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퍼의 중생교리에 대한 바빙크의 반론- 강웅산
2014-03-03 13:30:55
[카이퍼의 중생 교리]
카이퍼의 신학에서 전적타락의 교리에 대한 강조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것과 맞물려 있는 상대적 효과라고 할 수 있다. 카이퍼는 영적으로 죽어있는 죄인을 구원하는 일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임을 강조하기 위해 준비은혜(gratia praeparans)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카이퍼는 구원의 의미를 영원에서 영원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호의의 대상이 된다는 주권에 두고 있다. 즉 택함을 받은 자의 구원이 회심의 순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시작된 것이고 이 구원은 이미 옛 언약과 새 언약 속에서 그의 생애의 모든 순간 속에서 심지어 죄악 가운데 있던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이 카이퍼의 사상이다. 정리하면 선택과 회심 사이에 아직 어두움이 드리워 있는 동안에도 분명히 하나님은 그를 지키시고 계시는데 카이퍼는 이것을 준비은혜라고 불렀고 준비은혜야 말로 죽은 상태에 있는 죄인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달린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보고 중시하였다.
카이퍼의 구원서정 개념을 살펴보면 첫 단계는 새 생명을 심는 것으로 흔히 믿음-기능( fides-potentialis)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마치 세례 요한이 모태에서 부터 중생되었던 것처럼 전적으로 신적 동작으로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믿는 가정의 유아가 사망시 그 구원은 중생에 근거한다고 말한다. 이미 생명의 원리가 심겨진 사람은 아직 회심전이라도 죽은 것이 아니라 산 것이라는 논리이다. 두번째는 이 새 생명이 휴면( dormant)하고 있는 상태이다. 마치 겨울 땅속에 씨앗이 봄이 되어 싹이 트기를 기다리듯이, 새 생명이 잠자는 상태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셋째는, 말씀과 성령에 의한 부르심, 곧 내적, 외적 부르심의 단계이다. 외적 부르심은 비록 휴면하고 있지만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에게(들을 귀가 있는 자에게) 하는 교회의 사역(설교)이다. 카이퍼는 믿음-기능이 주어졌다고 그 사람이 스스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설교사역 속에서 성령께서 믿음-기능을 움직이셔야 유효한 결과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는 마치 숨을 쉴 수 있는 기능이 있어도 공기를 들이킬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호흡이 가능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넷째는, 이 부르심은 죄의 각성과 칭의를 낳는다. 이 둘을 믿음의 같은 동작으로서 각각 주관적 차원과 객관적 차원을 대변한다고 말한다. 즉 부르심으로 심겨진 믿음-기능이 실제적 믿음으로 발현되고 죄의 각성과 칭의가 믿음의 같은 동작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이 믿음의 동작은 회심의 결과를 낳는다. 믿음-기능에서 믿음의 첫 동작이 나오고 회심은 믿음의 첫 동작에서 나온다. 여섯째는, 회심이 성화로 이어진다. 카이퍼는 성화 역시 사람의 일보다는하나님의 일로 보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향해 자라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그의 생명으로 흡수되는 식으로 설명한다.일곱째, 성화가 죽음을 통해 완전한 구원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혼과 몸의 연합을 통한 영화이다.
카이퍼의 구원 서정 논의 방식을 통해 우리가 포착하는 중요한 특징은 뒤에 오는 것이 반드시 앞의 것에 포함되어 있다는 논리이다. 즉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중생에 구원의 모든 것이 들어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중생이 비로서 구원의 시작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카이퍼가 세례의 근거를 중생에서 찾는데서 확인된다. 그는 보에티우스의 말을 인용하여 세례를 받는 것은 언약의 일원으로 간주되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최초의 은혜(중생)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카이퍼는 로마서 8"29-30의 내용이 중생한 자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이 완성하신 일을 열거한 것이며 그래서 우리 밖에서 일어난 일이 단지 믿음의 의식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고 하나님 입장에서는 모든 일이 다 완료되고 준비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아의 중생은 성령의 도덕적 감화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보다 직접적인 형이상학적 동작을 보았다. 이 점은 화란교회에 적지 않은 물의를 이으키게 되고 결국 바빙크와의 논쟁으로 이어진다
카이퍼의 중생교리와 관련하여 또 다른 심각한 쟁점이 되었던 부분은 부르심과 중생의 관계이다. 그는 중생이 부르심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귀머거리가 귀가 열려 듣게되는 것은 실제로 말슴 선포(부르심)과 별개의 문제이므로 중생이 부르심보다 우선한다는 것이 맞다는 논리이다. 카이퍼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중생의 의미를 세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첫단계는 좁은 의미의 중생, 즉 우리를 살리시는 일로서 방편(말씀)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단계이다. 둘째 단계는 회심의 단계로 방편을 사용하시는 단계이고 섯쩨 단계는 성화로서 방편과 함께 우리의 참여를 수반하는 단계이다. 카이퍼는 이 구분을 통해 중생이 부르심(말씀)보다 앞선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카이퍼가 중생을 부르심보다 우선시 하는 이유는 일관되게 하나님의 주권에 모든 기원을 돌리고자 하는 그의 칼빈주의적 충정심의 발로이지만 이것이 오히려 그의 신학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바빙크의 반론]
개혁주의 안에 누구도 성령이 하시는 중생의 사역이 하나님의 주권적(sovereign)이고 단동적(monergestic)이고 직접적(immediate)인 사역이란 점에 대해 생각을 달리하지 않는다. 다만 바빙크가 카이퍼에게 발견하는 문제는 성령의 불가항력적 작용이 직접적(immediate)이냐 간접적(mediate)이냐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성령의 사역과 은혜의 방편과의 조화의 문제이다. 바빙크는 그의 책 : Saved by Grace- The Holy Spirit's Work in Calling and Regeneration 에서카이퍼의 중생교리에 대한 반론으로 세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첫번째 질문은 사람의 마음에 성령이 어떻게 작용하시는가? 두번째 질문은 성령이 삭람 안에서 직접적인 방법으로 작용하신다면 은혜의 방편의 사용을 배제하는 것인가? 세번째 질문은 성령의 개입이 방편의 사용을 배제하지 않는다면 이 둘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이다. 이 질문들에서 도출된 바빙크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1. 성령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직접적(immediate)인 방법으로 작용하신다. 2. 성령의 직접적인 방법은 은혜의 방편의 사용을 배제하지 않는다. 3. 성령의 직접적인 작용은 은혜의 방편과 조화를 이룬다. 바빙크는 첫번쩨 논지를 통해 전적 은혜와 자유의지의 대립을 두번째 논지를 통해 은혜의 방편의 사용을 지지하는 입장과 부정하는 입장의 구분을 그리고 세번째 논지를 통홰 은혜와 방편의 관계가 결국 개혁주의와 비 개혁주의를 구분하는 특징임을 역설한다.
1. 성령의 직접적 작용
바빙크는 성령의 직접적 작용을 이해하는 것을 은혜교리로 부터 시작한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은혜는 언제나 성령의 작용과 그 작용의 결과사이에 아무것도 개입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직접적 작용이다. 개혁주의는 은혜의 작용과 중생된 사람 사이에 아무것도(말씀도 성례도 교회도 이해도 의지도) 개입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직접적 의미를 방어하였다. 그러나 바빙크는 도르트 신경을 인용하면서 직접적 작용의 의미가 사수되는 것이 개혁주의이지만 "직접적 은혜"나 "직접적 중생" 이란 말은 명시적으로 쓰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바빙크는 은혜 교리에 있어서 직접적 작용이 개혁주의 전통이 방어하고 있는 핵심 사안이란 점에 엤어서는 일치하지만 그것을 중생과 함께 사용하여 직접적 중생(immediate regeneration)이라고 부르는 일에서는 카이퍼와 거리를 유지한다.
2. 성령의 직접적 작용과 은혜의 방편
바빙크가 제시하는 두번째 문제는 성령의 사역이 직접적이라면 은혜의 방편을 배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부르심과 중생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며 결국 말씀사역의 성질과 목표를 결정짓는데 큰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다. 이 작업을 위해 바빙크는 어거스틴에서 개혁주의에 이르는 역사에서 대두된 논쟁의 역사를 아우르면서 방편(말씀)의 중요성을 길게 변증하고 있다. 그가 방편의 중요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사영하는 개념은 크게 중생, 은혜 언약, 교회이고 이를 더 압축하면 그의 논증의 핵심은 언약개념이다. 바빙크에게 언약신학은 구원서정보다 앞서는 것이고 교회보다 우선시되는 중요성을 지니는 것으로서 카이퍼의 주장을 정확하게 반박할 수 있는 논점이 된다. 바빙크는 은혜언약을 강조하며 은혜 언약은 은혜의 선물이나 성령의 작용보다 앞설 뿐 어니라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나 속죄사역보다 앞선다고 말한다.
바빙크의 언약개념은 구원이 시간대에 와서 처음 시작되는 것이 아니하 영원에서 시작하여 영원에서 시작하여 영원까지 지속되는 것으로 시간대에서 언약이 설정하는 도구들을 통해 그 혜택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난 유아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카이퍼가 말하듯이 유아의 중생을 가정해서가 아니라 그 아이가 이미 영원한 언약속에서 언약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교회가 공적으로 확인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 아이는 태어나기도 전에 부모와 함께 은혜언약 안에 포함되어 있다. 긓러므로 그 언약은 언약을 밝히는 복음보다고 앞서고 중생을 포함한 구원의 선물보다도 앞선다.
바빙크에게 이렇게 언약의 우선성은 결국 중생보다 부르심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 논리적 근거가 된다. 바빙크는 " 유아가 알기전에 은혜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중생된다면 그것은 항상 은혜언약이 은혜를 선포하는 복음과 함께 이미 역사적으로 존재애 왔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언약을 전제한다는 것은 말씀의 내용인 약속의 성취를 기반으로 하므로 말씀은 중생을 포함한 모든 구원은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결국 유아세례는 중생이 아니라 언약에 근거한다는 것이 바방크가 주장하는 바이다. 바빙크는 은혜 언약을 말할 때 그것이 언약의 약속인 말씀의 사역과 집행을 배제하고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성령의 작용(언약의 결과)와 은혜의 방편(말씀)의 밀접한 관계는 은혜 언약의 특징이고 개혁주의의 일관된 전통이라는 것이다.
바빙크는 도르트 신경뿐 아니라 개혁신학의 정신은 부르심이 중생 보다 앞서는 것으로 본다고 말한다. 물론 카이퍼가 17세기 보에이투스를 인용하여 " 들을 귀가 있어야 들을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믿을 수 있다" 는 주장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혁주의는 대체로 중생 사역에 있어서 말씀의 불가분성을 물론 부르심을 중생보다 앞에 두는 것을 강조했다고 바빙크는 주장한다. 그러므로 바빙크는 회심은 말씀 사역과 더불어 일어나고 중생은 말씀 사역과 무관하다는 주장을 반박하였다. 그는 선포된 복음을 듣는 것이 중생을 위한 유효한(effectual) 도구임을 강조한다. 그는 말씀이 도구로 개입하는 방식은 말씀이 성령의 능력과 중생의 결과 사이에서 중간역할을 하는 간접적(mediate) 방식이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성령이 그 사람안에 내주히시며 그를 살리는 능력을 직접적(immediate)으로 행하신다고 말한다. 만약 중생이 부르심으로부터 전적으로 분리되거나 독립적인 것이 된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중생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부터 분리되는 심각한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말씀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획득하신 은혜를 교회에게 주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편이기 때문이다. 바빙크는 중생에서 말씀으로 부르심을 배제한다면 이는 중생을 그리스도의 사역보다 앞세우는 것이며 성령이 주시는 구원은혜를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역과 무관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직접적 중생의 강조는 결국 구원 서정의 질서를 뒤엎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이 가져다 주는 새 생명은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것이고 그리스도는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고난과 죽음을 감당하셨다. 그러므로 중생은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의 열매이다. 바빙크는 이 내용이 곧 은혜언약의 약속이고 복음이며 중생은 바로 이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사는 성령을 통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는 : 성령의 작용은 말씀이 집행되는데 까지" 라고 말한다.
이렇게 바빙크는 성령의 직업적 작용의 정당성과 함께 방편의 사용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바빙크는 개혁주의가 중생을 "직접적으로" 이해한 것이 은혜의 방편을 배제한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말하며 방편의 정당성을 언약신학의 구도 안에서 찾았고 그 구도에서 성령과 말씀의 조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성령의 직접적 작용과 은혜의 방편의 사용의 정당성 논의에서 바빙크의 결론은 말씀을 통한 부르심이 중생보다 우산한다는 것이다.
3. 성령의 직접적 작용과 은혜의 방편과의 상호관계
바빙크는 성령의 작용과 방편의 관계를 조명하기 위해 고마루스의 견해를 빌려 이렇게 규명한다. " 의미의 부각이 방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The thing signified is united to us rather than that the thing signified is united to signs) 방편은 하나님이 자신을 구속하시는 방식의 언약설정을 통하여 우리가 그 방편을 올바르게 사용할 때 그 방편이 약속하는 것을 기대하고 요구할 수 있는 특권과 같은 것이다" 이 말은 은혜의 방편이 어떤 힘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도덕적 작용(moral operation)일 뿐이라는 것이다. 은혜의 방편 가운데 바빙크가 관심을 갖는 것은 말씀, 특히 복음제시의 일을 하는 외적 부르심에 해당하는 말씀이다. 바빙크는 성령의 직접사역이 말씀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외적 부르심과 내적 부르심은 사실상 하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외적 부르심을 통해 선포하시는 말씀은 성령의 내적 부르심을 통해 마음에 새기기 원하시는 동일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물론 유아의 경우처럼 그 둘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지만 바빙크는 개혁주의의 원칙은 중생은 성령의 작용의 결과로서 복음선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강조한다.
성령의 중생 작용은 초자연적이지만 결코 은혜의 방편(설교)를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부지런히 말씀을 가르치는 역할을 해온 것이다. 설교는 중생된 자라도 하나님이 주신 새 생명에 대해 더 의식과 확신을 갖게 하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사실 중생된 자라 하더라도 어떻게 중생되었는지 알수 없는 것이 중생의 특징인데 중생의 여부는 그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진지하게 회개하는 것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고 바빙크는 설명한다. 개혁주의가 설려의 직접적 작용과 방편의 조화를 유지하는 것은 사람의 이성적 도덕적 본성과 그의 책임을 훼손하지 않는 방식이다. 성령의 유효한 작용이 말씀의 도덕적 작용과 조화를 이룬다. 신자는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불신자는 복음을 통해 일어나는 양심의 증거와 도덕적 작용을 거부하고 마음을 닫은 것에 대해 궁극적 정죄를 받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상대하시는 방법이고 그 구체적 형식이 언약이다. 바빙크에게 있어 성령의 직접적 작용이 말씀이라는 방편과 불가분적 관계에 있는 것은 언약구조안에서 가능해진다. 그 언약 구도의 특징은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약속하셨던 것을 성령으로 말씀의 사역을 통해 성취하신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바빙크는 성령의 직접적 작용인 중생은 말씀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말씀의 부르심의 사역을 통한 성령의 직접적 작용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았다. 카이퍼가 지나치게 논리와 사변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앞세웠던 반면 비빙크는 언약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택하시는 주권적 은혜를 부각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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