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 알리스터 맥그라스
2018-04-25 00:04:22
1. 경이에서 이해로: 여행의 시작
1) 황홀한 놀라움: 이해로 가는 문
- 경이감은 탐험과 발견의 출발점, 탐구여행의 결과 중 하나가 과학, 과학은 궁극적 질문에 답할 수 없음.
2) 큰 질문들을 피할 수 없는 이유
- 인간으로서 온전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과학이 내놓은 실재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만으로는 부족함.
- 모든 인생철학, 정말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모든 사고방식은 결국 과학을 넘어설 수밖에 없다.
3) 실제에 대한 풍성한 이해
- 하나님을 믿으며 세계를 풍성하게 이해하고 그 가치를 알아보게 됨.
- 실제를 보는 새로운 방식을 발견했고, 발견한 것에서 기쁨을 맛보았다.
- “저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믿듯 기독교를 믿습니다. 그것을 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서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C.S.루이스)
- 과학은 ‘큰 그림’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여전히 그 일부에 불과하며 신앙이 세부 내용을 채워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믿음과 과학 사이에 갈등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과학주의’라는 견해에 따른 것이다.
- “기독교의 지적 매력을 과학적 설명의 빈틈 찾기로 보는 생각은 변호할 수 없는 ‘존재의 이분법’과 ‘지적 구획화’를 요구한다.”(쿨슨)
- 기독교가 제시하는 실제관은 과학의 진행 과정과 그 성공을 이해할 수 있는 통찰력을 제공하는 동시에, 과학이 제기했지만 대답할 역량을 넘어선 질문들을 다루게 해주는 더 큰 서사를 제시한다.
4) 신앙과 자연의 진가를 알아봄
*반론: 믿음은 자연에 대한 이해를 풍성하게 하기보다는 훼손할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은가?
- 자연이 하나님을 가리킨다는 것과 그에 따라 자연계를 연구하고 감탄할 근본적이고 종교적인 동기를 제공한다는 것은 기독교 역사 내내 울려 퍼진 주제이다.
- 자연계를 기독교의 눈으로 바라보는 일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풍성한 의미를 더해주고 자연을 연구해야 할 새로운 동기를 부여했다.
5) 거대한 신화: 과학과 종교의 지속적인 ‘갈등’
- ‘갈등’서사는 진부하고 시대에 뒤떨어졌다. ‘갈등’서사는 지적 이유가 아니라 문화적 이유로 인기를 얻게 된 사고방식의 고전적 사례이다. 그 버팀목은 갈등 서사의 지배력을 이어가는 것에서 기득권을 보장받는 이들이다.
- 과학은 본질적으로 종교를 지지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 과학이 정치를 지지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 것과 같다. 과학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부인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 방법론적인 이유로 초자연적인 것을 무시할 따름이다. 과학은 반유신론적 방법이 아니라 유신론과 무관한 방법으로 실제를 다루는 학문이다.
- ‘겹치지 않는 교도권’(non-overlapping magisteria) 개념은 지적 경계를 보호하기 위해 창조적 상호 작용과 대화를 가로막는다.
- 과학과 종교의 대화는 서로를 풍요롭게 하고 상승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실제에 대한 ‘더 큰 서사’는 제대로 구성만 된다면, 우리 세계의 이해가능성과 정합성을 긍정하면서도 차이와 의견 불일치가 들어설 지적 공간을 만들어 낼 것이다.
2. 이야기, 그림, 지도: 세상 이해하기
삶에는 자연적 기제를 해명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존재한다.
1) 의미와 궁극적 질문들
- 삶의 본질, 삶의 목적, 왜
- “과학은 존재의 수수께끼와 세상에서의 인간의 역할과 같은 궁극적 질문들에 대해 단언할 입장에 있지 않다.”(포퍼)
2) 과학은 무신론적이지도 유신론적이지도 않다: 과학은 그냥 과학이다.
- 자연과학이 신뢰할 만한 지적탐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한계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 과학은 구체적인 어떤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견해도 수반하지 않는다.
3) 이해가능성과 정합성의 추구
- 인간인 우리는 삶의 여러 차원들을 정합적이고 만족스러운 전체로 통합하려 시도한다.
- 좋은 이야기, 그림, 지도는 우리가 실재를 더욱 깊이 인지하도록 돕는다. 반면 부적절할 이야기와 그림과 지도는 우리를 쪼그라들게 하고 빈곤한 사고방식 안에 가둬 놓는다.
4) 과학과 종교에 대한 이야기들
- 과학과 종교가 전쟁 상태라는 이야기는 신무신론의 저작에서 무비판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선별적인 역사적 사례 활용으로 ‘갈등’서사를 옹호한다.
5) ‘전쟁’서사에 도전하기
- ‘전쟁’서사에 도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대표적인 신화들을 체계적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 과학사가들의 연구는 과학혁명 이전과 그 기간에 있었던 과학과 신앙의 상호 작용을 입체적이고 다채롭고 신뢰할 만하게 설명해준다. 이들은 서양 근대 과학의 출현과 유지에 있어서 종교적 요인들이 상당히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견해를 대체로 받아들인다. [기독교의 창조 교리는 규칙성 있는 우주 개념을 긍정한다. 자연 연구를 신의 지혜와 아름다움을 알아가는 통로로 인정한다. 원죄 교리로 인간의 이성적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진리 확립의 수단으로 경험적 방법(실험)을 가치 있게 여기게 되었다.]
- 과학과 종교 간 ‘전쟁’의 신화는 19세기 후반 영국의 사회적 상황과 잘 들어맞는다. 성직자였던 구세대의 과학자들과 새로운 직업 과학자들의 대립이다. 이 시대의 진짜 갈등은 과학과 종교가 아니라 과학에 대한 전혀 다른 두 가지 이해 사이에 있었다.
- 기독교 신앙이 제공하는 풍성하고 깊이 있는 개념의 틀, 심적 지도는 과학 활동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권장하고 그 통찰력을 환영하며 그 한계를 뛰어넘는다.
6) 실재에 대한 다중적 지도들
- 실재의 깊이와 상세한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중적 접근이 필요하다.(메리 미즐리) 어떤 사고방식도 단독적으로는 우리 우주의 의미를 설명할 수 없다.
7) 실재의 다중적 층위들
- 복잡한 자연적 체계들을 제대로 다루려면 여러 층위에서의 참여와 설명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림의 일부만 보고 그것이 전체라고 생각하기 쉽다. (끓는 주전자의 비유)
8) 실재에 대한 다중적 서사
- 인간은 세계와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사용한다. 우리는 여러 서사를 사용해 세계 안에서의 우리의 위치를 파악하고 우리가 경험하는 바를 이해한다. 인간의 존재와 경험의 복잡성을 독자적으로 조직해 내고 그 연관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단일 거대 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 과학과 신앙의 서사를 한데 엮어 우리 세계에 대한 좀 더 풍요로운 시각과 이해를 얻으면서도 각 서사의 구별된 정체성은 존중하고 보존할 수 있다. 과학과 신앙은 인간 정체성에 대해 서로 다르지만 잠재적으로 상보적인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 둘은 각각 더 큰 그림의 일부이고, 어느 하나나 둘 다를 배제하는 순간 우리의 인생관은 그만큼 빈약해진다.
3. 이론, 증거, 증명: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알까?
1) 확실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열망
- 과학적 실증주의(과학은 실험으로 증명된 사실만을 다루는 확립된 지식체계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과학연구는 잠정적이다(과학자들이 오늘 믿는 내용이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수 있으며, 때로는 수정되고 때로는 완전히 버려지기도 한다). 거짓 확실성의 바깥에 있는 진짜 세계를 상대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2) 과학에서의 이론: 상황을 올바르게 보기
- 과학적 탐구는 ‘사상을 보는’ 최고의 방법, 즉 일체의 이념적 압력에서 벗어나 실제로 관찰한 내용을 가장 잘 이해하게 해주는 접근법을 찾아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과학은 여행 중에 있고 최종 목적지에 아직 도착하지는 않았다. 최고의 과학과 최고의 종교는 모두 잠정성, 열린 마음, 지적 겸손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3) 사례 연구: 태양계의 이론들
- 천동설▸주전원▸지동설(행성들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함▸타원궤도, 시차효과가 나타나지 못함▸별들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됨)
- 이론: 관측 결과에 가장 잘 맞는 모델을 찾아냄, 잠정적, 변칙 사례에 대응해야 함.
4) 과학에서의 증거, 증명, 믿음
- 과학은 과학 이론들을 증명하는가? 관찰 사실에 대한 주어진 이론이 최고의 것인지 증명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그것은 어떤 기준을 사용하여 이론을 판단해야 할지 완전한 합의가 이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학에서 증거는 여러 해석에 열려 있을 수 있다. (단일 우주, 다중 우주) 과학은 믿음에 의존한다. 특정한 이론들이 참이라고 믿고 그렇게 생각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어도, 그 이론들이 참임을 증명할 수는 없다.
- “과학적 지식은 절대적으로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정당한 신념을 끌어낼 수 있는 지식(Personal knowledge)으로 볼 수 있다.” “과학적 지식은 기계적인 과정에 의해서 오류의 여지없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념들은 신뢰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다는 우리의 개인적이고 오류가 있을 수 있는 판단을 거친다.”(마이클 폴라니)
5) 믿음의 입자: 힉스 입자
- 과학자들이 참이라고 믿었던 것이 정말 참이라는 증거가 나타난 사례.
- 1960년대 물리학자 피터 힉스와 여러 학자들이 질량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가정한 신비로운 입자. 입자물리학자들이 힉스 입자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것이 과학적 관찰 내용을 너무나 잘 설명해 주어 그 존재가 확실해 보이기 때문이었다.
- 2012년, 7월 4일 스위스 제네바의 거대강입자충돌기(LHC)에서 힉스입자 관찰, 2013년 3월 14일 유럽입자물리연구소의 물리학자들이 그 발견이 사실임을 확인함.
6) 종교에서의 이론: 삶을 이해하기
- 종교적 신앙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가?
①신앙은 실재의 이해가능성과 정합성을 긍정하는 실재관을 제공하여 세계를 이해하도록 돕는다. ②신앙은 삶에서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게 하는 틀을 제공한다. ③신앙은 나의 이익을 채우지 않는 도덕관을 제시한다. ④신앙은 부정적인 상황을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게 함으로써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도록 돕는다. ⑤신앙은 내 삶을 의미라는 더 넓은 맥락에서 보게 해주어 소망을 갖게 한다.
- 이론들은 관찰과 증거에 비추어 엄격한 검사를 거쳐야 한다.
7) 믿음은 변화된 사고방식
- 유신론은 세상을 보는 새로운 렌즈를 제공한다.
- 회개, 메타노이아: 철저한 마음의 변화, 근본적인 지적 방향 전환, 심적 변화-지성과 마음의 변화
8) 신앙으로 돌아감: G.K. 체스터턴과 C.S. 루이스
- 체스터턴은 기독교가 ‘세계에 대한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을 제고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기독교로 돌아왔다. 기독교의 그럴듯함은 단일한 논증이나 사실 확인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맞물려 있는 개념들과 주제들의 그물망에 근거한다.
- 루이스가 기독교를 재발견하게 된 것은 기독교가 상상의 영역과 이성의 영역 모두에서 이치에 맞아 역사의 패턴과 개인들의 주관적 경험과 자연과학의 성공에 대해 정합성 있는 설명을 제공한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9) 과학과 종교: 이론을 증명할 수 있는가?
신에 대한 이론이 세상을 이해하게 해준다는 말은 좋다. 하지만 그것이 옳다는 증거가 있는가?
종교 이론들은 지어낸 것이 아닌가?
- 이론 자체는 증명될 수 없어도 통합하고 설명하는 능력에 의거해 그 이론을 채택하는 것이 지적으로 적법하다.(C.S. 루이스), M이론의 예. 이성이 증명 할 수 있는 것만을 실재로 인정한다면 이성은 스스로의 신뢰성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인간의 이성의 범위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 기독교에는 세상을 이해하려는 시도 이상의 것이 있다. 세상을 설명해준다는 측면은 기독교의 풍성한 유산의 일부이다. 실재를 조명하는 능력은 이론의 신빙성을 평가하는 중요한 척도이고 그 진리성을 알리는 지표이다.
- 과학과 종교는 둘 모두 최고의 상태일 때 우리가 누구인지, 왜 여기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우리의 삶을 온전하고 충만하게 살아가려면 그런 풍성한 비전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7장. 의미 추구와 과학의 한계
심오한 실존적 질문들: 우리는 누구이며, 왜 여기에 있는가?
● 과학에는 한계가 있는가?
- 과학적 방법 자체에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 과학은 경험적으로 조사할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 고유 영역 및 분명한 정체성을 보존한다. (아인슈타인: 과학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을 뿐 당위는 알아낼 수 없고, 과학의 영역 밖에서는 온갖 종류의 가치 판단이 여전히 필요하다)
- 버트런드 러셀 등은 자연과학의 범위에 한계가 없다고 주장.
- 과학에 한계가 있는지의 여부와 이것이 함의하는 바가 무엇인지 고찰해 보자.
● 궁극적 질문들: 우리에게 왜 대답이 필요한가?
- 호세 오르테가: 과학은 지혜와 지식과 이해를 추구하는 인간의 탐색을 일정 부분만 장려한다. 그러나 인간은 더 나아가 과학적 지평 너머에 놓인 것을 탐구하기를 갈망한다.
- “세상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주 최고의 힘은 무엇인가?” “삶의 본질적 의미는 무엇인가?”
- 궁극적 질문에 대한 세 가지 선택지 – 무시 / 과학을 사용하여 대답하고자 시도 / 다중의 지도나 서사를 받아들여 대답
1. 궁극적 질문들을 무시한다
- 수학자 W.K. 클리퍼드: 불충분한 증거에 의해 무엇이건 믿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잘못이다 <-> 결정적 실험이라는 개념의 난점과 증거에 의한 이론의 과소 결정성 ex 양자론에 대한 해석, 우주론에 대한 현대의 논쟁
- <->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 증거가 심각하게 불확실하고 다중적 해석에 열려 있는 세상에서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지적 탐구의 진정한 목표가 오류 피하기가 아니라 참된 믿음의 대상을 찾는 것이라면...
2. 과학이 궁극적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
- 과학이 결국에는 삶의 근본적 질문들에 모두 대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접근
- 리처드 도킨스의 보편적 다윈주의: 종의 기원에 대한 다윈의 잠정적인 과학 이론을 부풀려 의미와 도덕에 관한 궁극적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는 방대한 메타서사로 삼음
- <-> 피터 메더워: 초월적 질문들과 자연과학이 권위 있게 다루는 물질적 우주의 조직과 구조에 대한 질문들을 구분. 과학이 한계가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3. 의미의 다중 지도를 사용해 궁극적 질문들에 답한다
- 궁극적 질문들의 중요성, 적법성 인식 / 다중의 의미 지도 사용하여 풍성해진 실재관으로 / 인지적 질문과 실존적 질문을 모두 다루는 것
- 알리스터 맥그래스: 기독교 신앙이 과학의 실재 탐구를 설득력 있고 대단히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과학과 신앙은 궁극적으로 인간 정체성에 대해 상호 보완적인 지도를 제공해 줄 수 있다.
- 기독교가 자연과학보다 증거 면에서 불확실한 토대 위에 서 있다는 비판에 대한 단서: 모든 과학적 판단이 잠정적이다, 모든 세계관이 경험적 검증 너머에 있다
세 가지 접근법 모두가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지적 불편을 안겨 줄 것임/ 안겨 주어야 마땅함을 인식해야 한다. 세 접근법 중 어느 것도 자명하게 옳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는 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우리의 선택이 정당화된다고 믿으면서 선택을 내려야 한다.
● 어째서 우리에겐 의미가 중요한가?
-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 삶의 도전들 앞에서 복원력을 갖추는 데 도움이 된다
- 사회심리학자 로이 바우마이스터: 종교, 직장, 가족, 인간관계 등 다중의 원천에서 의미를 끌어내는 경향. 다중적 원천을 갖고 있으면 무의미함의 위협에서 보호
● 실패한 대안: 과학주의와 의미
- 무신론 철학자 알렉스 로젠버그 <무신론자 실재 가이드>: 삶의 의미, 우주의 목적은 없다. 환원적 물리주의: 핵심 도덕이 존재한다는 것은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다 (cf. C.S. 루이스 <인간 폐지>?)
- 물리학이 인정하는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물리학 자체가 입증할 수는 없다
● 의미와 자연주의
- 로젠버그: 진화를 통해 우리가 실제로 틀린 것들을 많이 믿도록 만들어져가고 있다.
- 반박: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옳은지 알아볼 신뢰할 만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음
- 티머시 윌리엄슨의 지적:과학적 제국주의는 수학의 성공을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경험, 실험적이지 않은 순전한 추론): 모든 진리가 경성과학에 의해 발견될 수 있다는 말이 경성과학으로 발견될 수 있어야 한다 – 로젠버그의 주장은 형이상학적 주장에 불과함
- 과학의 이론과 실천의 본질에 해당하는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실재를 어떻게 연구할 것인지를 다룰 뿐, 그 실재의 형태나 규모를 미리 결정하지는 않는다. 과학이 우리에게 진리에 대한 독점적 접근을 허락한다고 가정할 때 문제가 시작된다.
8장. 경험적 윤리? 과학과 도덕
● 과학이 도덕의 토대가 될 수 있을까?
- 사회다윈주의 실험으로 생겨난 세 가지 심각한 우려: 1) 진화론에서 도출된 소위 과학적 가치 중 상당수는 자연에서 벌어진 일을 인간 사회에서 벌어져야 마땅한 일로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할 뿐 2) 과학적 이론화는 잠정적 3) 도덕적 질문들이 과학적 질문인 것처럼 취급함
- 리처드 도킨스의 입장 변화(2010): “과학은 도덕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신화를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 샘 해리스, 과학과 윤리를 말하다
- 샘 해리스의 과학적 도덕1) 도덕은 의식 있는 생물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한 것이다2) 과학은 무엇이 의식 있는 생물의 행복을 촉진하고 저해하는가에 대한 사실 정보에 접근 가능3) 따라서 과학은 객관적으로 도덕인 것이 무엇인지 결정 가능
<-> 이것이 유일한 핵심 가치여야 하는가? 이는 경험적 관찰 사실이 아닌 가치 판단<-> 실제로 시행 불가능. 공리주의의 난점
● 진화심리학과 윤리
- 다윈주의 메타서사 자체가 윤리적 사색의 기초를 제공하는가?
- 진화와 윤리의 관계에 대한 논쟁: 허버트 스펜서 – 적자생존을 도덕의 영역으로: 토머스 헨리 헉슬리,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 – 진화를 도덕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것에 강하게 반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G. E. 무어 - “자연주의적 오류”라며 지적. 선과 행복을 동일시할 수 없다. 선은 경험적 관찰과 연관시킬 수 없다
- 에드워드 O. 윌슨 – 도덕적 직관의 기원은 인류의 진화 역사의 관점에서 설명되어야<-> 기술의 층위에서는 진화론에 호소해 특정한 인간 능력이나 사고와 행동 패턴의 기원을 설명하기가 상대적으로 쉽지만, 이것이 규범으로 넘어가려면 어려움이 시작된다.
- 진화심리학은 종종 포스트모던한 도덕적 회의주의나 상대주의를 지지하거나 전통적인 도덕적 실재론을 약화시키는 데에 동원.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입증될 수 없다. 기술에서 규범으로 넘어가는 데에 어려움 / 진화적 과거에 대한 모든 과학적 이해가 필연적으로 일시적이고 잠정적
● 이성적 윤리? 이성의 한계
-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이성이 보편타당한 윤리를 드러낼 수 있다)는 이제 지나간 시대의 유물
- 인간 사고의 결론은 헌신에 의거하여 이루어지는데, 여기서의 헌신은 옳은 것으로 가정해야 하는 것이지 옳다고 입증될 수는 없다.
- 이는 과학과 종교 모두에 좋은 소식. 인간이 이성이 우주가 무엇인지 단언할 수 있다는 옛 합리주의의 독단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 우리는 어떤 ‘합리성’이 우주의 특징인지 미리 단언할 수 없다.ex) 양자역학의 파동-입자 이중성이 반직관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고전 뉴턴 물리학이 지배하는 일상 경험으로 형성된 합리성 개념을 가지고 접근했기 때문ex) 삼위일체 교리가 “합리적인가?”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내적 논리를 찾아내어야
- 보편 도덕 구축의 문제: 우리의 추론 패턴이 각 문화로부터 영향받는 정도를 인식하지 못함: 매킨타이어 – 보편 도덕이 합의되지 않는다. 합리적 윤리 관념에 이의를 제기하는 데 큰 역할
자연과학은 우리에게 선한 삶을 상상하고 살아낼 강력한 토대를 제공하지 못한다. 우리는 추가적 서사를 활용해 사회의 정의와 개인적인 진실함을 추구해야 한다.
9장. 과학과 신앙: 세상 이해하기 – 삶을 이해하기
별 볼 일 없던 대화 가운데 전혀 뜻밖의 명료함이 드러나는 순간= 마치 더 복잡한 대화자가 대화에 합류하면서 대화를 급진전시킨 것 같은.
--> 과학이 홀로 제공하는 것보다 더 풍성하고 심오한 서사가 필요하다
● 실재에 대한 이야기들을 한데 엮다
- 인간은 종교적 질문과 직관에 자연스럽게 끌린다. 마치 그런 질문들을 던지도록 되어 있는 존재처럼.
- 우리 세계에서는 널리 과학과 신앙에 대해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이 사이에는 보람차고 창의적인 대화를 해야 한다. 이 안에는 협상이 필요한 경계 문제가 있ㅇㄹ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애초에 가치 있게 여길 만한 모든 관계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접근에 대한 우려들
1. 발명된 우주? 없는 것 지어내기인가, 있는 것 또렷이 보기인가?
- 과학자에게 신앙의 창은 진짜 세계를 더 또렷이 보게 해준 망원경과 같을까? 아니면 착시를 만들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만들어진 우주를 보게 한, 결함 있는 현미경과 같을까?
2. 합리적 종교: 신비는 어디 있는가?
- 기독교는 정말 세상을 이해하게 해주는 것에 불과한가? 신앙의 다른 주요 주제들을 간과한 것은 아닐까?
- 신앙과 과학의 관계를 탐구하는 데에 유용한 접근법일 뿐, 더 많은 영역이 있다. 신앙의 관계적 측면, 신앙의 상상력 측면, 영성, 미술, 음악
3. 부적절한 종합? 내가 과학과 종교를 합치지 않는 이유
- 합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서사들 엮기” 서사들을 조악한 방식으로 균일하게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색상을 귀하게 여기고 적절히 사용해야
- 자연과학이 신앙의 서사를 풍성하게 할 수 있는 방법: 광대함을 더 많이 포착하고, 경이감을 느끼게 해 준다: 과학은 용서가 개인과 공동체에 가져다주는 경험적 변화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고, 그로 인해 보다 효과적인 목회 전략을 전개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용서 개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넓혀 준다
- 종교가 과학적 서사를 풍요롭게 하는 법1) 기독교는 실재의 정합성에 대한 확신을 제공한다. 세상의 근본적인 상호 연결성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한다.2) 기독교는 과학으로 답할 수 없는 것들에 답을 제공한다. 과학적 방법론의 엄격하고 일관된 적용을 보완해 준다. 과학만을 의미와 가치의 토대로 볼 때 찾아오는 실존적 진공 상태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3) 종교는 과학의 서사가 기술 관료적인 “평범한 것들의 목록”으로 붕괴되지 않도록 막아 줌으로써 과학의 서사를 풍성하게 해준다.
● 지금이라는 문제: 주관성과 과학
-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놀랄 만큼 비인격적이고 추상적인 해석
- 과학은 우리를 주체가 아닌 객체로 다루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에 우리의 상황에 대한 과학의 기술은 우리가 실제로 느끼는 바에 대한 기술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사실과 의미를 한데 엮을 수 있는 더 큰 서사가 필요하다.
● 밤하늘: 하늘 보기에 대하여
- 무신론자였을 때 밤하늘을 보며 저자가 느꼈던 오싹함, 으스스한 비인격성
- 믿음의 서사를 받아들일 때 새롭게 보임. 특별하고 작은 존재인 나, 우주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 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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