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퍼 칼빈주의란- 김재성
2014-03-20 01:26:25
개혁신학의 정수
제 11장 하이퍼 칼빈주의
손용환
‘하이퍼(Hyper)’라는 말은 ‘과도한’, ‘극렬한’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어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러한 이미지는 순수한 칼빈주의 전체를 매도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오늘날 ‘하이퍼 칼빈주의(Hyper-Calvinism)’을 따르는 사람은 칼빈주의자들 가운데서도 1%도 되지 않을 만큼 미미하다.
초기 하이퍼 칼빈주의자들
‘하이퍼 칼빈주의’는 ‘하이 칼빈주의 or 높은 칼빈주의(High Calvinism)’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생겨났다. ‘높은 칼빈주의(High Calvinism)’은 16세기 후반부터 발전하였는데 베자와 퍼킨스 등 초기 칼빈주의자들의 어떤 교리에서는 칼빈보다 좀더 강하게 주장하였다고 하여 만들어진 단어이다. ‘하이퍼 칼빈주의’와 ‘높은 칼빈주의’는 타락 전 선택설을 지지한다. 그러나 베자와 퍼킨스를 ‘하이퍼 칼빈주의자’라고 볼 수는 없다.
‘하이퍼 칼빈주의’는 17세기 후반 영국에서 벌어진 ‘신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논쟁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즉 ‘신율법주의자들’에 대한 과도한 대응에서 ‘하이퍼(과도한) 칼빈주의’가 태동하게 되었다.
초기 신율법주의 반대자들
*아이작 차운시-믿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자유롭게 전하고 신앙의 길을 제시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요셉 허세이(Joseph Hussey)-회중교회 목사로서 대중들에게 찾아가서 복음을 전달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존 스케프(John Skepp)-「하나님의 능력(Divinie Energy)」란 책에서 “성령의 특별한 사역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존 길의 ‘하이퍼 칼빈주의’
‘하이퍼 칼빈주의자’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침례교 목사였던 존 길(John Gill, 1697-1771)이다. ‘하이퍼 칼빈주의’를 간단히 줄려서 ‘길이즘’(Gillism)이라고 할 만큼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18세기의 칼빈주의자들 가운데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제외하고 필적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학문적으로도 뛰어나고 감화력이 있는 걸출한 목회자였다. 특히 「실제적이고 교리적인 신학의 총체」는 오늘날에도 칼빈주의적인 침례교회의 지침이 되고 있다.
「흙으로 빚어진 그릇」
존 스티븐스(John Stevens)는 19세기 ‘하이퍼 칼빈주의자’였으나 반율법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반율법주의자’ 갓스비 집안의 목회자들과 경쟁 관계에 있었다. 특히 존 스티븐스는 그리스도의 아들 됨에 대해서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출생하기 직전까지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아들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침례교 하이퍼들
영국에서 발생한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의 기저에는 반율법주의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하이퍼 칼빈주의들은 앤드류 풀러와 윌리엄 캐리가 주도하는 세계 선교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며 목소리를 모았다. 이 운동은 19세기 미국으로 넘어가면서 ‘미국 하이퍼 칼빈주의’ 그룹이 태동하는 동기가 되었다.
‘원시적 침례교도들’
미국 켄터키에서 선교 반대 운동에 가장 앞장섰던 극단적인 침례교 칼빈주의자들을 이름하여 ‘원시적인 침례교도들(Primitive Baptists)’이라 부르는데 1827년 미국에서 결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거리에서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자유롭게 제시하는 것과 외국에 가서 선교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필연주의자들’이라고 불리는 일단의 극렬한 침례교도들은 복음을 전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선택된 사람들은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을 직접 회개와 중생론이라 한다. 칼빈주의 정통신학은 간접적인 회개와 중생론, 즉 하나님은 말씀의 전파, 복음을 듣게 하는 수단을 사용하셔서 사람의 심령을 중생하게 하신다.
‘타락 전 선택설’의 곡해자로 알려진 다니엘 파커의 영향을 받은 다른 침례교도들은 ‘성령의 두 씨앗’이라는 이론을 통해 선택된 사람들 몸속에는 생물학적으로 선택의 ‘씨앗’을 갖고 태어났으며, 이는 차츰 꽃이 피어나듯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반대로 유기된 자들은 이미 몸 속에 저주의 씨앗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주장이다. 이들 ‘원시적 침례교도’을 ‘딱딱한 침례교파’(Hardshell Baptists)라고 부른다. 이들은 교회의 교육마저 거부했다.
아더 핑크
아더 핑크는 침례교 목사였지만 반율법주의자는 아니었으며, 하이퍼 칼빈주의자로서 유명한 저술가로 명성이 높았다. 목회 초기에는 ‘알미니안주의적인 세대주의자’였으나, 칼빈주의적 세대주의자로 입장을 선회하며, 최종적으로는 세대주의를 완전히 벗어버렸다.
훅스마와 일반 은총 논쟁
침례교인이 아닌 개혁주의 본류에서 나온 하이퍼 칼빈주의는 1920년대 미국에서 발생하였다. ‘하이퍼 칼빈주의’논쟁은 미시간 주 그랜드 래피즈 시에 소재한 칼빈 대학교와 칼빈 신학대학원 등이 속해 있는 네달란드계 기독교 개혁교회에서 격렬하게 일어났다. 이 때 논쟁의 핵심은 ‘일반 은총론’이었다.
‘기독교 개혁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는 네덜란드 개혁교회 신앙을 계승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의 조직신학을 충신하게 따르고 있다. 이에 동의 하지 않는 목회자들이 축출되어 ‘개신교 개혁교회(Protestant Reformed Church)’라는 교단과 ‘개신교 개혁 신학교’라는 새로운 조직을 만든다. 이 그룹에 속한 일부 학자들은 훅스마와 자신들의 견해는 존 길 등이 속한 ‘하이퍼 칼빈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유로운 복음 제시’에 반대하는 다른 하이퍼 칼빈주의자들과 공통점이 많다. 또한 일반 은총의 개념 자체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가장 높은 칼빈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훅스마와 개신교 개혁교회에서는 일반 은총이라는 모든 개념을 완전히 부정한다. 훅스마의 논리는 ‘타락 전 선택설’의 왜곡된 형태의 극단적 모습이다.
훅스마는 두 가지 필수적인 원리를 도출한다. 첫째, 선택된 자들은 켤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지 않다. 둘째, 택함 받지 못한 자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 아래 있지 못한다. 칼반주의 정통 신학자들은 훅스마의 이런 양립개념에 동의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며,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사랑을 입는다고 말한다.(엡2:3, 시145:9, 마5:43-48등)
하이퍼들의 오해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의 견해를 너무 광범위하게 적용하여 정통신학을 가진 사람마저 극단주의자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존 라이스(John R. Rice)와 노만 가이슬러(Noman Geisler)는 ‘돌트 신경’의 다섯 가지 요점을 신봉하는 사람까지도 하이퍼 칼빈주의자로 규정한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모든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반율법주의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칭의는 믿음을 갖기 이전에 주어지며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복음만 믿을 뿐이지 율법과는 상관 없다고 주장한다.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자유로운 복음 제시에 있어서 ‘자유’라는 단어를 알미니안들이 주장했던 ‘자유의지’에서 나오는 ‘자유’라는 개념과 동일시하여 거부한다. 그러나 1700년 이전의 모든 칼빈주의자들은 자유로운 복음 제시를 인정하고 실천하였다. 1700년 이전에는 데이비스와 허세이를 제외하고는 복음의 일반적인 제시를 거부하는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선포(to preach)’와 ‘제시(offer)’가 별개의 사항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사람에게 선포는 가능하지만 제시는 인정하지 않는다.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의 오류를 지적하는 역사적 칼빈주의자들의 논쟁점을 살펴보자. 다음은 존 머레이가 지적한 사항들이다.
①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복음과 관련하여 ‘제시한다’라는 말이 성경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킹 제임스 역본에만 근거하였다. 다른 영어 성경 특히 NASB의 고전 9:18에는 바울 사도의 복음 전파에 대한 용어로 사용되었다.
②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구원이 제시가 아닌 주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not offer, but give). 그러나 일반적인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복음의 제시를 통해서 주신다(God gives through the offer of the Gospel)’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주시되 말씀을 통해서 믿음을 갖도록 하시며, 그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말씀을 듣도록 하신다(롬10:17).
③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제시’는 보편적으로 제공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여 거부하며,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를 손상시킨다고 하여 반대한다. 그러나 복음의 제시가 보편속죄설로 이어지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④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자유로운 복음 제시가 보편구원론에 귀결된다고 하여 거부한다. 즉 하나님의 은총이 보편적이라는 함축을 띠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교리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듣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점을 강조한다. 참된 개혁신학은 선택교리와 복음의 균형을 유지한다.
‘신앙 의무’의 문제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의 ‘신앙 의무’라는 개념을 거부한다. 18세기 중반에 ‘근대 질문’이라고 불리던 논쟁이 있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얻는 믿음을 얻으려면 반드시 복음을 들어야 할 의무가 있는가?”에 대한 토론에서 주류 칼빈주의자들은 “예”,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아니오”라고 거부하였다.
첫째,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신앙의 의무’라는 개념이 마치 죄인들에게 믿을 수 있는 능력을 함축하고 있다고 하여 거부한다. 의무라는 말은 능력을 소유했을 때 가능하다. 그러나 개혁신학의 바른 입장은 인간의 무능력 교리를 주장하며 동시에 인간의 의무를 부인하지 않는다. 인간은 여전히 율법에 대한 의무를 벗어나지 못하며, 지킬 의무가 있다. 복음을 들었을 때도 동일하며 복음을 듣고 믿지 않았을 때 추가적인 처벌을 받을 수 있다.
둘째, 믿음은 선물이다. 따라서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믿음이란 모든 사람의 의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믿음은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선물과 인간의 책임을 동시에 다룬다.
셋째, 구원은 무조건적이다.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믿음이란 단지 축복이지 조건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통 칼빈주의자들은 믿음이란 의무이며 동시에 축복이라고 한다. 이는 행위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조건이라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맺는 말: 수퍼 칼빈주의자들에 대한 충고
하이퍼 칼빈주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에게 지나치게 대응하다가 신학의 강조점이 다른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대부분의 하이퍼들은 알미니안을 진정한 기독교 신자라고 간주하지 않는다. 갓스비는 웨슬레가 구원받지 못하고 죽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칼빈주의자들은 복음적인 알미니안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인정하고, 연약한 교리를 가진 형제들이라고 생각한다.
상당수의 젊은 칼빈주의자들은 은총 교리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더 나은 칼빈주의자가 된다고 생각한다. 즉 하이퍼 칼빈주의라는 단어를 수퍼 칼빈주의라고 생각한다. 이는 청교도가 스스로 높은 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고 했던 경고를 무시하였다.
우리시대에도 일반적인 칼빈주의자들도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의 정신과 연관을 맺고 있다. 문자적으로는 하이퍼 칼빈주의자가 아니더라도 복음을 제시하는 것에 있어서 무관심한 자세는 하이퍼 칼빈주의적인 태도이다. 근본적으로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교리의 불균형을 초래하고 있다.
하이퍼 칼빈주의 특징
2014-03-20 01:17:42
대부분의 칼빈주의자들은 다음의 하이퍼-칼빈주의적이며 파괴적인 믿음을 - 개탄스럽게 - 거부한다.
1. 하나님은 죄와 악의 입안자다.
2.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제 2원인들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
3. 어느 때에라도 선택받은 자들의 수는 사람에게 알려질 수도있다.
4. 전도하는 것은 잘못이다.
5. 선택의 확신은 회개와 믿음 이전에 받드시 찾아져야 한다.
6. 사람이 한번 진실하게 신앙을 고백하면 그 이후에 어떤 일을 하든 상관없이 구원받는다.
7. 하나님은 어떤 민족은 선택하시고 계시고, 다른 민족은 거부하고 계신다.
8. 불신자들의 자녀들 중 신생아들은 반드시 지옥에 간다.
9.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회개할 것을 명하시지 않으신다.
10. 성례(세례)는 은혜의 방편이 아니며, 오히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방해한다.
11. 참된 교회는 오직 무형 교회이며, 구원은 유형 교회와는 관련이 없다.
12. 성경은 교회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개개인의해서만 해석되도록 의도되었다.
13.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거나 성경적 법을 그들의 권위의 원천으로 하지 않는 정부에게는 복종할 수 없다.
14.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을 개선 시키는데 작용하지 않는다.
15. 구원은 예정설의 교리를 믿는 것과 동일하다.
16. 오직 칼빈주의자들만이 기독교인이다.(신영지주의 칼빈주의자)
알미니안 주의와 하이퍼-칼빈주의는 칼빈주의 5대 강령을 주장하는 찰스 스펄전이 투쟁했던 역사적 오류들 중에 포함된다.
그는 서로 한쌍인 이들의 범주에 속하는 오류들과 방심하지 않고 싸웠다. 하이퍼-칼빈주의의 주요 오류중 하나는 주장하기를
하나님의 주권의 이유 때문에 우리는 불신자들을 전도해선 안된다고 한다. 스펄전은 이러한 터무니 없는 주장을 - 오늘날의 칼빈주의라 자처하는 대부분들,
R.C. Sproul, John Piper, John MacArthur, Alistair Begg 그리고 그외 많은 다른 이들 처럼 - 거부했다. 우리는 선택의 교리는 반드시 강력하게
선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성경이 그렇게 주장하며 사람의 정서는 죄의 종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고 다만 성령의
효과적인 역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우리가 복음을 전할때 들을 귀가 있다면 말이다. 전도자는 복음의 씨앗(믿으라는 명령)을 차별없이 뿌리지만,
성령께서 그 복음을 그분께서 구원하고자 하는 이의 마음속에 싹트게 하신다. 그들은 아버지에께서 아들에게 영원전의 언약 안에서 주신 자들이다(요 6:37,39 엡1:4).
하이퍼 칼빈주의(Hyper-Calvinism)- 이천우
2014-03-20 01:28:35
칼빈주의에는 '하이퍼 칼빈주의'(Hyper-Calvinism)가 있습니다. 사실 하이퍼 칼빈주의란 말은 일상적으로 말하고 듣는 용어는 아닙니다. 칼빈주의란 말처럼 자주 듣는 말이거나, 그렇기까지는 않을지라도 종종이라도 듣는 말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참으로 드물게 듣는 정도입니다. 나 자신도 이 말을 최근에 듣기 전에는 십 년 이상이 되지 않았나 싶을 만큼 오래 전에 들었으니깐요.
그런데 하이퍼 칼빈주의는 기독교 역사 속에서 분명히 존재해 온 칼빈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지 못하고 부정적이었습니다. 즉 고운 시선으로 보지를 않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 그럴까요?
하이퍼 칼빈주의에서 '하이퍼'(Hyper)는 「건너편의; 초월; 과도히, 비상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서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을 매우 '과도한 자', '과격한 자', '극렬한 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편협하게 이들을 생각할 수 있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가진 자들 중에는 심지어는 칼빈주의자들을 전체적으로 나쁘게 보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이퍼 칼빈주의를 '칼빈주의를 추종하는 극단주의자'라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하이퍼 칼빈주의를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좋지를 않을까요? 이들은 역사적 전통을 잇는 개혁교회의 정통 칼빈주의자 곧, 순수한 칼빈주의자들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우선 하이퍼 칼빈주의를 말하는 사람들, 곧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극단적인 칼빈주의 예정론을 말하는 자들'이라는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 말에서 우리가 주의깊게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예정론을 따르는 칼빈주의자들 중에서 극단적 예정론에 치우친 사람들이 있다'고 이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칼빈주의 예정론을 말하는 극단적인 사람들이다'라는 생각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칼빈주의 예정론을 따르는 사람들은 극단적인 사람들이다"라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상 예정론을 말하는 모든 사람들을 다 싸잡아서 칼빈주의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특히나 극단주의자들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모인터넷에서 하이퍼 칼빈주의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 "극단적인 칼빈주의의 예정론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국장로교회가 너무 예정론에 치우쳐있기에 이런 말이 나온 것입니다."라고 답하고 있는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이퍼 칼빈주의를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은 칼빈주의 예정론과의 연관 속에서 구원론의 핵심 요약이 되는 칼빈주의 5대교리까지도 함께 싸잡아서 극단적인 칼빈주의라고 비판과 비난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우선 칼빈주의 예정론을 따르는 사람들로서 특히 '타락전 선택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지만 이로 인해서 이들의 사상을 '하이퍼 칼빈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정론은 칼빈에 의해서 비로소 말해지고 그 견해가 주장된 것은 아닙니다. 칼빈의 예정론은 그 자신의 독자적인 생각과 사상이 아닌 어거스틴의 사상을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어거스틴의 예정론을 반박하고 비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어거스틴의 예정론은 칼빈에게서만이 아니라 루터나 칼빈만큼이나 유명한 베자에 의해서도 더욱 더 그 견해가 확고해졌습니다. 베자는 칼빈의 예정론을 그대로 전수 받아 이를 그대로 답습하고 굳힌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칼빈의 신학 사상을 받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예정론에 대한 사상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그에 따라서 칼빈의 예정론을 지지하였으며 그 자신이 가진 예정론에 대한 견해에서도 내용은 기본적으로는 칼빈과 일치합니다. 그렇지만 칼빈이 볼섹하고 예정론 논쟁을 벌이고 있는 막바지에 그가 제시한 '예정론 도표'에 따르면 그가 가진 예정론 사상은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작정 교리와 예정론을 뿌리로 하여 칼빈의 예정론 사상과 당대의 개혁교회가 가진 신학 사상으로서의 예정론을 '타락전 선택설'의 견해에서 다루었습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보면, 그는 '타락전 선택설'이라든지 또는 '타락후 선택설'이라든지의 견해를 뚜렷이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타락전 선택설'을 말하는 것 같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타락후 선택설'을 말하는 듯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호해 보이는 것은 그가 일관되지 못한 신학 사상에 있어서가 아니라 예정론을 구원론의 신학적 시각에서와 또는 때로는 신론의 신학적 시각에서 다루는데 따른 것일 뿐이지 결코 여기서는 이렇게 말하고 저기서는 또 저렇게 다르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우리의 구원을 논함에 있어서 이를 아담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에 이르는 족보에서부터 다루는 것과 그리스도에서부터 시작하여서 아담에게로 올라가는 족보에서부터 다룬다고 할 때 구원의 예정이 사람의 타락에 앞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부터 드러내기도 하는가 하면 또는 감추어진 상태에서 다루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자는 어거스틴에서 칼빈과 개혁교회에 이르는 예정론을 지지하는데 이를 이중 예정[선택과 유기의 예정]으로 제시하면서 사람의 창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사람과 하나님의 진노를 위해서 창조된 사람의 창조를 다루고 이들의 선택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졌음을 강조함으로써 선택과 유기의 근거를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두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좀더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무관한 상태에서는 결코 어떤 바른 신학 사상도 나올 수 없기에 베자의 예정론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예정론'을 말하고 '타락전 선택설'을 따르는 자들이기에, 단지 이런 자들이라는 것 때문에 그들이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이라고 불리우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타락전 선택설'의 신학 사상을 가진 베자(Teeodore Beza)를 하이퍼 칼빈주의자라고 말하진 않습니다. 퍼킨슨도 동일한 신학 사상을 가진 자인데 그 역시 하이퍼 칼빈주의자라고 말하진 않습니다. '타락전 선택설'은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의 신학 사상이 아닌 칼빈주의자들, 나아가서는 개혁교회의 신앙을 가진 자들의 신학 사상입니다. 그리고 또한 '타락후 선택설'을 따르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하이퍼 칼빈주의'는 이들이 가진 '타락전 선택설'에 의해서 규정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정통 칼빈주의자들과는 다른 점이 있어서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이퍼 칼빈주의가 정통 칼빈주의와 다른 차이가 있는 것은 세세한 것은 놔두고 큰 틀에서 볼 때 다음의 두 가지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다음과 같은 점에서 하이퍼 칼빈주의로 불리우는 것입니다.
첫째,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칼빈주의자들과 달리 반율법주의에 서 있으면서 태동된 자들이었습니다.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으로 칼빈주의라는 신학 사상이 구교(舊敎)에 맞선 신교(新敎) 노선으로 형성되어 내려왔습니다. 이때 칼빈주의는 세월을 거듭하면서 여러 형태로 다양하게 발전해 왔는데 그들 모두가 긍정적이지만은 않았습니다. 그것은 부정적인 신학 사상을 띤 칼빈주의자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17세기에 이르러서 두 형태의 서로 대립된 신학 사상이 형성되었는데 반율법주의와 신율법주의가 그것입니다.
먼저, 반율법주의는 율법에 반대하는(against Law) 사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상을 가진 자들을 칼빈주의적 반율법주의자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이들이 모두 칼빈주의에 서 있는 자들로서 '타락전 선택설'을 지지하면서 반율법주의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어떤 의도에서 그렇게 율법에 반대하는 사상을 가지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너무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의무와 책임을 약화시켜 버린 데서입니다. 반율법주의자들이 말하는 핵심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안에서 구속 언약과 예정론을 다루어 가는데, 칭의가 믿음을 갖기 전에 주어진다고 하는 믿음에 선행하는 칭의의 개념을 가질 뿐만 아니라 - 이들이 이렇게 보는 것은 칭의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구속 언약의 '영원한 칭의'와 그리스도의 죽음의 구속과 부활의 의에서 얻은 '실제적 칭의'와 성령께서 선택된 자들에게 적용하는 '구체적 칭의'로서 이 칭의가 적용되는 것은 믿음보다 선행하며 칭의의 결과로 믿음이 나타난다고 보았다 - 구원의 확신 교리로서의 두 가지 증거인 성령의 내적인 증거와 성화의 외적 증거를 부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성령의 내적인 조명을 받는 수단이 되는 성경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성령께서 영원토록 성도들을 죄로부터 보호하시며 구원받은 자들의 내적인 생명 속에 거룩함으로 역사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이들에게서 율법은 단지 사람에게 죄를 알도록 할 뿐으로서 믿는 자들은 이미 의롭다 함을 받은 까닭에 죄가 더 이상 정죄하지 못하므로 율법은 믿는 자들에게 더 이상 필요 없고 다만 이미 죄를 용서받았다는 인식을 가지는데서 거룩함이 증진된다는 반율법주의의 사상을 가졌습니다.
둘째, (다른 한편으로는) 신율법주의가 형성되었습니다. 신율법주의는 17세기말에 형성된 새로운 율법주의를 말하는 것인데, 반율법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나왔습니다. 신율법주의의 핵심은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여기서 행위언약이 주어졌는데 아담이 철저한 순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서 행위언약에 실패함으로써 그 후손으로 오는 모든 인류도 함께 행위언약에 실패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은혜시대에 새로운 언약으로서의 율법을 제정하여 주셨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율법주의자들은 이 새로운 언약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음으로써 보여주신 모범을 좇아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시고 이를 믿음으로 용납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회개와 선행을 반드시 동반해야 하며 이로써 의롭다 함을 받는 칭의에 이른다는 사상을 가졌습니다.
반율법주의이든 신율법주의이든 이들의 사상은 정통 칼빈주의 신학 사상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들을 칼빈주의 신학 사상을 계승하고 있는 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상은 서로 대립되어서 반율법주의와 신율법주의의 논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때 반율법주의자들은 신율법주의와 논쟁을 벌이며 이들과 대항하였는데 이들 중 강성을 띤 상당수는 새로운 칼빈주의를 형성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에 이들을 '극단의(과격한, 극렬한) 칼빈주의'라고 불렀던 것이며, 바로 그들이 '하이퍼 칼빈주의'(Hyper-Calvinism)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에는 칼빈주의를 따르는 극단의 침례교도인들이 많습니다. 하이퍼 칼빈주의자로 불리우는 최초의 사람은 리차드 데이비스(Richard Davis)인데 그는 회중교회 복음 전도자였으며, 역시 하이퍼 칼빈주의자로 불리우는 요셉 허세이(Joseph Hussey)도 회중교회 목사인데 그 허세이의 제지로서 하이퍼 칼빈주의자로 유명한 존 스케프(John Skepp)는 침례교에 속한 최초의 하이퍼 칼빈주의자였고, 그 뒤를 이어 존 브라인(John Brine)이 존 스케프의 사상을 물려 받았습니다. 그리고 18세기에 칼빈주의의 영향 속에 있던 자들 중에서 조나단 에드위드와 함께 가장 유명한 존 길(John Gill)도 침례교 목회자로서 하이퍼 칼빈주의자였습니다. 이런 이들의 영향 속에서 칼빈주의적인 침례교도인들이 하이퍼 칼빈주의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이퍼 칼빈주의자는 영국에서 발생하여 뉴잉글랜드로 그 영향을 미쳤으며 미국에로 퍼져나갔는데 신율법주의자에 대항한 반율법주의자들보다는 한층 강성의 성격을 띤 까닭에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하이퍼 칼빈주의자는 여느 칼빈주의자와 같이 칼빈주의의 사상을 한마디로 말할 수 있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매우 강조합니다만, 이것을 지나치게 다루어서 비록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파 없이도 직접 회개와 중생 사역을 통해서 선택한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심지어는 선택된 자들에게는 복음 전도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까지도 말하였습니다. 선택된 자들은 선택의 씨앗을 갖고 태어나 궁극적으로는 구원의 열매에 이르며 유기된 자들은 저주받은 씨앗을 갖고 태어나 궁극적으로 멸망의 열매에 이른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다른 지역이나 다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파[선포]하는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복음을 제시하고 초청하는 것은 반대를 함으로써 반선교의 입장에 섰습니다. 그것은 구원은 선택된 자들에게 하나님만이 주시는 것이며 일반인들에게 제시하거나 초청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일반인들에게 복음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는 선택의 교리에 위배되고 속죄의 보편성을 내포하게 되어서 보편 구원성을 띠게 되기 때문에 이는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 교리에도 위배된다고 보았습니다.
세째,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이 정통 칼빈주의자들과 다른 차이가 있는 것은 일반은총론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영국에서 발생하였으며 주로 침례교도인들인데 미국의 개혁주의 주류인 네덜란드계 칼빈주의 개혁교회에서 일어난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쪽은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의 신학 사상을 영향을 받은 칼빈주의자들이었기에 아브라함 카이퍼가 주장한 일반은총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혁주의 주류인 네덜란드계 칼빈주의 개혁교회에 있으면서도 하이퍼 칼빈주의자로 불리우는 헤르만 훅스마(Herman Hoeksema)와 그를 따르는 자들은 하이퍼 칼빈주의자들보다도 한층 더 높은 칼빈주의자라고 불리웁니다. 그러니까 하이퍼 칼빈주의보다 '더 극단의 칼빈주의'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을 이들도 말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일반은총의 교리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하이퍼 칼빈주의자라고 할지라도 일반적으로는 일반은총의 교리를 인정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선택자나 불택자나 곧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이나 자연을 통해서 내려주시는 은총은 차별이 없습니다. 선한 자에게도 악한 자에게도 햇빛과 비를 주십니다. 이 일반은총 교리는 구원에 관련한 특별은총 교리와 함께 다루어집니다. 그러나 훅스마와 그를 따르는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일반은총을 부정합니다. 그런 까닭에 타락의 작정 이전에 선택과 유기의 이중 예정을 하였으므로 하나님은 선택된 자들을 사랑하시고 유기된 자들을 미워하신다는 것만을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또한 이것의 역설적 설명으로 선택된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지 않으며 반대로 유기된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입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런 사상은 특별은총의 영역과 일반은총의 영역을 구분 지으나 역사 속에서 수레바퀴를 이루고 있는 역사사관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이상에서 하이퍼 칼빈주의가 왜, 무엇 때문에 문제가 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이퍼 칼빈주의는 진정한 의미에서 칼빈주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예정론을 말하고 타락전 선택설을 말하고 칼빈주의 5대교리를 말하고 이 모두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말한다고 해서 칼빈주의는 아닙니다. 사실 하이퍼 칼빈주의는 칼빈주의 노선에 서 있으면서 칼빈주의에서 이탈한 비칼빈주의입니다. 그러니까 정상적인 칼빈주의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하이퍼 칼빈주의에서 보듯이 칼빈주의에서도 여러 형태의 다양한 칼빈주의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실정에서 개혁교회의 역사적 전통을 잇고 잇는 바른 칼빈주의에 견고하게 서 있는 진정한 칼빈주의자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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