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권 구원, 무엇이 문제인가? -장두만
2014-02-21 00:59:34
주재권 구원, 무엇이 문제인가?
장두만 박사
*이 글은 ‘목회와신학’ 2005년 1월호와 2월호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미국 신학계에서는 주재권 구원(Lordship Salvation)이 상당히 오랫동안 주요 신학적 이슈 중의 하나로 취급되어 오고 있다. 스타트(John Stott), 패커(J.I.Packer), 보이스(James Boice), 젠트리 (Kenneth Gentry) 같은 유능한 학자들이 오래 전부터 주장해 왔던 것이지만 이 논쟁에 불을 지핀 사람은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의 담임목사이며 매스터 신학대학 및 대학원(Master's College & Seminary) 총장인 맥아더(John F. MacArthur) 목사이다. The Gospel according to Jesus라는 책의 초판이 1988년에 발행되었고 개정증보판이 1994년에 발행되었는데, 이 책이 미국 신학계에서 많은 찬반 논쟁을 야기했고, 그 논쟁은 지금도 종결된 것은 아니다.1)
그러면 이것은 미국만의 문제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것은 단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디에 있는 누구든지 진지하게 연구해 보아야 할 문제인 것이다. 맥아더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오늘 우리 한국 교계에서도 동일하게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맥아더의 책은 1993년 우리나라에서 『구원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서울:여수룬)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되었고, 주재권 구원은 몇 년 전에 이남하 목사 (당시 미국 버클랜드 침례교회 담임목사)의 저서와 국내 세미나를 통해서 우리에게 소개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일부 독자에게는 주재권 구원 문제가 아주 생소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필자는 이 글에서 주로 세 가지 핵심적인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첫째, 주재권 구원이란 무엇인가? 둘째, 주재권 구원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진정으로 구원얻는 믿음은 어떤 것인가? 2)
I. 주재권 구원이란 무엇인가?
주재권 구원론의 주장자인 젠트리 (Kenneth L. Gentry)는 주재권 구원을 이렇게 정의한다:
주재권 구원이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할 때 동시에 그를 자신의 삶에서 주인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 두 가지 별개의 행동이 아니라 순수하게 믿는 한 가지 행동인 것이다. 3)
또 다른 주장자인 스타트 (John Stott)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주 되심(Saviorhood)과 주인 되심(Lordship)을 분리하는 것은 비성서적인 동시에 비현실적이다”고 한다. 4) 이런 주장을 간단히 요약한다면, 주재권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Savior)로 영접하는 동시에 삶 전체를 주관하는 주님(Lord)으로 영접해야 진정한 구원이라”는 주장이다. 5)
그러면 주재권 구원론자들이 왜 이런 주장을 하는가? 그 주된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첫째, "믿는다"(πιστευω), 특히 “...를 믿는다”(πιστευω εις)는 표현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그 속에는 순종 또는 헌신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6)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헌신이 없이 복음 진리를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만으로는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고, 그런 것은 “값싼 믿음”(easy believism)이라는 것이다.7)
둘째, 성경은 구원받기 위해서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회개가 복음의 한 요소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타락한 상태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죄로부터 돌아서겠다는 마음이나 의지가 없이는 진정한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8)
셋째, 주님(κυριο)이라는 단어가 "주인,통치권,소유권" 등을 의미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객관적 의미에서의 주님, 즉 하나님으로만 인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삶의 주인이고 통치자임을 고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9)
넷째, 신약성경, 특히 사도행전에 보면, “제자”라는 단어와 “신자”라는 단어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신자는 제자를 의미하고, 따라서 진정한 제자가 된 사람만이 신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10) 맥아더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갈보리에로의 부르심은 바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재권 하에서의 제자로서의 부르심이다. 그 부르심에 반응한다는 것은 신자가 된다는 의미이고, 그에 못 미치는 것은 불신이다.”11)
다섯째,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재권 구원론자들은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사실상 전혀 구원받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간주한다.12)
II. 주재권 구원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필자는 주재권 구원론자는 아니지만 맥아더나 다른 주재권 구원론자들의 주장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상당히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은 필자뿐만 아니라 한국 교계도 깊이 있게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일 것이다. 맥아더는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면서 진정으로 믿지 않는 소위 “거짓 고백”(false profession)의 문제와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의 문제에 대해서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는데, 필자도 이 면에서는 맥아더의 우려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맥아더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최근의 통계에 따르면, 세계인구 중 16억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름 있는 여론 조사에 의하면, 미국인들 중 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거듭났다고 한다. 이 숫자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비참하게도 속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확신이라는 것은 저주스러울 정도로 거짓된 확신(damning false assurance)이다. 13)
오늘날 문제시되고 있는 거짓 고백의 문제는 맥아더가 1988년에 제기했지만 맥아더보다 훨씬 이전인 1925년에 보수파 장로교의 대표적 학자인 그레샴 메이천(J. Gresham Machen) 박사가 이미 이 문제의 심각성을 제기한 바 있다:
현대 신앙생활의 가장 큰 악 중의 하나는, 내가 보건대는, 일정한 공식에 따라 “나는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한다”고 고백만 하면 그 고백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 있 다는 증거가 눈꼽만큼도 없어도 교회의 회원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이런 관습의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도덕적 성품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라든지 인도주의적 사업에 종 사하겠다는 막연한 목적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수없이 교회에 받아들이고 있다. 교회 내에 있는 그런 사람 한 명이, 내가 믿기로는, 교회밖에 있는 10명보다 주님 일에 훨씬 더 많은 해악을 끼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관습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만 된다.14)
교회에 속해서 교회에서 집사, 권사, 장로 등의 직책을 맡아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주님을 개인적으로 만나 거듭난 적이 없는 거짓 신자의 문제는 우리나라도 별로 다르지 않다. 1998년 6월 9일자 국민일보에 실린 내용을 하나 소개하겠다. 한국 갤럽에서 18세 이상의 성인 남녀 1,613명을 대상으로 가구 방문을 통한 1:1 면접으로 조사한 종교 자료를 발표했다. 그 자료에 의하면 개신교 인구가 20.3%, 불교 인구가 18.3%, 천주교 인구가 7.4%였다. 종교인 중 개종 경험을 가진 사람은 16.2%였는데, 개종 전에 불교를 믿었던 사람은 32.8%, 천주교를 믿었던 사람은 9.8%였으나, 기독교를 믿었던 사람은 무려 58.4%나 되었다. 한 때 기독교를 믿다가 다른 종교로 개종한 사람이 전체 개종자 중 58.4%를 차지한다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국민일보에서는 이렇게 지적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지만 이들 중 상당수가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개종하고 있어 교회가 초신자들을 대상으로 확실한 구원관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참으로 적절한 지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한국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온 세계가 주목할 정도로 경이적인 교회 성장을 이루었고, 그 결과 여러 교파에서 가장 큰 교회들이 대부분 한국에 있다고 자랑할 정도가 되었다. 교인의 숫자가 1,000만명 내지는 1,200만명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다. 그러면 그들이 모두 분명히 거듭난 신자들인가? 그들이 모두 확실히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교인 중에 정말 거듭난 성도들의 비율이 몇 퍼센트인지 통계적으로 신빙할 만한 자료는 없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10%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필자는 맥아더가 제기하고 있는 거짓 고백의 문제뿐만 아니라, 달라스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인 대럴 박(Darrell Bock)이 맥아더의『구원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분석하면서 맥아더가 제기하고 있는 6가지 주장에 동의한다고 했는데, 이 면에서는 필자도 전적으로 공감하고 있다. 그 6가지 주장은 다음과 같다.15)
1.구원얻는 믿음이란 복음 진리에 대해서 단지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 이상이다. 복음에 대한 지식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진정한 믿음이란 지식 이상인 것이다.
2.죄로부터의 회개는 복음을 제시할 때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며, 따라서 믿음의 중요한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3.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은 사람들의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받는 그 순간 예수님이 실제로 삶의 주인이 되어서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4.진정한 구원은 분명히 열매를 낳는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열매를 찾아보는 것은 행위에 의한 구원(work salvation)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열매는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이요, 구원얻는 믿음의 자연스런 결과이기 때문이다.
5.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다가 나중에 분명히 부인하고 돌아선다면, 그는 처음부터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6.“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언제나 구원받은 것이다”는 확신은 진정한 고백을 한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며, 이런 확신이 적용될 수 없는 거짓 고백도 분명히 있다.
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맥아더의 고민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필자도 학자로서 그리고 목사로서 동일한 고민을 오랫동안 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가 범하고 있는 몇 가지 착오 내지는 오류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맥아더의 구원에 대한 개념이 불분명하다. 자신의 목회경험과 연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목사로서, 일단 “믿기로 결단하고” 침례(세례)를 받았지만 아무런 변화도 경험 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정기적으로 다시 침례(세례)를 준다. 그들은 침례(세례) 받은 후에 진정한 회심에 이르게 되어 진실한 구원의 표현으로서 다시 침례(세례) 받기를 원한다. 우리는 거의 매주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의 침례탕으로부터 그런 간증을 많이 듣는다.16)
여기서 필자가 제기하고 싶은 질문은, “일단 믿기로 결단하고 침례(세례)를 받았으나 그들의 삶에서 아무런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언제 진정으로 거듭났는가?” 하는 것이다. 그들은 침례(세례) 받을 즈음에는 거듭났지만 확신이 없다가 나중에 다시 침례(세례) 받고자 할 즈음에 확신을 갖게 된 것인가, 아니면 처음에는 전혀 구원이 아니다가 나중에 참된 구원을 받고 다시 침례(세례)에 순종하게 된 것인가? 믿기로 결단하고 침례(세례) 받은 사람들의 영적인 신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맥아더의 입장은 참으로 아리숭하다. 맥아더는 그들이 처음에 침례(세례) 받을 때 참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에게 침례(세례)를 주었을 것이 아닌가? 맥아더에 의하면, 그들이 침례(세례) 받을 당시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해 구원은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지 못했기 때문에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면에서 맥아더의 견해에 전혀 동의할 수가 없다. 필자는 그들이 처음부터 진정으로 믿은 것도 아니고 따라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이미 메이쳔 (J. Gresham Machen) 박사가 지적했듯이, 일정한 요식행위에 의해 상담자가 말하는 대로 소위 말하는 “영접 기도”를 따라서 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정한 영접은 하지 못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참으로 구원받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본고 후반부에서 이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자 한다.
둘째(맥아더가 범하고 있는 몇 가지 착오 내지는 오류), 맥아더는 신자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주재권과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소원이나 각오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두 가지는 많은 부분에서 중복되고 있지만 동일한 것은 결코 아니다. 맥아더는 이 구분에 대해서 굉장히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달라스신학대학원과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대학원 교수를 역임한 잔슨 (S. Lewis Johnson)도 이에 공감을 표하고 있다:
그러나 맥아더는 종종 전적인 헌신(full commitment)이 구원의 필수요건이라는 주장을 하는것 같이 보이다가, 다른 데서는 자신의 입장을 수정한다. 그는 말하기를 “예수님은 당신의 주권적인 주재권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경우에도 구원의 소망을 주신 적이 없다”고 하면서, 굴복과 순종에 대한 요구를 “기꺼이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 (willingness to obey)으로 완화시키고 있다. 17)
맥아더의 책이 교계를 분열시키고 많은 학자들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실제적인 주재권과 주님으로 모시고자 하는 마음이나 소원을 때로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때로는 구별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그래서 예수를 믿은 사람은 순종하고자 하는 갈망 (yearn to obey)이 있다. 우리는 죄악 된 육신의 잔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완벽하게 순종하지는 못한다(cf. 고후 7:1; 살전 3:10).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소원은 참 신자에게는 항상 있는 법이다 (cf. 롬7:18). 성경 전체에서 신앙과 순종이 항상 밀접히 연관되어 잇는 것도 이 때문이다. 18)
그는 계속해서 주장한다:
믿는 자는 때로 불완전하기는 할지라도 순종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갈망을 낳지 않는 신앙은 전혀 신앙이 아니다. 순종을 거부하는 마음의 상태는 순전하고 단순한 불신 상태이다. 19)
그러나 맥아더는 동시에 참 신자는 구원받는 그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적으로 삶의 주인으로 모신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이 모든 구절들은 논란의 여지도 없이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의 한 부분으로서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포함한다” 20). 뿐만 아니라, 그는, “구원얻는 믿음의 표시는 예수의 주재권에 대한 굴복이다”21)고 한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께 나아올 때, 모든 것의 주인이신 분께 나아오는 것이다. 이 진리를 제외한 메시지는 어떤 경우에라도 복음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결함이 있는 메시지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을 구세주로만 제시하고 주님으로는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요. 죄에 대한 권위를 갖지 않는 구속자를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요, 자신이 구원한 사람에게 아무런 명령을 할 수 없는 약하고 병든 메시야를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22)
그러면 맥아더나 다른 주재권 구원론자들이 정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참으로 거듭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로 삶의 전분야에서 주인으로 모시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그런 소원은 분명히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아니면 구원받는 순간 예수께서 실제적인 삶의 주인이 되어야 참된 구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만약 주재권 구원론자들이 주장하는 바가 첫 번째 의미라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게 되면 바로 그 순간 성령께서 내주하시게 되고, 그 성령께서 예수를 주로 모시고 그 주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순종을 하되 불완전하게 할 수도 있고, 한 동안 순종하다가 얼마 후에는 믿음이 약해져서 제대로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럴 박(Darrell Bock) 교수도 유사한 주장을 하고 있다:
한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아들로 보게 될 때 성령의 임재는 잘 드러날 것이고, 그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갈망과 친밀감을 갖게 될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다는 것이 로마서 8:14-16이 가르치는 주된 내용같이 보인다. 23)
그러나, 만일 첫 번째 의미가 주재권 구원론자들의 진의라면 그들은 지금까지 쓴 논문이나 책을 다시 써야 할 것이다. 자신들의 주장을 정확하게 표현해서 쓸데 없는 혼란을 야기하지 말았어야 할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주재권 구원론자들, 특히 맥아더의 경우에는 그가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실제로 주장하는 내용을 달리 이해해야 한다고 하지만,24) 이것도 수용하기 어렵다. 맥아더나 다른 주재권 구원론자들은 글쓰기의 초보자가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을 갖춘 분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책이나 논문으로 출판한 내용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그들의 주장이 애매모호하다는 비판은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일 주재권 구원론자들의 주장이 두 번째 의미라면 참으로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들이 야기될 수밖에 없다. 필자가 보기에는, 맥아더의 경우에는 다소 애매하지만, 주재권 구원론자들은 주재권 구원을 두 번째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주장을 단호하게 반복해서 내세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1. 이 경우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은 객관적 주재권과 주관적 주재권을 혼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거듭난 신자라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당시 객관적 주재권--예수님이 주님이시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모두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모든 신자가 다 구원의 순간 주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적인 삶의 주인으로 모신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25) 환언하면, 진정으로 거듭났지만 매일매일의 삶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잔슨(S. Lewis Johnson)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논의에 있어서 양측의 수사(修辭)가 항상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구원에 있어 서의 “전적인 헌신”(total commitment)의 필요성을 부르짖는 소리나, 예수님이 모든 면에서 주님이 아니면 그는 전혀 주님이 아니다”는 공허한 구호를 반복하는 것은 확실 히 사람들을 오도하는 주장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다른 상황에서는 자신들의 주장을 대개 수정한다. 역사적인 신앙고백을 연구해 보면, 믿음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 고, 믿음이 공격을 받아 약해지기도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있어서 분명한 사실이다 (예, 사도행전 10:14에서 베드로가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고 한 것을 생각 해 보라).26)
2. 만일 주재권이 복음의 일부라면, 구원의 확신을 갖는 사람의 수는 극히 적을 것이다.한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완전히 확립하려면 평생이 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필자는 1968년에 거듭나 약 6개월동안 감격과 눈물 속에서 살았고, 진정으로 주님 뜻대로 살고자 했다. 그러나 지금 누군가가 “목사님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주재권이 형성되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의 삶의 전분야에서 그렇게 되어 있다”고 답변하기에는 망설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물론 필자는 거듭난 직후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예수님을 나의 삶의 전분야에서 주님으로 모시고 싶은 강한 소원을 가지고 있고, 어느 정도는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주재권 구원이 맞다면, 분명히 거듭난 그리스도인도 죽기 전에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가 없을 것이다. 27) 그러나 이것은 요한일서 5:9-13의 말씀과 분명히 상충되는 가르침이다.
3. 주재권 구원은 구원과 제자도, 또는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고 있다. 구원이란 기본적으로 죄 사함을 의미하며, 이는 눈깜짝할 사이에 성령의 역사로 인해 일어난다. 그러나 주재권/성화/제자도는 구원 받은 후에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칭의와 성화는 분리할 수는 없지만 구분할 수는 있는 것이다.28) 라이트너(Robert Lightner)가 이 문제를 바르게 지적하고 있다: “주재권 구원은 점진적인 성화와 칭의의 차이, 또는 제자도와 아들 됨의 차이를 분명하게 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구원의) 조건과 결과를 섞어놓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되기(being)와 그리스도인으로 되어가기(becoming)를 혼동하고 있다.”29)
복음에 주재권이라든지 그 외의 어떤 다른 요소를 도입하는 것은 복음을 전적으로 왜곡하는 행위이다. 사실상, “복음에 주재권에 대한 고백을 첨가하는 것은 복음의 강조점인 은혜를 파괴하는 위험한 일이다. 얼마만큼의 주재권이 되어야 구원얻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나?”30) 우리는 구원의 조건과 구원의 결과를 세심하게 구별해야 할 것이다. 복음은 어떠한 경우에도 손상을 입지 않도록 순수하게 보존되어야 한다. 사실상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사셨다는 진리--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갈 1:6-9; 고전 15:3-4).
4. 이 견해는 성경에 분명히 언급된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존재에 대해서 설명하기가 어렵다. 31)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 새로운 카테고리에 속하는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면 그리스도인으로서 특정한 상태를 가리키느냐 하는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32) 성경에 보면 구원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육신적인 상태에 있는 신자들이 있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구약에 나타난 롯은 분명히 구원받은 사람이지만 (벧후2:7), 오랫동안 헌신되지 못한 채 살았다. 아나니아와 삽비라(행5:1-11)는 물론 전반적으로 볼 때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시기, 분쟁, 분열 등으로 가득 찬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이었다(고전 3:1-4).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향하여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 3:2)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고전3:3)고 하면서 탄식을 했다.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사데 교회나(계3:1-6) 라오디게아 교회(계3:14-22) 성도들은 대부분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었다.
셋째(맥아더가 범하고 있는 몇 가지 착오 내지는 오류), “신자”라는 단어와 “제자”라는 단어가 성경, 특히 사도행전에서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신자는 제자라는 주장은 용납하기 어렵다. “제자”(μαθητη)라는 단어는 “배우는 자”(learner)라는 의미이고, 그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주어진 문맥에서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33) 신약성경에서 “제자”라는 단어는 적어도 3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예수님의 12제자와 같이 헌신된 제자들을 의미하기도 하고(마 10:1; 16:13-20, 24-27; 눅 14:25-35; 요 6:67), 참 신자를 의미하기도 하고 (행6:1-2,7; 11:26; 14:20, 22, 28; 15:10), 신앙 여부와 상관없이 그냥 배우고 싶어서 좇아 다니는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눅 6:17; 요 6:60, 66). 34) 맥아더도 “제자”라는 단어가 여러 가지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제자와 신자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35)
그러나 여기에서 참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신자”라는 단어와 “제자”라는 단어가 동의어냐 아니냐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헌신된 그리스도인과 헌신되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차이를 성경이 인정하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성경이 그런 차이를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언급했다(마16:24-27; 막 8:34-38; 눅 9:23-26;14:26-27). 구원은 그저 주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제자도는 많은 대가를 요구한다. 찰스 빙(Charles Bing)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제자도에 관한 구절을 모두 석의적으로 분석한 후에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구원은 그저 주는 선물이지만, 제자도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구원은 주로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와 연관되지만, 제자도는 주로 주님으로서의 그리스도와 연관된다.
구원
제자도
구속과 화해의 측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포함.
하나님의 뜻 전체를 포함.
구원에 필요한 유일한 조건은 “믿으라”는 것이다.
제자도의 조건은 “거하라, 순종하라, 사랑하라, 자신을 부인하라, 십자가를 지라,따르라, 자기 생명을 버리라, 가족을 미워하라”와 같은 것들이다.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이다.
전생애 걸친 성장 과정이다.
구원은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 지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것이다.
제자도는 신자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반응.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반응.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현세의 상급과 영원한 상급을 결정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행위로 얻는 것이다. 36)
그렇기 때문에 사도행전에 나타난 “제자”라는 단어의 제한적인 용법에 근거해 신자와 제자는 동일하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왜냐하면 복음서에서는 제자라는 단어가 참 신앙이 없는 자까지 포함할 정도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재권 구원론자들은 칼슨 (D. A. Carson)이 말하는 바 “성경의 편파적 사용”(selective and prejudicial use of evidence)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37)
다섯째,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순종이나 헌신이 없는 구원은 “값싼 신앙”(easy believism)이라 하여 매도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제시할 수 있겠다.
1. 첫 번째 이유는 기독교 진리 자체가 믿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성경 진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불신자들, 특히 교회 배경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기독교 진리를 처음 들을 때 그것을 이해하기는 너무 어렵고, 믿기는 더 어렵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고전 1:18상)라고 했고, 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1-22)라고 했다. 그러므로 불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불신자에게 복음 진리는 비합리적이고 어리석게 들리는 것이다. 라이리(Charles Ryrie)는 예수 믿기가 쉽지 않은 이유를 두 가지 제시하고 있다. 한 가지 이유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믿을 수 없는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요,” 또 다른 이유는 “우리의 믿음의 내용이 믿을 수 없는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38)
2. 비주재권 구원이 값싼 믿음이라는 비판이 타당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비주재권 구원론자들이 구원은 기독교 신앙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도하신 신앙의 첫걸음에 불과하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신자는 훈련받고 양육받아야 하며, 그 훈련이란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제자로 예수를 따르는 것은 많은 대가 지불이 요구되는 것이다. 누가복음 9:18-27을 비롯해서 성경 여러 곳에서 예수의 제자로 예수를 따르는 것이 결코 값싼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III. 구원얻는 믿음(saving faith)은 어떤 것인가?
구원론의 실제적인 문제를 취급함에 있어서 맥아더의 경우나 필자의 경우 모두 출발점은 동일하다. 즉, 오늘 날 교회 내에서 만연하고 있는 거짓 신앙고백 (false profession)의 문제이다. 그러나 동일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필자의 경우와 맥아더의 경우가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맥아더는 거짓 고백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주재권 구원을 제시하고 있지만, 필자는 구원얻는 믿음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춤으로 해결책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맥아더에 의하면, 한 사람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한 후에도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이유는 예수님을 구세주로는 영접했지만 주님으로는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맥아더의 주장에 동의할 수가 없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했지만 삶에 전혀 변화가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은 적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한다고 해서 반드시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었다고 볼 수 없다. 그들은 고백은 했지만 영생을 소유한 자는 아닌 것이다. 전도자를 따라서 하는 기도, 즉, 소위 말하는 “영접기도”는 했을는지 모르겠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 체면 때문에, 또는 마지 못해서, 또는 다른 이유 때문에 “영접기도”를 한 경우도 많기 때문에, 그런 기도는 참된 영접도 아니고, 참된 구원의 믿음과도 거리가 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접기도”만 하면 그 자체 때문에 구원받은 것으로 간주하는 오류가 교회 내에 범람하고 있다. “영접”과 “영접기도”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영접이라는 말을 많이 하면서도 진정한 영접이 뭔지 모르고 사용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다. 이 면에서는 고신대학 신학대학원의 박영돈 교수도 유사한 주장을 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기초를 잃어버리게 된 데에는 우선 회심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 즉 현대 전도방법과 메시지가 예수를 영접한다는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온전히 밝혀주지 못하고 매우 피상적인 회심과 개종을 유도해온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39)
그러면 진정한 영접, 즉 구원얻는 믿음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어떤 경우에 한 사람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1. 잘못된 믿음은 어떤 것인가?
1-1. 이미 언급했듯이, 복음 진리에 대해서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진정한 구원의 믿음이 아니다. “나는 복음을 다 안다, 다 동의한다, 다 옳은 말이다”고 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다”는 것은 전혀 다르다. 머리에서의 지식(head knowledge)은 마음으로부터 믿어지기 전까지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 한 사람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기 위해서는 믿음의 3요소, 즉, 지. 정. 의가 모두 동시에 행사되어야 한다. 라이리(Charles Ryrie)는 이렇게 말한다: “믿음의 3측면은 구별될 수 있겠지만, 구원의 믿음이 발생할 때에는 세 가지 모두가 통합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40)
1-2. 전도자를 따라 일정한 형태의 기도를 앵무새처럼 따라서 하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한 사람이 동일한 과정을 수십번 반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으로부터 믿지 않으면 그러한 형식적인 과정 자체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 영접기도는 했지만 진정한 영접은 못했을 수도 있다. 진정한 영접은 구원얻는 믿음과 같은 의미이다 (요1:12)
1-3. 참된 믿음은 주재권과도 상관없다.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자 마자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모시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받는 그 순간 실제적인 주재권이 반드시 확립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구원받는 순간부터 주재권이 확립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의 조건도 아니고 구원과 동시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구원의 결과로 올 수 있는 것이다.
1-4.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것은 모두 참된 믿음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41)
1-4-1. "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는다."
이 말은 자신이 유신론자라는 것을 밝힌 것 외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유신론자이다. 그러나 모든 유신론자가 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긴 설명이 오히려 사족(蛇足)이 될 정도로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성경에 의하면, 귀신들도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고 벌벌 떤다고 했다 (약 2:19)
1-4-2. "나는 00교회의 회원이다."
좋은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보장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교회 출석후 몇 주 동안의 새 가족반 과정을 이수하고, 약 6개월 지난 후 학습문답을 공부해 “학습”을 받고, 그로부터 약6개월 후 세례 문답 공부를 한 후 침례(세례)를 받으면 교회의 회원이 되는데, 그것이 참된 믿음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물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참된 믿음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참된 믿음이 없이도 그런 과정을 모두 성공적으로 이수할 수 있다.
1-4-3. "나는 천국 가기 위해서 열심히 하고 있다."
참된 믿음은 나의 열심이나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구원은 내가 어떤 사람이냐, 내가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만 연관이 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믿음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엡 2:8).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성경 진리를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열심히만 하면 천국이 보장될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다. 이러한 구원관은 성경이 분명히 정죄하고 있는 행위에 의한 구원관 (work salvation)이다.
1-4-4. "나는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고백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고린도전서 12:3에 근거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이 논리를 3단 논법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대전제: 나는 예수를 주님으로 시인하고 고백한다.
소전제: (고전12:3에 의하면) 이러한 고백은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결 론: 그러므로,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다.
위의 논증은 논리적으로 말하면 “애매어 사용의 오류”(fallacy of equivocation)를 범하고 있다. 먼저 대전제의 경우, “예수를 주님으로 시인하고 고백한다”는 표현이 적어도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한 가지는 마음으로부터 믿지도 않으면서 입만으로 시인하고 고백하는 경우가 있고, 또 다른 한 가지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구세주로 믿고 마음에서부터 “당신은 나의 주님입니다 이제 주님 뜻대로 살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논증에서는 대전제에서부터 문제가 있다. 그러면 소전제는 어떠한가? 고백이라는 말이 첫 번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면 소전제는 타당하지 않다. 입만의 고백은 조금만 공부하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성령과는 아무 상관없이 진행될 수 있다. 마태복음 7:21-23의 경우가 바로 이런 거짓 고백의 전형적인 예일 것이다. 그러나 고백이 두 번째 의미라면 소전제는 타당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전제와 소전제의 타당성을 검토하지 않은 채 내린 결론은 타당성이 없다.
1-4-5. "나는 모태 신자이다."
요한복음 1:13에 의하면,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했다. 성경은 “모태 신자” 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모태 신자임을 자랑하고 있다. 그런 신앙은 절대로 없다. 모태 죄인은 있어도 모태 신앙이라는 것은 없다(시 51:5).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대일의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모태 신앙이라는 것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것 외에는 별 다른 의미가 없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은 다른 종교를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보다는 예수 믿어 구원받을 가능성이 훨씬 많지만 기독교 가정 출신이 모두 거듭난 신자가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 아닌가?
1-4-6. "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치병을 고쳤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치병 치유를 받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지만 육체적인 치유가 내적인 영혼의 치유와는 상관이 없다. 육체적인 치유가 영혼의 치유로 나아갈 수도 있겠지만 육체적인 치유만으로 끝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1-4-7. "나는 방언을 한다."
방언의 은사는 성령의 역사로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방언 은사가 지금도 지속되느냐 중단되었느냐, 그리고 오늘날의 방언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에 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도 많은 논란이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길게 논하지 않겠다. 그러나 방언이 사탄의 역사로도 가능하고, 연습하고 배워서 할 수도 있고, 심리적인 현상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에 방언을 한다고 해서 모두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몹시 위험한 일이다.42)
1-4-8.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뜻대로 살고자 한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자주 범하는 오류 중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 없이도 하나님(=성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두 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올바른 성경 교육 부재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그런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성경은 이 문제에 관해서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요14:6). 요한일서 5:11-12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분명한 믿음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감히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만일 예수 없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은 순전한 짝사랑에 불과하다.
2. 참된 믿음은 무엇인가?
참된 믿음은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신뢰(whole-hearted trust)하는 것이다. “전인격적”이라는 것은 지,정,의 전체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믿으면 구원받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의 삶에 전인격적인 변화가 생긴다. 예수를 진심으로 믿으면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은 후가 분명히 구별된다는 말이다. 성경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3. 참된 믿음과 거짓 믿음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3-1. 참된 믿음은 열매로 안다. 거짓 믿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참된 믿음은 내재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열매를 맺게 된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고백을 하지만 아무런 변화의 열매가 없다면 그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3-2.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믿으면 바로 그 직후부터 변화의 열매가 나타난다. 예수를 전인격적으로 믿고 구원받으면 분명한 변화의 증거가 있다는 것은 교파 관계없이 모든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주장하고 있다. 장로교의 대표적인 신학자 가운데 한명이었던 찰스 하지(Charles Hodge)도 중생은 “영적 죽음에서 영적인 생명으로 옮겨가는 즉각적인 변화”라고 했고,43) 또 다른 장로교 신학의 대표자 중 한 명인 워필드(B. B. Warfield)도 유사한 주장을 하고 있다:
중생이란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인해(딛3:5;엡4:24) 영혼 속에 일어나는 근본적이고 완전한 변화이다(롬 12:2; 엡 4:23).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로운 사람”(엡 4:24; 골 3:10)이 되어, 더 이상 세상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롬12:2; 엡 4:22; 골 3:9), 지식과 진리의 거룩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다시 지은 바가 된 것이다(엡 4:24; 골 3:10; 롬12:2).” 44)
침례교 신학자인 스트롱(A. H. Strong)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것(중생)은 즉각적인 변화이다. 중생은 점진적으로 서서히 이루지는 일이 아니다. 변화를 준비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의 역사는 점진적일 수 있고, 중생이 있기 전과 후에 자신의 중생을 인식하는 것도 서서히 올 수 있다, 그러나 중생 그 자체는 성령의 영향으로 인해 일어나는 순간적인 일이며, 한 순간 영혼의 성향이 바뀌어 하나님에게 적대적이던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45)
중생과 그 후의 변화에 관해서 에릭슨(Millard J. Erickson;침례교)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첫째, 그것(중생)은 새로운 그 무엇, 즉, 사람의 자연적 성향의 전체적인 반전을 포함 하고 있다....나아가서 신생[=중생] 그 자체는 즉각적인 것같이 보인다. 신생을 묘사함에 있어서 그것이 단일한 행동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라는 암시를 하는 내용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46)
3-3. 한 사람이 참으로 거듭나면 경험하게 되는 변화에는 두 종류가 있다. 즉, 내적인 변화와 외적인 변화이다. 내적인 변화는 구원받으면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변화요, 외적인 변화는 즉각적인 경우도 있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성경은 진정으로 거듭난 신자가 내주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인해 경험하는 내적인 변화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한 변화 중 몇 가지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47)
내적인 변화의 예
3-3-1. 죄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그 해결
구원은 죄 용서이기 때문에 구원받으면 ꡒ나 같은 큰 죄인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때문에 용서받았구나. 나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완전히 해결되었구나!ꡓ하는 해방감이 분명히 있다(눅 5:31-32; 엡 1:7; 히 10:17; 요일 2:12; 계 1:5).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도 제대로 모르고 그 죄가 완전히 용서받은 것도 모른다면 그것은 결코 구원일 수가 없다.
3-3-2.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신 주님의 은혜에 대해서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감사가 있고, 또 그 주님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게 된다(벧전 1:8; 요일 5:1-3). ꡐ주님ꡑ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ꡐ찡ꡑ해지기도 하고, 주님만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하고, 주님에 대해서 마음에서부터 감사와 감격이 솟아나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등의 변화가 있다.
3-3-3. 내적 평안과 기쁨
구원받으면 마음에 엄청난 평안과 기쁨을 체험하게 된다(요 7:38; 행 8:39; 행 16:34). 나의 심령 속에서 솟아오르는 기쁨 때문에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기뻐하게 된다.
3-3-4. 말씀에 대한 새로운 이해
과거에는 영적인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에(눅 6:40; 고후 4:4) 말씀이 잘 이해도 안되고 재미도 없었는데, 거듭나면 말씀이 이해되고, 믿어지고, 좋아진다. 과거에 알고 있던 말씀이 새로운 의미로 깨달아지기도 한다(골 3:10). 말씀뿐만 아니라 찬송에 대해서도 새로운 인식이 생긴다. 과거에는 그냥 습관적으로 찬양했지만, 구원받고 나면 가사 하나하나가 바로 자신의 간증이요 신앙고백인 것을 깨닫게 된다.
3-3-5. 구원받지 못한 다른 영혼에 대한 관심
구원받고 나면 구원받지 못한 영혼을 진정으로 불쌍히 여기고 그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부담감이 생기기 시작한다(요 4:39; 행 9:20, 22). 대개 부모나 친지 등 가까운 사람에 대한 부담에서 그 범위가 점점 더 확대되어 간다.
3-3-6. 취향 및 가치관의 변화
구원받고 나면 과거에 관심 가지고 있던 것, 과거에 좋아하던 것, 과거에 추구하던 것이 시시하게 보이고 그 대신 새로운 가치관이 형성된다(눅 19:8; 요일 2:15). 한순간에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3-3-7. 죄를 안 지으려고 하고, 죄에 대해서 민감해짐
구원받고 나면 화인 맞은 양심이 살아나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해지고, 조그마한 죄만 지어도 금세 반응이 와서 괴로워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굉장히 두려워하게 되고, 죄를 안 지으려고 발버둥치게 된다(요일 1:5-10; 3:5-6, 9).
3-3-8. 다른 신자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영적 교제가 됨
거듭나면 과거에 흉금을 터놓고 대화하던 친구와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특별히 영적인 문제나 신앙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너무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거듭난 그리스도인과는 말이 통할 뿐만 아니라 그 교제가 너무 재미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을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그들이 참으로 소중한 형제요 자매임을 알게 된다. 과거에 전혀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거듭난 사람이면 금세 영적인 대화가 통한다(요일 1:3-4; 3:14). 아버지가 같기 때문에 공통점이 굉장히 많은 것이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채 교회에 다니는 사람과는-- 비록 그가 육신의 부모이고 형제일지라도-- 전혀 말이 통하지 않고 오히려 다툼만 생기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3-3-9. 주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
거듭나면 예수님을 삶의 전 분야를 주장하시는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소원과 마음의 결단이 자발적으로 따른다. 그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마음이 생기고(요일 2:3-5), 주님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생긴다. 또 집이라도 팔라면 팔 것 같고, 불 속에라도 뛰어들라면 뛰어들 것 같은 마음이 생긴다. 물론 나중에는 그런 마음이 식기도 하고 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적인 삶이 그 정도에까지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구원받은 사람이 금세 실제적인 주재권이 확립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그의 뜻대로 살겠다는 마음의 각오와 결단은 생긴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한 직후에 위에서 언급한 내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구원의 믿음을 가졌을 가능성이 굉장히 많다. 그러나 변화의 정도는 사람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애매해서 한 사람이 정말 구원의 믿음을 가졌는지의 여부를 알기 몹시 어려울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하면서 우리의 한계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제시한 변화의 열매는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을 가리는 일반적인 척도로서 상당히 유용할 것으로 생각한다.
결 론
오늘날 한국교회는 너무나 물량주의적인 외적 성장에 몰입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소위 “바람 목회”나 “유행 목회”를 하는 목사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교회가 부흥하는 방법이라고 한번 소문이 나면 한국교회에는 큰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다. 처음에는 살랑살랑 부는 미풍이지만 조금 있으면 메가톤급 태풍으로 바뀐다. 그리고는 곧 잠잠해지면서 또 다시 새로운 바람을 찾는다. 셀 목회가 잘된다면 모두 셀에 빠지고, 윌로우 크릭식이 잘된다면 모두 윌로우 크릭식이 되고, 제자훈련이 잘된다면 모두 제자훈련한다고 야단이다. 그런 내용을 담은 책은 금세 베스트 셀러가 되고, 그런 내용을 다루는 세미나는 목사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제자훈련이 필요 없다거나, 셀 목회가 잘못이라는 말이 아니다. 바람을 타다 보니 교회의 본질을 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교회가 바람이나 유행과 관계없이 반드시 해야 될 본질적인 일이 몇 가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분명한 복음을 통해 영혼이 거듭나도록 돕는 일이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바뀌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 나오는 한 영혼 한 영혼이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구원의 확신이 있는지, 그리고 그 구원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구원의 복음을 등한시하는 교회는 진정한 교회라고 할 수 없다. 새롭게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사람들이 어떻게 주님을 만날 수 있는지에 관해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교회에 등록을 하면 마치 하늘 나라에 등록한 것같이 잘못 가르치거나, 일정한 요식행위를 거쳐 소위 “영접기도”를 하면 구원받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그러다 보니 “거짓 고백”의 문제가 오늘날의 한국 교회의 핵심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다. 그 선물을 받아서 내 것으로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을 통해서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무엇인지, 잘못된 믿음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너무나 많은 혼란이 있다. 예수를 바로 믿으면 분명한 변화의 열매가 있다.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그 믿음이 바른 믿음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늘날 이 부분이 교회에서 분명하게 다루어져서 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서 바르게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구원받은 영혼이 제대로 양육받아서 성숙한 신자가 되게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방법은 시대마다 바뀔 수 있다. 그러나 본질은 절대로 타협하거나 변할 수 없다. 바른 믿음이 바로 그 중의 하나이다.(끝)
후 주
이 논쟁의 배경에 관해서 좀 더 자세히 연구하려면 다음의 저서와 논문을 참고할 것. John F. MacArthur, The Gospel according to Jesus, Revised and Expanded Edition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1994), 27-39; Kenneth L. Gentry, Lord of the Saved: Getting to the Heart of the Lordship Debate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1992),vii-xi; Charles C. Bing, "Lordship Salvation: A Biblical Evaluation and Response. Grace Life Edition" (Ph.D. Dissertation, Dallas Theological Seminary, 1991), 6-12.
주재권 구원과 비주재권 구원 문제에 관해서 깊이 있게 연구하고자 하는 분들은 필자의 영어 논문을 참고할 것(Andrew D. Chang, "The Nature of Saving Faith: Another Look at the Lordship Salvation Debate," Korea Journal of Theology 4 [November 2004])
Gentry, 10; cf. Bing, 5-6.
John R. Stott, ""Must Christ Be Lord To Be Savior?--Yes" Eternity (September, 1959),37; See also James I. Packer, Evangelism and the Sovereignty of God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61),89.
Charles C. Ryrie, Balancing the Christian Life (Chicago: Moody Press, 1969), 169; See also Livingston Blauvelt,Jr., "Does the Bible Teach Lordship Salvation?" Bibliotheca Sacra 143 (January-March 1986),37.
MacArthur, 37,194; Gentry, 15-23.
R.Alan Day, Lordship--What Does it Mean? (Nashville,TN: Broadman Press, 1993), 13-20; MacArthur, 185-94; Gentry,15-29.
MacArthur,175-84; Gentry, 33-47; Day, 21-30.
Gentry, 51-65; Day, 39-47.
James Boice, Christ's Call to Discipleship (Chicago: Moody Press, 1986),13-23; MacArthur, 35-37; Gentry, 67-82; Day, 33-36.
MacArthur, 36.
Gentry, 7; MacArthur,30-31,36,135,280.
13) MacArthur, xxi.
J. Gresham Machen, What is Faith? (Grand Rapids, MI: Eerdmans, 1925),156
Darrell L. Bock, "A Review of The Gospel according to Jesus," Bibliotheca Sacra 146 (January-March 1989), 26-32
MacArthur, xxii.
S. Lewis Johnson, ""How Faith Works," Christianity Today 33:13 (September 22. 1989),23 (Italics in the original).
MacArthur, 190 (Italics in the original).
MacArthur, 192 (Italics added).
20) MacArthur, 233.
21) MacArthur, 235.
22) Ibid.
23) Bock, 32; See also Randall Gleason, "The Lordship Salvation Debate," Evangelical Review of Theology 27:1 (2003),72.
24) Gleason, 59.
25) Bing, 118-19.
26) Johnson, 23.
27) J. Kevin Butcher, "A Critique of The Gospel according to Jesus," Journal of Grace Evangelical Society 2 (Spring 1989):37.
28) Ryrie, Salvation,150-54; Bruce Demarest, The Cross and Salvation (Wheaton, IL: Crossway Books, 1997),406-11;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MI: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4),746-58; Millard J. Erickson, Christian Theology, Second Edition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1998), 980-92; Anthony A. Hoekema, Saved by Grace (Grand Rapids, MI: Eerdmans, 1989),192-202.
29) Robert P. Lightner, Sin, Savior, and Salvation (Nashville, TN: Thomas Nelson Publishers, 1991), 212 (Italics in the original).
30) cf. Bock, "Jesus as Lord in Acts and in the Gospel Message," Bibliotheca Sacra 143 (April-June 1986):146.
31) Bing, 119-20; Ryrie, Salvation, 111-13; also Ryrie, Balancing, 170-73.
32) Gleason, 71-72; Bill Bright는 “당신은 성령 충만의 삶을 발견했는가?” (Have You Made the Wonderful Discovery of the Spirit-filled Life?) 라는 소책자에서 영적인 그리스도인과 육적인 그리스도인 문제를 두 종류의 카테고리라고 하는 대신에 두 종류의 영적 상태 (two different spiritual conditions of believers)라고 표현하고 있다; D. A. Carson은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의 차이를 존재론적 차이(ontological difference)라기보다 행동적 차이(behavioral difference)라고 말하고 있다 ("Reflection on Assurance," in Still Sovereign, eds. Thomas R. Schreiner & Bruce A. Ware [Grand Rapids, MI: Baker Books, 2000], 254-56.
33) cf. Moises Silva, Biblical Words and Their Meaning (Grand Rapids, MI: Zondervan,1983),139; Walter Kaiser, Toward an Exegetical Theology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81), 69-85; William Klein, Craig Blomberg and Robert Hubbard, Introduction to Biblical Interpretation (Dallas: Word Publishing, 1993), 156-71; A. Berkeley Mickelsen, Interpreting the Bible (Grand Rapids, MI: Eerdmans, 1963),99-100; Roy B. Zuck, Basic Bible Interpretation (Wheaton, Ill: Victor Books, 1991), 106-12.
34) Bing, 124-29.
35) MacArthur, 221. note 2 (his emphasis).
36) Bing, 157-58.
37) Donald A. Carson, Exegetical Fallacies. Second Edition (Grand Rapids, MI:Baker Book House, 1996), 54-55.
38) Ryrie, Balancing, 179-81; See also Ryrie, Salvation, 117-23.
39) 박영돈, “무너진 영성의 기초,” 『목회와 신학』(2004년 6월호): 208.
40) Ryrie, Basic Theology (Wheaton IL: Victor Books, 1986), 327.
41) 장두만,『구원, 그것이 알고 싶다』 (서울: 요단출판사, 1997), 92-98.
42) 방언 문제에 관해서 더 연구하려면, 다음의 책을 참고할 것. John F. MacArthur, Charismatic Chao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2; 이 책은 존 맥아더, 『은사』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음), 220-45; Joseph Dillow, Speaking in Tongue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75),165-80; John P. Kildahl, "Psychological Observations," in The Charismatic Movement, ed. Michael P. Hamilton (Grand Rapids, MI: Eerdmans Publishing Co, 1975),124-42; Charles C. Ryrie, The Holy Spirit, Revised and Expanded Edition (Chicago: Moody Press,1997),124-53; Robert Gromacki, The Holy Spirit, Swindoll Leadership Library (Nashville, TN: Thomas Nelson Publisher,1999), 205-35; Anthony A. Hoekema, Tongues and Spirit-Baptism: A Biblical and Theological Evaluation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81), 49-123.
43) 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3 volumes (Grand Rapids, MI: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9, reprint), 3:5.
44) B.B.Warfield, Biblical and Theological Studies (Philadelphia, PA: Presbyterian & Reformed Company,1968),351; See also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Fourth Revised and Enlarged Edition (Grand Rapids, MI: Eerdmans Publishing Company,1941), 468.
45) A.H.Strong, Systematic Theology (Valley Forge, PA: Judson Press, 1907). 826.
46) Erickson, 956-57.
47) 이 부분은 필자의 졸저『구원,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인용했음 (133-38 페이지 참조); 체이퍼와 왈부드는 구원받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8가지 말하고 있고 (Lewis S. Chafer and John F. Walvoord, Major Bible Theme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74],214-16), 그로마키는 12가지를 언급하고 있고 (Robert Gromacki, Is Salvation Forever? [Chicago: Moody Press, 1973].177-84), 라이리는 5가지를 들고 있다 (Charles C. Ryrie, So Great Salvation, 49-50). 그리고 네비게이토 출판사에서 발행한 소책자 『그리스도인의 확신』에서는 7 가지 변화를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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