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마가복음

마가복음 14장 마지막 시간들

메르시어 2023. 4. 18. 09:59

마가복음 14장 마지막 시간들

Tolle Rege/마가복음

2013-06-03 23:42:17


  

  결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흉계로 잡아죽일 방도를 구하였다. 빛이 어둠에 비추었지만 빛을 미워하는 것이다. 드디어 주님의 십자가 사역의 날이 임박한 것이다. 저들은 악한 뜻으로 도모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룰 뿐이다. 유월절을 앞두고 에수님은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셨는데 이때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최대의 존경의 표현이었다. 사람들은 비싼 향유를 허비한다고 화를 낼 정도로 여자의 행위는 파격적이었다.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도울 수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여자는 엄청난 가치를 가진 향유를 거의 허비하다시피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여자의 행위를 다르게 평가하신다. 그 여자가 한 일은 결코 향유를 허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꼭 필요한 일을 한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세상에 있겠지만 주님은 더 이상 세상에 계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의 행위는 그 여자가 의식을 하지는 못했겠지만 결과적으로 주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온 천하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하여질 것이라는 뜻밖의 말씀을 하신다. 이 여자가 한 일 곧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은 일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전해질 것이다. 즉 복음과 함께 여자가 행한 일도 전파된다는 의미이다. 이 말씀은 의미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복음과 복음에 대한 정당한 반응을 의미하신 듯 하다. 복음이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여 베푸신 언약적 자비라면 향유를 부인 여인의 행동은 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복음에 대한 인간의 정당한 반응으로서의 언약적 충성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니까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여인의 한 일도 전파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혜와 그 은혜에 대한 인간의 정당한 반응이 복음 전파에 필요한 두가지 요소임을 가리킨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드디어 열둘 중이 하나인 가롯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에게 간다. 유다는 그들에게 돈을 받고 자기 선생을 팔아먹을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때는 무교절의 첫날이었다. 이때 유월절 양을 잡는 날이었고 주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셨다. 이때 가롯 유다도 함께 식사자리에 있었는데 주님은 유월절 식사자리에서 제자들 중의 하나가 주님을 팔 것임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한 그릇에 빵을 적시는 자가 바로 그라고 지목하셨다. 이것은 유대의 회개를 촉구하신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말씀을 유다 앞에서 하실 이유가 없다. 그러나 주님은 인자가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죽음의 길을 갈 것이지만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니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않았더면 좋을뻔 하였다고 탄식하신다. 인간의 사악함 그러나 그 사악함 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된다는 무서운 진리가 섬뜩하게 느껴진다.  주님은 유월절 식사자리에서 그 유명한 성찬예식을 제정하셨다. 주님은 빵을 들어 자신의 몸으로 잔을 들어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자신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유월절 식사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를 사용하여 임박한 자신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계시하신 것이다. 주님이 주시는 빵과 포도주를 받아먹는 제자들은 이제 더이상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주님이 그들을 위하여 내어주시는 주님의 피와 살을 받아먹고 있는 것이다. 빵과 포도주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 것이다. 늘 일상적으로 먹는 식사가 육신의 생명을 주듯이 주님의 살과 피로 변한 빵과 포도주는 영혼을 살리는 영적 식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의 피를 가리켜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언약적 죽음인 것을 의미한다. 그 죽음이 언약적 죽음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는 십자가는 하나님의 언약적 자비를 나타내시는 것이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언약적 죽임이다. 두번째는 십자가는 언약을 배반한 자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하나님의 언약적 공의의 나타남이므로 언약적 죽임이다. 세째는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하나님과 인간간의 깨어진 언약관계가 회복되므로 주님의 죽음은 언약적 죽음이다.  주님은 덧붙이시길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때까지 다시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단언하신다. 이는 주님이 흘리시는 언약의 피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 완전한 피이므로 언약의 피를 또 다시 이 세상에서 흘릴 필요가 없음을 확언하신 것이다. 그만큼 주님의 언약의 피는 우리로 하여금 온전히 하나님앞에 나아가게 하는 피임을 의미한다.

 

  유월절 식사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올라가셨다. 주님은'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스가랴서의 예언을 인용하여 이제 주님이 잡히실 때가 임박하였음을 나타내신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난 후에는 제자들 보다 먼저 갈릴리고 가시어 제자들을 만날 것임을 말씀하신다. 베드로는 이 말을 듣고 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찌라도 자신은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가 오늘밤 닭이 두번 울기 전에 세번이나 주님을 부인할 것을 말씀하셨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하였지만 그것이 인간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제자들은 아직 알지 못하였다. 겟세마네라는 곳에 이르러 주님은 기도를 하시려 하였고 제자들에게 기다리라고 하신다. 기도하러 가실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대동하고 가셨는데 이때 주님의 마음은 심한 고통과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의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을 지경이라고 하신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나타나는 주님의 이런 모습은 그 분이 진실로 우리와 동일하게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셨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주님은 이 고통의 때를 겪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신 것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 죽음의 잔을 옮겨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었다. 그것이 주님의 뜻이고 소원이었다. 그러나 기도의 결론은 자기의 뜻대로 하지 마시도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한바 죽기까지 순종하신 주님의 모습이었다. 아담이 선악과를 통해서 배워야 했던 순종이 바로 이것이었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면서 보였던 순종이 바로 이것의 그림자였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순종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순종이다. 주님은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아담이래 불순종으로 얼룩진 인간 역사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역사를 여시려는 것이다. 이 치열한 기도의 시간에 제자들은 졸고 있었다. 주님은 그들에게 시험에 들지않게 깨어있으라고 당부하신다. 그리고 주님은 다시 기도의 자리로 돌아가사 세번째 동일한 말로 기도하셨다.

 

  이제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돌아왔을 때 제자들은 여전히 자고있었다. 그들에게 주님은 드디어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우는 시간이 되었다고 선포하신다. 주님을 넘겨줄 자가 가까이 온 것이다. 그때 유다와 함께 대제사장들과 세기관들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들이 칼과 몽둥이를 들로 나타났다. 무리들은 달려들어 마치 강도를 잡는 것처럼 예수를 붙잡았다. 드디어 주님이 잡히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주님의 무능해서 잡히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쳤지만 그들이 주님을 잡지 않았는데 이제 그들이 주님을 잡은 것은 성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과연 제자들은 주님을 버리고 모두 달아났다. 그들은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였다. 공회가 열린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았지만 하나도 얻지 못하였다.  결국 그들이 내세운 거짓증거는 예수가 손으로 지은 성전을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만에 짓겠다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거짓 증언에 예수님은 아무 변명도 하지 않고 침묵하셨다.  그러자 대제사장은 '네가 찬송받으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가? '라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렇다고 시인하시며 나아가 인자가 권능자 곧 하나님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는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대제사장이 이 말을 듣고 옷을 찟은 것을 보면 주님의 이 말은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되게 여김으로 하나님을 모독한 말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대제사장은 이런 말을 하였으니 예수를 정죄할 다른 증거가 더 필요없다고 단언하였다. 그들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가라는 대제세장의 첫 질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생각할 점은 이 질문이 예수에게 어떤 신성을 부여하는 질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의 대답에 신성모독이라고 분노한 것을 보면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예수가 신적 존재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서 이스라엘을 다르시는 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원래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그가 하나님의 보내신 자로서 다윗의 위를 이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인간 왕일 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란 하나님의 아들로 공적으로 기름부어진 자라는 의미인 것이다.

 

  이렇게 사형선고가 내려지자 어떤 자들은 예수께 침을 뱉고 얼굴을 주먹으로 쳤다. 이런 광경을 지켜보던 베드로는 아연실색하였을 것이며 자신이 그리스도라 믿은 예수의 무능한 모습에 깊은 실망과 좌절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을 나사렛 예수와 다니던 자로 지목하는 사람에게 자신은 도무지 예수를  알지 못한다고 세번이나 부인하며 마침내는 저주하며 맹세하기까지 하였다.이렇게 제자들의 배반을 받으며 예수님은 홀로 그 죽음의 길로 저벅저벅 걸어들어 가신 것이다. 아무도 함께 갈 수 없는 그 길은 우리 주님은 기꺼이 가신 것이다.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하면서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피를 흘리기를 작정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