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도서 1장 사도의 사명
디도서 1장 사도의 사명
Tolle Rege/디도서
2013-10-19 17:56:55
언제 바울이 디도를 만났는지, 디도가 어느 지역출신인지는 알 수가 없다. 바울의 전도 여행이 기록된 사도행전에는 디도가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뭏든 디도는 헬라인이고(디모데는 소아시아 루스드라 출신) 디모데 다음으로 바울의 사역에 상당한 도움은 준 사람이다. 바울은 그를 데리고 예루살렘에도 갔고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듣기 위해 디도를 보냈고 고린도 교회의 연보 문제를 마무리하는 일도 그에게 맡겼다.
바울은 자기의 사도 직분의 목적을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 경건에 이르게 하는 진리의 지식, 그리고 영생의 소망, 이렇게 3가지로 말하고 있다. 굉장히 함축된 말이지만 여기에는 깊은 진리가 나타나 있다. 먼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이란 말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의 출발점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이 믿음에서 시작하여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왜 택하신 자의 믿음이라고 하였을까? 이는 아마도 하나님의 택하심이라는 초월적 요소는 믿음이라는 역사적 요소로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믿음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믿음이 먼저인지 하나님의 택하심이 먼저인지, 이것은 순서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는 초월적이고 하나는 역사적일 뿐이지 이 두가지는하나이다. 물론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이지 택하심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 교리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선택교리는 믿음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경건에 이르게 하는 지식이다. 경건은 하나님을 마땅히 두려워할 분으로 아는 정당하고 풍성한 신관이다. 이 경건에 이르기 위하여는 진리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신자는 믿음으로 출발하지만 경건에 이르러야 한다. 경건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은 실패한 믿음이다. 그러므로 경건에 이르게 하는 진리의 지식이 필요한 것이다. 그 다음이 역시 궁극적인 소망인 영생이다. 영생은 부활로 말미암아 사망의 권세가 무너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의 소망이 없다면 믿음도 경건도 다 헛것이다. 바울은 신자의 궁극적 소망인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영생의 약속은 갑자기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준비하신 약속이란 말이고, 그 약속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원전이란 하나님의 창조시를 가리킬 것이고 그렇다면 영생의 약속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죽어야 할 존재로 지으신 것이 아니라 영생하는 존재로 지으신 것이고 비록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망은 불가불 소멸되어야 하며 사망의 권세 잡은 마귀 역시 멸망당해야 하는 것이다. 이 창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영생의 약속을 하셨지만 때가 이르매 이제 그 약속을 복음으로 나타내셨고 바울은 자신이 바로 이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았다는 것이다. 바울은 동일한 믿음을 가진 디도를 참 아들이라 부른다. 바울의 제자가 모두 이방인 가운에 나왔고 그들을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단지 그들이 바울의 제자이며 연소하므로 아들이라고 부른 것이라기 보다는 아버지와 아들의 특별한 관계를 염두에 둔 호칭일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아들이란 아버지의 법적 상속자이며 아버지를 대신하는 법적 권한을 가진 자였다. 그러므로 바울이 디도나 디모데를 아들이라 부른 것은 그들이 자신을 이어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세우는 일을 계승할 복음의 상속자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은 디도를 그레데에 남겨두었는데 그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각 성의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함이었다. 그레데 사역은 사도행전에는 나타나지 않는데 아마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잠시 풀려난 시점에 이루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바울과 디도는 그레데에서 사역을 하였는데 바울은 그레데를 떠나야 했고 교회를 조직한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다도를 남겨두어 그 일을 대신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장로의 자격을 디도에게 가르치는데 장로(elder)와 감독(bishop or overseer) 이란 두 용어를 같이 호환하여 사용한 것을 보면 두 호칭이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교회 지도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장로의 자격은 가정, 성품, 사역의 3가지 측면에서 언급되고 있다. 먼저 장로는 한 아내의 남편( 일부다처를 반대하는 것임)이며 믿는 자녀를 둔 사람으로 제한하고 있다. 교회의 지도자는 가정을 잘 다스리는 자이어야 한다는 전제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은 장로 개인의 품성이며 하나님의 청지지로서의 덕목인데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않으며, 급히 분내지 않고, 술을 즐기거나 폭행을 하거나 부당한 이득을 탐내지 않고 나그네를 대접하고,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고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사역의 측면으로서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키며 스스로 먼저 본이되어 남들을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할 수 있는 자이어야 한다. 요액하면 모범이 되며 바른 교훈으로 권면과 책망을 하는 일, 이것이 지도자의 가장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직무이다.
바울은 특히 할례파(유대인 그리스도인)를 경계하며 그들중에 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으니 그들의 입을 막으라고 명한다. 이런 자들은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하지 않은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 자들이며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명령을 하는 자들이는 것이다. 특히 "그레데인들은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슴이고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는 자신들의 속담처럼, 그레데인들은 이런 자들에게 미혹되기 쉬운 사람들이니 (할례파를) 엄히 꾸짖으라고 바울은 명한다. 바울이 깨끗한 자와 더럽고 믿지 않는자를 대조하여 말하는 것을 보면 깨끗한 자는 복음을 믿는 자요 더럽고 믿지 않는 자는 복음을 믿지 않는 자(주로 할례파를 가리킬 것이다.)것이다. 바울은 깨끗한 자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고 말한다. 이는 아마도 할례파가 주장하는 유대교의 정결규례를 염두에 두고 복음을 믿는 자는 유대교의 정결규례를 따르지 않아도 다 깨끗하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더럽고 믿지 않는 자들은 아무리 정결규례를 행해도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럽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시인하지만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들이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하나님의 복음을 따라 행하지 않는 자들이니 바울은 이들은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않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들이라고 단언한다.
언제나 바울에게 초미의 관심사는 교회를 굳게 세우는 일이다. 교회를 지도할 장로의 자격을 예민하게 가르친 이유도 교회를 무너뜨릴 위험이 있는 할례파의 입을 막으라고 명령한 이유도 모두 목적은 하나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닦아 놓으신 터 위에 바울은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고 있기에 바울은 자나깨나 교회를 세우는 일을 마음에 두고 염려하고 기도하며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셨다는 소명 의식을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는 바울은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