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 문화(리처드 니버) 머리말: 기독교 윤리의 유형들
2019-07-15 21:12:00
유형론적 방법과 발생론적 방법
1. 발생론적 방법은 단 하나의 아이디어나 원칙이 어떤 개별적 현상을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가정한다. 그래서 발생론적 척도는 발달의 정도에 따라 나누며, 개별적 사건의 가치를 가늠하는 척도의 수단이 된다.
2. 윤리학을 비롯한 사회과학 분야에서 유형론적 방법을 채택하게 된 것은 개별적 사건을 이해하는 면에서 발생론적 방법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기 위함이다. 유형론은 많은 요소를 여러 유형으로 나누어 각각 독특한 특징이 드러나도록 하는 방법론이다. 그래서 유형론은 단 하나의 기독교 윤리만 있다고 가정하는 입장을 반대한다. 왜냐하면 유형론은 가치의 척도를 구축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 윤리의 신학적 유형들
1. 그리스도인의 삶은 신앙과 성경을 통해 알려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과 이성을 통해 알려진 문화에 내재된 자연 속에 있는 하나님이라는 양축 사이에서 움직인다. 전자가 교회와 성경을 통해 매개된다면 후자는 문화적 공동체와 그 지혜를 통해 매개된다. 기독교 윤리의 여러 유형을 분석하려면 이 두 갈래가 서로 어떻게 결합하는지 주목해야 한다.
2. 이런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 윤리의 주요 유형은 (1)새로운 법 유형 (2)자연법 유형(3) 종합적 유형 (4) 이원론적 유형 (5) 전환론적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참고) 역사적으로 보면 초기 기독교나 재세례파의 경우에 보듯이 기독교가 소수집단으로 존재할 때는 분리유형을 보이다가 점점 교세가 증가하면서 역설형을 거쳐 중세 기독교에서 보듯이 종합형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이성의 시대와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 이후 현대의 세속화된 기독교에서는 일치유형으로 나아갔다. 일치유형에서 기독교는 윤리종교화될 위험성이 있다.
새로운 법 유형(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
1. 새로운 법 유형은 유대문화를 통해 알려진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포된 법 사이의 뚜렷한 반립관계를 전제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기본개념은 그리스도인을 새로운 법을 가진 새로운 백성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변문화(스토아철학)에서 도입한 원리들에 입각해 그 법을 해석한다는 사실을 거의 눈치 채지 못했다.
2. 이 유형은 도덕법의 내용을 그리스도에게서 끌어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가치관만이 타당하고 이 윤리를 가진 공동체는 당연히 잘못된 윤리를 가진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삶은 내세 지향적 방향성을 지니게 되고 종파적 특징을 띠게 된다. 초기 교회의 테르툴리아누스, 중세의 베네딕투스 수도원, 근대의 레오 톨스토이가 이 유형의 대표적 대변자로 보인다.
(참고) 1. 이 유형의 대표적 사례는 초기 기독교와 재세례파이다. 이 유형의 신학적 입장은 이원론적 분리주의라 할 것이다. 아 유형의 특징은 교회와 세상을 선명하게 구분하여 양자를 비타협적이고 대립적인 구조로 보는 도피적 반문화주의다. 이런 유형에서는 세상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교회만을 가치 있게 여기는 이원론적 삶의 태도가 나타나며 부정적으로는 구조선 신앙, 방주신앙의 모습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분리유형은 창조세계의 선함이나 구속을 통한 세상의 변혁보다는 세상의 전적타락에 강하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 그래서 세상을 장차 멸망할 도성이며 세상의 삶은 임시적이고 근본적으로 무의미하므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 천국을 소망해야 한다고 본다. 이 유형에서 신적 소명은 세상으로부터 나오라는 부름이지 세상으로 향하라는 부름은 아니다. 그래서 직업 활동과 일상적 삶은 종교적 목적 성취를 위한 수단이며 그 자체에 의미가 있지 않다.
2. 하워드 요더는 분리 유형이 반드시 도피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과 투쟁하는 원동력이 된다고 주장한다. 사실 변혁모델을 내세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실패한 이유는 세상을 긍정함으로서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가 세상과 더불어 사는 기독교 윤리 운동 정도로 변질된데 있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강력한 안티테제가 없음으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세속화된 경우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세상과 분리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분리유형은 단순한 분리가 아니라 대립, 구별의 의미가 강하다.
자연법 유형(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1. 이 유형은 새로운 법 유형의 정반대에 위치한다. 이 유형은 문화적 유형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자연은 문화를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고 이 유형에 속한 사람들은 문화 사회의 일원으로서 선한 것과 옳은 것을 해석하고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가치관과 규범을 자신의 문화가 지닌 이성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또한 이들은 교회를 문화와 융합하고 문화적 선과 법을 기독교적 선이나 법과 동일시하거나, 문화적 목표와 규범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한다. 이 유형이 새로운 법 유형과 유사한 점은 이들도 일련의 규범 아래서 살며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진력한다는 점이다.
2. 이 유형은 복음의 권고와 가치관을 사회의 가치관과 융합하려 한다. 그래서 예수의 계명을 이성의 법이나 자연법의 다른 형태로 간주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은 인간 문화가 지닌 자연적, 사회적 존재에게 필요한 최상의 가치관이 종교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본다. 이들은 복음적 가치관과 요구를 문화적 견지에서 해석하므로 복음에 대해 아주 선택적으로 접근한다. 그래서 복음의 요소들 가운데 문화적으로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들을 먼저 선택하고 그것들을 문화적 맥락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3. 이들은 문화 윤리의 요소들 가운데 신약성경과 가장 부합하는 것을 규범적으로 선택한다. 그러니까 이 유형은 자연법이나 상식적 윤리를 단순히 재가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이상형을 강조하며, 그 이상형과 기독교의 본질 사이에 전혀 차별성이 없다고 본다.
4. 이 유형의 특징은 조화와 적응에 있다. 그 전략은 분리주의적이거나 혁명적이 아니라 개량주의적이다. 또한 다른 세계의 개념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 시대의 최상의 부분이 연장된 것으로 본다.
5. 초기 기독교에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이 유형에 속한다. 그에게 헬레니즘의 이상주의와 기독교의 하나님의 사랑은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클레멘스의 윤리에 담긴 정신과 내용은 모두 교회가 아니라 주변 문화에서 끌어온 것이지만 그 내용만큼은 문화적으로 해석된 복음에 비추어 선택된 것이다. 중세의 아벨라르도 이 유형에 속하는데, 그는 이성으로 알게 되는 자연법이 복음의 윤리의 기본토대를 이룬다고 보았다.
6. 이 유형의 가장 뚜렷한 본보기는 근대 자유주의 기독교이다.
- 그 특징은 윤리가 신학의 바탕을 이룬다는데 있다. 슐라이어마허나 리츨은 기독교 윤리와 문화 윤리가 완전히 종합된 형태를 보여준다.
- 이 유형의 지배적인 성향은 도덕의식을 계시나 신앙보다 앞선 것으로 간주하지만, 그 도덕의식이 적어도 그 내용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상대적이라는 사실은 무시한다. 이들은 도덕의식의 제1원리를 찾고, 이 원리들을 복음의 요구사항과 가치관을 해석하는데 사용한다.
-. 자유주의 기독교는 그리스도인의 목표를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의 실현으로 보며, 그 나라를 고유한 가치를 지닌 개인들의 회합, 혹은 자유, 평등, 박애가 다스리는 나라와 같이 일종의 문화적 이상형으로 규정한다.
- 자유주의는 사랑의 규범을 복음의 가장 본질적인 계명으로 선택하되, 그것을 현세에서 도달 가능한 것으로 해석한다. 복음이 지닌 종말론적 견지는 간과하고 사람의 미덕을 그저 필수 요건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 자유주의는 개인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근대 사회의 가치관을 수용하며, 그래서 생명 혹은 영혼의 가치에 관한 복음서의 진술들을 이런 견지에서 해석한다. 이들은 복음의 윤리를 문화적 관점에서 해석할 뿐 아니라 문화적 윤리의 요소들 가운데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상적으로 보이는 것들을 선택한다.
(참고) 이 유형은 기독교를 문화의 한 유형으로 보고 기독교를 문화와 일치시키고 조화시키는 유형인데 현대의 세속화된 기독교나 자유주의 신학이 여기에 해당된다. 일치유형은 기독교를 윤리적 종교, 시민종교로 만들어 버린다.
중간에 위치한 유형들
1. 새로운 법 유형이나 자연법 유형은 모두 일련의 규범 아래서 살며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진력한다. 그러나 그 중간에 위치한 유형들은 일종의 불연속성을 갖고 있다.
2. 중간 유형들은 신적인 가치관을 교회 안에서와 문화 안에서 혹은 영원과 시간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파악하려 하며, 신적인 명령은 그리스도(성경, 교회)와 자연(이성, 문화)의 두 가지 매체를 통해 온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법이나 자연법 유형은 한 세계를 중심으로 삼는데 반해(물론 그 세계는 서로 다르지만), 중간 유형들은 두 세계 중심적이다.
3. 이들은 이 두 쌍의 가치들이나 명령들은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를 통해 (흡수하는 방식으로) 해석하거나 어느 한 쌍을 제거하는 방법으로는 조화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4. 이 중간 유형들 사이의 차별성은 서로 이질적인 요소들(두 쌍의 가치들이나 명령들)을 함께 묶는 방법상의 차이로 발생한다. 그것들은 크게 세 집단- 종합적(조형적), 이원론적(왕복운동), 전환론적으로 나눌 수 있다.
A. 종합적(조형적) 유형 :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
1. 초대교회에서 이 유형을 대표하는 인물은 없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를 대표하는 위대한 인물은 토마스 아퀴나스이고 거대한 사회조직은 근대 로마 가톨릭 교회다.
2. 이 유형은 자연의 명령과 복음의 명령을 모두 신적인 명령으로 간주하되, 둘 사이에 부분적이고 진정한 불연속성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나님의 법은 부분적으로 자연법의 다른 형태이긴 하지만 그 가운데는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도 있다고 생각한다.
3. 그러나 이 불연속성에는 실질적인 대립이 내포되어 있지 않다. 사실상 문화를 통해 알려진 자연의 가치관과 명령은 복음의 가치관과 명령을 매개하지는 않지만 그것들을 수용하도록 준비시킨다. 이 유형은 자연-이성의 가치관과 명령이 인간의 노력으로 실현될 수 있고 또 복음의 명령을 위한 준비작업의 기능이 있기 때문에, 그것들에 실제적인 강조점을 둔다. 그러나 이 유형이 자연법 유형과는 서로 다른 별개의 유형임이 분명하다.
4. 이것을 조형적 유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두 쌍(복음과 자연)의 가치관과 명령들을 서로 동일한 차원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즉 복음의 명령들은 문화에 속한 이들에게 필요한 지침을 공급하지 않으며 자연의 명령들은 하나님과 및 동료 인간과 영적관계를 맺은 이들에게 필요한 지참이나 동기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참고) 종합유형은 신앙과 이성, 자연과 은총, 철학과 신학, 교회와 국가를 종합하려는 모델로서 대표적인 신학자는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이 유형은 문화에 대한 관용과 포용을 특징으로 하는데 중세의 크리스텐돔, 로마카톨릭교, 일반은총이론이 여기에 해당한다.
B. 이원론적(왕복운동) 유형 : 문화와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
1. 이는 복음의 윤리를 급진적 형태 그대로 수용하지 자연적인 지성에 타당하게 보이려고 재해석하지 않는다. 또 조형적 유형의 경우처럼 복음의 윤리를 미래에만 국한한다든지 영적인 귀족층이나 영적인 차원에 국한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한다.
2. 이는 자연과 문화의 요구사항(예: 출산, 자기보존, 질서유지) 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또한 하나님의 요구로 수용한다.
3. 복음의 가치관과 명령들, 그리고 문화의 가치관과 명령들은 서로 번역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4.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요구는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요구를 실현하지 못한 죄를 사람에게 깨우쳐 주고, 자연과 문화에 나타난 하나님의 요구는 사람이 단지 복음의 요구만 실현하고 자연과 문화를 내버리는 것이 죄임을 깨닫게 해준다.
5. 영과 육으로서, 초월적 인격과 경험적 개인으로서, 하나님 안에 있는 존재요 사회 속에 있는 존재로서, 본질과 실존으로서, 인간은 이중적 존재다. 하나님은 이중적 신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자비, 세상에 대한 분노와 형벌. 세상은 이중적 장소다. 창조된 것이자 타락한 곳, 좋은 곳이자 부패한 곳. 이런 식으로 현 상황은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한다.
6. 마르틴 루터가 단연코 이 유형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 에른스트 트뢸치, 라인홀드 니버, 고가르텐, 에밀 브루너 등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루터는 복음의 명령과 가치관은 도덕법과 사회법의 기능과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해 있다고 보았다. 그는 문화-자연적 세계의 명령들은 창조세계의 타락된 질서라기보다는 오히려 타락된 창조세계를 위한 질서라고 주장한다.
(참고) 1. 역설 유형은 그리스도는 문화와 섞이거나 일치되지 않지만 하나님은 교회와 세상을 각각 다른 방식으로 다스리신다고 본다. 하나님은 교회를 은혜로 다스리시며(은혜의 왕국) 세상은 권능으로 다스리신다.(권능의 왕국) 루터의 “두 왕국론”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유형은 세상과 교회가 서로 다른 두 원리 아래 갈등 없이 공존할 수 있다는 현실적응주의를 그 특징으로 한다. 이 유형은 그리스도인이 교회와 세상 안에 공존하면서 삶의 긴장을 덜어주는 유익은 있지만 세상과 타협하고 순응하여 세상과 동일화될 위험을 안고 있다.
2. 이 유형에서 신앙과 이성, 철학과 신학은 대립하지 않고 상호보완적으로 공존한다. 루터의 “두 왕국론”은 초기교회의 분리유형으로 복귀도 아니고, 중세의 종합유형의 계승도 아닌, 교회와 국가의 두 영역을 구분하여 두 영역의 공존과 병립을 인정하는 두 질서, 두 영역의 사회형성 이론으로 평가된다. 한 분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왕국과 세상의 왕국을 세우시고 각각의 왕국을 다른 방식으로 통치하시는데, 그리스도의 왕국은 은총과 자비로, 그리고 세상의 왕국은 진노와 형벌로 다스리신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영원한 나라, 하늘의 나라이지만 세상의 왕국은 시간의 나라, 장점적인 나라, 지상의 정부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복음과 말씀으로 인간의 내면적 영역을 다스린다면 세상 왕국은 율법과 강제력으로 외면적 영역을 다스린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구원을 목표로 하고 세상 왕국은 유지와 보존을 목표로 한다. 루터는 이 두 영역이 서로 섞이거나 혼동되면 안 된다고 말한다. 루터의 “두 왕국론”은 두 통치와 두 질서 속에 가는 그리스도인의 이중적 실존방식을 잘 설명해주며 이중 윤리의 합법성을 열어주는 현실주의적 세계관이다.
3. 이 유형은 세상의 삶에 긍정성과 정당성을 부여한다. 세상의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일상의 삶이 소중하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긴장하고 갈등하는 삶을 살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의 왕국에서는 신앙으로 방식으로 사랑과 성령의 다스림 안에서 살아가면 되고 세상 나라에서는 세상의 법과 권력의 강제력 아래 살아가면 된다. 이 두 나라는 서로 섞이거나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세상 왕국의 질서로 살아가서도 안 되고, 반대로 세상 왕국에서 그리스도 왕국의 질서로 살아서도 안 된다. 두 왕국론에 의하면 교회는 영혼의 구원만을 관장하며 세속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세상 나라는 하나님이 세우신 세상의 군주들에게 자율적이며 합법적으로 위임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불의한 통치자나 악법에 대한 저항권이 무력화되고 기성 체제를 유지, 보전하는 숙명적 묵종을 초래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존재 방식을 이원화하여 한 영역을 그리스도의 통치로부터 자율적인 영역으로 남겨둠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윤리가 이중적이 되며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적극적인 역할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 유형은 교회 밖의 영역을 긍정하고 하나님나라와 세상나라의 공존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현대와 같은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유용한 유형으로 평가된다.
C. 전환론적 유형(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
1. 이성으로 파악하는 자연법은 자연에 의해 매개되는 진정한 하나님의 법이 아니고 타락한 이성에 의해 파악되는 법이다. 이 측면에서 종합적 유형과 구별된다. 하지만 그 명령들은 타락한 질서를 위한 명령이 아니라 참된 질서로부터 나오는 타락한 명령들이다. 이 축면에서 이원론적 유형과 구별된다.
2. 이성에 의해 인식되는 가치들은 하나님을 위한 진정한 가치들이지 세상의 상대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가치들은 이성과 문화에 의해 혼란스러워졌고 하나님에게서 동떨어져 있다.
3. 복음과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명령들은 자연과 이성에서 나오는 명령들을 대치하지 않으며 복음을 통해 파악되는 가치들도 이성으로 파악되는 가치들을 대치하지 않는다. 복음과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명령과 가치들이야말로 진정한 궁극적 명령이요 가치들이다.
4.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선의 발견과 그분을 통한 궁극적 계명의 수용은 자연-문화에 내재된 타락된 질서를 온전한 상태로 회복하고 자연의 명령들을 재해석하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5. 이 유형은 복음을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는 새로운 법 유형과 비슷하지만 복음의 기능은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기 보다는 기존 사회를 전환시키는데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전환은 도덕적 성격과 더불어 궁극적으로 형이상학적 성격을 지닌 급진적 혁명을 의미한다. 이 측면에서 자연법 유형과 구별된다.
6. 이 유형에 속한 대표적 인물은 아우구스티누스를 들 수 있으며 칼뱅이나 조나단 에드워즈, 대체로 칼 바르트도 이 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참고) 1. 변혁유형은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주님이시므로 세상을 변혁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라고 본다. 요더와 하우어워스는 이에 반론을 제기하여 세상과 분리되어 교회의 독특한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세상을 변혁하는 진정한 방식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유형의 신학적 입장은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론에 기초한 문화변혁 신학이다. 신칼빈주의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대표적 사례이다. 이 유형은 그리스도의 전 포괄적 구속과 다스림에 근거한 역사참여와 문화변혁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자칫 승리주의나 정복주의로 오도될 위험이 있다.
2.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론은 그리스도의 통치가 영적, 개인적, 종교적 영역에 국한될 수 없으며 창조세계는 타락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새 창조를 향해 나아간다는 이론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구속은 악한 세력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이므로 현실구조를 변혁적으로 이끌어간다고 본다.
3. 루터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신앙의 영역에 제한한데 반해 칼빈은 세속국가의 영역도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루터는 불의한 세속 권력에 대한 저항권을 말하지 않았지만 칼빈은 그리스도의 저항권을 인정했다. 칼빈주의 전통에서는 세속영역의 신학적 의미를 인정하여 세속정치에 참여를 강조하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모든 영역에 이미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왕적주권론에 근거한다. 루터의 두 왕국론이 그리스도인의 이중윤리, 교회의 세속화, 세상과의 타협 등의 위험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왕적주권론은 신정주의적, 승리주의적 위험이 있다.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
2015-03-19 13:59:02
리차드 니버는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를 다음 5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였다. 니버의 이 유형구분은 세상과 기독교와의 관계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존재방식을 설명하는 모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초기 기독교나 재세례파의 경우에 보듯이 기독교가 소수 집단으로 존재할 때는 분리유형을 보이다가 점점 교세가 증가하면서 역설형을 거처 중세 기독교에서 보듯이 종합유형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이성의 시대와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이후 현대의 세속화된 기독교에서는 일치유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치유형에서는 기독교는 윤리종교화될 위험이 있다. 니버의 유형론에 의하면 초기교회는 분리유형에, 중세교회는 종합유형에, 루터교회는 역설유형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각각의 유형들은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설명하는데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고 어느 유형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1) 분리유형: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Christ against Culture) : 그리스도인이 세상으로 부터 분리되어 존재하는 모델로서 분리형의 대표적 사례는 초기 기독교와 재세례파이다. 대표적인 신학자는 초기 교회의 터툴리안이다.
2) 일치유형: 문화의 그리스도(Christ of Culture) : 일치유형은 기독교를 문화의 한 유형으로 보고 기독교를 문화와 일치시키고 조화시키는 유형인데 현대의 세속화된 기독교나 자유주의 신학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일치유형은 기독교를 윤리적 종교로 만들어 버린다.
3) 종합유형: 문화위의 그리스도(Christ Above Culture) : 종합유형은 신앙과 이성, 자연과 은총, 철학과 신학, 교회와 국가를 종합하려는 모델로서 대표적인 신학자는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이 유형은 상대를 향한 관용과 포용을 특징으로 하는데 중세의 기독교(Christendom), 로마카톨릭교, 일반은총이론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4) 역설유형: 문화와 역설적 관계인 그리스도(Christ and Culture in Paradox) : 역설유형은 그리스도와 문화는 섞이거나 일치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교회와 세상을 각각 다른 방식으로 다스리신다는 적응모델인데 대표적인 것이 루터의 두왕국론이 여기에 해당한다.
로버트 웨버는 니버의 5유형을 단순화하여 분리모델(Separation Model), 동일모델(Identification Model), 변혁모델(Transformation Model)의 3가지로 구분하였다. 니버의 분리유형과 역설 유형이 웨버의 분리모델에 해당하며 일치유형과 종합유형이 동일모델에 해당할 것이다.
1)분리유형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 신학적 입장은 이원론적 분리주의(Dualistic Separatism)라고 할 것이다. 초대교회, 제세례파, 공동체운동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모델의 특징은 도피적 반문화주의라고 볼 수 있는데 교회와 세상을 선명하게 구분하여 양자를 비타협적이고 대립적 구조로 보는 것이다. 이런 모델에서는 세상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교회의 생활만을 가치있게 여기는 이원론적 삶의 태도가 나타나며 부정적으로는 구조선 신앙, 방주신앙의 모습이 나타난다. 분리모델은 세상을 그리스도인과 지나치게 간격을 두게하여 세상을 등지고 멀리하는 도피적 그리스도인으로 머물게 한다. 그리하여 자칫 이원론자, 분파주의, 현실도피로 흐르게 된다.
2) 동일(적응)유형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그리스도 안에서 동시에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데 대표적인 신학적 입장이 루터의 두 왕국론(Two Kingdom Theory) 이다. 이 유형에 해당하는 형태는 루터교회, 시민종교(Civil Religion)일 것이다. 이 유형은 세상과 교회가 서로 다른 두 원리 아래 갈등없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인데 현실적응주의를 그 특징으로 한다. 이런 유형의 단점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순응적이고 타협적,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가지게 된다는 점이다. 이 유형은 그리스도인이 교회와 세상속에서 이중적으로 살아가는 공존형으로서 그리스도인이 교회와 세상안에서 동시적으로 살면서 세상속에서의 삶의 긴장을 덜어주지만, 반대로 세상과 타협하고 순응하여 세상과 동일화될 될 위험이 있다. 오늘날 번창하는 번영신학이 적응형의 유형일 것이다.
3)변혁유형
그리스도인은 온 세상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통치아래 세상을 변혁하는 책임을 맡았다는 것인데 그 신학적 입장은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론(Theory of Christ Kingship)에 기초한 문화변혁 신학이다. 이 유형의 대표적인 예는 신칼반주의 그리고 기독교적 세계관 운동이다. 이 유형은 그리스도의 전포괄적 구속과 다스림에 근거하여 문화변혁과 역사참여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승리주의나 정복주의로 오도될 위험이 있다. 변혁모델은 분리주의자들처럼 세상을 등지는 것도 아니요, 동일주의자들처럼 적응의 관점도 아니라 이 세계 역사가 그리스도에 의해 변혁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사고에 기초한다.
그리스도와 문화-분리모델
2015-03-19 15:52:26
분리 유형의 신학적 입장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분리되어 살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속해있고 세상은 죄와 마귀에게 속해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과 세상은 빛과 어두움, 그리스도와 벨라알처럼 대립하고 조화할 수 없으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거리를 두고 긴장을 유지하면서 반세상적 태도로 살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이방제국의 백성과 구별되어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 죄악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타락한 세상구조와 분리되어 의인으로서 살아가야 한다. 모세는 히브리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고 애굽의 질서에 동화됨을 거절하여 분리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은 제국적 질서에 순응하거나 동화되지 말고 분리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토라가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방식은 이방인의 삶과 구별된 거룩한 삶이다. 거룩은 이방백성과 구별되는 계약백성인 이스라엘의 삶에 대한 명백한 표지였는데 이런 삶의 방식은 제의법, 도덕법, 음식법, 절기법 등에서 다양하게 규정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은 불가능한 가능성의 윤리라고 불릴만큼 그리스도인과 이방인의 삶의 방식을 근원적으로 구분한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나그네요 행인이다. 그리스도는 이 땅의 도시에서 체류자이며,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나그네들이라고 하였다. 바울도 결혼관, 재물관에서 현세에 대한 강한 애착을 버리는 세상과 분리된 태도를 보여준다. 히브리서도 믿음의 선진들이 세상 문화와 융합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요한은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세상과 분리될 것을 요구한다.(요일 2:15-16) 요한 계시록은 기독교 공동체가 적그리스도로 상징되는 국가에 대항하는 순교적 삶을 묘사하고 있다. 초대교회는 기독교는 세상과의 철저한 대립(radical antithesis)의 종교로 고백하였다.
분리주의는 세상에 대한 부정적이고 비판적 태도에 근거한다. 이 세상은 죄로 오염되고 부패한 현실이며 죄많은 세상이라고 본다. 분리유형은 선하신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선함이나 구속을 통한 세상의 변혁보다는 세상의 전적 타락에 강하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 그래서 세상은 장차 멸망할 도성이므로 세상의 삶은 근본적으로 무의미하고 그리스도인이 잠시 머물다 가는 임시처소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이 아닌 제 세상, 천국을 동경하고 희망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직업활동이나 경제활동, 결혼, 성생활, 여가 취미 등의 일상적 삶은 종교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분리모델에서 신적 소명은 세상으로 부터 나오라는 부르심이지 세상으로 향하라는 부르심이 아니다. 그래서 직업활동은 신적 소명이 아니며 거룩과 세속은 철저히 구별된다. 구원이란 죄많은 세상으로 부터의 구원이다. 구원은 죄된 세상에서 탈출하는 것이며 죄악된 육체상태로 부터 벗어나는 영혼의 구원이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의 삶은 반세상적 삶이다. 경건한 신자의 삶은 세상에 대한 미움과 거부에세 출발한다.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을 택하든 그리스도를 섬기든 선택해야 한다. 죄악된 세상에서 신앙을 지키려면 세상으로부터 지신을 격리시켜 세상의 흐름과 세상적 가치를 멀리해야 한다.
분리유형의 역사적 형태외 믄제점
교회 탄생 후 3세기까지의 콘스탄틴 이전의 기독교는 카타콤의 교회요 소종파형으로 국가와 대립관계를 유지하면서 분리주의적 가독교 존재하였다. 당시 로마제국은 식민통치의 수단으로 종교화된 황제숭배를 요구하였으나 교회는 그리스도를 유일한 숭배대상으로 인정하고 황제숭배를 거부하였다. 그들이 일체의 국가적 통치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으나 세속적 통치권력을 상대화하였다. 그래서 때로 그들은 정치적 무정부주의자(.anarchist)로 오해받기도 하였다. 그들은 특정 직업을(국가공무원, 군인, 검투사, 전차운전, 조각가 등)을 거부하고 흥행이나 오락적 행위에 가담하는 것을 금지하는 등 자신들을 세속적 삶으로부터 구별하였다. 그 대신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형제, 자매애적 사랑, 타인에 대한 환대, 이방인,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일, 노예를 해방하는 일, 재물을 공유하는 일 들을 시행하였다. 터툴리안은 분리형 신학의 대표적 신학자였는데 그는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 기독교와 세상을 배타적이고 대립적으로 보았다. 디어게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그리스도인과 세상의 관계를 영혼과 육체의 관계로 비유하며 영혼이 육체안에 거하지만 육체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해있지 않다고 말한다.(WE ARE 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 16세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재세레파는 국가와 교회가 결합된 콘스탄틴적 기독교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국가교회(state-church)의 제도화된 형식으로서 유아세례를거부하고 원시주의(primitivism)를 추구하며 국가와 교회를 근본적으로 분리하였다. 대안사회를 추구하는 공동체 운동들도 반문화적 삶의 양식을 보여주는 존재 방식을 추구하며 교회가 세상 문회에 적응하고 순응하는 것을 거부한다.
분리유형은 이 세상을 죄악시하므로 현세적 삶을 부정적이고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책임과 역할에 소홀하게 된다. 1그리하여 신앙이 지나치게 왜소화되고 게토화된다. 그러므로 분리유형은 공적인 삶보다는 개인적인 경건과 종교활동에 의미를 찾고 기독교 신앙의 사회 공공적 기능을 갖지 못하여 복음의 사회적 차원과 복음의 사회변혁적 차원을 간과한다. 그래서 신앙의 보편타당성을 보여주시보다는 특이상과 정체성을 고수하는 일에 몰두하기 쉽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세상은 무엇인가? 성경은 부정적 의미로 또 긍정적 의미로 세상에 대하여 말한다.2 신약성경에서 부정적으로 말하는 세상은 악한 사회질서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치체계를 말한다. 한마디로 세상은 하나님의 주되심을 부정하는 삶의 모든 영역이다.3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펼펴지는 무대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긍정적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세상을 향해, 세상속에서 그리소 세상을 무대로 이루어진다. 성육신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 긍정되었다. 무엇보다고 세상은 선교의 자리이며 그리스도인이 문화명령을 수행하는 자리이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증거하고 구현해야 한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관계하면서 문화를 형성하고 창조해 나가야 한다.
각주 1
하워드 요더는 분리유형이 반드시 도피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과 투쟁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변혁 모델을 내세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실패한 이유는 세상을 긍정함으로써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가 세상과 더불어 사는 윤리운동 정도로 변질된데 있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강력한 antithesis가 없음으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세속화된..
각주 2
부정적 의미의 세상과는 분리가 필요하지만 긍정적 의미의 세상과 분리해서는 안된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세상과 분리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분리유병은 단순한 분리라기 보다는 대립, 구별의 의미가 강하다. 사실 분리유형에서 긍정적 의미의 세상과의 분리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각주 3
영지주의나 신플라톤주의는 창조세계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다. 물질이나 육체 자체가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영육이원론을 주장한다.
- 하워드 요더는 분리유형이 반드시 도피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과 투쟁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변혁 모델을 내세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실패한 이유는 세상을 긍정함으로써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가 세상과 더불어 사는 윤리운동 정도로 변질된데 있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강력한 antithesis가 없음으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세속화된 경우이다. [본문으로]
- 부정적 의미의 세상과는 분리가 필요하지만 긍정적 의미의 세상과 분리해서는 안된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세상과 분리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분리유병은 단순한 분리라기 보다는 대립, 구별의 의미가 강하다. 사실 분리유형에서 긍정적 의미의 세상과의 분리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본문으로]
- 영지주의나 신플라톤주의는 창조세계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다. 물질이나 육체 자체가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영육이원론을 주장한다. [본문으로]
그리스도와 문화-적응모델
2015-03-19 15:53:01
적응모델은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이중적 존재방식에 근거한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존재하는 방식과 세상나라에서 존재하는 방식이 동일할 수 없고 다른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적응모델에서 신앙과 이성, 철학과 신학은 대립하지 않고 상호보완적으로 공존한다. 적응모델의 대표적인 신학적 입장은 루터의 두왕국 이론이다. 루터의 두왕국 이론은 초기교회의 분리모형으로 복귀도 아니며 중세적인 종합모형의 수용도 아닌, 교회와 국가의 영역을 구분하여 두 영역의 공존과 병립을 인정하는1 두 질서, 두 영역적 사회형성론이라 평가할 수 있다. 루터의 두왕국론은 초대교회의 저항, 분리 모델도 아니고 중세의 일치,종합 모델도 아닌 적응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두왕국론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시는 이중의 방식을 전제하고 있다. 한분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왕국과 세상의 왕국을 세우시고 각각의 왕국을 다른 방식으로 통치하시는데 그리스도의 나라는 은총과 자비로 다스리시고 세상의 나라는 진노와 형벌로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루터는 이 두왕국은 서로 서로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영원한 나라, 하늘의 나라, 영적 정부이며 세상의 왕국은 시간의 나라 잠정적인 나라, 지상의 정부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복음과 말씀으로 사랑으로 내면적인 영역을 다스린다면 세상 왕국은 율법과 강제력으로 외면적 영역을 통치한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구원을 목표로 하고 세상 왕국은 유지와 보존을 목표로 한다. 이렇게 두왕국론은 두 질서, 두영역에 대한 이중의 통치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두왕국론은 두 통치와 두질서속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이중적 실존방식을 잘 설명해주며 이중 윤리의 합법성을2 열어준다. 이것은 교회와 신자의 실존적 현실을 인정하는 현실주의적 세계관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영적, 종교적 영역외에도 세상의 나라를 자율적 나라로 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으며 동시에 세상의 통치에도 속한다.
적응유형은 이 세상의 삶에 긍정성과 정당성을 부여한다. 세상의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잇고 일상의 삶이 소중하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그리스도 사이에서 긴장되고 갈등하는 삶을 살아갈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의 나라에서는 신앙의 방식으로 사랑과 성령의 다스림 안에서 살아가면 되고 세상 나라에서는 세상법과 권력 강제력 안에서 살아가면 된다. 이 두나라는 서로 섞이거나 혼동되면 안된다. 그리스도 나라의 방식으로 세상나라에서 살아가려고 해서는 안되고 세상나라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살아가서는 안된다. 그리스도는 세상 영역으로 침범하지 않으며 세상나라는 그리스도의 나라에 간섭할 수 없다. 세상의 권세들과 직업들. 기능들은 모두 하나님이 세우신 세상 질서이다. 두왕국론에 의하면 교회는 영혼의 구원만을 관장하며 세속정치에 개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세상 나라는 하나님이 세우신 세상 통치자들에게 자율적으로 위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통치자과 세상법에 복종하여야 한다. 이렇게 되면 불의한 통치자나 악법에 대한 저항권이 무력화된다. 따라서 두왕국론은 현존하는 사회질서에 대한 변혁논리가 약화되고 기성체제를 유지 보전하는 숙명주의적 묵종을 초래하게 만든다.3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존재방식을 이원화하여 한 영역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수용하고 다른 영역은 (그리스도의 통치로부터) 자율적인 영역으로 남겨둠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윤리가 이중적이고 분열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만들었다. 세상 나라를 자율적인 영역으로 인정함으로써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적극적인 역할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어거스틴의 두도성론도 루터의 두왕국론과 유사하다. 어거스틴도 세상 국가는 지상적이고 잠정적이자만 긍정적으로 인정하였다.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들, 가인과 아벨, 예루살렘과 바벨론, 알곡과 가라지와 같은 이중적 실존에 대한 묘사는 이런 두왕국적 사회론과 유사하다. 두왕국 유형은 교회밖의 영역을 긍정하고 하나님나라와 세상의 공존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현대와 같은 다원화 사회에서는 유용한 모델이다.
각주 1
두왕국론은 중세 국가교회를 극복하기 위하여 등장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와 왕국과 세상 왕국을 각각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영역으로 인정하여 두왕국이 상호보완적으로 공존하고 병립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스도의 왕국과 세상 왕국은 모두 하나님의 통치 아래있고 두 왕국은 서로 다른 질서와 통치원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서로 간섭하거나 혼동되면 안된다고 함으로써 그리스도인..
각주 2
그리스도 안에서는 무한한 용서가 필요하나 세상법에 의지해서 고발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법을 통해 세상질서를 유지하시기 때문이다. 세상의 권세와 법은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질서로 긍정된다.
각주 3
루터 자신도 악한 통치자에 대한 저항권에 침묵하였으며 루터의 윤리는 후대의 루터주의자들에게 이중영역과 이중윤리를 제공하여 세상 권력과 타협주의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초래하게 만들었다. 루터교회가 이차대전 당시 히틀러 정권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 두왕국론은 중세 국가교회를 극복하기 위하여 등장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와 왕국과 세상 왕국을 각각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영역으로 인정하여 두왕국이 상호보완적으로 공존하고 병립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스도의 왕국과 세상 왕국은 모두 하나님의 통치 아래있고 두 왕국은 서로 다른 질서와 통치원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서로 간섭하거나 혼동되면 안된다고 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두 왕국에서 이중적 삶을 사는 것이 정당화된다. [본문으로]
- 그리스도 안에서는 무한한 용서가 필요하나 세상법에 의지해서 고발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법을 통해 세상질서를 유지하시기 때문이다. 세상의 권세와 법은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질서로 긍정된다. [본문으로]
- 루터 자신도 악한 통치자에 대한 저항권에 침묵하였으며 루터의 윤리는 후대의 루터주의자들에게 이중영역과 이중윤리를 제공하여 세상 권력과 타협주의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초래하게 만들었다. 루터교회가 이차대전 당시 히틀러 정권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본문으로]
그리스도와 문화-변혁모델
2015-03-19 15:53:33
루터의 두왕국론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영적, 종교적 영역에 제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통치를 지상의 나라에 직접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지상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아닌 이성의 원리와 세속 군주에 의해 다스려 진다는 것이다. 루터의 두왕국론은 하나님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를 이원론적으로 분리시키지만 그 두 나라는 모순과 대립으로 만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세상에 개입하지 않고 세상나라는 이성과 자연법칙에 따라 존립하는 자율적 왕국이 된다. 그리스도인의 실존의 이중성(두영역, 두원리,두직분)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을 전제하고 있는 루터의 두왕국론은 교회와 국가의 이원적 분화를 초래한 근대적 세계형성의 토대로 작용했다.
변혁모델은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론에 기초하여 그리스도인은 온 세상을 주님의 통치 아래 변혁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론(Kingship of Christ)은 그리스도의 통치가 영적, 개인적 ,종교적 영역에 국한될 수 없으며 창조된 세계는 타락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새창조를 향해 진행되어 나간다는 이론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구속은 사탄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이므로 현실구조를 변혁적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변혁모델이 가진 두가지 전제는 첫째 그리스도는 개인의 구주를 넘어서 온세상의 왕이 되신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리스도의 구속은 영혼구원을 넘어서 우주적 구속이라는 것이다.1 변혁모델에서는 구속을 개인적, 인격적 차원에 국한시키는 것을 반대하고 문화와 세상의 구속으로 확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2 기독교 세계관이 그 대표적이다. 이런 사상은 그 뿌리를 개혁주의에 두고 있으며 칼빈에게 까지 거술러 올라간다.3
루터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신앙의 영역에 제한한데 반해 칼빈은 세속국가의 영역도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다고 보았다. 루터가 국가영역의 상대적 자율성을 강조했다면 칼빈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국가영역에도 군림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했다. 물론 칼빈도 신앙과 정치, 교회와 국가를 구분하였지만 루터와 달리 그리스도의 통치를 신앙과 종교 영역에 국한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루터는 불의한 세속권력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저항권을 말하지 않았지만 칼빈은 불의한 국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저항권을 인정하였다.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통치도 교회와 국가의 두 영역에 모두 미친다는 것이다.4
루터의 두왕국론에 의하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아무런 역동성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칼반주의 전통에서는 루터교보다 더 적극적으로 세속영역의 신학적 의미를 발전시키고 세속정치에 참여를 강조하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모든 영역에 이미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왕적 주권론에 근거한다. 하나님나라와 세상 나라는 이분법적으로 분리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동일시될 수도 없다. 이 둘 사이는 상충, 충돌과 함께 유비와 상응도 존재한다. 루터주의가 둘 사이의 상충의 측면을 강조한다면 칼반주의는 유비와 상응을 강조하는 입장이다.5
세상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변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세계관운동은 변혁모델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기독교세계관은 창조-타락-구속의 틀에 기초하는데 이 틀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따라서 선하게 창조된 세상은 비록 인간의 범죄로 타락하였지만 하나님의 창조계획은 포기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인하여 새창조를 향하여 변혁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속은 단순히 죄의 용서, 중생, 칭의만이 아니라 창조의 회복, 새창조를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세계관은 구속을 창조의 관점에서 보고 창조와 구원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구속의 범주를 인간과 피조계 전영역을 포괄하는 것으로 본다. 타락이 영적 개인적 차원에 국한하지 않고 세상의 구조악을 가져온 것처럼 그리스도의 구속도 영젹적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총체적이고 우주적인 차원을 갖는다는 것이다.6
개혁신학 전통의 그리스도 왕적 통치론은7 두영역이 존재하지 않고 오직 한분 그리스도의 통치만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세상은 그리스도밖에서 자율적으로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고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이 그리스도의 통치에서 벗어난 곳은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세상문화 전체는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변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은 바로 사회, 문화적 변혁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변혁모델에서는 종말은 세계멸절이 아니라 세계변형이라고 주장한다. 현재적 문화의 결과물들은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벧후 3:10-12) 새하늘과 새땅이 도래하는 새 예루살렘에서 통합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나라의 현재와 미래는 급격한 단절이 아니라 구속적 변혁과정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주장한다.
루터의 두왕국론이 그리스도인의 이중윤리, 교회의 세속화, 세상과의 타협의 위험성이 있다면 칼빈주의 혹은 그리스도의 왕적 주권론은 신정주의적, 승리주의적, 교회의 세계지배의 위험이 있다. 이 이론은 타종교나 비종교적 사회질서에 대해 열광주의적 정복이나 전투적 방식으로 접근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우주적 통치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세계정복이 아니며 세상을 기독교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이지 그리스도인의 통치나 교회의 통치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해 정복과 지배라는 승리주의적 방식이 아니라 사랑과 섬김 그리고 고난을 당하는 십자가적 방식이어야 한다.
각주 1
창조-타락-구속이란 패러다임에서 분리모델이 타락을 강조하고 죄된 세상과의 결별을 추구한다면 두왕국론은 타락과 구속의 중간지점을 강조하면서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현실적으로 인정한다. 이와 달리 변혁모델은 구속을 강조하면서 구속을 넘어 창조로 나아간다.
각주 2
분리 모델에서는 구원의 개인적, 영적 차원을 강조하므로 교회와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보게 되며 전도를 통한 영혼구원을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소명을 본다. 이에 반해 변혁모델에서는 구속을 우주적 차원으로 보므로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문화명령을 성취하는 것으로 본다.
각주 3
존 스토트, 로날드 사이더 같은 복음주의권에 속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개인과 영혼에 춧점을 맞추면서도 사회변혁을 주장한다.
각주 4
"만유의 주권자이신 그리스도가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영역은 인간의 삶에서 한 치도 없다.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명구도 이와 유사하다.
각주 5
루터주의와 칼반주의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의 범위에 대한 것이다. 루터주의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신앙의 영역에 국한시킨 반면 칼반주의는 인간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대하였다. 두번째 치이점은 루터주의가 세상나라의 자율성을 인정하고 하나님나라와의 조화, 공존을 강조했디면 칼반주의는 세상나라의 자울성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나라가 세상나라를 변혁하..
각주 6
개혁주의 세계관에 의하면 구원이란 새창조를 향헤 계속적으로 진행중에 있는 변혁적이고 종말론적인 과정인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나라의 종국적 완성의 도상에서 이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각주 7
칼바르트도 바르멘신학선언(1934년)에서 그리스도의 왕적주권론을 주장하였다. 바르맨선언은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영역은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영젹,교회적, 사적 영역에 제한하고 다른 삶의 영역을 자율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주권을 부인하는 것임을 강력하게 천명한다.
- 창조-타락-구속이란 패러다임에서 분리모델이 타락을 강조하고 죄된 세상과의 결별을 추구한다면 두왕국론은 타락과 구속의 중간지점을 강조하면서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현실적으로 인정한다. 이와 달리 변혁모델은 구속을 강조하면서 구속을 넘어 창조로 나아간다. [본문으로]
- 분리 모델에서는 구원의 개인적, 영적 차원을 강조하므로 교회와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보게 되며 전도를 통한 영혼구원을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소명을 본다. 이에 반해 변혁모델에서는 구속을 우주적 차원으로 보므로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문화명령을 성취하는 것으로 본다. [본문으로]
- 존 스토트, 로날드 사이더 같은 복음주의권에 속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개인과 영혼에 춧점을 맞추면서도 사회변혁을 주장한다. [본문으로]
- "만유의 주권자이신 그리스도가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영역은 인간의 삶에서 한 치도 없다.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명구도 이와 유사하다. [본문으로]
- 루터주의와 칼반주의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의 범위에 대한 것이다. 루터주의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신앙의 영역에 국한시킨 반면 칼반주의는 인간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대하였다. 두번째 치이점은 루터주의가 세상나라의 자율성을 인정하고 하나님나라와의 조화, 공존을 강조했디면 칼반주의는 세상나라의 자울성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나라가 세상나라를 변혁하여야 함을 강조한다. [본문으로]
- 개혁주의 세계관에 의하면 구원이란 새창조를 향헤 계속적으로 진행중에 있는 변혁적이고 종말론적인 과정인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나라의 종국적 완성의 도상에서 이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본문으로]
- 칼바르트도 바르멘신학선언(1934년)에서 그리스도의 왕적주권론을 주장하였다. 바르맨선언은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영역은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영젹,교회적, 사적 영역에 제한하고 다른 삶의 영역을 자율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주권을 부인하는 것임을 강력하게 천명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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