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와 다윗약속 (언약)의 의미 -송제근
2014-10-08 14:59:46
하나님 나라의 역사와 계시에 나타난 다윗약속 (언약)의 의미 -송제근
목차
1. 도입
2. 다윗약속(언약)에 대한 피상적 이해와 그 이유
2.1. 단어에 대한 피상적 관찰
2.2. 청교도 신학의 언약에 대한 오해
3. 다윗약속(언약)의 정의와 내용, 그리고 형성과정
3.1. 다윗약속(언약)의 정의
3.2. 다윗약속(언약)의 내용
3.2.1. 다윗의 근본적 관심 (삼하 6장)
3.2.2. 하나님의 집에 대한 다윗의 열심 (삼하 7:2)
3.2.3. 하나님의 열심있는 반응 (삼하 7:5~17)
3.2.4. 다윗의 열심있는 감사 (삼하 7:18~29)
3.3. 다윗약속(언약)의 형성과정
3.3.1. 그의 생애 이전의 예견과정
3.3.2. 다윗의 생애를 통해 나타난 다윗약속 (언약)의 준비과정
4. 이스라엘 역사와 계시에 나타난 다윗약속(언약)의 의미
4.1. 시내산언약/모압언약과 다윗약속 (언약)과의 관계
4.2. 새시대(왕국시대)의 기초로서의 다윗약속 (언약)
4.2.1. 다윗의 실정 속에서도 진행된 다윗약속 (언약)의 실제
4.2.2. 솔로몬 왕권사와 남북조 왕국으로의 분열사 속에서의 다윗약속(언약)의 실제
4.3. 왕국멸망 후의 다윗약속(언약)의 의미
4.3.1. 요시야왕의 종교개혁의 의미와 한계 (왕하 22~23장)
4.3.2. 여호야긴왕의 재등극의 의미 (왕하 25:27~30):
5. 신약시대와 계시에서의 다윗약속(언약)의 의미
5.1. 예수께 성취된 다윗약속(언약)
5.2. 언약제도의 통합으로서의 그 메시아의 사역
5.3.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인 교회를 통해서 나타나는 다윗약속(언약)의 적용
5.4. 제 3경륜으로 이루어지는 땅 위의 하나님나라의 붕괴와 첫번 메시아의 재출현
6. 결어
1. 도 입
우리는 어떤 한 사람을 세 가지 관점에서 평가해 볼 수 있다. 먼저 개인적 관점에서 어떤 인물들을 볼 때 위대한 인품을 소유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또는 공동체적으로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는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개인이 역사적 공동체적 역할을 하였지만,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과 인격적이고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그 역사를 이루어간 사람의 경우는 아주 드물다. 시저와 같은 인물은 로마를 탄생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그 최후가 비참하였고, 그가 한 기여가 과연 우주전체 역사에 의미를 가진다고 본인이 보람을 가지며 확신하였는지 명확하지 않으며, 실제로 그런 기여를 하였는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우리가 연구하려는 다윗약속(언약)의 주인공은 바로 이런 세 가지 점들을 다 이룬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다윗은 그 생애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그 중간의 치명적인 약점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역사의 기초를 놓았고, 사후에도 명확하게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다윗이 이런 인물로 완성되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은 하나님이 그와 맺은 다윗약속(언약)이었다. 이런 점이 우리가 다윗약속(언약)을 깊이 연구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2. 다윗약속(언약)에 대한 피상적 이해와 그 이유
다윗약속(언약)만큼 신학자들이나 평신도들이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그런 피상적인 이해의 결과는 다윗약속(언약)의 기초와 내용, 적용범위까지 왜곡하거나 축소 혹은 과장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2.1. 단어에 대한 피상적 관찰
가 장 일반적인 피상적인 이해는 언약이라는 단어를 너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일어난다. 이런 경향의 역사는 종교개혁 이후 아주 오래되었기 때문에 그 뿌리가 깊어서 성경학자들조차도 그런 일반적인 이해를 따라간다.1 언약이라고 번역되는 히브리어 berith는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천편일률적으로 하나로만 해석할 때 어려움이 생긴다. 이 히브리 단어의 여러 가지 뜻은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
i) 단순한 약속으로서의 의미(promise),
ii) 선물, 하사품으로서의 의미(grant),
iii) 명령, 법규로서의 의미(law),
iv) 인격 당사자들끼리 공적관계를 법적으로 맺는 의미 (covenant) 2
따라서 성경에서 이 단어가 쓰이거나 그런 개념이 있을 때에 예민하게 그 상황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노아 berith(창 9장)는 전형적으로 첫 번째인 ‘약속’이란 의미를 가진다. 명령과 법규로서의 berith는 구약에서 많이 쓰였고 법이나 규례 등의 용어와 같이 쓰이기도 한다 : “네가 내 berith를 지키면”. 이 표현은 다시 말하면 “네가 내 명령을 지키면” 이라는 의미가 된다. 물론 이것이 이 단어의 다른 의미에서 적용된 것이기도 하다.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가 이미 만들어진 것에 근거해서 그런 언약관계의 법규를 지킨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네 번째로,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인격당사자인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공적인 관계인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며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 되는 관계를, 합법적으로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출애굽 때- 시내산; 입가나안 때 - 모압과 세겜) 이루는 의미이다.
그런데 다윗약속(언약)은 이것들과 성격이 다른 것으로 위에서 말한 세 번째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즉 다윗의 행동과 삶의 동기가 하나님이 지극히 기뻐하신 것이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은 다윗에게 엄청난 선물을 주시는 것으로서의 berith인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고대근동에 왕이 충성스러운 신하에게 보답으로 땅을 선물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 나와있는 유사한 예는 소위 비느하스의 선물(약속)이다 (berith hashalom 민 25). 이스라엘의 타락에 대하여 비느하스가 특심한 열심으로 창을 들고 대범하게 범죄한 사람을 죽인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내린 선물이다. 즉 비느하스의 후손이 영원히 대제사장의 직분을 행하도록 허용한 것이다. 이런 은혜로운 선물을 내린다는 약속이 berith라는 단어가 쓰인 다른 용례와 혼동될 수 있다. 이 용례에는 이미 어떤 인격당사자끼리 관계가 맺어진 전제 위에 이루어지는 어떤 사실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계를 공적으로 시작하는 것과 이미 이루어진 관계 속에서 특정한 선물로서의 약속을 내리는 것 사이에 예민한 구분이 필요하다.
2.2. 청교도 신학의 언약에 대한 오해
여기에 청교도신학, 개혁교회의 정통신학이 언약을 일반적으로 설명한 것도 다윗약속(언약)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도록 한 이유가 되었다. 정통신학에서 언약을 설명할 때 고대근동에서 실제하였던 조약, 입양, 결혼과 유사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근거를 두지 않았다. 하나님은 언약이라는 고귀한 개념을 하늘에서 뚝 떨어뜨리셨고, 그것으로 성경의 모든 신학구조를 만들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언약은 거룩한 개념이며 초월적인 개념으로 여겨졌으며 이후의 모든 이런 전통 하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언약을 이러한 의미에서 신비한 신학적 개념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은 철저하게 그 당시에 사람들이 누구나 쓰고 있던 세상적 제도를 응용하여 만든 것이다. 언약은 인간끼리의 공적인 관계형성에서 생기는 사랑과 의무, 관심과 책임 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언약은 천상에서 온 것이 아니라 철저히 세상바닥에서 생겨진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은 당신과 이스라엘과의 관계형성의 도구로 삼기 위하여 할례를 베푸셨다.
그 결과 생겨난 것 중의 하나가 은혜언약과 행위언약 혹은 무조건적 언약과 조건적 언약을 구분하려고 한 것이다. 은혜언약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로 부어주시는 것이며, 행위언약은 인간의 행동의 조건이 전제된 언약으로 이해한 것이다. 창세기 2장과 호세아 6장 7절에 근거하였다고 하는 소위 아담언약이 행위언약으로 여겨졌고, 그 이후의 언약(예를 들면 노아언약)은 모두 은혜언약으로 여겨졌다. 3 소위 아담언약은 또한 조건적 언약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리고 시내산언약은 은혜언약에 속한다고 하면서도 조건적 언약으로 여겨졌다. 한편 족장언약은 다윗언약과 함께 무조건 언약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런 구분들은 berith란 단어가 쓰인 용례 뿐 아니라, 성경의 전체적 내용까지도 혼돈하게 만들었다.
다윗언약은 무조건적 언약처럼 보이나 충성스러운 신하에게 내리는 선물과 같은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것이 아니라 한 가계와 맺은 것이고 그 가계가 하나님 나라에서 하는 역할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시내산언약과 차원이 다른 것이며, 열성스러운 비느하스를 위해서 그의 후손이 대제사장직을 행할 것을 선물로 준 평화의 언약과 동일한 차원의 것이다.
3. 다윗약속(언약)의 정의와 내용, 그리고 형성과정
3.1. 다윗약속(언약)의 정의
여 기서 우리는 소위 다윗언약이라고 인정된 것에 대해서 새로운 정의를 내려야 한다. 이미 말한 대로 사무엘하 7장의 내용을 따라서 ‘하나님이 다윗과 그 가계에 내리는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다윗선물로 표현할 수 있으나, ‘선물(grant)’이라는 한글 단어가 법적인 성격을 띄지 못하므로 ‘다윗약속’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일반적으로 인정된 상식적 인식의 전환을 위하여 ‘다윗약속(언약)’이라고 중도적인 표현을 사용하였다.
3.2. 다윗약속(언약)의 내용
다윗약속(언약)의 내용은 사무엘하 6~7장에서 극적으로 표현되었다.
3.2.1. 다윗의 근본적 관심(삼하 6장)
전 (前)시대인 사사시대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의 핵심적 상징인 증거막에 대한 관심을 새시대, 왕조시대를 여는 다윗은 이미 사무엘하 6장부터 표현하였다. 언약의 증거궤를 다윗성으로 옮겨오는 일의 조심스럽고 열성스러운 과정을 자세하게 묘사하였다.
3.2.2. 하나님의 집에 대한 다윗의 열심 (삼하 7:2)
이어서 사무엘하 7장 2절에서 그 궤를 모신 장소를 자신의 화려한 백향목 궁과 비교할 때 초라한 것을 간략하지만 강력하게 묘사하였다. 그것도 하나님의 종인 나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묻는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강력한 감탄문인 reei na (behold, ‘보라’)로 시작한다. 이어서 간결한 대조구문으로 자신과 하나님의 궤를 소개한다 :
주어(‘나’) + yosheib (분사 ‘거하도다’) // 주어(‘하나님의 궤’) + yosheib (분사 ‘거하도다’).그러나 본격적인 비교는 각자가 거하는 장소의 재질에 있다 : ‘백향목집’ // ‘천막’.
3.2.3. 하나님의 열심있는 반응 (삼하 7:5~17)
이런 간략하지만 열성적인 관심에 대해 하나님은 아주 열성스럽게 응답하신다. 먼저 다윗의 열심있는 행동에 대해서 하나님은 긍정적으로 감탄하면서 표현하였다(7:5). 그 감탄은 의문문(ha)형식으로 표시되었다 : “네가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고 싶어한다고 ?” 그리고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으로서 엄중한 선언문 형식으로 아주 강력하게 표현되었다(7:11) : “여호와가 너에게 선포하노라 ! : 집을 + 너를 위하여 + 건축하리라 + 여호와가 !” 여기서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시면서 주어로 ‘나’가 아닌 ‘여호와’로 표현하였고 공적인 선포를 나타내는 동사(nagad hif.)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 말 자체도 강력하게 표현되었다. 그 속에서도 주어가 ‘나’가 아닌 ‘여호와’이며, 문장순서도 앞에서 표현한 것과 같이 ‘집’이란 목적어를 가장 먼저 놓았다. 전체적으로 언어유희(wordplay)를 통하여 하나님도 다윗의 대조법에 반응하여 다윗의 이런 행동과 자신의 행동을 대조시키신다.
“네가 나를 위하여 집을 짓겠느냐 ?” (5절)
(성전)
//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지으리라 !”(11절)
(왕조)
그 러나 이것 이전에(삼하 7:8~11) 이미 하나님은 다윗의 열심과 정성에 감동하여서 개인적인 차원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약속을 하셨다. 뿐만 아니라 이것 이후에도(삼하 7:12~16) 다윗이 가장 염려할 수 있는 문제를 확신시키셨다. 즉 자신의 왕조가 비극적으로 끝나버린 사울의 왕조와 비슷한 최후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불안을 하나님은 원천적으로 봉쇄하셨다. 다윗의 후손이 아무리 죄악을 범하고 하나님께 인생 채찍과 사람 막대기로 징계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징계를 받아도 사울의 경우처럼 다윗왕조 자체가 없어지는 결과는 없을 것이라는 확약을 주셨다. 이것은 다윗의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역사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약속이다.
이러한 약속은 또 다른 차원의 자발성과 적극성의 승리로 나타났는데 그것은 이동형이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을 증거하던 것이 한 장소, 다윗의 처소에 고정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행정적인 통치의 중심과 종교적인 통치의 중심이 광야시절이나 사사시대와 마찬가지로 왕정 아래에서도 일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을 다윗이 의도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그렇데 된 것이다. 이것은 다윗약속(언약)의 놀라운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하나님은 이것을 다윗 시대가 아니라 솔로몬 시대에서 실현되도록 하셨지만. 이것은 다시 다윗약속(언약)을 향하여 그것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 것이었다.
3.2.4. 다윗의 열심있는 감사 (삼하 7:18~29)
다윗은 하나님의 이 과분한 약속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잘 알았다. 또한 그것을 하나님은 신적인 방식이 아니라 낮아져서 ‘인간의 규례대로’, 인간적인 방식으로 표현해 주신 것까지도 알았다(7:19).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과 그 역사의 특별함을 찬양하였다(7:22~24).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시내산언약의 기초가 다윗 개인과 가계에 주신 약속의 기초임을 드러낸 것이다. 이어서 자신의 집이 영원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축복을 간구하고 있다(7:28~29). 이로서 하나님이 다윗을 향해서 허락한 선물로서의 다윗약속(언약)의 큰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이제는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의 역사 속에서 실현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3.3. 다윗약속(언약)의 형성과정
인격적 존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한 사건의 의미는 그 인격들의 전체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다윗약속(언약)은 이것이 주어진 사무엘하 6~7장의 사건에서 뿐 아니라, 더 넓게 하나님과 다윗의 역동적인 전체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관계는 첫째로 다윗의 생애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예견되어졌다. 둘째로 이 관계는 그의 생애동안, 특히 다윗약속(언약)이 시작되기 전에도 역동적으로 진행되어졌다. 그가 유일한 왕으로 부상되었을 때에 그 모든 예견들의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3.3.1. 그의 생애 이전의 예견과정
오경과 역사서의 전반부가 그의 생애가 시작되기 전에 어렴풋한 예견들을 하고 있다.
(1) 창 37~39장 : 먼저 이 장들에서 우리는 특이한 역사 서술을 본다. 분명히 현재의 역사를 진행시키는 데는 요셉의 사건(37,39장)이 중요하지만 전혀 엉뚱하게 유다의 사건이 그 중간(38장)에 서술된 것은 창세기 자체로 해결할 수 없는 내용이다. 유다의 이 사건은 창세기에 다른 어떤 중요성을 보여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에 다룰 창세기 49장의 야곱의 아들들에 대한 예언에서 유다가 탁월하게 예언되었다 하더라도 이것이 창세기 38장의 유다에 대한 수치스러운 기록과 서로 상반되는 효과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창세기 49장은 유다를 영웅적으로 취급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정당하다면, 38장에서 자부인 다말에게서 자신의 자녀를 출산하는 치욕적이며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의 주인공이 바로 49장의 그 유다인 사실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 것인가를 설명해야 한다. 이 설명은 창세기 자체로서 완결될 수 없는 것이며, 오경의 한계를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우선 8장에서 유다의 사건이 갑자기 소개된 것은 수치스럽고 영광스러운 것을 솔직히 기록하여 인간의 연약과 실수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자비의 역사를 기록하는 창세기의 관점에서는 상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창세기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창세기 자체로는 명확하지 않고, 그 이후의 역사와 기록에서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었다.
우선 창세기 38장은 앞으로 다말->라합->룻->밧세바 라는, 유다족과는 아주 비정상적인 관계를 이루는 여인들을 통해서 이어지는(마 1장), 심지어 이세벨의 피를 관통하여 나타나는 다윗왕조의 가계가 어떻게 영원할 수 있을까 하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의 시작을 형성한다. 결국 이것은 인간의 죄악으로 저질러진 역사의 과오를 메시아 자신의 피로 청소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선포하신다. 그런데 이 점은 다윗약속(언약)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약속(언약)은 왕적 직분의 영원한 수행만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제사장적 직분은 왕적 직분의 영구성을 나타내는 다윗약속(언약)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언약의 근간을 이룬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최초의 역사로 옮아갈 수 있다. 창세기 3장 15절을 전통적으로 하나님이 최초에 허락하신 위대한 복음으로 본다면 여자의 후손으로 나타나실 메시아가 뱀의 머리를 부수심으로 악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처리하실 것이다(롬 16:20). 그렇다면 이것은 역사적으로 주어졌던 다윗약속(언약)의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 예견이다. 그 메시아가 자신의 발꿈치가 물리는 일 즉 자신이 일시적으로 죽음을 경험하는 일을 통하여 이루실 대제사장적 언약사역을 미리 선포한 것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이미 오경 속에는 다윗약속(언약)의 씨가 내재한다고 할 수 있다.
(2)창세기 37, 43, 44, 49장 : 이 장들에서 우리는 유다의 자비롭고(창 37:26~27), 의기에 넘치며 지도자로서의 책임감이 넘치는 행동(창 43, 44장)과 관련하여서 공적인 지도자로 설 것이 예언되는 모습(창 49장)을 본다. 이 세 가지는 유다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데 연관되는 본문들이다. 그러나 이 본문들도 창세기 속에서 그 충분한 의미를 추론해 낼 수 없는 것이다. 이 본문들은 위의 본문과 함께 우선 창세기 속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즉 유다를 영웅적으로 그리며, 한편에서는 유다의 혐오스러운 모습을 동시에 그리는 것은 창세기의 전체적인 메시지에 상반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족장들에게서도 하나님 앞에서 업치락 뒤치락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자비로 새로워지는 모습을 충분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본문들이 궁극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 지는 오경의 한계를 벗어나야 찾을 수 있다.
창세기 37, 43, 44, 49장은 유다지파 중에서 통치자가 나올 것을 예견한 것인데 이것은 유다 개인의 지도자 자질이 많은 책임있는 행동을 위기의 상황에서 한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행한 행동이 자신과 자신의 후손의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역사결정권이 인간에게 있다는 표현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역사를 형성하는데 적극성을 가지도록 하는 하나님의 격려라고 볼 수 있다. 이 적극성은 다윗 자신에 의해서 충분히 나타났고 이것을 하나님은 귀하게 보시고 역사를 초월한 약속(언약)을 주신 것이다.
(3)라합과 아간의 사건(수 2~7장) : 이미 밝혔듯이 라합의 사건은 아간의 사건과 동일한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4 이스라엘의 구원과 세상(여리고)의 심판이 공존하듯이, 한 이스라엘 사람의 심판과 한 이방인의 구원이 공존하게 된 것이다. 특이하게도 아간은 유다지파였지만 거기서 심판을 받았고 라합은 그 유다지파로 편입되게 된 것이다. 즉 라합은 살몬의 아내가 됨으로서 유다계열에 합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마 1:5, 룻 4:21). 이 사건은 구원과 심판 사이에서 운명이 극단적으로 엎치락 뒤치락하는 것을 보인다. 이 사건도 그 자체로 그 시대에 교훈이 되는 차원이 있지만 그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여호수아서 안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것은 위에서 다룬 창세기의 본문들처럼 그 차원을 넘어서는 것과 동일하다.
(4)룻의 이스라엘에의 편입(룻기) : 룻기에서 룻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역사의 의미가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물론 남편과 두 아들의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불가능 속에서 끼어 들어온 이방여자와 형사취수제도를 통해서 가까스로 가계가 이어가는 차원에서 그런 면이 있다. 그러나 거기서 더 나가서 이렇게 재기한 가계가 하나님 나라 전체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룻기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다.
이런 다윗의 조상들의 극단적일 정도의 다양한 삶의 모습이 다윗의 역사가 설명되기 전에 그 어느 누구보다 자세하게 소개된 것은 다윗에 대한 철저한 예견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 예견에 있어서 하나님이 결정한 운명을 따라서 모든 것이 진행된다는 결정론, 혹은 운명론이 역사를 지배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인간의 행동여하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인간중심론이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형성에서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여서 큰 선을 미리 그으시나, 인간에게 허용하신 자유의 범위를 침범하시지는 않으신다. 인간에게서 역사형성의 자유는 인간됨의 가장 중요한 면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역사형성에서 완벽히 자유하다는 사실에서 큰 기쁨을 누리면서 살지만, 역사에서 자신이 뿌리는 수많은 죄악의 씨앗들과 그 결과들에 신음하면서 한탄할 수밖에 없고, 무엇보다도 자신은 자신의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 어떤 일을 할 수는 없다는 사실 앞에 지극히 겸손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그으신 당신의 큰 선을 따라서 인간의 역사형성의 자유 속에서와 함께 역사를 형성해 가신다. 인간들이 기쁨으로 역사를 형성하도록 격려하시지만 인간들이 져야 할 책임을 물으시면서 동시에 그들이 뿌린 죄의 씨앗들을 하나님은 무한한 자비로 용서하시며 역사를 새롭게 하신다. 다윗의 생애 이전에 형성된 이 역사는 다윗약속(언약) 형성에도 중요한 근간이 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형성의 자발성을 무한히 기뻐하시며 격려하시고 또한 인간의 연약과 죄악도 용서하시면서 역사를 새롭게 하신다. 이것은 다윗의 생애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생애가 결정되기 이전부터도 나타났고, 그런 차원의 결정체가 다윗약속(언약)으로 나타난 것이다.
3.3.2. 다윗의 생애를 통해 나타난 다윗약속(언약)의 준비과정
그의 생애가 시작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다윗의 역동적인 관계가 늘 존재하였다.
(1) 왕조출현에 대한 부정적 평가(삼상 8,12장)와 그 극복 : 왕조의 출현은 일반문화사의 진전에서 예상되는 것이었다. 가나안을 완전히 정복해야 하는 현실적인 요구 속에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의 필요성을 이스라엘이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이 통치되고 유지되는 방식은 세상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사람이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가 이스라엘에 있었고 이미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셨다. 그러므로 왕정의 요구는 이러한 언약에 의한 신정정치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왜곡시키는 것이므로 하나님은 그것이 언약을 어기는 죄악임을 명확히 하셨고 부정적으로 표현하셨다(삼상 8,12장).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부정적인 요구를 허용하셨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형성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자유를 비록 부정적으로 사용한 것이지만 그것을 허용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다윗약속(언약)과 관련된 아주 특별한 점이 있다. 그것은 이런 요구를 허용하신 후에 이제 그 요구를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데 사용하신다는 사실이다.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도 이어서 부어졌다. 일단 그것이 허용된 후에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아주 적극적으로 이루는 도구로 삼으셨다. 그래서 다윗을 왕으로 삼으실 뿐 아니라 그의 왕권이 영원한 것이 그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되었다. 더 나가서 그 다윗 가계의 한 영원한 왕으로 제 2위되시는 그리스도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시는 통로가 된 것은 역사를 향한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인간의 부정적인 요구가 극적으로 만나는 순간이었다. 그야말로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가 퍼부어짐으로 역사의 모든 죄악이 청소되도록 하였다.
(2) 사울이 왕으로 있을 때에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음(삼상 16장) : 사울이 아직 왕으로 있을 때에 다윗이 갑자기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사실은 다윗의 생애에 너무나 풀기 어려운 숙제를 준 것과도 같다. 한 나라에 한 왕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한 시기에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 둘씩이나 존재하는 상황을 하나님은 마련하신 것이다. 다윗 개인으로 보면 사울이 죽고 난 뒤에 기름부음을 받았으면 긴장스러운 삶을 오랫동안 살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고통스러운 세월을 오랫동안 보내게 하셨다. 자신을 멸하려고 그렇게 철저하고 끈질기게 공격하는 사울이 도대체 자신의 적인지를 수없이 물었을 것이고 그 대답은 항상 부정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추격의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나면서 사울의 옷자락을 벤 사실에서 자신이 또 하나의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을 대적하는 분노와 반항의식을 가졌다는 사실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했다(삼상 24장). 그런 삶의 극단적인 끝에는, 대적인 블레셋에 들어가서 미친 체하여 혹은 이스라엘의 대적이 된 것처럼 하여 보호받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벼랑끝 생존전략을 구사하는 가운데,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심지어 자신의 신복에게 반역으로 죽임을 당할 위기까지 몰려가야 했다(삼상 30장). 그런데도 이런 시기가 언제 끝날지 선지자들도 알려주지 않는 가운데 그저 깜깜한 동굴과 같은 상황을 견디면서 앞으로 걸어가야 했다. 이것이 다윗약속(언약)이라는 하나님과 함께 형성해 나가는 위대한 역사적 결과물이 있기까지 다윗의 역사형성의 자유의 차원에서 있어야 할 필수적인 중요과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너무나 갑자기 종료되었고, 새로운 역사가 펼쳐졌는데 마치 깜깜한 동굴이 끝나고 갑자기 환한 빛의 세상을 만날 때의 현기증을, 이것이 끝나는 사무엘하 1장에서 느낄 수 있다.5 그 이후의 사건들 속에서 다윗 편에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행하는 모습을 계속해서 볼 수 있는데(삼하 1~5장), 이것은 모두 이 때까지 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윗 편에서 꾸준히 역사를 자발적으로 형성하는 과정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다윗약속(언약)이 하나님 나라 역사와 계시역사의 형성에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를 살펴볼 때가 되었다.
4. 하나님 나라(이스라엘) 역사와 계시에 나타난 다윗약속(언약)의 의미
4.1. 시내산언약/모압언약과 다윗약속(언약)과의 관계
시 내산언약/모압언약 6과 다윗약속(언약)은 같은 차원에서 논해질 성격의 것은 아니다. 시내산언약은 하나님과 한 백성간에 일어난 일이고, 다윗약속(언약)은 하나님과 그 하나님 백성중의 한 개인(가계)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미 설명한 것과 같이 전자는 인격당사자 간의 공적관계를 법적으로 맺는 것이고, 후자는 그 언약 속에서 하나님은 그 속의 한 사람이 가졌던 자발성에 대해서 무한한 선물을 내리신 것이다. 셋째로, 전자나 후자나 조건적/무조건적 차원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둘 다 무조건적이며 동시에 조건적이다. 시내산언약에서 하나님을 일방적으로 무조건적으로 많은 백성 중에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려고 선택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축복과 저주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멸망해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이다. 마찬가지로 다윗약속(언약)은 무조건적인 것으로 시작되었다. 무조건적인 기름부음이 있었다. 또한 저주스럽게 보일 수 있는 사울과의 운명의 고리는 궁극적으로는 다윗이라는 인물을 형성시킨 위대한 연단이었으므로 다윗의 선택이 역설적인 의미에서 무조건적 하나님의 자비이다. 그러나 다윗이 기가 막힐 웅덩이에 빠지는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서 상황이 바뀔 수 있는 조건적인 것이었고, 심지어 사울의 결과가 자신의 상황이 안된다는 보장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다윗약속(언약)은 무조건적으로 주어졌다. 다윗의 왕권이 영원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조건성이 있다. 그것은 다윗의 각 후손이 어떻게 역사를 형성하느냐에 따라서 축복과 저주가 갈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역사의 마지막에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자비가 부어질 것이다. 그것은 다윗의 왕권은 결코 빼앗지 아니할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악한 개인이 이 약속이 이루어지는가를 시험할 수 있으나 결코 결과의 단물을 마실 수 없는 것은 믿음으로 견디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살아간 의인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결과물을 보아야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결과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 셈이다.
시내산언약/모압언약과 다윗약속(언약)은 하나님 나라 형성의 차원에서 깊은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인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합법적, 역사적으로 이루는 최초의 수단이 시내산언약/모압언약이었다. 그런데 이 언약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인도하는 데 공적인 제도가 필요하였다. 그것은 바로 아론으로 표현되는 제사장 제도와 모세로 표현되는 사사제도였다. 전자는 언약의 회복/유지/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제도였다. 후자는 백성들이 언약적 삶을 현실적으로 수행하도록 하는 데 필요한 제도였다.
이런 제도 하에서 400년의 역사가 흘러갔다. 그 역사는 비참하고 부정적인 내용으로 점철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부인하고 백성들은 제도의 개혁을 원했다. 이방백성과 같은 행정조직인 왕제도를 원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 제도를 부정적, 소극적으로 인정하셨고 바로 같이 세우신 제도가 선지자제도였다. 선지자들의 출현과 왕들의 출현이 시기를 같이 한다는 사실은 이 제도들의 해석에 중요한 거점이 된다. 즉 선지자제도와 왕제도는 이전에 있었던 사사제도의 분할인 것이다. 이 두 제도들은 사사제도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인도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한다. 왕들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현실적으로 행하도록 한다. 선지자들은 그런 구체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경고하고 알리는 역할을 한다. 단지 왕들은 세습적이라는 요소가 새롭게 도입된 요소일 뿐이다. 그러나 세습성은 이미 제사장 제도 속에 있던 것이었다. 왕들은 사사들이 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백성들의 구체적인 상황가운데 행동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또 선지자가 되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되는 것이나, 그가 하는 선포가 위에서 주신 것이라는 점은 사사들이 하던 역할과 동일한 것이다. 유일한 차이는 정치나 행정적으로 인도하던 지도자의 세습성이 새롭게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8
이렇게 시작된 왕정제도는 옛시대의 마지막에 새로운 소망처럼 보였다(삿 17:6, 18:1, 19:1, 21:25). 그러나 그 시작이었던 사울에게서 이미 절망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를 이은 다윗은 이렇게 구겨진 새제도를 어떻게 새롭게 하느냐의 과제를 안았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주어진 다윗약속(언약)은 완전한 보증을 얻는 것이었다. 시내산언약/모압언약의 큰 제도적 구조 속에서 새로운 변혁이 다윗약속(언약)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실제로 인도하는 견인차가 완전한 보증을 얻은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가 광야시절이나 지금 왕국시절이나 언약적으로 진행되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새로운 지도체제, 인간적 죄악으로 시작되었던 그 체제를 통해서 새롭게 진행될 것을 보증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4.2. 새시대(왕국시대)의 기초로서의 다윗약속(언약)의 의미
4.2.1. 다윗의 실정 속에서도 진행된
다윗약속(언약)의 실제
이 런 다윗약속(언약)이 주어지고 난 뒤에 이제 실제 역사가 진행되었다(삼하 8~24장). 다윗의 충성을 통하여 많은 승리와 영광을 주시기도 하였으나, 다윗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삼하 11장의 밧세바 사건, 삼하 24장의 백성의 인구조사). 이 사건들은 사울의 경우의 불순종보다 훨씬 더 심각한 범죄일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이것들 때문에 혹독한 언약적 저주를 받았으나(삼하 13~19장의 압살롬 사건과 삼하 24장의 백성의 심판), 하나님은 약속대로 다윗의 왕권 자체는 포기하지 않으셨다.
4.2.2. 솔로몬 왕권사와 남북조
왕국으로의 분열사 속에서의 다윗약속(언약)의 실제
(1) 솔로몬의 언약수행의 실패 : 다윗왕권의 가장 탁월한 임금으로서 솔로몬의 통치는 하나님이 인간의 자발성을 기뻐하시는 가장 중요한 표를 솔로몬에게도 보여주셨다. 그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지혜를 간구하였을 때에 그것뿐 아니라 다른 모든 세상에서 필요한 것도 주셨다. 이것도 다윗약속(언약)에서의 축복의 성취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다윗에게서 배운 중혼정책을 통해서 정치를 안정시키는 것을 다윗의 경우처럼 이스라엘의 유력한 집안의 여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행하게 될 때에 생기는 치명적인 문제인 그 이방여자들의 신들을 섬기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하면서 성전을 무너트리는 역설적인 일을 행한 인물이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 가지 경고를 주셨으나 그 경고를 무시하였고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 자체가 남조 유다와 북조 이스라엘로 나누어지는 심판을 행하셨다(왕상 11장).
(2)여로보암에게 주신 특별한 기회 : 여기서 특별한 것은 남조 유다를 다윗을 위하여 남기는 은혜를 베푸시나, 북조를 다스리게 될 여로보암에게 하신 약속이다. 우선 다윗의 왕권에 대한 확약을 하나님은 지키실 것을 거듭 말씀하셨다(왕상 11:32, 34, 36, 39). 그리고 여로보암에게 놀라운 약속을 하셨다(왕상 11:38). ‘다윗에게 허락하셨던 것과 같은 견고한 집’(bait neeman), 즉 영원한 왕권을 그에게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중왕권을 통해서도 통치하시겠다는 말이 되는 셈이다. 다윗의 가계가 하나님 나라의 한 영역을 영원히 통치하는 것은 허락된 일이나 그런 통치가 다른 가계에서 또 한 번 일어날 가능성까지 주신 것이었다. 이제 여로보암의 가계가 다윗의 후손보다 오히려 더 큰 영역인 열지파의 영역을 영원히 통치할 가능성까지 열어놓으신 것이다. 또 다윗약속(언약)과 비슷한 ‘여로보암약속(언약)’이 생겨날 수도 있었다. 그것은 다윗과 유사하거나 그를 능가하는 자발성을 가지고 행할 때에 어느 순간에 그런 약속을 하실 것이었다. 여로보암이 실수를 할 때에도 하나님은 선지자를 계속해서 보내심으로 그 여로보암에 대하여 지극한 관심을 변함없이 가지고 계심을 보이셨다(왕상 13~14장). 그러나 결국 여로보암은 이 기회를 잡지 못하였고 가장 치명적인 실수를 통치 초기부터 행하고 말았다. 정권의 유지를 위하여 종교의 영향력을 세심하게 고려하여 벧엘과 단에 황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이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낸 여호와라고 선포하였다(왕상 12:25~33). 물론 여로보암에게는 어떻게 종교적인 나라인 북조 이스라엘을 성전이 지어진 예루살렘 없이 통치할 것인가 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기는 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 진정한 하나님을 위한 성전을 만들 수는 없었는가? 중요한 것은 장소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었던 시내산언약/모압언약이었다. 비록 그것이 솔로몬이 지은 성전과는 비교가 될 수 있으나 자신에게 왕권을 허락하신 것이 신적인 기원을 가진다면 그 언약의 기초인 성전을 다시 짓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이 기회를 잡지 못하고 정권유지 자체만을 목적으로 하여 종교는 그것을 도우는 부차적인 수단으로 사용하는 모든 세속적 통치자들의 길을 걸어가고 말았다. 그래서 그의 가계는 4대만에 끝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3)“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과 북조의 멸망 : 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을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모든 통치자들이 다 걸어갔다. 누가 계승해서 통치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남조 유다처럼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충실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었다. 북조 이스라엘은 서자가 아니라 덩치가 다윗의 후손이 통치하는 것보다 5배나 큰 당당한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래서 남북조 시대의 많은 선지자들이 주로 북조를 향해서 파송되었으며, 기록선지자 1세대(아모스, 호세아 등)는 주로 이제 곧 멸망할 북조 이스라엘을 향해서 예언활동을 한 사람들인 것이다. 하나님이 언약적 심판의 도구로 선정하신 앗수르(사 10:5)를 통해서 북조를 멸망시키시고 그 하나님 나라의 땅을 유린하게 하시고 그 속의 하나님 나라의 씨를 언약적 저주대로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다(신 28장, 왕하 17장).
(4) 남조 유다의 언약에 충실하지 아니함과 파멸 : 뿐만 아니라 남조 유다의 다윗약속(언약)을 이어받은 후손들 중에서 하나님과의 시내산언약/모압언약에 충실한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 대해 경건하였으나 북조이스라엘과 화친정책을 취한 여호사밧을 통하여 이방여인 시돈의 공주인 이세벨의 피가 다윗의 후손에게까지 흘러 들어오는 비참한 역사를 경험하기도 하였다. 거기서 이세벨의 딸이자 유다왕 아하시야의 어미가 되었던 아달랴는 자기 아들의 죽음을 보고 자신의 손자뿐 아니라 다윗의 씨 전체를 진멸하는 놀라운 정책을 취한다(왕하 11장). 그러나 하나님의 지극한 은혜로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비록 이세벨의 피가 섞였지만 제사장 여호야다의 열심을 통하여 보존되고 다윗의 위를 승계하도록 하신다. 오욕과 은혜가 뒤섞인 가운데 역사를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신 것이었다. 또 여러 번의 종교개혁 가운데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탁월한 개혁으로 하나님 나라가 언약으로 새로워지기는 했으나 이미 마지막 언약적 저주인 대파국으로 가는 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나님이 세우신 또 하나의 언약적 저주를 수행하는 도구인 바벨론의 집요한 공격으로 결국 성전도 예루살렘도 파멸되고 하나님 나라의 땅도 이방이 통치하며 하나님 나라의 씨도 다 끌려가며, 다윗의 후손들도 끌려가서 바벨론의 환관과 내시가 되는 언약적 저주를 받았다(왕하 20:16~21, 25:1~26).
4.3. 왕국멸망 후의 다윗약속 (언약)의 의미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것은 왕국의 총체적 파멸 후에 어떻게 다윗약속(언약)이 의미를 가지느냐의 문제이다. 이것이 역사서 1부(여호수아서~왕하) 중에서 열왕기하를 기록한 저자의 문제였다. 그가 가진 대표적인 두 문제는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의 의미와 한계, 그리고 북조와 남조의 붕괴이후에 여호야긴이 바벨론에 의해서 재등극한 사실의 의미였다.
4.3.1.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의 의미와 한계(왕하 22~23장)
이 저자의 첫번째 문제는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의 의미와 한계에 대해서 고심했고 그것을 담담하게 기록하였다. 요시야 왕 개인에 대한 훌다의 예언(왕하 22:20)과 그가 갑작스럽게 애굽 왕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것(왕하 23:28~30)에 차이를 느끼지 않았다. 그가 열조에게 돌아가며 평안히 묘실에 들어가게 한다는 열왕기하 22장 20절 상반절의 표현은 하반절의 이 장소에 내릴 이 모든 재앙을 네 눈으로 보지 않게 하리라는 것과 평행을 이룬다. 예루살렘에 내려지는 재앙을 직접 경험하고 자신의 아들이 목베이는 장면을 눈앞에서 보이고 난 후에 자신의 눈이 뽑혀진 사람은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였다. 오랫동안 통치하면서 극한 악을 행했던 아버지 므낫세를 향한 저주를 요시야 시대에는 행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한 것이었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그 자체로 미진한 것이 아니라 남조 유다가 누적해온 언약적 저주를 요시야 혼자서 돌이키기는 역부족이었다는 뜻이다. 그의 개혁으로 다윗왕조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언약적 저주에서 구원하지 못할 뿐 아니라, 다윗왕조 자체의 파멸도 막지 못하는 것이 되었다.
4.3.2. 여호야긴왕의 재등극의 의미 (왕하 25:27~30)
두 번째 문제는 역설적으로 그 다윗의 후손인 여호야긴이 바벨론의 새로운 왕 에윌므로닥이 등극하면서 특별사면의 결과로 다시 등극하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가 재등극한 것이 이스라엘을 이전처럼 완전히 다시 통치할 수 있는 입장까지 허용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 상징적으로 이스라엘의 통치권을 받고 자신은 바벨론 궁에서 신하처럼 살도록 된 처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이 역사서 1부의 마지막으로 장식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 책의 마지막은 엄밀히 말해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다윗왕조의 파멸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부록처럼 붙어있다고 여겨질 수 있는 이 특별한 기록은 파멸되어 포로생활을 같이 하든지 아니면 파멸된 이스라엘 속에 사는 어떤 역사가에 의해서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 역사와 그 의미를 추적하는 그에게 이 사건은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거나(M. Noth), 다윗왕조의 완전한 회복의 소망(G.v. Rad)이나, 아니면 이스라엘이 회개를 하면 회복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외친 것(H. Wolff)이었을까? 이 역사가에게 인정된 사실은 하나님 나라는 망했고 회복의 징후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다윗왕조 역시 다시 돌아와서 재통치 할 기미를 아직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여호야긴왕의 재등극이란 사건이 주는 의미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개여부와 다윗왕조가 스스로 새롭게 됨과 상관없이 시내산언약/모압언약과 다윗약속(언약)을 은혜로 새롭게 하시며 지켜가신다는 사실이다. 즉 여호야긴 왕이 재등극한 상황이 벌어진 현재로는 다윗왕권 자체의 씨가 하나님이 히스기야에게 저주하셨던대로 바베론 왕의 환관과 내시가 되기는 했지만 완전히 진멸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의 후손, 이전에 3개월 가량 아주 짧게 왕이었던 그가 비록 형식적이지만 유다의 통치자로 재임명되었다는 사실에서 다윗왕조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님의 무능으로 파기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 그리고 어떻게 구체적으로 다윗왕조가 회복되고 이스라엘을 하나님과 언약을 지키는 진정한 언약공동체로 다시 세울 것인가에 대해서는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가진 메시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약속(언약)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임한 이 모든 저주는 이스라엘을 지키시리라는 언약을 맺은 여호와가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언약에 불충성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며, 다윗왕조의 파멸은 하나님이 불신실함이 아니라 다윗왕조의 언약에 불신실함 때문인 것을 이 저자는 명확하게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적 자비는 이스라엘과 다윗 후손의 한계의 끝에서 시작된다는 궁극적인 소망을 메시지로 선포한 것이다. 여호야긴을 통해서 어떻게 다윗가계가 하나님 나라를 부흥시키며 재통치를 할 것인지는 몰랐을 것이지만 역사적으로 주어진 작은 소망을 있는 대로 선포한 것이다.
5. 신약시대에서의 다윗약속(언약)의 의미
5.1. 예수께 성취된 다윗약속(언약)
그러나 여호야긴의 재등극 후 500년 이상 다윗의 가계는 역사 위에 부상하지 아니했다. 심지어 이방이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의 땅을 경쟁적으로 통치해왔다. 하나님의 나라가 강대국이 세력을 확장하는 통로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전쟁의 상태에 머물러 왔다. 한 때 마카비 가계의 노력으로 새롭게 되는 것 같았으나 무위로 끝나고 페르샤 -그리스 - 로마로 이어지는 이방인 통치가 계속되었고 심지어 에돔사람 헤롯이 이스라엘의 중요한 부분을 통치하는 상황까지 전개되었다.
이럴 때에 하나님의 나라는 전혀 새로운 경륜으로 전이되었다.9 일정한 공간으로 집중되는 차원이 없어지고 모든 공간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 예루살렘과 성전이 되었으며 지성소가 되었다. 각 사람은 자신에 하나님의 나라가 직접 임하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또 일정한 혈통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의 씨가 되는 차원도 철폐되고 하나님의 뜻으로 난자들이라면 누구든지 그 씨가 될 수 있었다. 나라와 방언과 국경을 초월한 하나님의 씨들이 죄의 고백과 믿음의 고백으로 서로를 금방 인식하게 되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 자체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다만 언약의 존재방식과 전개방식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시내산언약/모압언약이 아니라 예언자들이 예견한 새언약(예레미야)/평화의 언약(에스겔)이 그 나라가 합법적으로 역사적으로 이 땅에 존재하는 방식이 되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방식의 변화가운데 다윗약속(언약)도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되었다. 일정한 땅과 일정한 씨를 통치하는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어디든지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삶을 영위한 영역자체를 통치하는 다윗의 후손이 나타난 것이다. 시편 2편의 기름부음 받은 그 아들의 발에 열방이 입을 맞추는 오랜 이상이 궁극적으로 성취되었다. 시편 122편의 다윗 집의 보좌로 일사분란하게 행진하는 하나님의 공동체의 이상이 머리되신 다윗의 한 후손을 향해서 한 몸의 지체들이 일사분란하게 하나되어 움직이는 것으로 성취되었다.
이 다윗의 후손은 글자 그대로 혈통으로 다윗의 후손으로 나타나심으로(마 1장, 롬 1:3) 구약의 다윗약속(언약) 헛되지 않음을 나타내었다. 하나님은 과연 위에서 언급한 여호야긴의 재등극을 마지막으로 소개하면서, 하나님은 다윗왕조에 대한 약속(언약)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굳건한 믿음으로 증언한 역사서 1부의 마지막 기록자가 옳았음을 500년의 세월을 두고 증거하셨다.
이 제 그는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영원한 왕으로 섬김을 받으실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왕국을 당신의 종을 통하여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 심지어 그는 당신의 왕국을 당신의 몸으로 삼으셨다. 그리고 그 몸을 위하여 자신을 인생으로 낮아져서 내려오셨고 죽음으로 당신의 나라로 삼으셨다.
5.2. 언약제도의 통합으로서의 그 메시아의 사역
이 렇게 기름부음 받은 예수께서 다윗의 후손으로서 다윗약속(언약)의 진정한 성취자임이 분명해졌다(막 1:9~11). 그러나 예수는 이런 점을 넘어서는 모든 언약제도를 통합하시는 분이셨다. 왕국시대 이후로 나타났던 제사장제도, 왕제도, 선지자제도의 구분이 이제 필요없게 된 것이다. 한 분이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을 희생으로 드리셨고, 한 분이 영원한 왕으로서 자신이 종이 되어 섬기셨고, 한 분이 영원한 선지자가 되어서 진리를 선포할 뿐 아니라 당신 자신이 진리 자체가 되셨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모세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진노로 나타났던 모세와 아론으로 지도권이 분리되는 것까지 회복하는 역사이다(출 4장). 모세의 그 행동으로 사사제도와 제사장제도가 분리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제 그 구분조차 필요없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하나님이 언약을 통해서 이 땅에 당신의 나라를 이루실 그 원초적인 상태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런 모습은 다윗약속(언약)을 그 자체로만 해석할 때에는 발견할 수 없고, 다윗약속(언약)을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시내산언약/모압언약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해석할 때에 가능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약의 모든 직분을 통합하는 사역을 행하신 것이다.
5.3.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인 교회를 통해서 나타나는 다윗약속 (언약)의 적용
이제 그 삼중으로 기름부음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승천하시고 완성하신 사역의 적용을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에 맡기셨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기름 부으심 받음(막 1:9~11)은 이 통합사역의 객관적 증언이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표현은 세상의 입양, 새 왕의 등극방식을 따라서 선포된 메시아의 권위에 대한 공적 선포였다.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했다”는 보고는 그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권능을 부여받았다는 공적인 선포였다.
이제 이 메시아께서 다른 메시아들을 세우시고 승천하셨다(요 20;19~23). 다윗의 후손들이 행했고 자신에게 이루어진 일을 정확하게 자신이 가르쳤던 제자들에게 행하셨다. 단순히 제자들에서 스승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고, 단순히 사도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제 3경륜의 시대10에 두 번째 메시아들이 첫번 메시아에 의해서 파송된 것이다. 그들은 첫 번 메시아가 완성한 사역을 적용하는 권세를 받았다.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그들이 받은 파송과정은 동일하다. 먼저 그들은 메시아적 권위를 인정받았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들을 보내노라.”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행할 권능을 첫번 메시아처럼 받을 것이었다. “성령을 받으라.”
이로서 두 번째 메시아들은 첫 번째 메시아가 행하고 기초를 놓은 언약의 통합직무를 행할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 다양한 권능을 각 사람이 받았다(고전 12~14장). 그들은 구약시대의 세 직분처럼 나누어졌으나 머리되신 첫번 메시아의 몸으로 유기적으로 통합될 것이다(엡 4장). 이 통합직분을 통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를 통해서 견고히 하나님 나라가 이 땅 위에서는 구약의 근본적인 이상이 성취될 것이다.
5.4. 제 3경륜으로 이루어지는 땅 위의 하나님 나라의 붕괴와 첫번 메시아의 재출현
그 러나 이러한 탁월한 경륜 하에서 만들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도 어두움의 세력의 외적 내적 공격으로 허물어져 갈 것이다. 그 허물어짐이 제 2경륜에서 예루살렘과 성전 그리고 하나님 나라 전체가 붕괴되는 것보다 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윗약속(언약)을 이어가는 둘째 메시아들이 제 2경륜시대의 다윗의 후손들처럼 죽임을 당하고 내시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한 타락과 붕괴를 경험할 것이다(말세에 내가 믿는 자를 보겠느냐?). 그러나 이 때에 하나님은 또 다른 경륜의 세계를 여실 것이다. 이제 그 첫째 메시아가 다시 하늘에서 오실 것이고 다시는 무너지지 아니하는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씨(144,000명)가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땅인 새 하늘과 새 땅에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이루면서 살 것이다. 이것을 그 다윗의 후손이 이룰 것이며, 그가 통치할 중심인 새예루살렘이 신부가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것처럼 하늘에서 갑자기 임할 것이다. 모든 전쟁은 끝나며 모든 슬픔과 눈물도 끝이 날 것이다. 이제 그 메시아의 완전한 통치가 이루어질 것이다.
6. 결어
인간은 자신의 시대만 바라보면서 역사를 형성할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개인의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시고 계신다. 이 점에서 다윗 개인의 역사는 자신의 한계를 너무나 훌쩍 뛰어넘은 영향을 가져왔다. 그 삶의 이전부터 그러하였고 그 삶 이후는 더욱 그러하였다. 우리 시대를 사는 사람에게 우리의 후손이 메시아가 되는 것과 완전히 같은 역사형성의 기회는 주어지지 아니할 것이나 유사한 기회는 언제든지 언약의 백성에게 열려있다.
어떤 면에서 우리의 범죄에 대해서 역사를 통해서 징벌하시고 우리의 자발성을 심히 기뻐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은 역사의 평면 속에서는 수동적이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공유할 수 없는 역사의 더 깊은 지평에서 하나님은 역사형성을 오래 전부터 준비하실 뿐 아니라 인간이 만든 어떤 결과에도 당신 자신이 계획하셨던 길로 당신 자신의 희생을 통한 자비로 역사를 유도해 가신다. 언약백성이 이런 하나님을 모시고 오늘도 역동적인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 다윗약속(언약)이 주는 최대의 교훈이다.
주(註)
1. 본인이 쓴 이전의 글들을 통하여 여러 번 이 문제를 지적하였다.
2. 본인이 이것을 영어의 covenant라고 번역하였는데, 영어세계권 속에서 학자들이 반드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covenant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 중에서도 여기서 말한 그 의미로 좁게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3. 본인의 다른 논문에서 이미 소위 아담언약은 언약의 카테고리에 들 수 없는 것이어서 잘못 이해된 것이며, 창세기 2장의 내용은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내리는 명령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밝혔다.
4. 본인의 “여호수아서의 신학-언약공동체의 역사”, 「그말씀」 1999년 3월호와 곧 나올 「오경과 구약의 언약신학」(두란노)를 참조하라.
5. 본인의 “정반대의 결과에 이르는 위기의 절정에 처한 두 지도자”, 「그말씀」2000년 3월호와 곧 출판될 「오경과 구약의 언약신학」(두란노)를 참조하라.
6. 시내산언약과 모압언약에 대해서는 본인의 「시내산언약과 모압언약」(솔로몬 1998)과 곧 출판될 「오경과 구약의 언약신학」(두란노)의 전반부를 참조하라.
7. 사사제도의 원조는 모세와 여호수아였다. 지도자는 혈통에 따라서 승계되는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이 전격적으로 인정한 자만이 지도자로 나설 수 있다. 또 제사장제도를 따라서는 토라, 즉 기록된 언약법의 뜻을 백성에게 가르쳐야 했으나, 사사제도를 따라서는 현실적인 상황에 맞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즉 사사제도를 통해서는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현실적인 언약적 삶을 유지하도록 하였고, 제사장제도를 통해서는 세습적 지도자가 전통적인 언약적 삶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모세와 여호수아도 사사제도의 반열에서 이해하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를 파악하는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서와 사사기를 연속적인 차원에서 읽어야 하는 것이다.
8. 이런 점에서 역사서 1부를 사사제도 아래에서의 역사를 다룬 여호수아서~사사기와 왕과 선지자제도하에서의 역사를 다룬 사무엘서~열왕기서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인 여호수아서~사사기에서도 사사제도의 시작과 절정에 이른 발전과 마지막 타락으로 이어지는 그래프를 그린다고 볼 수 있다. 후반반도 그런 모습을 보이는데 이미 전 시대 마지막에 새 제도 아래에서 움직이는 새 시대에 대한 소망으로 출발하는 모습을 보인다(“그 때에 왕이 없었으므로”). 후반부인 사무엘하~열왕기하에서도 절정의 발전을 다윗과 솔로몬의 역사에서 기록하였으나 이어진 긴 타락과 파멸의 역사는 전반부와 비슷한 곡선의 그래프를 그린다고 할 수 있다.
9. 본인의 “제 4계명의 구약적 의미와 현대적 적용”, 「목회와 신학」 2001년 3월호와 「오경과 구약의 언약신학」(두란노)을 참조하라.
10. 경륜의 구분에 대해서는 본인의 “제 4계명의 구약적 의미와 현대적 적용”, 「목회와 신학」 2001년 3월호나 「오경과 구약의 언약신학」(두란노)을 참조하라. 송제근 | 2001. 10
'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공회 39개 신조 (0) | 2023.05.06 |
---|---|
위대한 성자 프란체스코[ 서평]-니코스 카잔차키스 (0) | 2023.05.06 |
성령론 - 싱클레어 퍼거슨 (0) | 2023.05.06 |
하나님나라 백성에 관한 연구- 김용주 (0) | 2023.05.06 |
요한계시록 강의- 김세윤 (0) | 2023.05.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