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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칼 라너의 타종교관에 대한 비평- 문상철

칼 라너의 타종교관에 대한 비평- 문상철

2014-10-15 16:01:54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신학정론 2003년 가을호 기고 논문)

칼 라너의 타종교관에 대한 비평

 

문상철

<선교학•전임강사>

 

I. 서론

 

칼 라너(Karl Rahner)는 그의 제2차 바티칸 공회에서의 역할로 인해 20세기 로만 카톨릭 교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로만 카톨릭 신학계 뿐만 아니라 개신교 신학계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그는 특별히 그 포괄주의적인 타종교관으로 인해 신학계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시도했다.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개념은 그의 포괄주의적인 신학의 핵심에 속하는 사상이다. 이 개념은 인간의 초월적 본성과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라는 신학적 명제들 위에 세워졌다. 이 개념은 라너 자신이 인정한대로 전통적인 로만 카톨릭 신학의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주장이었다. 전통적인 로만 카톨릭의 신학적 입장과는 다른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라너는 교리의 발전이라는 개념을 통해 교리적 입장의 전환 가능성에 대해 논리적인 변호를 한다.

 

이 글은 이상과 같은 라너의 세가지 주요 명제들에 대해서 성경신학적 및 철학적 신학의 관점에서 그 타당성을 검증하고 비평하려고 한다. 이것은 포괄주의뿐만 아니라, 다원주의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그의 신학적 토대에 대해 근본적인 재검토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궁극적으로 타종교들에 대해 사도적 전통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나아가서 무엇이 진정한 성경적 구원론인가를 생각하는 데도 통찰력을 제공해주리라고 생각한다.

 

II.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개념

 

칼 라너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했던 제 2차 바티칸 공회에서의 가장 논란이 되는 교리는 다른 종교들에서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에게만 알려진 방법으로” 가능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새로운 교리의 배후에는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개념이 있다. 이 개념은 현대 로만 카톨릭 신학뿐 아니라, 기독교 신학 전반에 걸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특별히 이 개념은 신학자들 사이에 포괄주의적이고 다원주의적인 사상을 자극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바티칸 II는 명시적으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를 채택하지는 않았지만, 특별히 Lumen Gentium(교회에 대한 교리적 헌장)에 그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Lumen Gentium 2:16은 “자신의 잘못이 아닌 사유로 그리스도의 복음이나 그 교회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은혜에 의해 감동을 받아, 그 행동에 있어서 양심의 작용을 통해 아는 대로 그의 뜻을 행하려고 한다면, 그들 역시 영원한 구원을 받을 것이다” 고 분명히 천명하고 있다.  Nostra Aetate에서도 카톨릭 신자들은 “신중하고도 관용적으로 다른 종교의 신자들과 토론하면서 협동할 것”을 요청 받고 있다. 이러한 조항의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앙과 삶의 방식을 증거하면서 비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영적 및 도덕적 진리들을, 또한 그들의 사회적 삶과 문화를 인정, 보존, 격려하도록 하는 것이다.”  라너 역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그의 개념이 공회의 가르침과 호환된다고 보았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개념에 있어서 라너의 주된 논지는 “기독교가 비기독교적 종교의 신자들을 단순히 비기독교인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간주될 수 있고,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차후에 다른 조항에서 더 조심스럽게 설명되고 있다. 이에 대한 나중의 조항들을 읽으면 우리는 그가 독자들로 하여금 이 용어의 자체적 의미보다는 이 용어가 실제로 의미하는 바에 따라 판단하기를 원한다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노력 가운데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용어에 의해 의미하지 않는 것을 정리하였다.

 

라너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조심스런 설명을 더하고 있다:

“모든 사람을, 그가 은혜를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와 상관없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사실이다. 그 자신의 기본적 결정에 있어서 그의 존재가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것을 진정으로 부인하거나 거부하는 사람, 결정적으로 자신의 구체적 존재에 대항하도록 자신을 설정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유신론자,’ 심지어 익명의 ‘유신론자’로 간주될 수 없다.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모름지기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만이 그렇게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모든 종교를 전체적으로 균등히 정당화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면서, 그 종교들 사이의 혼란과 무질서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고 보는 종교 상대주의의 태도, 혹은 다른 종교들 사이의 변환과 강조점의 차이가 전체적으로 볼 때 비본질적인 것들과만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태도”를 취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는 또한 오해로 말미암아 선교의 중요성이 약화되지 않도록 주의하기도 했다: ‘익명의 기독교’에 대한 이 논의가 선교, 설교, 하나님의 말씀, 세례 등의 중요성을 경감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주 어리석은 것이 될 것이다” 고 하면서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오해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오해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념에 아무런 변경도 가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붙들린 바 된 사람은 모든 의미에 있어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 오늘날 어떤 경우에도 비기독교적인 종교가 여전히 개인의 구원을 위해 긍정적인 기능을 할 것이라는 것은 완벽하게 납득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 사람이 자유로운 행위, 혹은 은혜에 의해 고양된 그리스도에 대한 근본적 관련성에 있어서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또 숙고는 없더라도 그의 영의 이 움직임의 기본적 최종성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진정한 신앙 행위를 하는 것인데, 이 최종성은 이미 계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 그는 말한다.  동시에 그는, “이 초자연적 최종성이, 명백한 숙고는 없지만 자유롭게 받아들여진다면, 거기에는 우리가 ‘익명의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존재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라너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사상을 기독교 인간론으로부터 끌어낸 두 가지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첫째 전제는, “지식과 자유에 있어서 인간 정신의 무제한적 초월적 본성의 교리”이며, 둘째는 “직접적인 하나님에 대한 소유에서 그들의 ‘초자연적 숙명’에 도달한 가능성 속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제시되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효과적 의지의 교리”이다.  첫번째 전제는 소위 “초자연적 실존”(supernatural existential)의 개념과 상관이 있으며, 둘째 전제는 “신적 자아 수여”(the divine self-bestowal)의 개념으로 이어진다.  이 두 개념은 기본적으로 라너가 발견한 기독교 인간론에서 끌어낸 것이다. 이 두 관심 영역 외에도 겉으로 보기에 성경 외적 사상의 출현이 정당화 되어야 한다. 그는 ‘교리의 발전’의 개념을 통해 그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 한다. 이러한 개념 또한 성경의 빛 속에서 면밀히 검토될 필요가 있다.

라너 신학의 한 특징은 그것이 인간론적 전제들에서 출발한다는 데 있다. 라너는 주장하기를,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련성 속에서 절대적 초월자로서 이해되는 순간, 신학에 있어서 ‘인간 중심성’과 ‘신중심성’은 반대 개념들이 아니라 두 측면에서 본 한 개의 같은 개념이라고 한다.  따라서 라너에 있어서 철학적 신학과 계시 신학은 모두 초월적 인간론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 우리는 신학적 논의의 결과가 성경적 기준에 의한 평가로 이어지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여러 사람들에 의해 지적된 바대로, 이러한 인간에 대한 이해는 라너 신학의 특징일 뿐 아니라,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하는 신학자들에게서 발견될 수 있다. 따라서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포괄주의적 사상에 대한 적절한 이해와 평가는 ‘초자연적 실존’과 ‘신적 자아 수여’의 두 개념들을 면밀히 검토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이 두 개념에 대한 비평은 자연스럽게 현대 종교다원주의의 근본 사상에 대한 비평이 될 것이다.

 

III. 인간의 초월적 본성의 개념

 

라너에게 있어서 인간은 “무제한적인 지식과 자유의 초월성을 소유하는 존재”이다.  인간의 초월성에 대한 이 일반적 전제는 내적 동력, 매개, 의식적 인지, 도덕성의 개념 속에서 효과적으로 설명된다. 

첫째로, 그는 인간의 내적 동력이 절대 존재, 절대 희망, 절대 미래, 선 자체, 무조건적인 옮음,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에게로 향한다고 설명한다.  

 

둘째로, 그는 범주적 대상을 통해서 일어나는 매개는 종교적인 개념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이 물질이 자유롭게 완전한 책임성과 자아의 결정성의 입장에 도달하는 한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초월적 관련성은 일상적이고 세속적이며 물질적인 매개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인지적 능력의 일부인 사고는 반드시 초월적 본성을 규정하는데 있지 않다. 이 때문에 명백한 무신론자는 그 본성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이른 바 “무주제적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개념 외에 다름 아니다.  

 

넷째로, 이 초월성을 가진 인간은 그의 긍정적인 도덕적 결정에 있어서 양심의 무조건적 부름을 인정할 때 익명의 유신론자가 될 수 있다. 무조건적 양심의 작용으로 인해 열리는 궁극적 가능성의 조건은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존재와 관련된다. 라너에 있어서 이 도덕성은 본질적으로 영적이며 자유로운 인간성의 절대적 가치와 절대적 존엄성에 기초해서 세워진다. 

 

다섯번째, 초월적 본성을 지닌 인간은 역사적 정황에 개입되어 있다. 즉 인간의 이러한 영적 존재로서의 초월성은 역사적 정황을 넘어선 인간 삶의 분리된 부분으로 남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구성된 초월적 하나님 경험이다.  

 

여섯번째, 모든 인류에 현존하는 초자연적 실존은 그 동력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불가변적 정점을 향한다. 달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신-인으로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여하심에 있어서 으뜸적이고 클라이맥스적인 정점이다. 같은 맥락에서 인간의 본질적 존엄성은, 그가 하나님 자신을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에 대해 자신을 열 수 있고 열어야만 한다는 사실에 있다.  

 

일곱번째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그들의 양심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교회의 영 속에서, 그들에게 연장된 하나님의 생명 속에서 연합되어 있다.  

초월적 인간론의 이러한 측면들은, 비록 지식의 객관적인 면과 주관적인 면이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지라도, 인간이 주체이며, 객체나 사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초월적 인간론에서 인간은 스스로 계획하고 개방된 미래를 기대하는 존재이며, 희망하고 하나님에 의해 모든 절대적 미래를 포용하도록 능력을 부여 받은 존재이다.  주체로서의 인간의 이러한 본래적 본성은 “인간 삶의 전적인 성취”를 추구하는 모더니티에 호소한다. 이것은 세계가 분명히 인간의 처분에 달린 측면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 주체의 개념에서 다른 주체들과의 인격적 의사소통 속에서 존재하는 주체의 자유 개념이 일어난다. 

이 초월적 인간론은, 라너의 가장 체계적이면서도 시적으로 쓰인 최후의 저작에서 절대적 신비의 현존 속에서의 인간의 개념에 의해 강화된다. 그는 신비를 초월 속에 거하는 거룩하고, 명명할 수 없고, 무한한, 처분된 속성으로 묘사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 속에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하나님은 스스로 모든 것의 기초를 놓은 어디 곳에서나 존재한다. 다른 한편으로, 세계는 하나님의 초월적 토대와 하나님의 심연 속에서의 궁극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라너의 초월적 인간관은 확실히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혔다. 그것은 두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하나님과 인간의 영적 만남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였다. 초월성에 대한 그의 논증은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적 조명의 필요성이라는 관점에서는 적절치 못한 부분이 있다. 그의 가장 큰 오류 중의 하나는 인간의 본성에 있어서의 죄성의 효과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인간의 본래적 초월성이 모든 인간의 원죄와 그 효과, 사단의 공격 앞에서의 인간의 무력감 속에서도 보존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측면을 등한시 하는 인간론은 모두 나이브하다고 할 것이다.

 

라너는 그의 기독교 신앙의 토대(Foundations of Christian Faith)에서 초월적 인간론에 대해 2장을 할애 한 후 인간의 죄악된 본성에 대해 다루면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항해서 결정을 내릴 가능성에 대해 토론한다. 그 세부적 내용에서 라너는 인간의 죄악된 본성의 힘에 대해 온전히 인식하지 못한다. 그의 논리는 미묘하게 죄의 효과를 극소화하는데, 그는 “자유의지의 하나님에 대한 부정은 하나님에 대한 초월적이며 필수적인 긍정에 기초하고 있으며, 다른 방식으로는 일어날 수 없다고 본다. 여기서 자유의 부정적 결론의 초월적 가능성은 그 필수적 긍정에 의해 타당성이 인정된다. 모든 지식과 자유 행위는 초월적 용어와 근원으로 인해 활성화 된다.  이러한 입장은 신학적 중심 주제인 초월성의 개념과 함께 가능해지는 일종의 형식 논리의 결과이다. 이런 논리적인 논증 속에서 그의 죄에 대한 낮은 관점은 계속된다:        

우리는 먼저 세상에는 진정으로 주관화된 악의 가능성이 강하고도 위협적으로 존재해왔다는 것을 가정할 수 있지만, 이 가능성이 실체가 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자유에 대해 치명적이고, 인류의 발전 속에서 일어나야 하는 불행한 상황들이 낮은 데서 시작되어 위를 향하는 발전으로부터 결코 발생하지 않았으며,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가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라너는 또한 원죄가 그 도덕적 질에 있어서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달되는 것을 부인한다. 그는 원래의 자유 행위로부터 비롯된 개인적 죄책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없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향하거나 인간에 반대되는 개인적 초월성에 대한 존재론적 부정이기 때문이다. 원죄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그의 개인적인 견해라기보다 카톨릭 신학의 입장이다. 그는 원죄를 비유적인 의미로 받아들이지만, 명료한 단일적 의미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선재 은총에 대한 의도적인 강조와, 죄와 원죄에 대한 의도적인 무시로 말미암아,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은 자기 계시를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롭고 선한 의사 결정을 하기 이전에 성화시키는 특질을 부여하도록 한다는 주장을 하게 한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금 이러한 라너의 주장들이 과연 성경적인 교훈인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게 된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바울의 언어는 라너의 관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고 말한다 (롬 3:23). 또한 그는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다” 고 말한다(롬 5:14). 나아가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고 말한다. 이러한 성경적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라너는 인간론에 있어서 지나치게 낙관적임을 알 수 있다. 인간론에 있어서 우리는 비관적일 필요도 없으며 낙관론 일색일 수도 없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죄성 사이에서 성경적인 균형을 가질 필요가 있다. 

 

IV.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의 개념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개념의 두 번째 중요한 사상적 토대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이다. 그것은 보편적이고 초자연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기 원하시므로 다른 종교 속에서도 구원을 받을 사람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원죄와 개인적인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진정으로 모든 사람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며, 이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의 보편적 구원을 의도하시기 때문에 삶의 어떤 정황에서도 인간은 구원을 얻게 될 진정한 가능성을 가진다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이 구원 의지는 초자연적 은혜의 전파에 의해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은혜는 진정한 구원 행위와 신앙 행위의 조건을 바꾸는 변형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라너는 두 가지 요소를 다루고 있다.

 

첫째, 이 은혜는 인간 자유의 지속적인 가능성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칭의 자체의 형태로 표현되거나 칭의를 가져다 오는 수용으로 표현되거나, 아니면 직접적이고 의도적인 거부로도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실존적 실체에 대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의지 속에서 개인에게 지금 주어지고 효과적으로 부여되는데, 그 으뜸가는 원칙 속에서 그리고 더 개발되어야 하는 씨로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로, 이 은혜는 인간의 의식을 변형시킨다. 그것은 인간 정신의 자연적 행위의 범위를 벗어나 존재하는 형식적 대상을 가져온다. 따라서 반드시 하나의 대상이나 온전히 생각되어진 것으로 인식되지 않을 것이며, 의식적으로 알려진 인간 자체의 무제한적 초월성의 근본적 본성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측면 외에도 다른 중요한 내용들이 관련되어 있다. 셋째로, 신적인 자기 부여는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뿌리, 영적 본성의 가장 깊은 곳에까지 관통하며, 거기서부터 인간에 영향을 미치며, 그의 이러한 본성의 방향을 바꾸어 하나님의 가까운 임재를 향하게 한다. 즉, 그것은 이 본성에 내적 동력과, 하나님을 향한 궁극적 경향, 즉 은혜를 부여한다. 

 

넷째로, 모든 인간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로 인해 모든 개인은 긍정적인 구원의 방편을 가져야 하는데, 적어도 인간에게 초자연적 구원을 소유할 가능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와 구약 성경 밖에 존재하는 종교들이 인간적인 숙고나 인간의 사악함에 대한 인식에서 한 종교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인 결과라기보다, 자아 의지적인 결정의 일환으로 종교를 결정한 결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다섯번째로, 비기독교적인 종교들은 원칙적으로, 그리고 그 자체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오심과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의해 추월되고, 쓸모 없게 되었다. 이것은 기독교의 팽창이 다른 종교들의 적절성을 폐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논의는 상호 호환성이 없는 두 명제들 사이의 딜레마를 나타낸다. 라너가 강조하는 첫번째 측면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모든 인간이 구원 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두번째 측면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 구원이 부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두 상반되는 관점 가운데서 그는 출구를 발견하려고 한다. 즉, 어떤 방식으로든 모든 인간이 교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어야 하며, 이 능력은 단순히 추상적인 관점과 순전히 논리적인 가능성의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적이고 역사적이며 구체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 의지를 너무 단순하게 본다는 것이다. 라너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잘못 사용하기도 한다:

성경은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모두를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말한다 (딤전 2:4); 하나님께서 홍수 후에 노아와 맺은 화평 언약은 결코 폐지된 적이 없다: 그 반대로, 하나님의 아들은 그의 자기희생적인 사랑의 비견할 수 없는 권위로 모든 인간을 포용하면서 그것을 완성하셨다. 

 

라너는 이 구절들을 석의함에 있어서 균형을 잃고 만다. 디모데전서에서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 인한 자유의지의 잘못된 기능 및 사용과의 긴장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이 논의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구절들은 얼마든지 더 있다. 에베소서 1:4,5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의 개념을 가지고 예정에 대해 감사하다는 입장을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피력하고 있다. 그는 이 예정의 은혜의 수혜자로 다른 종교의 추종자들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성경은 선택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12 사도들, 바울과 다른 많은 제자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그릇들이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의 언약적 관계 역시 선택적으로 발전된다.

 

라너의 보편적 구원의지의 개념에는 또한 논리적 오류가 있다. 그것이 그야말로 보편적이려면, 하나님의 구원의지는 사람이 아무리 완악하고 죄악되더라도 인간이 저항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라너가 원한 만큼, 폭이 넓다면 비도덕성이 문제가 되어서는 안된다. 다른 종교들을 폐지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기독교가 전파되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게 된다. 그의 철학적 신학은 여기서 한계를 보이고 있다.

 

V. 교리적 발전의 개념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개념은 사도 시대에는 교회에 없던 내용이다. 많은 점에서 그 개념은 전통적인 로만 카톨릭 신학을 뒤집어 놓은 것이다. 라너는 이러한 일관성의 결여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한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라너는 표면적으로 대치가 되는 교리들의 조화를 꾀하고 있다.

 

마리아에 대한 교리로부터 예를 들면서, 라너는 그 교리가 역사적 이야기 속으로 나중에 들어와야 했던 점을 부각시킨다. 처음 복음이 전해졌을 때 이 교리는 현재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지만, 나중 교회가 새로운 교리를 발전적으로 전개했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그의 교리에 대한 관점은 정적이라기보다 동적이다. 그의 ‘교리의 발전’의 개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우선적으로, 라너는 계시된 진리는 항상 그대로의 내용이며, 정확하게 진리로 남는다. 즉, 그것은 실체를 가리키며 항상 구속력이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의 계시는 사도 시대의 종말과 함께 종결된, “최종적이며, 능가할 수 없는 계시”이다. 이런 주장과 함께 그는 역사적 상대주의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둘째로, 모든 인간적 주장은, 심지어 신앙이 하나님의 구원 진리를 표현한다는 주장까지도 유한하다. 이것은 그 주장들이 전체적인 진리를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앙이 표현되는 모든 공식이 그 진리를 보존하는 동안에도 원칙적으로 다른 진리 주장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또한 역사적 사실 속에서 전해진 것이며, 사도들이 구두로 선포한 내용이기도 했다. 이 진리들이 기독교 신앙의 토대와 어떤 관련성 속에서 대두되느냐 하는 “진리의 계층 구조”의 개념은 그 자체의 한계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단번에 영원히 선포된 계시 진리의 정점을 중심으로 진화하고 회전하는 신학에 대해서 우리는 의문을 가진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의 발전뿐만 아니라 교리의 

발전이 있으며, 신학의 역사뿐만 아니라 (같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이후에도) 신앙의 역사가 있음을 인식한다.          

 

넷째로, 계시는 하나의 구원적 사건이다. 오직 그 시점에서만,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만 진리들이 전달된다. 구원 역사의 이 지속적인 대사건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능가할 수 없는 클라이맥스에 도달했다.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확실히 세계에 주셨다.  라너는 계시의 본성과 관련하여 이 개념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계시는 단순히 유한한 것들의 합이 아닌 것이다.

 

다섯번째로, 교리의 결정은 교회의 신앙에 속하며, 교회는 자신을 사실상 단순한 “편의성”의 고려에 의해서,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정적 지식을 완전히 소유한 것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교회는 “권위 있는 교육 기능”과 함께 수직 계층적으로 구성된 교회를 의미한다. 교회는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인식의 기관을 가지고 있어서, 그 기관에 따라 어떤 것이 객관적으로 단순한 인간의 숙고의 결과 이상인, 신학적 행위의 결과로 등장하는지 말할 수 있다.  

 

여섯번째로, 계시의 즉각적인 명제들 속에 단지 가상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것을 설명하는 종료의 지식은 ‘계시’로 불릴 수 있고, 그렇게 불려야 한다. 또한 그 결과 교회에 의해 엄격한 의미에서의 신적 신앙의 대상으로서 선포될 수 있다. 그러나 카톨릭 신학에 있어서 다수 의견은 “추론된” 명제들은 단순히 인간적인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일곱번째로, 원래적인 명제들과 교리적 발전의 결과로 도달한 것들 사이의 관련성은, 한 명제 속에서 공식적이거나 가상적으로 암시되는 것과, 성령의 지원과 빛 속에서 진행되는 논리적인 절차에 의한 명시적 설명 사이의 연관성으로 구성될 수 있다.  교도권의 기능은 보존하고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교도권은 성령의 지원에 의존한다. 

 

요약하면, 라너는 성령과 말씀, 성경과 전통의 조화로운 역사 속에서 교리의 진화의 개념을 설명한다:

성령과 말씀은 모두 원칙적으로 사도들의 것과 같은 경험의 영원한 능동적인 잠재성으로부터, 비록 전통 속에서 전해져 내려온 사도적 말씀에 따라 지지되어 사도들의 경험에 의존하며 그것을 연장하는 경험이라고 할지라도, 말씀, 성례, 권위의 전승을 통해 사도들과 연결된 것에서 끊어진다면 역사적인 뿌리의 상실로 인해 결코 계속해서 살 수 없을 것이다.  

 

라너의 결론은 발전된 교리가 성령의 인도함 아래에서 사도들과 성경의 권위만큼이나 구속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류가 없는 것은 교회라는 결론 속에서 로만 카톨릭의 전통적인 교회론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라너의 이러한 관점은 성경과 전통의 관계에 대해 통찰력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개신교의 관점과는 거리가 있는데, 특별히 개신교의 오직 성경 주의와는 상반된 면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복음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교리의 발전 개념은 시대와 문화를 넘어선 사도적 복음 이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어서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다. 

 

먼저, 라너는 두 교리 혹은 교도군 사이에서 모순의 가능성에 대해 적절히 다루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한 좋은 예는, 로만 카톨릭 교회가 개신교회를 “이단”으로 정죄한 트렌트 공회와, 같은 신학적 입장을 가진 집단에 대해 화해적 제스처를 하면서 이들을 “분리된 형제들”이라고 한 제2차 바티칸 공회 사이의 모순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트렌트 공회는 종교개혁자들이 주창한 칭의론을 분명히 거부하였지만, 이제 그들은 두 교회 사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에큐메니컬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분위기의 변화”로 치부할 수 없는 근본적인 변화인 것이다.  따라서 교리의 발전이라는 이 개념은 어떻게 명백한 모순을 일으키지 않고 교리가 변경 가능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지를 설명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둘째로, 라너의 성경과 전통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는 모호성 혹은 모순이 있다. 그는 성경의 말씀이 항상 살아 있는 교회의 말씀이라고 보면서, 이 말씀이 계속해서 교회의 살아 있는 자체적 전통에 의해 지탱된다고 본다. 간단히 그 말씀은 이 교회의 자체적인 전통의 살아 있는 증거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너는 이렇게 말한 다음 다른 논리로 전통의 우선성을 주장한다:

한편으로, 성경은 그 자체로서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이 재생되고 교회 안에서 전해지는 전통의 결과이며 양식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의 전통의 양식이며, 전통의 객관화의 양식이기도 하다. 그것은 항상 교회의 전체적 과정, 심지어 구전 전통의 과정에 덧붙여져 있다. 

 

만약 이 주장들이 상호 호환성이 있는 것이라면, 철학적이고 이성주의적인 신학의 한계만을 나타내는 것일 것이다.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우리는 성경의 권위와 관련하여 모순된 결론으로 연결되는 논리적 전개의 적절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베드로전서 1:24, 25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VI. 결론

 

칼 라너는 제2차 바티칸 공회의 주된 엔지니어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현대 신학에서 포괄주의는 물론 다원주의적인 사상을 시작한 인물이다.  그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개념은 순수하게 성경 신학적 토대 위에 세워졌다기보다 철학적 명제들 위에 세워졌다. 여러 전제들 가운데서 세가지 명제들에 대해서 이 논문은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라너 자신이 밝혔듯이 인간의 초월적 본성과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라는 두 가지 명제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개념에 초석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이에 더하여 교리의 발전 혹은 진보의 개념은 모순되어 보이는 교리적 차이에 대한 그의 대답으로 주어지기도 했다. 

 

인간의 초월적 본성에 대한 교리는 긍정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 즉 죄의 효과를 소홀히 여기는 점에서 오류가 있다. 라너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지나치게 낙관적임에 틀림없다. 바울의 자신의 죄성에 대한 탄식은 우리의 복음 이해와 인간관에 있어서 핵심을 이룬다. 

하나님의 구원 의지에 대한 교리 또한 지나치게 단순화된 입장으로 비판 받아 마땅하다. 이 교리에는 성경적 자료들과의 충돌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체의 논리에 오류가 있다. 하나님은 인류에 대한 그의 관계에 있어서 보편적이기도 하시지만, 구체적이시다. 특별히 구속 역사와 언약적 관계에서 하나님은 항상 거룩한 그의 백성을 일방적 기준에 의해 선택하셨다.

 

발전된 교리의 개념은 많은 비성경적 명제들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현대 로만 카톨릭 교회의 변경된 교리적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개발되었지만, 사도적 전통의 계승의 가능성에 대해서 상반된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라너는 이 개염을 통해 균형을 잡으려고 하지만, 그의 노력은 그의 교리적 입장을 더욱 모호하게 할 뿐이다. 하나님의 불변의 말씀이 교회 전통이나 교도권과 충돌할 때 종교 상황의 변화에 따른 신학적 변화라는 입장은 충분한 설득력을 보여주지 못한다. 이 개념에 대해서도 그는 견고한 교리적 토대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개념은 성경적 자료에 의해서 지지되지도 않고, 논리적으로도 타당성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있다. 이 개념에 대한 자세한 분석의 결과로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성경적 실체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 자극적이지만 비성경적인 개념은 성경의 계시의 말씀과 사도적 전통에서 벗어났으며, 성경과 성령의 일관된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교리이다.

         

VII. 참고 문헌란

 

1. 1차 자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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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heological Investigations. Vol. I- God, Christi, Mary and Grace. Tr. By Cornelius Ernst. Baltimore: Helicon Press, 1961.

          . Theological Investigations. Vol. II- Man in the Church. Tr. By Karl-H. Kruger. Baltimore: Helicon Press, 1963.

          . Theological Investigations. Vol. IV- More Recent Writings. Tr. By Kevin Smyth. Baltimore: Helicon Press, London: Darton, Longman & Todd, 1966.

          . Theological Investigations. Vol. VI- Concerning Vatican Council II. Tr. By Karl -H. and Boniface Kruger. Baltimore: Helicon Press, London: Darton, Longman & Todd,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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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heological Investigations. Vol. X- Writings of 1965-67 2. Tr. By David Bourke. New York: Herder and Herder, 1973.

          . Theological Investigations. Vol. XVI- Experience of the Spirit: Source of Theology. Tr. By David Morland. New York: The Seabury Press, 1979.

          . I Remember. Autobiographical T. V. Interview Material, 1985. 

          . Theological Investigations. Vol. XXI- Science and Christian Faith. Tr. By Hugh M. Riley. New York: Crossroad, 1988.

          . Foundations of Christian Faith: An Introduction to the Idea of Christianity. Tr. By William V. Dych. New York: Crossroad, 1989.

Schroeder, H. J. O.P. Canons and Decrees of the Council of Trent. St. Louis: B. Herder Book Co., 1941.

 

2. 참고 문헌

 

Berkouwer, G. C. The Second Vatican Council and the New Catholicism. Tr. By Lewis B. Smedes.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1965.

Hick, John. The Metaphor of God Incarnate: Christology in a Pluralistic Age. Louisville, Kentucky: Westerminster/John Knox Press,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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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nia, Kaas, “Justification and Roman Catholicism” in D. A. Carson ed. Right With God: Justification in the Bible and the World. Published on Behalf of the World Evangelical Fellowship by the Paternoster Press and Baker Book House,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