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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켈트 영성이야기(A Celtic Sprituality)- 필립 뉴엘

켈트 영성이야기(A Celtic Sprituality)- 필립 뉴엘

2014-10-25 16:46:09


펠라기우스

 

  켈트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신학자는 4세기에 등장한 펠라기우스였다.  펠라기우스 저작에 나타난 켈트 영성 전통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은 하나님의 생명이 드러나는 창조의 선함을 강하게 강조하는 것이다. 그의 많은 가르침은 구약성서의 지혜전통으로 부터 유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를 이런 전통의 완성이며 지혜와 겸허함의 완전한 모범으로 보았다. 다시 말하여 켈트 전통의 강조점은 교회의 교리와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살아있는 지혜의 생명에 있는 것이었다. 펠라기우스는 380년 초에 로마로 여행하였다. 그는 켈트 전통에서 그러했던 것 처럼 평신도 수사로서 로마에서 살았다.

 

  펠라기우스에 대한 비판은 두 가지 점에서 시작되었다. 한 가지는 그가 여성들에게 성서읽기를 가르쳤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갓 태어난 어린아이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여성들을 교육시키고자 했던 열망은 펠라기우스가 하나님의 형상은 남성이나 여성 모두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한 것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형상의 선함은 지혜와 은혜를 통하여 성숙되고 자유럽게 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출생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본래적인 축복과 창조의 더렵혀지지 않은 선함을 지니고 있다고 가르쳤다. 이런 점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과 인간 안에 내재하는 악함과 본질적 불의를 강조하는 로마 제국 교회에서 발전되어 온 영성과 강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펠라기우스가 인간의 본질적 선을 강조하는 것은 악의 현존과 인간을 지배하는 악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여 인간의 마음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선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선이 잘못된 행위와 악의 실행으로 인하여 숨겨지고 가리워진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 안에 자리한 어떤 어두움보다 더 깊이 하나님의 빛이 있으며 그 빛은 어떤 어두움도 가리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펠라기우스에게 구원이란 악의 지배에서 해방되는 것이며 본질적인 우리의 선한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선함은 상실되거나 혹은 지워진 것 처럼 깊숙히 묻혀있으나 하나님이 우리 속에 심으신 그 선함은 그대로 거기에 있으며 해방될 것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에게 그리스도가 가져온 구원이란 바로 그러한 해방이며 우리 안에 있는 선함이 자유롭게 되는 것이며 참으로 우리 삶에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의 사악함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 대부분의 본질적인 선함에 대한 확신을 상실케 하고 우리의 삶 가운데 선이나 악을 선택하는 의지의 중요성을 가볍게 여기도록 한다며 염려하였다. 

 

  펠라기우스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지만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 있음을 언급하면서 구원의 은혜가 교회에 의하여 주어진다면 그 은혜는 사람의 본성을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지배를 받던 선한 본성을 해방시켜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내포하는 이러한 견해는 아우구스투스적 모델과 아주 다른 것이다. 교회와 세상의 구별을 강조하기 보다는 교회는 이미 모든 생명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하나님의 선(사람의 본성)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구원의 관리자가 아니라 해방자가 된다. 416년에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프리카 주교들은 주교회의를 통하여 펠라기우스를 정죄하였지만 이듬해 교황은 로마에서 소집한 회의에서 이러한 갈등을 해결코자 하였는데 이 회의에서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은 전적으로 옳고 정통으로 판결되었고 펠라기우스가 인간의 본성적 선을 강조하는 것은 악의 우세함을 강조하는 아우구수티누스의 강조점과 조화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아우구수티누스는 교황의 교서를 유념하지 않았고 이후 서방교회는 하나님이 부여한 인간의 선한 본성에 대한 시각을 상실하기 사작하였다.  이러한 손실은 근본적으로 세상을 거룩하지 못한 영역으로 바라보는 교회의 관점을 함축하였다.

 

  교황의 교서에 실망한 아프리카 주교들은 국가의 개입 노선을 따랐고 418년 제국의 칙령으로 펠라기우스는 정죄되고 추방되었다. 이 때 펠라기우스를 반대하여 작용한 힘들은 완전히 정치적인 것이었음이 확실하다. 펠라기우스는 파문되어 추방당한 후 웨일즈로 돌아와 웨일즈 수도원의 보호를 받았던 것같다.  주목할 점은 이후 수백년 동안 영국의 켈트 교회에 나타난 많은 영적 특성들이 명백히 팰라기우스이 영서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영국에서 그리스도 영성의 가장 초기 특징들을 점검해 보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이러한 작업은 오늘날 우리의 고유한 영성을 발견하도록 돕는다. 태어날 때 부터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다는 것과 본질적으로 죄있는 존재라는 것을 믿는다면 이것이 우리의 영성을 위하여 함축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참된 영성과 어린아이의 순결함, 단순함, 결백함과 선함 사이에 생명력있는 연관성이 없다는 것은 무것을 뜻하는가?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을 우리가 부인한다면 우리는 본래적 선함이 없은 존재이고 우리의 영성은 우리 안에  심어진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영성이 우리의 본성과 이질적인 것인가?  다른 사람들이 교회의 성례전 외부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람들을 본질적 선함이 결여된 존재로 대하게 된다면 우리의 영성은 제도 교회의 구성원이 아닌 우리의 많은 이웃에게서 나타나는 믿음과 덕으로부터 배울 것이 없다는 말인가?

 

  펠라기우스가 파문을 당하고 영국으로 돌아올 당시인 5세기 초에 게르만의 로마 침략으로 로마 군대는 영국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펠라기우스는 은신을 위해 켈트세계로 돌아왔고 로마는 지중해 지역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 동안에 앵글로족과 색슨족은 영국으로 들어왔다. 이후 200년 동안 켈트교회는 로마교회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켈트 영성은 발전하였고 꽃을피웠다. 켈트 세계에서 펠라기우스와 동시대인 니니안(360-432)은 로마에서 훈련을 받고 고항인 쿰부리아에 돌아와 로마의 도시적 교구 구조가 아닌 동방의 수도원 유형에 기초하여 스코틀랜드의 픽트와  브리튼족에 대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으며 비슷한 시기인 430년 경 패트릭은 아일랜드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초기 아일랜드 선교에는 창조의 선함에 대한 자각과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 하늘이 현재적으로 함께하는 것에 대한 감각을 표현하는 켈트 영성의 중요한 특징들이 나타난다. 초기 아일랜드 교회의 기도와 예술안에는 하늘과 땅,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시간과 영혼이 분리되지 않고 얽혀있다. 패트릭 당시에 불리던 유명한 브리스트 플레이트(Breastplate) 찬송에는 창조된 것의 선함에 단순히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 안에는 무엇인가 창조되지 않은 것의 현존, 즉 하나님의 임재를 주목하는 것이 나타난다. 아일랜드로 패트릭의 선교가 이어지던 시기에 거기로 아주 풍부한 켈트 영성이 밀려들었다. 로마인들에게 영향도 상대적으로 덜 받고 앵글로 색슨의 무력침입과 문화적 방해도 받지 않은 섬인 6세기 아일랜드에는 패트릭이 가져론 그리스도교와  이전의 두루이드 종교의 자연신비주의 전통이 창조적으로 만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존 스코투스 에리우게나

 

  켈트 선교가 계속되어 영국 남부로 이동하였을 때 로마로부터의 선교는 다시금 정립되어 597년 켄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영국 선교를 시작하였다. 거의 200년 동안 지속되던 켈트 선교와 로마 선교의 분리는 이제 막을 내리게 되었다. 664년 노섬브라아의 휘트비 총회에서 로마 선교의 방식을 선택하게 되면서 컬트 선교는 위축되게 된다. 로마 선교가 베드로의 전통에 기초한 것이라면 켈트 선교는 요한의 전통에 뿌리박은 것이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을 강조하는 요한의 전통은 켈트 선교에서 펠라기우스처럼 인간의 본질적 선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휘트비 총회의 비극은 베드로의 전통과 요한의 전통 가운데 한 가지 만을 택한 것이다. 두 전통은 모두 복음의 전통이며 창조적 긴장 가운데 조화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총회의 결정은 켈트 선교의 관점을 근본적으로 거부하였다.  

 

  9세기의 철학자였던 존 스코투스 에리우게나는 창조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와 성서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함께 포착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성서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처럼 자연 안에서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듣기를 확신하였다.   에리우게나는 9세기 초 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9세기 중반에 프랑스로 가서 프랑스 왕인 대머리 챨스의 왕정에 있는 학교장이 되기도 하였다. 에리우게나는 위축되어 가던 켈트 영성을 서방제국의 한 가운데로 가지고 갔던 것이다. 그는 창조에 대한 강조와 범신론 때문에 펠라기우스이 생각을 부흥시킨다는 이유로 고소당하였다. 에리우게나의 사상은 성 요한의 신비주의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그는 요한은 가장 깊은 진리를 관찰한 자로 묘사하였다. 요한복은 서언에 대한 설교에서 에리우게나는 하나님이 만유 안에 계시며 삶의 본질이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하나님은 무로부터 모든 것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유한 본질로 부터, 하나님의 참 생명으로 부터 만물을 창조한 것이다. 모든 것 안에 비추이는 빛이 바로 이 빛이다. 그러므로 에리우게나는 세계를 하나님의 현현, 곧 하나님의 가시적인 자기 계시로 보게된 것이다. 그래서 에리우게나는 하나님에 대하여 배우는 방법은 성경의 글자들과 창조의 종을 통한 것이라고 믿었다. 에리우게나에 따르면 무형적인 것은 유형적인 것의 원천이며 하나님의 생명은 외형적이고 물질적인 모든 것의 원천이 된다. 우리 생명의 본질이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것이고 하나님 안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에리우게나는 외형적 삶의 복합성의 기초가 되는 하나님의 통전성(unity)과 단일성(simplicity)을 깨달을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에리우게나는 "자연의 분배"라는 자신의 대표작에서 창조의 본질적 선함에 대한 켈트적 영성을 더욱 발전시킨다.  그는 자연 안에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악인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와 모든 피조물은 가리위져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본질적 선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에리우게나는 우리 자신과 존재하는 것의 내면에 어두움과 악이 있을지라도 더 깊은 본질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선함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은혜를 자연과 대립되는 것으로 본 것이 아니라 자연과 연합하고 협력하여 자연을 회복시키거나 혹은 그 본질적 선을 해방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은혜는 내적인 시력을 치유하고 우리 내면 깊숙히 존재하는 선을 다시 보도록 우리 눈을 열어주는 것이다. 에리우게나의 사상과 저술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임을 말하는 범신론으로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거의 사상을 묘사하는 더 정확한 개념은 모든 것 안에 하나님이 내재히신다는 "만유재신론"일 것이다. 1225년에 그의 주요 논문이 교황에 의해 정죄받았고 1685년에는 교황의 금서 목록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에리우게나의 영성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나 존 타울러와 같은 후대 신비주의자들에 의해 다시 표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