든 그는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그의 메시아 주장을 날인하였다. 그리고 그의 십자가 위에는 결정적인 말이 걸려 있었다.?예수, 유대인의 왕?유대인 애국자들에게 있어서 그는 메시아가 아니며 그들이 과거 수 없이 겪었던 거짓 메시아 중의 하나였다는 증거로 이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 확실히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러 오지 않고 그것을 완성하려고 왔다고 선언하였다. 신약의 교회는 어찌되었든 일치된 목소리로 예수를 주님,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호칭하였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메시아 개념들을 취해서 스스로에게 적용하였다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는 그 개념들 모두를 고난의 개념으로 수혈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예수는 메시아 전통 속에서 특별히 고난의 종의 전통 가운데서 그의 입장을 확고하게 취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리스도는 가장 혐오스러운 사람들 가운데서도 선의 불꽃을 발견할 수 있었고 언제나 잃은 양을 찾았으며 결코 그를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 그렇게 인간적인 제자들에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내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거역하지 않으며??아버지여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하는 분을 본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이스라엘의 예언적 소망을 성취하였다. 그는 자신의 인격 안에서 구약성서가 예시하고 예고하였던 모든 것이 현실이 되었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종이 가장 참되고도 궁극적인 메시아 패턴이라고 이해하였다.

 

제 8 장 두 세계 사이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만일 예수가 어떤 의미로든 메시아라면 그는 이스라엘 신앙이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적 통치를 현실적으로 만들기 위해 온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참된 의미에서 지금 여기에서 현재적 사실이 되었다고 확인하는 것이 복음 메시지의 핵심이다. 예수의 인격과 사업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신약성서 신앙에 있어서 예수가 행한 기적들은 우연적인 것도 주변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의 인격에 필수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종말론적으로 이해되었다. 즉 그것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시대가 현재로 침투해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그것들 안에 있었고 그리고 이 시대의 악한 능력과 싸우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세상 속에 이미 들어온 능력이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그의 나라로 부르기 위해 오셨다. 그의 사명은 더 나은 더 영적인 윤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었다.

신약성서 윤리를 우리는 이 하나님의 나라의 부름의 빛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예수의 윤리는 하나님 나라의 윤리다. 그리고 예수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단지 그의 세대뿐 아니라 그 후의 모든 세대들까지도 그 윤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을 기대하였다. 즉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참 백성이라는 사실을 보이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가 세상 속으로 들어왔다고 선언하였으며 그리고 사람들을 그 나라에로 불렀다. 신약성서는 교회가 곧 계약의 백성임을 주장하며 또한 교회의 주님이 교회와 오래 기다렸던 새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진술한다. 이것은 참으로 신약성서의 핵심되는 주장이다. 교회가 참 이스라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그것은 모든 약속을 물려받을 상속자이며 그것의 승리는 아주 확실하다. 참으로 신약성서는 그 승리는 이미 쟁취된 것이라고 선언하기까지 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강력한 사업은 앞으로 올 시대의,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세상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신호하였다. 신약성서 교회는 앞서 말한대로 스스로를 그 나라의 백성으로, 앞으로 올 시대 안에 이미 살고 있는 ?존말론적인 공동체?로 보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미 현재하는 하나님 나라의 확실한 승리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다.

 

제 9 장 세상 끝날까지

 

하나님 백성의 성서적 개념,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하나님 나라의 기대를, 모세적 신앙에서 볼 수 있는 그들의 뿌리로부터 시작해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 . .?라는 신약성서의 끝맺음 환상에까지 추적하였다. 그리고 아주 역동적이고 창조적이 이 사상이 성서 말씀을 통일하는 주제라는 사실을 보이려고 노력해 왔다. 신약 교회는 지금까지 말해 온 대로, 이미 이루어진 것과 기다려지는 것 사이의, 죽어가고 있는 현 시대와 태어나려고 애를 쓰고 있는 새 시대 사이의 특별한 중간적 위치에 서 있다. 그러나 그 나라는 그 능력 가운데 와야 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래의 것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교회는 아주 잘 인식하고 있었다.

신약 교회의 설교는 때가 짧고 마지막 때가 왔다는 확신에 따라 강한 급박함의 성격을 지녔다. 그러한 급박한 성격은 결코 교회의 메세지에서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임박한 심판에 대한 느낌에서 솟아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말하고 선포하라. 그 복음이 무엇인지 어떤 의혹도 없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그것은 초대 교회가 오래 전에 종말의 급박함을 가지고 선포했던 구원의 복음이다. 어둥운 마귀 세력들과 그 심복들이 이 세상을 끔찍한 노예 상태로 가두어 놓았다. 그러나 좋은 소식이 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새 시대의 능력이 들어와 그 악한 세력을 움켜잡고 십자가에서 그것을 무찌르고 그리고 마지막 승리를 향해 나아간다. 이제 사람들을 불러 그 새 시대 속에서 살도록 하자!거짓 메시아에 의해 오랫동안 속임을 당하고 거짓 충신들에 의해 노예가 되어온 세상에게 교회는 고대의 구원의 복음을 선포한다. 교회는 성서의 소망을 가지고 그 소망을 단호히 세운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것을 세울 수 있는 그 밖의 다른 장소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역사의 목표로 그리고 인간 구원의 유일한 소망으로 선포한다.

이제 신약성서의 교회관은, 우리 귀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오히려 평범하다. 교회는?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이다. 참 교회는 새 이스라엘이고 또 새 이스라엘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실에 있어서 하나의 특별한 백성이어야 한다. 교회의 선교적 사명은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이다. 참으로 그것은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교회의 승리는 십자가의 승리이다. 이것은 또한 예수 자신의 의도 가운데 있는 것이다. 신약성서는 그 십자가가 패배가 아니라 전적인 승리였다고 확인한다. 믿음의 길을 걷는 자는 어두움에서 다니지 않을 것이다. 즉 미래의 승리가 그에게 현재적인 사실이 되었다는 신약성서의 신비를 이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