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장 니고데모
요한복음 3장 니고데모
Tolle Rege/요한복음
2012-12-08 22:29:08
바리새인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유대인의 지도자가 밤에 은밀하게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아마도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특별한 선지자로 여긴 듯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생각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신 것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를 보지 못한다는 말씀은 니고데모의 영적무지함을 지적한 것이고 따라서 그는 예수님이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알지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나라가 거의 동일시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이 회개하라 하나님나라가 가까웠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나라를 임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선포한 것이다. 유대의 지도자인 니고데모가 "거듭난다"는 말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서 그 말은 유대인들에게 생소한 표현이었던 것같다. 예수님은 거듭난다는 표현의 의미를 물과 성령으로 난다, 혹 영으로 난다는 말로 설명하셨는데 결국 요점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람의 영이 새롭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으며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지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하였다. 이런 니고데모를 향하여 예수님은 짤막한 그러나 엄청난 계시의 말씀이 담긴 설교를 하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지만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한다고 책망하신다. 여기서 우리란 아마도 세례요한과 예수님 자신을 가리킬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말한 것, 증거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당연히 임박한 하나님나라의 소식일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나라가 임박하였음을 알았고 보았으므로 이를 증거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증거를 받지 아니하였다, 그것이 땅의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임하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하늘의 일이란 이미 하늘에서 이룬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할 것이다. 땅에 임하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증거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어떻게 이미 하늘에 이루어진 하나님나라를 믿겠는가 라는 반문이신 것이다. 오직 하늘에서 내려온 자 그러나 사람이신 예수님외에는 하늘에 이루어진 하나님나라를 알 자가 없는 것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높이 들어올린 것 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도 높이 들리울 것이다. 높이 들리운 놋 뱀을 바라본 자들이 생명을 얻었듯이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하실 것이다. 드디어 그 유명한 말씀이 등장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이 말씀을 일반적으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으로만 이해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몇가지 중요한 점을 간과하고 있다. 먼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왜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는가? 이런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창조목적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특별히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고 그에게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따라 지으신 사람에 대한 사랑이요 그들이 창조목적을 이루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의 표현이신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은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사람을 통하여 이루시려던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따른 사랑이고 창조목적을 이루시려는 사랑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려는 것이며 나아가 구원의 목적 역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는 것이라고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 다음에 그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는 말씀도 만약 하나님의 사랑을 일반적 의미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면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독생자를 믿지 않는 자들이 멸망한다면 독생자를 주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창조목적에 따른 사랑으로 이해한다면 독생자를 믿지 않는 자의 멸망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목적을 떠난 인간은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를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이 임할 것이다. 왜냐하면 빛이 세상에 왔는데도 오히려 빛을 미워하고 어두움을 더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빛을 미워한 까닭은 그 빛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악한 행위가 드러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회개를 거부한 것이고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다. 그러나 빛으로 나아오는 자, 그들은 진리를 따르는 자들이고 이러한 행위는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어서 요한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등장한다.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에게 그가 증거하던 예수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 간다고 보고하였다. 요한은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이 세례를 준다면 그것은 하늘에서 주시는 것이라고 말한다.요한의 자기 인식은 매우 분명하다. 그는 자신은 메시아야 아니라 그의 앞서 보내심을 받은 자이며 신랑의 음성을 듣고 기쁨을 누리는 친구와도 같으므로 예수는 흥하여야 할 분이시고 자신은 쇠하여야 할 자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자기인식에 비하여 그는 예수님을 하늘로 부터 오시는 이, 만물위에 계시는 분으로 증거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시고 하나님은 그에서 성령을 한량없이 주시므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신다. 그러므로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심을 증거하는 것이고 반대로 그의 증언을 거절하는 자는 하나님의 참되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위대한 분의 증거를 받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35-36절의 요한의 최종적 선언은 17-18절의 예수님의 선포와 동일한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17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였는데 35절에서는 하나님이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이나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신 것이 동일한 의미임을 짐작하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이 창조목적을 따른 사랑인 것이며 그 창조목적을 이루시려 독생자를 주신 것이듯이 하나님이 아들을 사랑하사 아들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다는 말은 바로 하나님이 사람으로 하여금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려는 창조목적의 성취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추기] 2014. 1. 24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너무도 유명한 구절이다.
그러나 우리는 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 방식이
독생자를 주시는 것이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을 말할 때 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못 박히신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을 말한다.
그러나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사랑만 나타난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엄청난 진노가 나타나 있다.
자기 아들이라도 아끼지 않고 버리시는 하나님
그리고 죄의 댓가는 오직 죽음뿐이라는 무서운 선포가
거기에 나타나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말할 때
죄인에게 분노하시며 결코 죄를 용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두려운 공의를 먼저 말해야 한다.
그 다음에
우리는 그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야 한다.
그래야지 십자가가 진정으로 복음이 되는 것이다.
전자가 우리의 회개를 요구한다면
후자는 우리의 믿음을 요청할 것이다.
이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비로서 그리스도와 연합된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를 위한 죽음이 되고
또한 우리의 죽음이 되는 것이다.
전자가 우리의 죄책을 해결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우리의 죄성을 해결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중생에 대하여 가르치시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누구든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회개하고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 아닐까?
[추기] 2019-11-06 17:30:39
요한복음 3장
니고데모는 왜 예수를 찾아온걸까? 니고데모는 표적을 보고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생각했고(2절) 그래서 아마도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찾아왔을 것이다. 그런데 니고데모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매우 뜻밖이다. 예수는 니고데모가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나라를 볼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 지적에는 예수가 보여준 표적이 바로 예수를 통해 도래한 하나님나라의 표적이라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 예수는 표적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보여줬지만 니고데모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니고데모가 표적에서 하나님나라를 보았다면 그는 예수를 그저 하나님께로 부터 오신 선생으로 알 것이 아니라 그가 바로 그 하나님나라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이심을 알아보아야 했다. 이어지는 예수의 지적(11절)은 니고데모의 문제가 단지 영적 무지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것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예수의 증언을 거부하는 완악함이었다. 예수는 표적을 통하여 그 나라를 증언했지만 니고데모는 그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11절)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백성들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었지만 정작 자신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예수의 증언을 거부한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자이면서 동시에 하늘에 올라간 자라고 말하면서 하늘에 올라간다는 말을 다시 부연하여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말한다. 요한 복음에는 "들린다"는 표현이 여러군데 나타나는데(8:28 ; 12:32) 그것은 예수의 죽음을 가리킨다. 요한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예수가 높이 들리는 것, 하늘에 올라가는 것, 영광스럽게 되는 것으로 표현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죽음에서 독생자의 영광이 절정에 이른다고 본 것이고 이것은 결국 1장 14절에서 말한 독생자의 영광속에 있는 은혜와 진리가 십자가를 통해서 충만하게 나타남을 의미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장대에 달아 높이 든 것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살게하려는 것이듯이 십자가를 통해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높이 들리운 예수를 보고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게되는 것이다.(14-15절) 하나님은 이렇게 세상을 사랑하셨고 그래서 독생자를 주심으로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셨다. 여기서 영생을 얻는다(15, 16절), 구원을 받는다(17절)는말은 앞에서 언급된 하나님나라를 본다(3절) 혹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5절)는 말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를 믿는다(15, 16절), 그로 말미암아(17절),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는다(18절)는 구절에서 믿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 모든 내용을 연결해 볼 때 그것은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하나님나라의 왕이심을 믿는 것이고 이것은 다시 말하면 그의 왕적 다스림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 영생을 얻는다든지 구원을 받는다든지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고 이것은 예수가 그 나라의 왕이심을 믿고 순종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인 것이다. 문제는 예수가 그 나라의 왕이심을 믿지 않을 때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17-18절) 왜냐하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1장 3절)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므로 그는 세상의 왕이시다. 그리고 그는 이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그 악행이 드러날까 두려워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19-20절) 그러나 진리를 따르는 자들은 빛으로 나아온다.(21절) 예수는 메시아다.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이 기쁜 소식이다. 그것은 메시아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나라가 도래한다는 소식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을 떠났던 이제 왕이 자기 백성에게 돌아오신 것이다. 그러니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그 복음은 구원이 되지만 복음을 거절하는 자에게 그 복음을 심판이 될 수 밖에 없다. 결국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에서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지만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나라의 표적을 보지 못하고 거부한 자로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예수를 위로부터 오시는 이,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 만물 위에 계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31절) 그는 친히 보고 들은 것(하나님나라)을 증언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에 대한)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다.(32절) 세례요한은 (하나님나라에 대한)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얼마나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신 줄을 확실하게 알게 된다고 말한다.(33절) 아들을 믿는 자(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믿는 자) 에게는 영생이 있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고) 순종하지 않는 자(예수가 왕되심을 거부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게 된다.(심판을 면하지 못한다) 요한복음은 분명히 예수가 메시아( 하나님 나라의 왕)이심을 믿음으로써 그가 다스리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구원을 받는다, 영생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