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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전성민

예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전성민

2015-04-04 20:31:15


예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전성민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세계관 및 구약학 교수)

“진정으로 참된 최고의 실재는 무엇인가?” 제임스 사이어는 이 질문을 세계관이 답해야하는 일곱 가지 질문들 중에서 첫 번째 질문으로 꼽는다. 사이어는 이 질문에 대해 “하나님, 여러 신들, 물리적 우주”가 가능한 대답들이며 기독교 유신론의 답은 “하나님”이라고 설명한다(사이어, 14). 안점식 교수 또한 “궁극자, 인간, 자연의 존재와, 이 삼자의 관계”를 세계관의 유형을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는다. 그는 “궁극자, 절대자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세계관을 분화시키는 데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하며 그 관점은 “다른 영역에까지 중요한 영향을 주면서 특정한 세계관의 특질을 결정하게 된다”고 설명한다(안점식, 80). 따라서 하나님 이해는 기독교 세계관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다. 그러나 단순히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명확히 알 때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과 함의를 파악할 수 있다.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사이어는 기독교 유신론의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삼위의) 인격이시며, 초월적이고 내재적이며, 전지하시고, 주권자이시며 선”이시라고 말하고 각 개념들을 설명한다(사이어, 21). 이러한 개념적인 설명들은 그것들 나름의 유익이 있지만 가장 근본적으로는 성경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된다. 사이어도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 성경이 근본임을 지적하며 무엇보다 예수님이 하나님에 대한 가장 충만하고 명료한 계시임을 확언한다(사이어, 32).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와 인류 전체가 어디서 왔는지 혹은 나의 인생이나 인류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에 대해 성찰할 때, 나의 세계관은 이야기의 형태로 표현된다. . . . 그리스도인은 창조, 타락, 구속, 영화로 구성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 중심에는 물론 예수의 탄생, 죽음, 부활이 자리잡고 있다”(사이어, 12. 강조는 필자). 이것은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는 히브리서 1:1-2의 말씀과 맥을 같이한다. 성경이 하나님을 알려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가장 명확하고 정확히 알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의 탄생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라는 것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신앙 고백 중 하나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사실 중에서 어떤 것이 믿기에 더 어려울까? 현대인들은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을 어렵게 느낄지 모르지만, 초대 교회 시대에는 그 반대의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영지주의의 가현설은 예수님이 사람으로 보였을 뿐, 진짜 사람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요 1:14)고 선언하며, 요한1서는 예수 사건을 “듣고, 눈으로 보고, 자세히 보고, 손으로 만져본” 일임을 분명히 하고(요일 1:1), 요한2서는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셨던 것을 부인하는 자”는 “미혹하는 자”라고 비판한다(요이 7절).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또한 분명 사람이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인성만이 드러나는 것 같은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이다. 폭풍 만난 배 안에서 베게를 배고 주무시던 순간에도(막 4:38), 새벽에 길을 가시다가 배가 고프셨던 순간에도(마 21:18), 죄인들과 친구이자 먹보에 술꾼이라는 비난을 받으실 때에도(눅 7:34), 죽은 나사로 앞에서 우시던 순간에도(요 11:35), 그리고 무엇보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도 그가 하나님이 아닌 때는 한 순간도 없었다.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들이 불편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은연 중에 가현설적인 신앙에 젖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이 사람이셨다는 사실은 신성과 인간성이 공존할 수 있음을,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이 배치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신성은 인간성을 배제하지 않고 그것을 담아냈다(Barth, 49 참고). 사람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으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으로 사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기독교 세계관은 인간성을 신성과 반대되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쏟아 붓는 성육신의 사랑을 보여주는 가운데 인간성을 품어낸 신이 기독교의 하나님이다(빌 2:6-11). 참 사람됨이 참 하나님됨이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하나님 이해다.

둘째, 예수님의 죽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보여준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구원과 관련된 문제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것이다(Moltmann, 201). 기독교의 하나님은 강하기만한 천하장사 같은 신이 아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실은 “약함의 역설”을 보여주며 능력, 힘, 권력(power)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촉구한다(고먼, 429 이하).

“아주 중요한 사실은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메시아의 약함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행하신 행위는 모든 형태의 능력과 권위를 다 뒤엎어버린다. 실제로 그리스도는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시고, 이 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시다. . . . 이처럼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 거하는 자리요 그 능력을 보여주는 계시가 되시는 이유는 오직 그가 약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바울이 볼 때, 그리스도는 약함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먼, 443, 저자의 강조)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은 약함이 진정한 강함이며, 죽음이 진정한 생명의 길임을 보여준다. 또한 십자가 사건은 고통의 자리에 함께 하는 하나님이 기독교의 하나님임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이 고난을 정당하게 여기심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고난당하는 자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고먼, 591).

셋째, 예수님의 부활은 정의를 세우시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부활을 소망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 영원히 존재하려는 욕망을 품는 것이 아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죽음의 현실 앞에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소망하며 지금 고난의 현장에서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간다(김근주 참고). 그런 삶을 살면서 받았던 고난과 핍박이 부당했으며 그 삶이 옳은 삶이었다고 선언하는 정의의 심판이 부활의 핵심이다. 악행에도 불구하고 편안히 삶을 마친 악인을(시 73:3-5) 심판대 앞에 세워 그의 행위대로 갚아주는 것이 부활의 이유다(요 5:29; 계 20:12-13). 예수님의 부활은 이러한 심판의 첫 열매였으며 (빌 2:9; 롬 1:4; 고전 15:20)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기독교의 하나님은 정의를 세우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신성과 함께 인간성을 품으신 하나님,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는 자들와 자신을 동일시하신 하나님, 정의를 세우시는 하나님 - 이것이 예수님의 탄생, 죽음, 부활을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명확한 모습이다. 이런 하나님이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이다.

[참고문헌]
김근주. 『구약으로 읽는 부활신앙』 서울: SFC, 2014. 
안점식. 『세계관 종교 문화』 서울: 조이선교회, 2008. 
전성민. “기독교 세계관과 성경 읽기: 구속과 성경 읽기.” 「월드뷰」 2014년 10월호. 32-35. 
제임스 사이어.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서울: IVP, 2007. 
마이클 고먼. 『삶으로 담아내는 십자가』 서울: 새물결플러스, 1987.
Barth, Karl. The Humanity of God. Richmond: John Knox Press, 1960.
Fee, Gordon D. Paul’s Letter to the Philippians. Grand Rapids: Eerdmans, 1995. 
Moltmann, Jürgen. The Crucified God.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3.

 

 

제목: 길을 보여주신 십자가
본문: 빌립보서 2:1-11
전성민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세계관 및 구약학 교수)

“주의 이름 높이며”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하늘 영광 버리고 이 땅 위에 / 십자가를 지시고 죄 사했네 / 무덤에서 일어나 / 하늘로 올리셨네 / 주의 이름 높이리.” 이 가사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 이후 그를 하나님이 높이셨음을 말하는 빌립보서 2:6-11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찬양의 원래 영어 가사에는 “주님은 길을 보여주기 위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You came from heaven to earth to show the way”). 저는 이 가사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 것은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을 보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빌립보서 2:1-11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가 빌립보 성도들이 본 받아야 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설명합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2:1-11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먼저 1절에서 4절에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겸손을 통해 하나가 되라고 호소합니다. 그리고 5절에서 11절에서 바울은 그들이 따라야 할 그리스도 예수의 본을 설명합니다. 1절에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경험을 삼위 하나님과 연결해 말합니다 (Fee, 182). “그리스도 안의 권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긍휼과 자비를 추가로 말합니다. 바울은 이들의 이런 경험을 토대로 삼아 마음을 같이하라고 호소합니다(2절; Fee, 182). 절이 나누어진 것을 고려하지 않고 원문의 구조를 살펴보면 마음을 같이한다는 것은 첫째로 같은 사랑을 가지는 것(2절), 둘째로 뜻을 합해 한마음을 품는 것(2절), 세째로 각각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3절). 그리고 뜻을 합해 한마음을 품는 것은 다툼이나 허영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을 통해 이루어지며(2-3절), 자기 보다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는 것은 자기 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일을 서로 돌아보는 것을 통해 이루어집니다(3-4절).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통해 바울을 빌립보 성도들이 자신의 기쁨을 충만하게 해주기를 바랍니다(Fee, 176).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한 권면, 위로, 교제, 그리고 긍휼과 자비를 토대로 삼아 공동체가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은 빌립보 교회에만 필요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도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한마음을 품고 다른 사람을 더 낫게 여겨야 합니다. 이를 위해 다툼과 허영을 피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주어진 과제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바울이 답이 5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이것은 “그리스도의 태도를 가지라”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새번역 참고). 그리고 이제 바울은 6-8절이 빌립보 성도들과 우리들이 가져야 할 그리스도의 태도를 상세히 설명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을 비워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가져야 할 겸손의 태도는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성도들이 가야할 겸손의 길의 본보기입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

6-8절은 성육신을 묘사하는 놀라운 본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오해할 만한 표현들이 몇가지 등장합니다. “종의 형체”, “사람들과 같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가 그런 표현들입니다. “종의 형체”에서 “형체”는 겉모습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6절에서 하나님의 “본체”라고 번역된 단어와 같습니다. 이것은 “본질적 특징”(essential quality)를 말합니다(Fee, 211).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셨던 것 만큼 종의 본질적 특징을 가진 존재가 되신 것입니다.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는 표현도 성육신을 약화시키는 표현이 아니라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라는 구문과 함께 쓰여 예수께서 자신을 비우신 방식을 설명합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라는 표현을 예수님이 겉모양만 사람이었다는 식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 또한 예수님은 사람으로 알아 볼 수 있었다, 즉 분명 사람이었다라는 말입니다(Fee, 215). 물론 이 표현들은 예수님이 단지 사람만이 아니라 동시에 분명한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함의합니다. 예수께서 종의 본질적 특징을 가지셨을 때조차,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을 때조차, 여전히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진짜로 사람의 삶을 사신 하나님이셨습니다(Fee, 212). 이 사실은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인 하나님 이해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신적인 것과 인간적이 것이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오는 4월 16일은 세월호가 침몰한지 1년이 되는 날입니다. 애절한 사연을 가진 여러 어른들 뿐 아니라, 말 그대로 피지도 못하고 져버린 꽃 같은 학생들을 포함해 300명의 가까운 사람이 죽고 9명의 시신은 아직도 찾지 못한 일이 벌어진지 1년이 지났습니다.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났지만 세월호는 언제 인양될지 기약이 없습니다. 여러분 주변에 세월호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지를 잃은 사람들이 있으신지요. 세월호 사건이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 죽음으로 인한 이별은 없앨 수 없는 삶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위로와 긍휼과 자비를 나눌 수 있을까요?(빌 2:1)

우리는 “인간적”인 것과 “신앙적”인 것을 서로 배타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족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것은 극복해야할 “인간적”인 모습이며, 아무리 가족의 죽음이 슬퍼도 천국과 부활의 소망 속에서 기뻐하는 것이 “신앙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우셨습니다. 금세 그를 다시 살리실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셨습니다. 그가 우시던 순간은 하나님이 아니셨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우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우시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은 결코 그의 하나님 되심과 충돌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셨기에 우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울음을 모르는 신앙은 기독교적이라기보다 인간의 번뇌를 벗어버리는 해탈을 추구하는 불교적 신앙에 더 가까와 보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의 울음을 아셨던 예수님을 본 받습니다. 우리는 함께 슬퍼함으로 위로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 “인간적”인 위로는 분명 “신앙적”입니다. 이것이 성육신이 보여주는 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예수님의 성육신을 설명하는 6-8절은 그 시작과 끝에 매우 첨예한 대조가 있습니다. 6절 처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셨다고 말합니다. 반면 8절 마지막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말합니다(Fee, 217). 이 둘을 묶으면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인 예수께서 보여주신 길은 고난 당하는 자와 함께하는 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고난 당하는 자와 함께 하는 삶을 촉구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본 때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심판에서 사람들을 구해내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더우기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이 고난 당하신 분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이 고난 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히 13:12).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고난 받는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영성을 탐구한 고먼은 “약자들이야말로 그 누구보다 먼저 십자가를 본받는 사랑을 받아야”하며 “십자가를 본받는 사랑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을 위하여 자비와 정의를 추구”한다고 말합니다(고먼, 594, 616).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 받는 사람들과 함께 고난을 받고 죽으셨다는 사실이 가라앉는 배를 보며 하나님이 어디서 무엇을 하셨는지 부르짖었던 분들에게 일말의 빛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무리 십자가를 묵상한다고해도 세상에서 고난 받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그들의 괴로움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고난 받는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시고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밖히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런 묵상은 아편과 같은 것입니다(전성민, 35). 예수님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그 죽음에 십자가로 죽음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제 우리를 그 길로 부르십니다. 십자가의 길로 부르십니다.

예수를 높이신 하나님

6-8절의 주어는 예수님이셨습니다. 9-11절에서 주어는 성부 하나님으로 바뀝니다. 9절이하에 부활과 승천을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당연히 그것들이 전제되어 있습니다(Fee, 220). 이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고 지극히 높여 모든 사람들이 그를 “주”로 시인하게 하셨습니다. 이 “주”는 황제를 부르는 호칭 중 하나였습니다(Fee, 196).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어린 양은 이제 역사를 통치하는 사자(lion)로 드러나셨습니다(계 5:5-6). 하나님은 사람들이 저주 받았다고 생각했던 예수를 다시 살리셔서 그의 의로움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성육신과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성도들에게도 그들의 고난과 슬픔을 헤아리시며 정의를 세우는 생명의 부활을 약속하십니다(요 5:29).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그의 성육신을 본 받아야 합니다. 그의 십자가를 쫓아야 합니다. 성육신의 겸손함으로 다른 사람을 낫게 여겨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며 고난 받는 자와 함께 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으로 태어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가 가야할 길입니다. 십자가가 보여준 길입니다. 그 길 마지막에는 영광과 생명의 부활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참고문헌

김근주. 『구약으로 읽는 부활신앙』 서울: SFC, 2014. 
안점식. 『세계관 종교 문화』 서울: 조이선교회, 2008. 
전성민. “기독교 세계관과 성경 읽기: 구속과 성경 읽기.” 「월드뷰」 2014년 10월호. 32-35. 
제임스 사이어.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서울: IVP, 2007. 
마이클 고먼. 『삶으로 담아내는 십자가』 서울: 새물결플러스, 1987.
Barth, Karl. The Humanity of God. Richmond: John Knox Press, 1960.
Fee, Gordon D. Paul’s Letter to the Philippians. Grand Rapids: Eerdmans, 1995. 
Founds, Rick D. “Lord, I lift your name on high.” Universal Music - Brentwood Benson Publishing.
Moltmann, Jürgen. The Crucified God.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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