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진리1 (하이델베르크 문답) -S.G. Dgraaf
2014-02-08 23:50:14
1) 교회의 신앙 고백의 중요성
하이델베르그 교리 문답서를 다룬다는 것은 교회의 신앙 고백을 다루는 것이다. 교리 문답서는 교리를 가르칠 때 사용되는 교제이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교회의 신앙 고백이다. 그러므로 하이델베르그 교리 문답서는 교회가 엄숙하게 선포하는 믿음의 고백이며 동시에 그 고백을 문서로 기록한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믿음을 교리 문답서로 표현할 때 그 가치는 무엇일까? 처음에 이 질문을 던질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교회의 신앙 고백이 도대체 내게 무슨 유익을 주는 것일까’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이 드는 것은 우리가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는데 익숙해져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주 앞에서 믿음으로 살기를 바란다면 내 중심으로 교회의 신앙 고백을 대하는 자세부터 고쳐야 한다. 물론 교리 문답서는 “사나 죽으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고 후반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가?”라는 질문도 한다. 더욱이 “이 모든 것을 믿는 것이 당신에게 지금 어떤 유익을 주는가?”라고 직설적으로 묻기도 한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이 질문들이 반드시 개인의 유익을 가장 먼저 앞세우려는 의도가 아닌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교회의 신앙 고백은 보통 두가지 목적을 취한다. 첫째는, 교회 내부의 하나됨을 보호하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를 고백함으로써 각 시대의 이단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 둘째는, 외부 세상을 향해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교회에 진리를 계시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교회의 신앙 고백에는 헌신의 요소가 들어있다. 성경은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께 헌신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만일 헌신과 예배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앞서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이름을 고백하는 신앙 고백은 우리의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의 신앙 고백이 믿음에 의한 고백일 때 성도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생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들의 삶의 태도에는 주를 향한 경배가 가장 앞서게 된다. 헌신이 없는 믿음이란 있을 수 없다. 믿음은 언제나 믿음의 내용을 바라보고 그 내용을 주신 하나님께 순종하게 된다. 이때 믿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사랑을 붙든다. 물론 하나님은 주의 말씀에 의해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여 주신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은 다시 주의 말씀에 의해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무한한 신실하심을 붙든다. 믿음의 증거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가운데 머물며 누리는 평강이다. 그럼에도 믿음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신실하심을 결코 다 헤아릴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광대함과 능력에 사로 잡혀 압도 당하게 된다. 즉,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들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의 믿음을 사로잡아 압도한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진 마음은 언제나 그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향한 경배함으로 가득차게 되어 있다.
우리는 교회가 공식적으로 신조를 선언하는 것과 교회의 신앙 고백 행위를 아직은 구별하지 않았다. 또한 교회의 고백 행위와 고백 내용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았다. 실제로 이들 사이에는 구분이 있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따로 떼어내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교회는 신앙을 고백하는 그 자체를 교회의 신앙 고백 행위로 간주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할 경우 교회는 신앙 고백을 하면서도 주를 향한 경외와 예배의 마음을 잃을 수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의 신앙 고백 행위는 형식에 갇힌 죽은 고백과 다름없게 된다. 만일 교회가 형식적으로 신앙을 고백하게 되면 교회는 신앙을 고백 하면서도 그렇게 살지 않게 된다. 따라서 교회의 삶과 교회의 신앙 고백 사이에는 점점 거리가 생긴다. 하지만 교회가 참으로 교리 문답서의 모든 내용을 보화처럼 귀중하게 여기고 마음속에 새긴다면 교리 문답서는 교회에 큰 자원이 될 것이다. 그럴 경우, 교회의 신앙 고백 행위는 단순한 형식적 고백 행위가 아니다. 이때의 교회의 신앙 고백은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행위가 된다. 교회의 신앙 고백 행위 안에 주를 향한 찬양과 감사의 마음이 담기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교회가 신앙 고백을 하는 최고의 목표이며 또한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앙 고백을 행하여야 하며 또한 신앙 고백에 따라 행하여야 한다. 이는 신앙 고백을 듣고 말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교회가 신앙 고백의 내용을 이해한 가운데 마음으로부터 고백할 때 신앙 고백의 의도대로 성도들은 주를 향하여 경배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결코 신앙 고백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신앙을 참되게 고백할 때, 우리가 언급한 신앙 고백의 두가지 목표가 이루어지게 된다. 즉, 교회 내부의 하나됨을 보호하게 되고, 외부로는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된다.
신앙 고백은 결코 “교회 공동체의 동의”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상호간의 계약과 같은 그러한 개념이 아니다. 신앙 고백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 핵심이다. 교회가 신앙을 고백하면서 경외함과 헌신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지 않는다면 그러한 고백은 교회의 하나됨을 보존하는데 아무런 효력이 없다. 신앙 고백이 없이 교회가 공동체를 결속 시키기 위해 여러 수단들을 동원하고 노력하더라도 실제로 교회의 하나됨은 무너지게 되어 있다. 물론 교회는 여전히 신앙 고백의 내용을 그대로 지속할 수 있고 또한 비슷한 종교적 감정과 영적 체험을 나눌 수 있다. 심지어 신앙 고백이 다르더라도 공통적인 종교적 감정을 나눌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있어서는 참된 신앙 고백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또한 공동체 내의 신앙 고백의 차이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찬양은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계시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옳바르게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결코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없다. 그 이유는 참된 예배는 교회가 고백하는 신앙에 따라 하나님의 진리를 인정함으로 가능하여지기 때문이다. 교회가 헌신하는 자세로 신앙을 고백하고 그 고백이 찬양의 행위로 이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교회의 참된 하나됨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교회가 기도하는 자세로 신앙 고백을 붙들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리를 외부 세상에 전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여진다. 만일 교회가 제멋대로 신앙 고백을 조정하고 제한하고 변경한다면 교회는 어느새 본래의 믿음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세상의 조직체가 된다. 이때 교회는 세상을 향해 전해야 할 메시지를 잃게 된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진리를 붙들 때에 이 땅에서 특별하고 유일한 기관으로 존재할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하며 교회를 주관하고 자유하게 하는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신앙 고백에 대한 교회의 관점과 자세가 지금까지 말한 것과 다르다면 그러한 교회의 고백은 믿지 않는 세상이 들을 때 알맹이 없는 슬로건으로 밖에 들릴 수 없을 것이다. 교회 안에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증거가 없을 때, 교회는 세상 방법을 사용하면서 세상 원칙을 외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과 원칙을 사용하는 교회는 세상에 물든 타락한 교회로서 결국 세상의 조직과 거의 다를 바가 없게 된다.
특히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배로서의 신앙 고백은 교회에 위로를 가져다 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교인들 중에는 종종 교리 문답이 우리의 삶과 죽음 가운데 과연 유익과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의심하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참으로 교리 문답은 교회의 신앙 고백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대하지 않는 자들에게 위로보다는 도리어 불편함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신자가 신앙 고백을 통한 경배와 기도 외에 어디서 위로를 얻을 수 있겠는가?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기도하기를 “오 주여, 무엇이 가장 우선인지 깨닫게 하소서. 그것은 주를 부르며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참된 도움과 위로를 위해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을 찬양하는 고백을 드리게 되는 사실을 말해 준다. 즉,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고백하는 것과 하나님의 위로와 도움을 구하는 것은 서로 뗄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영적으로 교만하고 사악한 인간들은 교리 문답의 귀중함을 깨닫지 못한 채 신앙 고백을 강탈하여 제거한 후에 인간 스스로 위로를 얻으려고 추구하여 왔다. 하지만 그들은 교회의 신앙 고백으로서의 교리 문답의 귀중함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2) 신앙 고백을 시인하는(professing) 교회
이와 같이 신앙 고백은 교회 전체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신앙 고백이 각 개인에게 어떤 유익을 가져오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단지 부차적인 요소일 뿐이다. 이러한 배경 가운데 이제 우리는 교리 문답을 각 성도를 위한 교과서(textbook)로 여길 수 있다.
신약에서 ‘시인한다’는 뜻은 “똑같이 말한다”는 뜻이다. 신앙 고백을 시인한다는 것은 교회의 성도들이 똑같이 말한다는 뜻이다. 때때로 이 뜻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말한다는 뜻도 된다. 교회는 신앙고백을 시인함으로써 주님의 말씀을 반복한다. 이때 신앙 고백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주신 특별 계시에 대한 교회의 반응이다. 교회는 때때로 여러 상황에 대해 부차적인 언급을 할 필요가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순종과 반응을 말해야 한다.
교회의 신앙 고백의 확실성은 주님의 말씀을 시인하는데 있다. 즉, 신앙 고백의 내용이 진리라는 점에서 우리는 평안을 누린다. 물론 교회는 주님의 말씀을 되풀이하는데 있어서 실수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수정과 개혁을 요구받는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으로서 좌우에 날선 검과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교회의 무오류를 논할 수 있다. 하지만 교회가 무오류를 논하는근거는 교회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있다. 즉, 교회의 무오류란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시인하도록 인도한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진리를 시인하는 일은 교회 전체의 소명으로써 각 신자의 소명보다 앞선다. 이는 각 신자들은 참 교회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여질 수 있다”(참조, 엡 3:18-19).
또한 이러한 배경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각 개인의 신자들에게 선포되기보다 주님의 교회의 백성들에게 선포되었다는 사실이 있다. 구약과 신약의 성경 전체를 통틀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주의 백성에게 나타내신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주의 백성을 믿음으로 인도하면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재창조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가 되도록 하신다. 이는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롬 4:17)은 또한 하나됨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이미 연합된 상태로 회복된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신다.
교회가 연합과 조화 가운데 하나님의 계시에 반응할 때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가 된다. 하지만 이 말이 진리가 교회의 도움을 필요로 하거나 또는 교회 안에서만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진리는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서는 진리에 의해 발생한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진리는 고백되어지고 보존되고 변호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며, 이는 우리에게 교회 안에서의 신앙 고백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이 사실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교회와 우리 자신과의 관계 가운데 두 가지를 구별해야 한다. 한가지는 우리는 교회의 회원이라는 점이다. 즉, 우리는 교회를 구성하고 있고 교회는 우리를 부분으로 하여 전체를 이루고 있다. 다른 한가지는 교회는 우리를 인도하며 이끄는 점이다. 이와 같이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를 믿음으로 받은 신자들의 모임이다. 사실 믿음으로 진리를 받은 자들을 통해 교회가 이루어지고 교회는 진리에 항상 복종한다. 하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를 신앙 고백으로 형성시켜서 교회 회원들의 삶을 이끌고 인도해야 할 의무와 권한을 갖는다. 이러한 기능이 바로 “진리의 기둥과 터”가 지닌 본질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교회의 부분을 형성하며 교회의 친교와 삶에 동참하였다는 증표를 받게 된다. 그 후에 교회의 지체로서 살아간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이 증표를 믿음으로 받아야 한다. 결코 이 증표를 거절하거나 의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증표에 대한 믿음을 통해 독자적인 자아 의식을 이겨내고 공동체적인 의식을 가질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교회 공동체 내에서 다른 성도들과 친교하며 사는 법을 배우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은 내 개인에게 주어지기보다 교회 공동체에게 먼저 주어진 것을 믿어야 한다. 즉, 주의 약속은 공동체에게 주어지며 나는 공동체의 지체로써 그 약속을 받게 되는 것이다.
때때로 교회가 개인적인 믿음과 개인적인 적욕을 강조하다가 믿음의 친교를 간과하거나 망각하는 때가 있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성령을 대적하게 된다. 그 이유는 성령은 격리된 지체를 적극적으로 구원하여 다른 지체들과 하나가 되는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성령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하는 자들 중에 격리된 자아의 믿음을 강조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고 도리어 성령을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통해 믿음의 교통 및 믿음의 친교를 계속 만들어 내신다.
교리 문답은 “사나 죽으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에 대해 언급하지만 그것이 지금까지 말한 교회 공동체의 우선권을 없이할 수는 없다. 누구든지 교리 문답이 먼저 교회의 신앙 고백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망각할 때 신앙 고백의 유익을 얻을 수 없게 된다. 교리 문답 내에서의 ‘당신’은 교회에 속한 지체로서의 ‘당신’으로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당신’의 신앙 고백은 공동체의 믿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공동체의 믿음’이라는 말이 공동체적으로 동의된 믿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의 믿음이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서로 같은 믿음의 친교를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각각 교회의 회원으로써 교회의 신앙 고백에 동의하며 참여한다. 즉, 교회의 신앙 고백은 나의 신앙 고백이다. 이 사실은 어마어마한 위로를 준다. 그 이유는 내가 교회의 고백에 참여했다는 것은 내가 개인적으로 고백하는 것 이상을 고백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개인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얼마나 제약되어 있는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우리 자신이 얼마나 무딘지 알기 때문에 이 사실로 인해 위로를 받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앙 고백을 계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책임이 있다. 한편 각 개인은 교회 안에서 성숙하여져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어야”(엡 3:19) 한다. 이처럼 각 지체가 교회의 신앙 고백에 참여한다는 의미는 각 지체가 교회가 아는 것을 알아가고 교회가 이해하는 것을 이해하여 가는 것을 뜻한다. 각 지체가 기도하는 자세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신앙 고백에 동참할 때 교회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교회는 모든 지체들이 이러한 부름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교회에 주어진 지도권을 행사해야 한다. 먼저 교회의 역할과 권한은 신앙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공식화하는데 있다. 교회는 신앙 고백을 통하여 그 생명을 이어간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앙 고백을 시인하면서 동시에 지체들로 하여금 기도하는 마음과 경배하는 마음으로 똑같은 신앙 고백을 시인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리 문답을 설교함으로써 모든 지체들에게 신앙 고백을 가르쳐야 하며 특히 어린 자녀들에게도 교회의 신앙 고백을 시인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만일 신앙 고백의 내용이 주의 말씀을 반복하고 되풀이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러한 신앙 고백은 단지 인간의 주관적인 고백일 뿐,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교회는 생명을 잃게 된다. 하지만 주의 말씀과 일치하는 신앙 고백을 신실함과 경배하는 마음으로 반복하고 되풀이할 때 각 지체들에게 순종의 행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만일 우리가 순종을 바란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워야 한다. 이는 신앙 고백을 듣고 배우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젊은 지체들이 신앙 고백을 통해 순종에 이를 수 있도록 교리 문답을 교육하여야 한다.
교회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 신앙 고백의 내용을 형성하고 그것을 반복적으로 고백하게 함으로써 지체들을 교훈해야 한다. 이러한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기 때문에 권위를 가지고 신앙 고백을 가르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 고백과 동반하는 교회의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유일한 권위를 방해할 수 없다. 교회는 단지 그 권위를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만 빌어올 수 있다. 신앙 고백이 나타내는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빌어온 권위이며 그 권위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는 계속 교회 안에서 증가하게 된다. 은혜의 말씀의 엄위와 고귀함은 교회가 말씀에 근거한 하나님의 진리를 권위있게 선포할 때 더욱 드러난다. 은혜의 말씀의 찬란함과 그로 인해 나타나는 은혜 자체는 지체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예배로 이끈다. 따라서 교회는 지체들에게 신앙 고백의 가르침을 통해 성령의 은혜가 넘치도록 해야 하며, 특히 젊은 지체들이 경배하는 자세로 신앙 고백을 시인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3)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신실한 복종으로서의 신앙 고백
교리 문답의 전체 내용을 습득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신앙을 고백하는 것과 그 고백을 시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할 때만이 우리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여 있음을 고백할 수 있다. 신앙 고백은 결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다는 느낌이나 체험에 근거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체험은 언제나 믿음의 열매이지 믿음의 바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체험은 주께 속한 믿음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믿음은 그 바탕을 체험에 두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두어야 한다.
이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의 믿음을 교회의 신앙 고백으로부터 이끌어내거나 추론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교회의 신앙 고백으로부터 믿음이 생겨나길 기대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 이유는 신앙 고백 자체가 진리로 여겨질 위험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교회의 신앙 고백만을 붙들고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한다면 그의 신앙 고백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적인 반응이라고 볼 수 없다. 물론 신앙 고백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신실한 복종이며 반응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이해하는 자들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 응답하는 법을 각각 배워야 한다.
교회는 신앙 고백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각 개인도 자신의 믿음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앞에서 우리는 자아 의식이 신앙 고백의 주된 목적이 될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이 뜻이 교회가 우리의 삶을 인도함으로써 각 개인의 삶의 가치를 제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신앙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그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교회 안에서 복종하게 되면서 각각 자유하게 되고 나아가 교회 공동체 내에서의 교제를 통해 더욱 온전한 삶을 누리게 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였다는 신앙 고백을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게 된다. 하나님은 교회에게 말씀하시길 주께 속한 자들마다 세례의 증표를 통해 기독교 교회에 연합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바른 신앙 고백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의 반복일 뿐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였다는 신앙 고백은 그 근거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면 그 고백 역시 순종의 행위가 된다. 성경이 우리에게 신앙 고백을 시인하라고 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 고백을 시인할 수 있다. 우리가 계속적으로 담대하게 고백하고 시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그렇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제 교회 외부에서 자라난 사람들이 어떻게 믿음으로 와야 하는지 질문해 보자.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 대해 하신 말씀을 믿음으로 받을 것을 요구 받는다. 하지만 교회의 회원이 아니며 교회 외부에서 믿음으로 와야 하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요구가 적용될 수 없다. 우리는 이것이 비정상적인 상태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류를 보면 교회 외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그러나 다수라고 해서 그들의 비정상적인 상태가 정상이 될 수는 없다. 그들의 비정상적인 상태는 하나님의 처음 계획에 들어있던 것은 아니다. 처음의 어떤 시점, 즉 아담의 때와 노아 시대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언약 안에 있었다. 과거 세대 가운데 기독교 국가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언약에 속하곤 하였다.
하지만, 지금 교회 밖에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우리는 그들이 언약을 떠났으며 따라서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들이 자신들의 비정상적인 상태를 의식하고 죄를 고백할 때에야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은 가능하여진다. 그들이 자신들의 상태를 성경의 기록대로 받아들일 때 그들이 결코 저버린 적이 없던 교회에 적용되는 약속들을 다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는 추측이 아니다. 바울은 믿음을 가지게 된 이방인들에게 이전에 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엡 2:12)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였다. 사실 그리스도도 이방인들이 먼저 자신들이 약속의 언약으로부터 제외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할 때에야 도움을 주셨다. 예를 들어, 주께서 백부장을 도우실 때도 그가 자기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고백할 때 도움을 주셨다. 또한 가나안 여인을 도우실 때도 그녀가 이방인은 개와 같아서 자녀들의 식탁에서 함께 먹을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고백할 때 도우셨다(참조, 마 8:8; 15:27). 이처럼 이방인들은 말씀이 말하는 자신들의 비정상적인 상태를 의식하며 수치를 느끼게 될 때 믿음 안에서 약속의 언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그 권위에 항복할 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였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된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분명하고 최종적인 근거를 발견한다. 종교적 체험은 실제적으로 사람이 믿음에 이르도록 도움을 줄 수는 있다. 하지만 믿음을 가진 이후의 체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얻는 것이어야 한다. 즉, 신앙 체험은 믿음에 의해 인식되어져야 한다. 종종 믿음 없이도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것과는 전혀 다른 체험이 가능하다. 더욱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같은 식으로 체험을 고백할 수 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결코 다른 사람들의 체험 고백에 뿌리를 내릴 수 없다. 물론 내 자신이 믿음을 통해 교회의 신앙 고백을 알게 되면 나는 그 고백을 함께 시인하면서 다른 지체들과 함께 교제를 갖게 된다.
지금까지 말한 이러한 원칙에 대해 혹자는 우리가 믿음을 지식에 국한 시키고 있다고 반대한다. 결국 교리 문답은 지식에 믿음을 가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교리 문답의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는 신실한 믿음의 지식이며 의식적으로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교리 문답의 지식은 우리를 사로잡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기초한 지식이다.
어떤 사람은 교회의 신앙 고백 및 성도들의 신앙 고백 시인을 반대하는 이유로서 교회가 고백과 시인을 구원을 얻는 조건과 공로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회중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또한 교회의 신앙 고백을 시인해야 세례를 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우리의 의로 삼아야 하는 성경의 요구와 상충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혼동 때문에 실제로 회중 앞에서 믿음을 공적으로 시인하는 것을 주저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착각은 신앙 고백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은 것이다.
먼저 우리의 신앙 고백은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하고 되풀이 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사로잡히기 때문에 더 이상 주의 말씀에 대적하려 하거나 또는 대적하고 싶은 마음을 갖지 않게 된다. 우리의 고백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고백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완전한 죄인이라고 말한다. 말씀에 사로잡힌 우리는 진심으로 그 말씀대로 신앙을 고백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한 구속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그 구속을 누리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인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사로잡으면 우리는 믿음 안에서 머리를 숙이고 그 말씀에 순복한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신앙을 고백한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한다. 따라서 주께서 친히 우리의 삶 가운데서 거룩을 이루시겠다고 하신다. 이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놓치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주께서는 어떻게 우리가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 가르치신다. 주의 요구에는 언제나 우리를 위한 약속이 담겨 있고, 우리가 그 약속을 받기 위해서는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는 역시 그 명령에 순종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히는 것이며 그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 고백은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하는 그 일에 순종하는 것이며,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여 있음을 감히 믿고 시인하는 것이다.
2. 인생의 유일한 위로
제 1문: 사나 죽으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인가?
사나 죽으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죄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다.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성령으로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 이제부터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기꺼이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신다.
제 2문: 이러한 위로 가운데 기쁜 인생으로 살고 죽기 위해서 당신은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첫째,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지
둘째,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내가 어떻게 해방을 얻는지
셋째, 그러한 해방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1) 우리의 유일한 위로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우리의 유일한 위로를 고백할 때, 이는 그리스도의 위로가 없는 삶은 헛되며 죽음으로 인해 소망이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강력한 역사에 사로잡히지 않은 자들에게는 이 고백은 결코 진리처럼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인간들에게는 살아야 할 이유와 죽음의 본질에 대한 참된 지식이 있을 수 없다.
이 세상은 보편적으로 궁핍한 상태에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이 그 궁핍을 해결하는 길이라고 쉽게 대답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교통과 상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교통을 하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묻곤 한다. 그리스도로 인한 위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궁핍을 사용하셔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우리가 잘 알듯이, 인간의 삶이 어두운 골짜기에 떨어져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세상이 다 무너진 것 같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상황을 도구로 사용하신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진리는 여전히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궁핍에 주의 말씀의 빛을 비추셔서 죄를 깨닫도록 하신다. 오직 그 이후에야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교통하는 위로를 맛보게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히지 않고는 도리어 세상은 그들의 필요를 핑계로 하여 하나님을 비난하고 대적한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히지 않을 경우 사람들은 그들의 삶이 절대적으로 궁핍하다는 사실마저 인정하지 않는다. 세월이 지나면서 여러 좋은 시절이 다 지나가더라도 그들은 삶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인간들은 죽는 그날까지 계속 새로운 계획을 만들어낸다. 가장 실패한 인생들에게도 죽음이 찾아오면 실망을 느낀다. 즉, 그들 인생에 아직 어떤 소망이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완전히 절망하여 죽음을 바라는 사람일지라도 그는 죽음을 일종의 구조 수단으로 여긴다. 이는 그가 여전히 자기 손으로 위로를 택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그를 속이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스스로 죽음을 택하면서도 죽음 이후에 어떤 소망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이러한 거짓 위로의 가능성을 완전히 잘라낼 수 있다. 주의 말씀은 우리에게 삶은 고난이여 죽음은 심판이라고 알려준다. 그리고 그 원인은 죄로 인한 저주 때문이라고 가르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 누구도 그 저주를 피할 수 없다고 계시한다. 고난과 부패와 멸망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할 때 그리스도는 유일한 ‘기회’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는 사나 죽으나 유일한 위로라고 고백하는 것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위로가 없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으로 유일한 위로인 사실을 안다는 것은 이 세상은 저주로 가득하며 저주로 끝맺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과 같다. 만일 우리가 아직 이 세상에서 뭔가를 기대하며 매어달려 있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빛을 본다는 것은 모든 다른 일시적인 빛들이 꺼져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아마 인생에는 많은 위로와 즐거움이 있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특히 사랑과 여러 인간 관계 속에서 즐거움과 위로와 격려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인생의 여러 문제들과 고통은 이러한 것들에 의해 해소되는 것으로 주장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위로마저 제거하신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밖에서의 모든 인간 관계는 저주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저주 아래 있는 인간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 즉, 사람들은 그리스도 밖에서의 인간적 사랑과 관계 속에서 저주를 맛보는 것이다. 비록 인간 관계 안에 사랑이 있다고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그 관계는 인간의 생명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악화시킨다. 실제로 인간 관계의 사랑은 미움과 증오로 악화될 때도 많다. 이는 삶의 뿌리는 그러한 인간 관계의 사랑으로 고쳐지지 않는 것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삶과 관련한 저주를 우리에게 계시하여준다. 삶에는 피할 수 없는 참담함이 있다. 그 저주 배후에는 인간의 죄가 활동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삶을 볼 때 삶의 비참은 인간의 죄로 인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비참을 공적으로 드러내어 우리의 죄를 보여주신다. 그러나 인간들은 고통을 보며 더욱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하나님을 비방한다. 반면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과 궁핍을 통하여 인간들의 영혼을 짓누르고 그 마음을 깨뜨리신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인간의 교만한 마음을 깨뜨리는 것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궁핍 그 자체가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삶의 고통을 사용하셔서 그들을 자신에게로 이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궁핍에 대한 보편적인 의식이 은혜를 접하게 되는 요인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로잡기 위해 그들의 궁핍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비참을 죄의 결과로 보게 하심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신다.
종종 인간들은 필요를 강하게 느낄 때 자아 연민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자아 연민에 빠지면 무능하여진다. 반면 어떤 인간들은 삶의 비참을 볼 때 폭력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자아 연민이든 폭력적인 반응이든 그들의 삶은 좌절에 떨어지거나 무너지게 된다. 하나님은 이러한 상태의 사람들에게 말씀으로 다가가셔서 그들의 비참을 죄의 결과로 보게 하신다. 그러면 우리의 생명도 주의 것이고 이 세상도 주의 것인데 무엇이 이러한 비참을 빗어낸 것인지 바로 보게된다. 그때부터 우리는 이 세상의 비참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대하게 된다.
바로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 오히려 이미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에 세상의 비참을 죄와 관련하여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그리스도와 세상의 궁핍을 연결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죄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 만일 인생의 비참을 죄의 결과로 보지 않는다면 어찌 이러한 고백이 가능하겠는가? 물론 우리는 이 고백 이상으로 우리의 삶을 위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고백이 제시하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코 그리스도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인류가 죄로 인해 생명을 팔아버리고 사탄의 굴레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는 인간의 삶은 의미가 없고 헛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때때로 인간의 삶이 아름답고 풍성하게 보일 수는 있을지라도 실제로는 사탄의 권세 때문에 인간의 삶은 무의미한 것에 굴복되어 있다. 그러한 삶의 특징은 참된 목적이 없다. 이는 사탄에게 속한 모든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인간들은 그들의 존재마저 무의미하기 때문에 스스로 모순이 된다. 그들은 자신의 모든 삶 가운데 무분별하고 감각없는 모순된 자취들을 남기게 된다.
궁극적으로 볼 때, 우리가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때는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여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는 때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우리는 하나님과 더욱 깊은 친교를 누려 나가며 주의 사랑에 반응하면서 이 땅에서 산다. 만일 이 목적을 잃으면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 그럴듯하게 보일지라도 인간의 삶은 무감각하여지고 무분별하여진다. 당신이 아직 무거운 짐을 느낀 적이 없다면 살면서 반드시 느끼게 될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삶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로 하여금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것을 고백한다
2) 삶의 회복
하지만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 나의 유일한 위로라는 뜻이 삶이 그대로 죄와 사탄의 지배 아래 똑같이 있게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또한 삶의 허무에서 도피하기 위해 현실을 무시하라는 의미도 아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주어지는 위로는 우리의 삶에서 벗어나거나 현실과는 상관이 없는 그러한 종류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위로는 그리스도께서 인생 속으로 들어오셨던 것 같이 우리의 삶 속으로 침투하여 들어온다.
만일 현실의 삶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모든 소망은 오직 미래에만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는 실제로 구속을 받은 상태가 아니다. 그 이유는 나는 현재의 삶 가운데 존재하지 미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목숨이 있는한 현실에서 벗어나 관념 속에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삶은 나의 목숨과 같은 것이다. 주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6)라고 하셨는데 이는 우리의 삶의 회복을 위해 하신 말씀이다. 즉, 어떤 사람이 자신을 위해 살면 그의 삶은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삶을 잃는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면 그 삶은 의미있는 삶이 되면서 영원히 남게 된다. 따라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강력하게 우리에게 현재의 삶을 가리킨다. 현재의 삶이 의미가 있으려면 반드시 영원한 의미를 지닌 삶이 되어야 한다. 현재의 일시적인 삶의 진정한 의미는 그 삶이 영원한 의미를 지닐 때 발견된다.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고 고백하였다. 이는 영원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 삶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증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의 삶의 의미는 영원한 것이어야 한다. 이 사실은 현실의 삶의 가치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드러나게 한다.
현실의 삶에 의미를 주는 분은 그리스도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고 계시되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에 의미를 준다. 그리스도는 육체가 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에도 이미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말씀’으로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셨다. 태초부터 있었던 그 말씀 안에는 생명이 있었다. 즉, 하나님과 교제하는 참된 생명이 있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요 1:4). 인간에게 하나님과의 친교를 부여했던 그 말씀은 삶에 감각과 의미를 주었다.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의미를 깨닫도록 하시고 그의 빛을 그들의 삶 가운데 비치게 하셨다. 하지만 인간들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되고 분리되자 그들은 삶의 본질에 대한 중요성과 지식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리스도로 오셔서 다시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드러내자 하나님은 몹시 기뻐하셨다. 인간들은 다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과 연합되면서 그들의 삶은 그 의미를 맘껏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삶을 압박하는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는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이다. 즉, 주님이 나의 주가 되고 내가 주의 것이 될 때 내 삶은 결코 헛되지 않게 된다.
다시 살펴보겠지만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 근거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피로 우리를 사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이러한 연결과 연합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이에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신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리면 그리스도는 적극적으로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흘러넘치게 하시고 또한 우리의 마음을 열어 그 사랑에 사랑으로 반응하게 하신다. 이것이 바로 죽은 영혼을 다시 살리는 유일한 방책이며 다시 살아난 영혼은 그의 삶에서 그 실재를 나타낸다. 죄로 인해 모든 가능성을 완전하게 잃었던 우리의 삶이 다시 모든 가능성을 되찾게 된다. 이는 단지 기회가 주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훨씬 더한 무한한 축복을 부으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하셨던 약속의 성취이기도 하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완전하게 죽었던 삶에 생명을 가져오신다.
이 모든 과정은 단숨에 발생하지 않는다. 인간이 그리스도와 그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만이 유일한 ‘기회’라는 사실을 깨닫는데는 대단히 오래 걸린다. 인간들은 온갖 다양한 방법으로 삶의 어려움들을 풀어보려고 시도한다. 결국 많은 실패와 쓰라림을 겪은 후에야 마지막 방책으로써 그리스도를 찾는다. 그럼에도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를 발견하면 이는 복되고 즐거운 체험이다. 이때 그리스도는 그들의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으시고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신다! 주님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의 삶을 날마다 채우시며 의미를 부여하신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인간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는 우리의 삶은 사방으로 닫혀 있다. 하지만 사랑 안에서는 삶의 봄철을 맞이하게 된다. 인간들끼리의 사랑을 통해서도 사람들은 삶의 보람을 느낀다. 심지어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들이라도 서로의 사랑을 통해 잠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은 것처럼 보여진다. 하지만 어느새 그들의 삶은 다시 허무함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삶에 영원한 의미를 부여한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은 이 세상에서나 영원한 세상에서나 의미를 갖게 된다.
우리는 이 모든 위로를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체험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체험이 ‘믿음’에 의한 것임을 강조해야 한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증거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믿음으로 그 사랑을 붙들어야 한다. 참으로 당신의 삶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의미를 되찾았는가? 그리스도의 사랑이 당신 안에서 승리의 능력이 되고 있는가?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대항하는 여러 요소들이 남아 있다. 우리를 죽이고 마비시키는 죄의 세력과 이기심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자신을 잊게 되면서 죄와 이기심을 극복하게 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승리한 사실을 믿음으로 붙들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종종 수수께끼 같은 현상을 나타낸다. 우리의 마음은 생기를 얻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향해 열려있지만 동시에 반응이 차단되는 때가 있다. 아마도 반응이 차단되는 이유는 당신의 마음이 계속 생기를 유지할 수 있을지, 혹은 시들어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의 삶의 의미는 펼쳐진 서적과 같이 자명하여진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는다. 믿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붙드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믿는다. 우리는 오직 믿음만으로 그리스도께 속하여 이 땅에서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붙들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참으로 위로를 받는다. 나아가 삶의 고난 가운데서도 위로를 받는다. 우리는 고난을 견딜 수 있다. 그 이유는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는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는 죽음 안에서 삶의 의미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담대히 죽을 수 있는지” 말하지 못한다. 결국 삶을 살아갈 수 있고 죽음을 준비하는 자가 누구이겠는가? 그리스도가 없는 인생은 복잡하고 무의미하다. 인간의 삶에 빛을 비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3) 어린양의 통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친분을 맺을 수 있게 된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죄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따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것이며 하나님은 그의 기쁘신 주권 가운데 그의 사랑을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허락하신다. 우리는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방법’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될것이다. 즉,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탄의 손에서 구출하기 위해 그의 보혈을 사탄에게 지불하였다는 사상이 교회 역사 가운데 있었는데 이러한 사상은 거짓이며, 교회는 올바르게 이러한 사상을 거절하여 왔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은 주의 사랑을 거부하고 멸시한 우리를 공의에 따라 처리하심으로 사탄의 권세 아래 두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값을 위해 치른 보혈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하나님께 치른 것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우리가 사탄의 권세 아래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한다. 사탄이 우리에게 행사할 수 있던 권세는 공의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사탄의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니며 그의 권세는 스스로 소유한 것이 아니다. 우리를 짓누르고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이며, 사탄은 이를 위한 도구일 뿐이다. 심지어 이 세상의 지도자들도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권세를 부여받는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아무 것도 파괴할 권세를 갖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람이 손에 달려있든 사탄의 손에 달려있든 궁극적으로는 그들 배후에 계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능욕하였기 때문에 피조물에게 우리를 멋대로 대할 권세를 허락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 및 삶 자체의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그리스도의 속죄를 허락하셨다. 따라서 인간과 세상의 모든 문제의 해결은 그리스도의 속죄에서 발견된다. 사실 속죄만이 세상과 인생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다. 인간들이 그들의 멍에에서 벗어나려고 행한 모든 노력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인간에게는 영원한 파멸을 피할 길이 없다. 죄 가운데 탐닉한다고 해서 인간의 마음이 자유로울 수 있는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산다고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이상주의는 단지 꿈일 뿐 인간의 비참은 언제나 그대로 있다. 이처럼 구원을 위한 인간들의 모든 노력은 모독 당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충족시킬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생명을 취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만족시키셨다. 우리를 대신하여 그의 보혈과 영혼과 사랑을 하나님께 드리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채워지면서 하나님은 우리와 화목할 수 있게 되셨다. 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이 세상은 존재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의 공의가 충족되는 순간 사탄은 그의 파멸의 권세를 빼앗기게 되었다. 그는 여전히 아직 남은 권세를 휘두르지만 하나님께 속한 것을 향해서는 머리털 하나 건드릴 수 없다. 더욱이 사탄의 권세는 고작 하나님의 손 안에서의 도구일 뿐이다. 사탄은 스스로 하나님을 대항할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 밖에 되지 못한다. 사탄은 권세를 빼앗긴 후에 더 이상 제 멋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믿음의 문제이다. 세상의 파괴를 볼 때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가 헛되게 고난을 당하신 것은 아닌지, 그의 피가 헛되게 흘려진 것은 아닌지 묻는 경우가 있다. 사탄은 여전히 우리의 삶 가운데서 많은 것을 파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믿음으로 속죄가 여전히 끊임없이 역사하는 것을 체험한다.
우리가 사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손에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엄청난 위로를 준다.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은 이렇게 나타나셨다. 계시록에 어린 양을 경배하는 환상이 나타난다. 그 어린 양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았다”(계 5:6). 이는 자기 백성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죽음에까지 던진 그리스도의 사랑이 지금 우주를 통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엄청난 값을 치르고 우리를 사셨다. 즉, 그의 무한히 귀중한 보혈로 우리를 사셨다. 따라서 그는 결코 우리를 놓지 않으신다.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죽음으로 산 우리를 더더욱 사랑하고 보호하신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4) 삼위 하나님의 사역
우리는 그리스도를 강조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만을 말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이며 선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속하여 있다. 그리스도 중심 신학과 하나님 중심 신학 사이에서 어떤 차이점을 찾아내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중심을 채우실 수 있다. 이에 성경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라고 진술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과 ‘아들’로 계시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외에 누구를 영접하겠는가? 그리스도는 아버지를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나아가 성령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그러므로 교리 문답은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여 아버지와 성령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더욱이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알 수 있다. 우리는 아버지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알며, 성령은 오직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안다. 예수 그리스도를 벗어난 삼위일체의 계시는 추상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는 삼위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다가온다.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여 아버지께로 나아간다.
교리 문답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신다”고 고백한다. 하늘 아버지는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하신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되돌아보게 된다. 즉,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을 통해 우리를 위해 구속을 이루셨다. 또한 그리스도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셨다. 하나님은 영원한 말씀을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보내심으로써 사람들과 교통하시려는 의도를 충분히 나타나셨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충만함으로부터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뜻을 알게 된다. 동시에 내가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아버지의 뜻이 없이는, 즉 하나님의 사랑의 뜻이 없이는 우리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질 수 없다. 사소하고 우연한 것 같으며 아무런 목적이 없어 보이는 모든 사건들이 사실은 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즉, 우리와 우리 주변에 발생하는 모든 사건에는 우리를 향한 사랑의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 따라서 우연하며 사소한 사건들이라도 우리의 삶을 위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이다. 즉, 우리에게 발생하는 모든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를 나누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아버지의 뜻에 의하면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룬다.” 삶을 살다보면 우리의 삶의 기회를 차단하는 많은 일들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 모든 ‘불가능들’은 하나의 큰 ‘가능성’을 가져온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더 가까이 오도록 한다. 모든 불가능들은 도리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이는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보지 못한다. 믿음이 없으면 삶에 닥치는 여러 고난과 어려움은 단지 삶의 모순으로 여겨질 뿐, 아무런 의미를 얻지 못한다. 하지만 믿는 자들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사실이 하나님께는 ‘가능하다’는 사실을 붙든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도 평강과 확신을 누린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위하시는 분이다. 의미도, 목적도, 사랑도, 은혜도 없는 불가능으로 가득했던 삶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다시 바라보게 되면 놀랍게도 그 삶은 하나님의 뜻으로 가득한 삶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성령을 의식하게 된다. 교리 문답은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성령으로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신다”고 고백한다. 이 내용은 앞부분의 고백과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즉, 우리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것을 성령을 통하여 확신하게 된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확신을 주신다. 성령은 우리가 영생을 확신할 수 있도록 믿음을 주신다.
성령이 주시는 믿음은 하나님의 요구에 응답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 우리에게 믿음이 임하면 우리는 다시 말씀과 성령에 반응한다. 이때 우리는 나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뜻에 따른 성령의 역사인 것을 깨닫게 된다. 그토록 방자하고 반역적인 마음이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오직 성령께서 행하신 기적이 아니겠는가? 성령은 기적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열리게 하시고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깨닫게 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누리며 영생을 얻는다. 그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한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가 얻은 영생을 확신하게 된다.
우리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통해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살게” 된다. 믿음은 사랑 안에서 역사한다. 성령에 의해 믿음을 소유하게 되면 우리의 삶은 특별한 목적을 가지게 되는데 그 목적은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은혜 가운데 충만하여지는 것이다. 그후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더욱 충만하여지게 되고 그러면서 우리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실현하게 된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위로를 확신하게 된다
5) 하나의 구원 안에서 나타나는 세가지의 면
우리는 지금까지 내 자신에 대한 신앙 고백을 하였다. 우리는 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것임을 고백하였다. 그후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대하였고 마침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위로를 확신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앙 고백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결국 신앙 고백은 믿음에 의한 고백인데, 믿음이란 그 본질상 언제나 먼저 하나님께 초점을 둔다. 만일 우리가 교리 문답을 각 개인을 위한 것으로 오해한다면 이는 교리 문답이 교회의 신앙 고백인 것을 망각하는 것이다. 교리 문답은 교회가 예배하는 자세로 하나님을 시인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 하나님을 예배하며 시인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 교리 문답은 하나님의 계시의 빛으로 사람을 보기 시작한다. 오직 그 빛 안에서만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참으로 알 수 있다. 교리 문답은 하나님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고백하는데 그 배경 속에서 사람에 대한 진술이 들어있다. 누구든지 이 사실을 간과하면 교리 문답을 오용하거나 오해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인간의 상태에 대한 교리 문답의 진술을 들어보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죄와 비참을 아는 것을 하나의 덕으로 여긴다. 그는 인간 스스로 믿음을 가질 수 없으며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어느새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죄와 부패를 인정하는 자신을 대견하게 생각하게 된다. 죄와 비참을 깨닫는 자신을 보면서 ‘그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자신에게 임한다고 여긴다. 이때 이 사람의 문제는 자신의 죄에 대한 그러한 지식이 하나님의 선물인 사실을 망각한 점이다. 따라서 그는 어느새 자신의 구원이 자신의 죄와 비참에 대한 스스로의 깨달음 때문에 온 것이라고 오해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오해 가운데 신앙을 고백한다면 그의 고백의 내용은 옳더라도 실제로는 죄의 성향을 그대로 유지하며 고백하는 셈이 된다. 사실 신앙 고백이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바는 인간 자신에 대한 혐오이다. 그러나 종종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고백하며 도리어 자신을 대견하게 여기며 자아를 사랑하는 자들이 있다.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고백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간에 대해 조명하여 주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자신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의존한다. 칼뱅은 그의 기독교 강요 1장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신을 아는 지식 가운데 무엇이 먼저인지 질문을 던지며 그 대답을 하지 않는다. 즉, 그 두 지식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이 먼저인지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그분의 언약 안에서만 알 수 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즉,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동시에 안다. 오직 논리적에서 따질 때에만 내 자신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의존하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인 사실을 알 때 하나님의 빛은 우리의 삶을 조명하여준다.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과 주의 부르심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고, 반면 우리의 불충성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하나님의 계시에는 우리를 두렵게 하고 도망치게 하는 면이 있고 동시에 우리를 붙들어 잡아끄는 면이 있다. 교리 문답은 우리의 죄와 그리스도의 대속과 우리의 성화에 대한 지식이 서로 엮어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세 가지 지식은 전부 구원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의 사랑의 빛이 우리의 죄악을 밝히 드러내어 죄책을 느끼게 하면 우리는 겸손하여져서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내는 십자가의 구속을 바라보게 된다. 죄악과 십자가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우리의 성화도 죄와 십자가와 뗄 수 없다. 이처럼 교리 문답에는 구원의 세가지 면(죄, 십자가, 성화)이 언급되고 있고 이 세가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를 말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죄악된 상태를 알지 못한채 그리스도의 구속을 감히 말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빛이 우리의 죄악을 드러낼 때 우리는 참으로 죄책을 느끼면서 그리스도로 인한 은혜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우리 안에 거룩한 새 사람이 일어난다.
구원의 세가지 면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실로부터 얻는 위로를 더욱 명확하게 한다. 구원의 세가지 면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함으로 나타나는 세 가지 면이기도 하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주신다는 계시를 통해 더욱 이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위로 가운데 기쁜 인생으로 살고 죽기 위해서 당신은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이 질문은 당신이 세 가지를 알아야 기쁜 인생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가지를 앎으로 당신의 유일한 위로이신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간다는 뜻이다. 우리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에게 속할 때 그리스도의 유일한 위로는 이 세가지를 포함하며 우리는 이 세가지 면을 알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유기체적인 성장을 생각해야 한다. 믿음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믿음의 발전의 초기 단계에도 있다. 믿음의 맨처음 상태에서부터 구원의 세 가지 면을 포함한다. 또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이 세 가지는 계속 성장한다. 한편, 교회의 신앙 고백은 이를 깨닫도록 돕는다
3. 하나님의 율법과 우리의 죄성
제 3 문: 당신의 죄와 비참을 어디에서 아는가?
하나님의 율법에서 안다.
제 4 문: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스도는 마태복음 22장에서 율법의 요구를 가르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제 5 문: 당신은 모든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가?
지킬 수 없다. 나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나의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이 있다.
1) 우리의 비참에 대한 ‘믿음의 지식’
인간의 비참에 대한 지식은 믿음에 의한 지식이다. 우리는 이를 ‘믿음의 지식’이라 부른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관계 속에서 이 지식을 얻게 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없이는 믿음의 지식은 있을 수 없다.
우리의 비참에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지식과 연결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믿는다면 하나님의 진리의 한 면만을 붙들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사람은 구속의 복음을 붙든다.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은 서로 구별되는 것이지만 믿음은 처음 시작부터, 심지어 배아 상태의 믿음일지라도, 하나님의 계시 전체를 여러 면에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교리 문답은 믿음의 지식으로부터 인간의 비참을 다룬다. 사실 믿음이 없이는 인간의 비참에 대한 진정한 지식이 있을 수 없다. 믿음은 맨처음부터 하나님 말씀 전체와 그 내용 전부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믿음의 지식을 만들기 시작한다.
교리 문답은 우리의 비참에 대한 지식을 오직 믿음의 관점에서 언급한다. 누구든지 구원을 붙드는 믿음에서 벗어나게 되면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성령의 죄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특별히 하나님의 심판 선언을 들은 가인의 대답은 이 사실을 대표적으로 설명한다. “내 죄짐(형벌)을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창 4:13). 그가 생각하는 ‘죄짐’은 형벌 밖에 없다. 그의 대답은 하나님이 그에게 내린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 4:12)는 형벌이 너무 심하다는 것이다. 가인의 항의는 자기 죄악을 유죄로 인정은 하더라도 하나님이 내리신 심판을 받을만큼 그토록 큰 범죄는 아니라고 믿는 가인을 보여주고 있다. 즉, 그는 하나님의 판결에 복종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판결에 복종하는 것은 언제나 믿음의 행위로서 그 믿음은 언제나 구속을 붙들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구원을 계시하지 않으셨다면 인간 편에서는 하나님의 판결에 동의하거나 긍정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인간들은 가인처럼 하나님의 판결에 항의하며 그 심판을 피하려고 시도하던지 또는 형량을 감하려고 노력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죄악된 육체는 언제나 심판에 대항한다.
그러므로 율법만을 선포하는 것은 결코 죄에 대한 자각이나 자백을 가져오지 않는다. 오직 율법과 복음이 함께 선포될 때 인간의 비참에 대한 믿음의 지식이 만들어질 수 있다. 사람은 복음이 없이는 오직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두려워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 발생하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원수로보며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게 만든다. 이러한 상태로는 사람은 인간의 비참에 대한 참된 지식에 이를 수 없고, 도리어 유죄에 짓눌린 상태에서 더욱 방종하게 된다.
복음이 없이는 인간의 비참에 대한 구원의 지식이 있을 수 없다. 즉, 복음의 지식이 없이는 참된 회개 및 죄의 자백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이 하나님의 심판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도록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에 전혀 쓸모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두려움은 인간의 비참에 대한 참된 지식을 알게 발판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이 구속의 역사를 일으키는 접촉점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로잡기 위해 두려움을 수단으로 사용하실 수는 있다. 즉, 율법의 선포로 인하여 두려움을 느끼는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될 때 하나님은 은혜 가운데 간섭하여 회심을 일으킬 수 있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리 문답의 첫째 부분은 율법 부문, 둘째 부분은 복음의 부문, 세째 부분은 다시 율법 부문으로 나누는 것은 옳지 않다. 교리 문답은 율법과 복음을 따로 언급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율법과 복음을 포함한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통해 우리에게 구속의 역사가 임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첫번째 부분에서도 율법이 복음과 관련하여 언급되고 있다. 이 사실을 망각할 때 우리는 율법을 언급하는 첫째 부분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을 갖도록 하는 예비책으로써 율법만을 가르치는 것은 율법에 대한 바른 지식과 죄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가져올 수 없다고 본다. 또한 율법 없이 복음만을 전파한다고 해서 그 결과로 믿음이 발생한다고 보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율법과 복음을 나누는 일이 기독교 내부에서 종종 진행되고 있다. 어떤 경우는 율법을 가르치는 부분에서 교인들이 영적으로 불균형한 상태에 이르게 되면서 인간의 비참에 대한 그릇된 지식에 빠져 그곳에서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그들의 비참 가운데 오래 신음하며 고통을 당하면 그곳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는 억척스럽고 인위적인 설명을 시도하기도 한다. 고통을 충분히 당하고 나면 구속을 받아들일 수 있는 때가 온다는 것이다. 그들은 율법으로 인한 죄에 대한 지식이 믿음을 세울 수 있는 바탕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때 인간의 비참에 대한 그들의 지식과 구원에 대한 그들의 지식은 믿음을 통한 지식과는 전혀 다르다. 그 이유는 믿음을 통한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기반으로 하여 서는 것이지만 그들의 지식은 한쪽에 치우친 불완전한 지식이 되기 때문이다.
복음을 선포함이 없이 율법을 가르치는 것은 오직 율법주의적인 삶을 낳는다. 이러한 삶은 율법 아래에서 신음하며 율법의 짐을 진다, 이때 그들에게 율법은 끊임없는 원수가 된다. 이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인 율법을 거부하게 되고 나아가 율법을 통해서만 가능한 참된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한편 이러한 율법주의적인 삶을 거부하기 위해 교회 내부에서는 ‘복음적인 삶’이라는 극단적인 반대 현상을 보여왔다. 물론 율법주의적 삶에는 안식교단이라는 극단적인 파당도 있다. 아무튼 ‘복음주의적’ 운동은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제거하였다. 그들은 율법과 복음을 구별한 후에 이 둘이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율법을 원수로 여겼으며, 율법이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며 또한 복음과 연관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복음주의적’ 운동은 교회가 매주 율법의 핵심인 십계명을 가르치고 읽는 것에 대해 모순으로 생각하여왔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머물기 위해 하나님의 율법을 영원히 집어 던져 버렸다.
‘복음주의적 운동’의 특징 중에 하나는 죄에 대한 지식을 얻는데 있어서 율법을 사용하지 않는 점이다. 그들은 다시 율법적으로 매이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 운동은 해마다 교회에서 교리 문답이 인간의 비참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어리석은 일로 생각한다. 그들은 이미 비참에 대한 지식과 그 지식이 주는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율법으로 인한 고통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알기를 원치 않는다.
성경은 믿음의 삶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는 삶이라고 증거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단지 무조건적인 찬양이 아니다. 우리는 죽을 육체 가운데 거하는 동안 율법의 심판 아래에서 비참을 느끼며 한숨을 쉬지만 동시에 그리스도를 통한 해방 가운데 평안과 기쁨과 영광을 누린다. 바울은 율법의 심판에 대해 그 실재를 느끼며 신음하며 고백하였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롬 7:14). 우리가 율법의 심판 아래 계속 있지 않는한, 구원의 고백은 계속되는 흥분의 감정일 뿐 실제로는 텅빈 것이 된다. 율법과 복음을 동시에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날 때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에 대해 스스로 만족을 느끼며 그 만족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쁨으로 오해한다.
교회의 회원들이 주님과의 언약을 오해하여 위에 서술한 ‘복음주의적’ 영향을 나타내서는 안 된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오해할 때 율법의 심판 아래 끊임없이 존재하는 비참을 망각할 수 있다. 그러한 삶은 우리의 일상의 죄가 언약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훼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율법의 저주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게 된다. 우리는 그 어떠한 죄악이라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언약을 누리기에 무가치한 자로 만든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주의 언약이 존재하도록 그 배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기 위해 희생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것은 가장 무서운 죄가 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율법의 경고 가운데 죄는 영원한 형벌에 합당하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갖는 하나님과의 교통은 피상적인 것이 된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배후에 있는 은혜를 깨닫지 못한 것처럼, 그래서 참으로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살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똑같이 율법의 기능을 망각할 때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잃을 수 있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 계시되는 인간의 비참에 대해 끊임없이 고백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우리의 비참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오직 믿음을 통해 가능하다. 즉, 율법과 복음이 함께 선포될 때 우리의 비참에 대한 올바른 믿음의 지식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교리 문답에서 첫부분에 나오는 우리의 비참에 대한 고백은 후반에 나오는 복음의 선포없이는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후반의 복음 선포는 첫부분에 나오는 율법으로 인한 인간의 비참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2) 언약의 율법
교리 문답이 고백하는 율법은 언약의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말한다. 율법이 주어지는 서언은 다음과 같다.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 율법의 요약은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신 6:5)이다. 이처럼 율법은 언약적 율법이다. 우리가 율법을 삶을 위한 죄의 지식의 원천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율법의 역사에 대해 간력하게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 때문에 율법과의 관계가 영원히 완전하게 끝이 났다고 믿는 자들은 “율법 책”을 특별히 마음에 두고 언급하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은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 27:26; 참조, 갈 3:10)고 하였다. 율법 책 안에는 율법의 특별 기능이 강조되고 있으며,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의 관계를 결정하는 본질적인 내용들이 간략하고 분명하게 정의되어 있다. 하지만 율법은 십계명이 제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차원에서 모든 피조물에 존재한다. 지금까지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우리에게 말한다. 이는 율법의 역사를 검토해보면 분명하여진다.
타락하기 이전에 아담이 율법에 대해 가졌던 지식을 소위 “피조물 또는 고유의 율법”(a created or innate law)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아담은 “고유의 율법”에 의해 저절로 하나님의 뜻을 위하는 성향이나 적성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담은 “고유의 율법”에 의해 율법을 알며 그 율법의 기준에 의식적인 순종을 하였다. 사실, 엄격하게 따진다면 “고유의 율법”이나 “하나님에 대한 고유의 지식”이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지식과 마찬가지로 율법에 대한 지식 역시 계시의 결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새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의 마음에 새겨지는 사건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그 사건이 이루어지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아담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그리고 피조물들을 관찰함으로써 율법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갖게 되었다. 그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율법 아래 두셨는지 보았다. 그의 삶 역시 율법에서 예외가 될 수 없는 것도 깨달았다. 그가 피조물들과 갖는 모든 관계는 율법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는 모든 피조물의 조화 및 상관 관계, 그리고 상호 의존성을 보았다. 그는 이러한 피조물의 법으로부터 사랑의 법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조화는 사랑에 의해서만 보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담은 자신과 모든 피조물의 관계를 다스리는 것은 사랑의 법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 지식은 그의 안에 고유하게 있던 선천 지식이 아니었다. 그는 모든 피조물과 관계를 맺어가면서 사랑의 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지어졌던 것이다. 그는 모든 피조물과 어울리면서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 친밀함 및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피조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배우면서 하나님을 의지하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율법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가질 수 없었다. 이에 하나님은 그에게 자신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할 수 있는지를 말씀해 주셔야 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선악과의 언약을 통해 약속과 소명을 말씀하실 때 분명하여졌다. 즉, 하나님이 아담에게 말씀에 의해 체결된 언약을 통해 친교를 허락하실 때, 그는 그 언약을 통해 율법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샘은 그 언약 안에서 아담을 향해 무한하게 열렸다. 아담은 언약 안에서 사랑의 법을 더욱 충만하게 이해하는 법을 배워갔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발견해야 한다.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일 뿐이다. 더욱이 사랑 안에서 하나님께 응답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라난다. 이와 같이 사랑의 언약이 있었으며, 그 안에서 사랑의 법은 언약의 법이 되었다. 아담은 주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는 율법의 계시를 통해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사랑의 법을 확증하였다. 이처럼 사랑의 법이 언약을 통해 그에게 발견되면서 그 법은 그의 모든 존재와 사고의 바탕이 되었다.
언약의 두가지 기능이 아담을 위한 율법을 완성시켰다. 한 가지는, 그는 자신과 모든 피조물이 율법에 복종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서 하나님은 율법을 제정하신 자로서 율법 위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그는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위엄과 초월하심을 깨달았던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율법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친교의 법이라는 점이었다. 즉, 그가 율법을 더욱 순종할수록, 하나님은 자신을 아담에게 주셨다. 이렇게 하여 율법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친교 수단이 되었고 언약 안에서 양 측은 서로 묶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양 측은 서로 뚜렷하게 구별되었다.
그러므로 타락 이전의 율법은 이미 언약의 율법이었다. 즉, 그때부터 약속과 요구는 이미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였던 것이다. 사람은 율법의 의미와 그 의도를 알았으며 약속을 통한 요구에 순종하는 법을 배웠다. 이에 하나님은 약속 안에서 자신을 그에게 주셨다. 이 사실은 나중에 복음과 율법의 상호 관계를 결정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다.
성경은 인간이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이후에도 율법에 대한 모든 지식과 율법을 향한 모든 순종을 다 잃은 것은 아니라고 계시한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4-15). 모든 피조물 안에서 나타나는 율법의 계시는 인간들에게 지금도 계속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말씀의 계시가 없을 그때에도 계속 나타나고 있었다. 즉, 모든 피조물 가운데 나타난 계시를 통한 율법의 요구는 인간들의 마음 속에 항상 기록되어 있었고, 그들의 마음에 기록된 율법의 요구는 양심을 수단으로 하여 당장 나타난다.
이제 성경 말씀을 주목해보자! 성경은 이방인들이 율법을 알거나 율법을 지킨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방인들은 본성상 율법이 요구하는 것들을 행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율법의 일을 행하는 것”은 율법을 순종하는 차원과는 다르다. 그들의 행위를 볼 때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모든 율법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규범(norm)을 지키지 못한다. 따라서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약 2:10)는 율법의 통일성을 고려할 때 이방인들이 율법을 이룰 가능성은 전혀 없다. 오직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여시고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의 요구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임하는 요구로 들을 수 있을 때 율법의 뚜렷한 사랑의 규정에 원칙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방인들의 마음에 율법의 ‘요구’가 쓰여있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율법이 쓰여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일반 계시를 통해 율법의 몇가지 규정에 순응할 뿐이다.
우리는 방금 아담이 창조되면서부터 하나님의 언약을 기반으로 하여 어느정도 사랑의 율법을 알게 되었다고 언급하였다. 더욱이 언약은 개념적으로는 모든 창조가 있기 전부터 존재하였다. 하나님은 참으로 아담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이 지어질 때 처음부터 아담과 언약을 체결하셨다.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언약 안에 포함되어 지어지게 하셨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서, 또한 아담과 모든 피조물 사이에서 모든 관계의 바탕이 되었다. 언약이 깨어졌을 때, 모든 피조물은 은혜의 언약을 벗어난 상태가 되면서 인간에게는 단지 조각난 율법의 지식들과 약간의 외적인 순종이 남게 되었다. 이제 율법에 대한 온전한 지식과 온 율법을 마음 전체로 늘 순종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방인이 조각난 율법 지식과 순종을 지닌 것조차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체결하셨던 은혜의 언약의 결과라고 말할 필요가 있다. 이방인들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지만 모든 피조물을 통한 율법의 계시를 접하게 되는데 이 또한 그리스도의 역사이다. 잠언 8장과 9장은 지혜가 부르짖으며 명철이 소리를 높인다고 말한다.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그가 길 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 성문 곁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이르되”(잠 8:1-3). 여기서 지혜는 언약의 하나님의 계시로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바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부르짖는다. 그리스도는 삶 자체가 갖는 모든 관계 속에서 율법을 요구한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공의를 구하고 하나님의 교훈을 받아들일 것을 부르짖는다.
우리는 잠언의 내용이 언약을 기초로 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구절은 그리스도를 통한 말씀의 계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말한다. 이처럼 이방인들의 삶 가운데는, 즉 그들의 인간 관계와 피조물과의 교류 가운데 그리스도의 부름이 있었다.결국 성경이 말한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2:15, 롬 1:20)는 말씀은 맞다.
은혜의 언약 안에서 특별 계시가 주어질 때 기본적으로 십계명을 통해 율법이 주어졌다. 이때 십계명 율법의 요약은 사랑의 법이다. 물론 이 의미는 언약 안에서 특별 계시를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피조물과 삶 자체를 통해 나타나는 율법의 요구가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그리스도는 특별 계시의 언약 안에 있는 자들에게도 그들의 삶 가운데서 율법을 요구하신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서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실 때 기본적으로 부정적 형태, 즉 금지 형태로 주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는 구약의 언약 아래서 ‘노예된’ 삶과 연결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은혜의 언약에 절대 필요한 것임을 계시하시기 위해 구약 시대에서도 여전히 죄를 드러내시며 인간의 죄악됨을 나타내셨다. 더욱이 교회는 구약 시대에 아직 형성 단계였기 때문에 율법의 보호와 돌봄 아래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율법은 예식법과 사회법에 의해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십계명 외에 두개의 또다른 법률을 주셨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예식법과 사회법은 십계명을 그 시대의 상황에 적용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면에서 율법은 하나이다.
우리는 율법의 형벌 및 죄를 드러내는 부분과 관련하여 이제 특별히 “율법 책”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율법 책을 통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구약 시대에 율법의 계시만이 있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신약 시대가 시작되면서 율법은 원칙적으로 완전히 다른 형태로 우리에게 임하게 된다. 물론 본질적으로는 율법은 십계명으로 똑같이 표현된다.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효력을 나타냈던 율법은 모든 삶에 저주를 선포하였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율법은 부정적인 형태로 있었고, 부정 예식과 씻는 예식, 금식, 금지 음식 등의 명령들이 주어졌었다. 하지만 성령의 강림(부으심)을 통해 모든 피조물은 다시 여호와께 성결하게 되면서 주의 백성들은 그것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성령의 강림 이후 이제 율법은 우리에게 적극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가운데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주를 위해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율법은 적극적인 의미로 우리에게 죄의 지식을 알리는 원천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리 문답에서 율법을 언급할 때 사랑의 요구로 제시하며 또한 적극적인 의미로 제시한다. 즉, 율법을 죄의 지식을 아는 원천으로 계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적극적인 의미로 율법을 말할 때 그 율법은 기본적으로 10개의 계명을 의미한다.
하지만 신약의 신자들은 10개의 계명을 통한 조명 가운데 여전히 모든 피조물과 삶을 통해 찾아오는 율법을 접하게 된다. 즉, 우리는 모든 것에서 율법을 접한다. 모든 관계, 모든 말과 생각, 모든 대화와 움직임까지 율법 아래 있다. 우리는 모든 삶의 관계에서 율법이 연관되어 있으며 또한 모든 관계를 다스리고 있다는 사실을 피할 수 없다. 우리의 모든 사소하고 구체적인 사건 가운데서도 율법이 관련되어 있고 율법은 우리의 양심을 붙들어 모든 행위 가운데 경성하게 한다.
우리는 어렸을적부터 부모로부터 여러 금지의 명령을 받으면서 율법을 느끼고 배운다. 그러나 사실은 부모들이 말하기 전에 주변 세상을 통해 이미 율법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된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죽는 그날까지 책임을 요구하는 규정 가운데 살아간다. 우리가 그 규정을 지키지 못하면 당장 잘못을 행하였음을 인식하게 된다. 이는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우리 모두가 언제나 율법 하에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율법을 배우며 그 율법은 하나님의 언약의 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언약의 법인 율법을 받아들이는 것을 배운다. 그후 우리는 “율법 책”을 대할 필요를 느낄 뿐만 아니라 주의 “율법 책”을 우리의 삶을 위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명령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주를 향한 사랑 가운데 우리의 삶 전체를 드리고 성결하게 하도록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가르치고 또한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지 인도한다. 따라서 적극적 의미로서의 율법이 반드시 가르쳐져야 한다. 율법은 우리의 삶 전체를 심판 아래 가두면서 동시에 우리를 들어올리는 힘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삶 전체를 온전하게 거룩하게 하는데는 한참 역부족이다! 놀랍게도 언약 안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율법 안에는 또 다른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 있다.
3)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
율법이 언약의 율법이라는 사실은 죄의 지식을 아는데 결정적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좀 더 다룰 필요가 있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는 것은 적어도 율법에 대한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다. 하지만 양심의 가책이 죄의 참된 지식을 줄 수 있는가? 양심의 가책만으로는 우리는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으로”(시 51:17)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한다. 물론 하나님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양심의 가책에 사로잡히게 할 수 있다. 이러한 때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에 의해 하나님 앞에서 죄책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는 벌써 하나님의 은혜가 간섭한 결과로서 우리는 율법을 언약의 율법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종종 하나님이 짓누르고 깨뜨리실 때까지 자신을 책망하는 양심을 붙들고 오래 동안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 책망을 받게 되면 그 책망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기 떄문에 우리는 율법을 사랑의 율법으로 보게 된다. 하나님은 사랑의 율법을 수단으로 하여 우리와의 관계를 정상화하신다.
소위 행위 언약의 율법은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 10:28)는 규정이 아니다. 즉, “이 계명을 지키라. 그러면 너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규정이 아니다. 행위 언약이라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는 공로 및 대가 개념이 전혀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언약을 통해 언제나 먼저 사랑을 베푸신다. 하나님은 그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사랑하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규정하셨다. 이 관계에는 어떤 규칙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설정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규칙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 가운데 자라난다. 이와 같이 율법은 언약 율법(covenant-law)이다. 따라서 “행위 언약”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호의의 언약”(covenant of God’s favor)이라고 칭하는 것이 더 낫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명령은 언약을 떠난 자에게 해당한다. 그에게는 다시 스스로 율법을 완성하여 살아나는 수 밖에 다른 길이 없다. 하지만 이 길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옛 언약은 실은 은혜의 언약을 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율법을 통하거나 율법에 의해서는 사람은 저주의 판결을 받게 되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필요로 해야 함을 알려준다. 더욱이 옛 언약은 이스라엘이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설득하기 위해 주어졌다.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아 언약 밖으로 쫓겨나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그리스도가 오기까지 옛 언약은 인간의 저주 상태를 가장 확실하게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하셨고 우리의 모든 죄악을 대속하셨다. 그는 단지 사람만이 아니라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그 일을 이룰 수 있으셨다.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에게조차 율법은 사람들을 두려움에 빠뜨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지는 않았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언약으로써 하나님은 그 율법을 통해 사랑 가운데 먼저 자신을 그의 백성에게 주셨다. 율법의 형태가 법적인 형식을 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의 언약 역시 은혜의 언약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양면을 띄었다. 하나님은 자신을 주시면서도 뒤로 물러나셨다. 자신을 계시하시면서도 베일 뒤에 숨으셨다. 이제 율법은 언약의 율법으로 우리에게 임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며 사랑을 요구하는 것으로 우리와 및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과의 관계를 규정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빛 가운데 율법을 볼 때 그 율법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며 우리의 마음을 깨어지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서 살아가는 삶 전체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 및 그 사랑의 요구를 보여주면서 우리로 하여금 더욱 깨어지게 만든다. 그때에도 여전히 부분적으로 깨어질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무책임하고 무반응적인 삶에 대해 얼마나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겠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의 요구로 나타나는 언약의 법으로써의 율법은 우리 안에 책임을 일깨우고 계속적으로 책임 의식을 갖도록 채촉한다.
우리가 우리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여길 때, 우리의 사랑을 위한 지침과 규칙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놓이게 될 것이다. 언약의 율법으로서의 율법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로 표현할 것일 뿐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이 ‘사랑-율법’은 하나님도 복종해야 하는, 하나님을 초월하여 있는 어떤 외적인 기준이 아니다. 또는 ‘사랑-율법’은 하나님께서 임의적으로 다른 것을 명령할 수 있는 그런 것도 아니다. 이 율법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발생하여 하나님을 통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율법이 하나님 위에 있지 않고 또한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는 고백은 스콜라 철학이 게으르게 시간을 낭비할 수 있는 그러한 신학적인 관건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고백은 오늘날까지 큰 가치가 있다. 이는 율법을 언약의 율법으로 고백하기 때문에 발견되는 가치이다.
우리는 율법을 하나님을 벗어난 어떤 외적인 기준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러할 때 우리는 율법을 신격화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은 기본적으로 율법주의에서 발견된다. 언약적 율법으로써 율법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규정이다. 그 율법에 따르는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자라난다. 율법을 지키는 데 반드시 포함되는 것은 주의 사랑에 사로잡혀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때 우리가 살면서 염려하게 되는 것은 주의 율법에 어긋나는 어떤 일을 하여 하나님을 실망시킬까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율법주의는 그 목적이 하나님을 위하거나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 가운데 사는 데 있지 않고 율법 자체를 지키는데 있다. 율법주의자들의 최고의 목적은 율법에 일치하여 사는 것이다. 이는 수고로운 일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을 위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피조물을 섬겨서는 안 된다. 심지어 율법마저 섬겨서는 안 된다. 그러할 경우 율법의 기능이 너무 많은 힘을 갖게 되고 사람들은 율법을 오용하게 되고 율법 자체를 향상시키게 된다. 율법주의는 하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모든 율법주의자들은 자신을 위해 충성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을 언약의 율법으로 알 때 우리는 율법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할 수 있게 된다.
율법주의의 전형적인 표현은 바리새주의에서 발견된다. 이는 특히 안식일 명령에 대한 자세에서 분명하여진다. 그리스도의 설명에 따르면 율법주의는 사람이 안식을 위해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율법을 신성화하여 섬기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율법이 오용되는 정도는 바리새주의에서 발견되는데,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자랑하였다.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막 2:27)고 말씀하셨다. 이 의미는 하나님은 언약적 율법 안에서 사람의 삶에 복을 베푸시며 사람은 율법에 따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안식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뜻이다.
청교도의 여러 형태 역시 율법주의에 빠진 것들이 있다. 특히 어떤 청교도 단체 내에서는 안식일에 대한 명령에 초점을 두었다. 여기서 문제는 안식일과 관련한 순종과 섬김이 본질적으로 율법 자체과 관련되어 버린 사실이다. 그러한 율법주의는 언제나 교회 내에서 패배하는 것은 아니다. 종종 사람들은 율법 자체를 지키기 위해 율법에 일치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 율법의 노예가 되고 율법은 속박하는 세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율법이 주어진 목적과 상반되게 된다. 그 이유는 은혜로 받은 율법을 하나님과 교제하고 사랑하는 규칙으로 사용할 때 사람은 율법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더욱이 율법을 임의적인 것으로 여기는 생각은 쉽게 극복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전혀 다른 뭔가를 명령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여야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는 하나님이 사랑 가운데 우리에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기준을 발견하도록 하는데서 하나님의 주권이 칭송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거부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방법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어떻게 더 크게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겠는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은 율법이 임의적이어야만 보장 받을 수 있다고 이해한다면 우리는 전우주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율법을 결코 말할 수 없게 된다. 이 관점에 의하면 전우주적으로 적용되는 율법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 법에 묶여 있게 될 것이며 따라서 그는 더 이상 주권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온 우주에 적용되는 율법이 없는 것으로 전제하기 때문에 모든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결정할 필요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는 인간의 마음과 주어진 상황 만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결정할 수 있겠는가? 다른 말로 하면, 그렇게 되면 상황 자체가 율법이 되며 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 자체가 율법이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율법이 아니며 도리어 상황과 인간의 사랑을 신성화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인간들은 이러한 주장과 함께 참으로 가장 달갑지 않은 형태의 이상주의에 이르렀다. 인간들은 다양한 관계의 이상들을 형성하여 놓았다. 인간들은 그러한 이상으로부터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율법을 따로 만들었다. 이는 인간은 완전하게 자아 의지적이며 자아 중심적인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종종 인간이 만든 율법에서 나온 그러한 행위와 자세를 여러 인간 관계 가운데서 보게 된다. 결혼 관계에서, 가족 공동체 내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람과 소유의 관계 속에서, 집단과 집단의 관계 속에서, 나아가 국가들과의 관계 가운데서조차 인간이 만든 율법을 적용한다. 하지만 사물과 인간의 사랑을 신성화하는 이상주의는 실제로는 불법의 형태일 뿐이다. 물론 이상주의와 함께 많은 불법이 묵인되고 위선이 난무하게 된다! 우리는 이상주의를 통해 “사랑은 신이다”라는 전제에 이른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고 선포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에 복종함으로써 이 결론에 이를 수 있게 된다
4) 당연히 전제된 믿음
율법이 언약의 율법일 때, 율법의 명령은 믿음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한다. 우리는 이 사실을 율법이 주어지는 서언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아는 것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이다. 마찬가지로 율법의 요약도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신 6:5)이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알 때에만 가능하다. 이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그분의 사랑 가운데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 안에서 오직 믿음에 의해 우리에게 계시된다. 따라서 율법의 요구는 믿음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 율법은 사랑의 율법이며 율법은 믿음을 전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하신다. 또한 모든 사람에게 믿음을 가질 것을 요구하신다. 이방인들이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이유는 그들에게는 말씀의 계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잘못이다. 하나님은 태초에 사람에게 말씀을 주셨다. 그러나 민족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멸시하였다. 이에 그들은 믿음을 전제로 하는 사랑의 율법에 의해 도리어 심판 아래 있게 되었다. 사람은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율법의 요구를 이해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다. 이는 우리가 십자가를 알 때에만 율법의 요구를 알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지금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붙드는 유일한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랑의 율법으로 우리를 심판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과 연합하게 된다. 그후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원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의 심판 앞에서 두려워 떨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잡아당기기도 하고 던지기도 하신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의 심판을 접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비참한 상태도 하나님의 계시의 중심이 되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에게 발생할 수 있다. 주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인 율법은 우리의 것이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사랑의 율법의 요구가 나타나며 그 요구로 인해 우리에게 거룩함이 나타난다. 만일 하나님이 참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분의 독생자를 주셨다면 그 사랑의 요구는 얼마나 거룩하고 위대한 것이겠는가!
지금까지 한 말을 요약하면,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믿음에 의해서만 그 사랑의 요구를 율법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만일 의심이 있다면, 실제로 깊은 죄 의식이 있을 수 없다. 믿음과 죄 의식은 함께 공존한다. 둘다 있든지 아니면 둘다 없다. 우리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말할 수 없다. 때때로 사람들은 믿음을 거부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어떤 사랑을 말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절대로 알 수 없다. 내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뵐 때에야 하나님은 나를 잡아당기셔서 주의 사랑의 심판 가운데 두신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 앞에서 죄 의식을 갖게 되는 지점에 이르게 된다.
믿음을 벗어나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율법에 대한 지식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믿음이 없이는 이웃을 향한 사랑의 율법에 대한 지식도 있을 수 없다. 오직 믿음을 통해 나는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위한 사랑의 요구를 이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믿음을 통해서만 나는 참으로 나의 이웃을 알고 또한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지 올바르게 사랑의 요구를 이해하게 된다. 믿음이 없이는 나의 이웃을 올바로 알지 못한다. 바울은 육체에 따라 아는 지식에 대해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 육체에 따라, 또는 세상적인 방식으로 사람을 아는 것은 사람을 대할 때 혈연 관계, 우정, 사업 관계, 단체 관계 등, 자연적인 사랑의 관계와 본성적인 관계로 그들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전적으로 본성적인 관계들에 대해 죽어야 한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
오직 본성적인 관계들만 있다면, 그러한 관계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경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통해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내려놓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 드린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여 다시 우리에게 돌려주신다. 그후 우리는 더 이상 육체에 다라 서로를 취하지 않고 서로를 하나님의 선물로 받게 된다. 하지만 오직 본성적 사랑만 있을 때는 율법의 두번째 목록을 성취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두번째 목록은 오직 첫번째 목록을 깨달은 후에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자연적인 관계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러할 때 자연적인 관계들이 동시에 영적인 관계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요구에 있어서도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우리는 믿음을 벗어난 사랑이 많은 경우 이기적인 사랑으로 마칠지라도 모든 자연적 사랑이 순전히 이기적인 사랑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믿음이 없는 사랑 안에도 여전히 자발적인 면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에 의해 신자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 믿음이 없이도 이웃을 향한 사랑 가운데 자발성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사랑에서 나타나는 그 자발성 역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계속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이웃 사랑에서 나타난 자발성은 그 뿌리가 잘려진 상태에 있다. 즉, 믿음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뿌리로부터 잘려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기주의가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위협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기적이었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들의 동료와의 관계에서도 그 이기심을 보였다. 그리스도께서 그 비유를 통해 제사장과 레위인과 사마리아인의 이웃을 말하지 않는 것은 특이하다. 주님은 거꾸로 말씀하신다. 즉, 주님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물으셨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6).
우리는 믿음을 통해 더 이상 내 삶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이웃으로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 당신은 믿음을 통해 당신 주변의 사람들을 내 자신을 이웃으로 주어야 하는 대상으로 보고 있는가? 이러할 때 우리의 눈은 활짝 열려 내가 누구에게 이웃이 되어야 하는지 깨닫게 된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흔히 그들의 이웃이 되지 못하고 지나칠 것이다. 이처럼 이웃을 향한 사랑의 명령에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5)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
언약의 율법에 따르면 우리의 사랑은 그 기준을 하나님의 사랑에 두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또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추구하신다. 심지어 만물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시면서도 하나님은 자신을 추구하신다. 따라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의 기준이다. 언약의 율법은 우리에게 일종의 자기 사랑을 가질 것을 명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의 사랑의 의도 가운데 첫째여야 한다.
하나님 자신을 위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측정해야 한다. 하나님으로 인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의 삶을 주장하는 요소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최고의 동기가 없으면 우리의 모든 삶은 의미가 없다.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삶 가운데서 첫째가는 목적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결코 자신을 잊지 않으시듯이,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를 완벽하게 사로잡는 일종의 사랑이 필요하다. 온 맘으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랑이 필요하다. 성경은 이러한 마음에 대해 말한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우리의 삶에서 가장 우선되고 가장 깊은 동기는 오직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영혼을 다하는 사랑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성경은 우리의 영혼을 “내 속에 있는 것들”(나의 가장 깊은 모든 존재 - 역주)(시 103:1)과 동일시 한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의 감성을 뜻한다. 삶 가운데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들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우리 안에 만들어 내어야 한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모든 이성의 기능, 즉 생각과 결단을 동반하는 활동적이고 의지적인 기능을 다 사용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의 이성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 외에 다른 목적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모든 힘을 다 사용해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자라날 것이다.
이러한 사랑이 하나님께 의로움이 되는 것이다. 의로움이란 각 인격체에게 그들의 분깃을 돌려준다는 뜻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조금도 아끼지 않고 다 드릴 때에야 우리는 하나님께 하나님의 것을 돌려줄 수 있다.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의 율법에 의해 다스림을 받으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언약 가운데 두셨다. 우리는 날마다 그 언약 안에 머물 필요가 있다. 이것이 가장 크고 중요한 첫 계명이다. 이 계명은 율법의 두번째 목록을 주관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관점에서 우리는 우리 이웃을 보며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똑같이 사랑해야 한다. 이 율법은 두번째 목록에 있는 언약적 율법이다. 자신과 이웃을 향한 이러한 사랑으로 우리는 주 하나님과의 언약 가운데 머물 것이다. 우리는 자아 사랑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리는 것도 아니다. 둘째 계명은 첫째 계명와 같으며 첫째 계명과 함께 주어졌고, 따라서 첫째 계명과 다른 계명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과 이웃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지만 육체에 따라서는 우리는 자신도, 이웃도 사랑할 수 없다. 율법의 둘째 계명은 우리가 자신을 사랑함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빛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이 보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도적질하는 우리의 사랑이 있다. 이는 죄악된 자기 도취적인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영적으로나 실제 삶에서나 그 정체를 드러낸다. 이러한 사랑은 교만 가운데 자신에게 만족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소위 ‘영적 교만’으로서 가장 가증한 사랑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자기 도취적 사랑에 빠진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지식과 관계를 호언장담한다. 이러한 사람의 삶의 균형은 오직 자신에게 달려 있다. 자기 도취적 사랑에 빠진 사람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리에서 신속하게 벗어나 자신에게서 안식을 찾으려고 한다.
자기 도취적 사랑은 영적인 면에서 볼 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며 또한 ‘하나님으로 인하여’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이 상태에서는 영적으로 잠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그릇된 자아 사랑은 또한 현실 속에서 그 정체를 드러낸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여러 면에서 잘못 사용할 수 있다. 몸의 힘에 교만을 느끼고 몸의 성취를 자랑할 뿐만 아니라 정욕의 도구로 몸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몸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부적절한 자아 사랑에 빠져 들면 좌우로 치우치게 되면서 하나님을 위한 사랑과 전혀 관계가 없게 된다. 이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도적질하는 사랑이다.
또한 이웃으로부터 하나님을 빼앗기를 원하는 이웃 사랑이 있다. 때때로 우리는 가장 친밀한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을 질투할 때가 있다.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경우가 그러한 경우이다. 이때 이웃과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경쟁 상태가 되면서 일종의 긴장이 생기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가장 친밀한 관계에 있어서도 그 관계를 하나님의 선물로 보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이웃과의 관계를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관계로 보아야 한다. 이웃을 향한 그릇된 사랑은 부적절한 자아 사랑처럼 영적으로나 현실에서나 그 정체를 드러낸다. 이 경우 우리의 이웃과의 관계는 궁극적인 의미로 볼 때 서로 세워주는 관계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여진다. 오히려 이웃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영적으로든 또는 현실에서든 자신을 위해 상대를 착취하는 자리로 쉽게 타락하게 된다. 우리의 삶의 구속(redemption)과 이웃과의 관계의 구속은 하나님의 절대적 요구를 받아들이는데 달려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요구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에게 그렇게 어렵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기준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 모든 것을 지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시는 그 동기를 볼 때, 사랑이 요구될 수 있는 것인지 또는 사랑이 명령이 될 수 있는지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사랑은 강요될 수 없으며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은 결코 어떤 명령에 순복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인간의 마음이 자율적이라는 주장을 내세울 경우 우리는 인간의 마음을 신격화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모든 것이, 심지어 인간의 마음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지어졌다는 진리와 상반된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지으시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셨다. 따라서 사랑은 사랑의 ‘말씀’이 태초에 모든 것을 지으셨기 때문에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말씀하였고, 그 말씀에 의해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되었다. 따라서 처음부터 사랑은 우리의 삶을 그 사랑에 반응해야 할 의무 아래에 두었다. 따라서 우리 측에서는 사랑은 의무이며 우리가 갚아야 할 빚이다. 그러나 결코 다 갚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사랑에 빚진 상태에 있다. 따라서 사랑은 율법이 된다.
아무 것도 사랑처럼 그토록 많은 것을 완벽하게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많은 의무를 완수하며 수많은 빚을 갚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의 빚은 끝이 없다. 우리가 다 내어줄지라도 사랑은 여전히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응답을 요구하며 모든 것을 요구한다.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를 창조한 하나님의 사랑은 당연히 그러한 요구를 할 자격이 있다. 더욱이 하나님의 사랑은 그 요구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지옥에서라도 하나님의 사랑의 요구는 계속 지속된다.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그 동기와 기준을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발견해야 한다.
자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은 우리 마음이 우리 자신과 이웃에게 초점을 두게 한다. 모든 관계 또한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관계 속에서 우리의 사랑은 그 기준과 바탕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찾아야 한다. 이 요구 또한 명백하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의무를 다 채울 수 없다. 우리는 세금이나 수익, 존경, 영광 등에 대한 빚을 갚을 수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이 그분의 사랑 때문에 우리를 위해 이웃과의 관계를 만드신 것을 알 때, 이웃을 향한 우리의 사랑의 빚은 끝이 없고 방대하게 된다. 우리의 모든 사랑은 하나님께 드려진 사랑으로서 거룩한 사랑이어야 하며 주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어야 한다.
6) 미움의 본성적 성향
교리 문답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질문에 대해 “지킬 수 없다. 나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나의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한참 모자르다는 데에는 아무도 반박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마땅히 줄 것을 주는 것을 의를 행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때 오직 위선적인 몇 사람만이 자신들이 의를 행하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미워하는 성향”에 대한 문제는 전혀 다른 질문이다.
성경은 인간의 미움의 성향에 대해 자명하게 선포한다. 예를 들어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든 불신자든 모든 사람 안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설명은 어려울 수 있다. 불신자의 삶 가운데 죄를 저지하는 성령의 영향력이 여전히 나타나는 상황에서 죄를 극복하는데는 반드시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성령의 그러한 수고를 인식하면서 인간들이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나의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고백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마땅히 우리가 본성상 죄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고백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본성’이라는 용어는 물론 죄로 타락한 우리의 속성에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잠시라도 죄가 자연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또한 언약의 율법에 따르는 삶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해도 안 된다. 사실, 죄야말로 비정상적이며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더욱이 신앙 고백은 “성향이 있다”고 말한다. 만일 이 표현이 말이나 생각에까지 적용되지 않고 오직 행위에만 국한된다면 미워하는 성향은 충분히 통제될 수 있다는 생각의 여지를 남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워하는 성향이 나타나는 실제 상태에 대해 아직 언급하지 않았다.인간의 미움의 성향을 분명히 보기 위해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의 관계를 따로 구별하여 고려해 보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벗어난 영역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가능할까? 이 질문은 위의 성경적인 점검에 의해 이미 답변이 된 것 같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하나님을 찾으려는 많은 진지한 노력이 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하나님을 위해 평생 수고하고 봉사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의 질문은 과연 그들의 모든 섬김과 추구가 뭔가를 바라지 않고 행하여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보상을 바라고 행한 것이라면 그들의 섬김과 추구는 본질적으로는 사랑이 아니라 교만을 위한 것이거나 또는 이기심에 의한 것이 된다. 물론 사랑 안에도 언제나 자신을 위해 뭔가를 얻으려는 바람이 있다. 그러나 사랑에 의한 바람은 보상이나 지불 개념이 아니다. 또한 사랑에 의해 나타나는 섬김의 열망 역시 우리가 모든 것을 받았다는 확신에 근거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사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섬기는 것은 자신의 기쁨을 위한 간절함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계속 인류를 끌어당기시고 호소하신다는 사실이다. 순수하게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람이 뭔가를 추구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뭔가를 먼저 시작하셨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일 뿐이다. 만일 아무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면 성경은 다음과 같이 사람을 유죄로 선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 그렇다면 하나님의 호소와 영향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뜻하는가? 일종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 같은 것이 그 결과가 아닐까? 이때 그들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굴복을 의미하며 사랑의 표현도 굴복으로 하게 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반응으로 나타난다.
믿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유지되고 이끌린다는 증거를 보여준다. 우리는 이러한 증거를 그들의 여러 종교적인 섬김과 헌신을 통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종교 숭배’는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신에 굴복하는 우상 숭배이다. 이러한 숭배는 언제나 말씀의 계시와 언약의 말씀과 언약의 율법을 거절할 때 발생한다. 따라서 그들의 숭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노골적인 불순종이다. 반면 참 사랑이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언약을 통해, 언약의 말씀 안에서, 언약의 율법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기로 선택하신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거절한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재미난 사실은 본성상 하나님을 미워하는 성향이 인간이 스스로 만든 하나님에 대한 견해를 사랑함으로 계속 가려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때 살아계신 하나님과 관련하여 인간의 자결권이 분명하여진다. 심지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에 있어서 인간 멋대로 결정하여 행한다. 사람이 그러한 자결권을 더욱 실현할수록 그들은 더욱 그러한 종류의 예배에 자신을 헌신하여 드린다. 이스라엘의 산당에서 드려진 번제는 예루살렘 제단에서 드려진 제사보다 훨씬 더 많았다. 오늘날도 이 세상은 종교적인 헌신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들은 언약의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절하고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그분을 사랑할 수 있다.
이러한 깨달음 가운데 이제 이웃을 향한 사랑을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이웃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을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여러 모양으로 서로 극진히 사랑하는 모양은 부인할 수 없다. 더욱이 만일 우리가 그들의 이웃 사랑을 순전히 이기심으로 치부한다면 이는 분명히 부당한 처사이다. 그들에게도 이타주의적인 이웃 사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웃 사랑은 그들의 관점과 생각에 따라 이웃을 사랑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즉, 믿음이 없이는 사람은 이웃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믿지 않는 자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위하는 관점 및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웃을 보지 못하는 점이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이웃을 진정으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잘못되고 결함있는 편견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의 이웃을 참으로 알 수 있다. 만일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어떤 사람이 잠깐이라도 이웃을 사랑하다가 그 이웃이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을 위하는 것을 알면 미움의 성향이 나타난다. 이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웃을 향해 곧바로 미워하는 마음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가장 강력한 이웃 사랑 안에는 그 만큼 하나님을 대항하는 강한 반감이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며 힘을 모아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경향이 있다. 만일 이웃을 향한 사랑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서로를 사실과 다르게 알 만 아니라 서로를 우상으로 만들거나 존경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옆으로 밀쳐낸다. 이때 그들은 서로를 참으로 발견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은 깊은 의미에서 볼 때 외로움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
그들은 실제로는 영원한 친교를 갖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영원한 교통을 나눌 때만이 그들의 외로운 고독의 상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고독은 그들이 서로를 판단할 때나 헤어질 때 끔찍할 정도로 뚜렷하여진다. 이때 그들은 오직 자신 밖에 없다는 것을 느낀다.
그들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을 위하는 이웃을 향해 미움을 갖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웃이라는 관계 때문에 그 미움은 억압된다. 이는 이웃이라는 관계는 성령의 역사로 인한 열매이며 또한 성령의 보존하시는 역사로 인해 타락한 인류 가운데 이웃 관계가 유지되기 때문에 믿지 않는 자들의 미움이 억압되는 것이다.
우리는 “나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나의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고백을 할 때 내 자신과 관련한 고백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미움의 세력 또는 성향은 우리 안에 잔재하여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의해 억제된다. 종종 우리 자신 안에 남아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은 비록 연약할지라도 미움을 억제하는 유일한 수단인 것 같다. 불신자들의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신자의 세계 안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반감과 이웃을 향한 미움이 종종 터져 나오곤 한다. 인간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미움을 대하며 그리 놀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미움의 성향은 우리 자신 안에 잔재로 남아있는 사랑에 의해 극복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 안에 잔재하는 사랑은 뿌리가 잘린 사랑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승리는 전적으로 믿음을 통한 사랑의 결과로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성령이 믿음을 통해 우리 안에 사랑을 창조하실 때, 우리는 그 사랑으로 미움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우리 자신을 자랑할 이유가 될 수 없다. 사실, 그 사랑을 만들어내시는 성령은 우리 안에 잔재하는 자연적 사랑을 사용하거나 관계하실 수 없다. 도리어 성령을 통해 만들어지는 사랑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사랑을 죄악된 것으로 정죄하고 그러한 인간적 사랑을 물리친다. 언약의 율법 아래에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오직 심판 밖에 없다. 즉,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비참에 대한 지식은,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믿음의 지식이다
4. 타락 및 원죄, 그리고 중생의 절대 필요성
제 6 문: 그러면 하나님은 사람을 그렇게 악하고 패역한 상태로 창조하셨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마음으로 사랑하며 영원한 복락 가운데서 그분과 함께 살면서 그분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도록 사람을 선하게 그리고 자신의 형상대로, 즉 참된 의와 거룩함 가운데 창조하셨다.
제 7 문: 그렇다면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의 첫째 부모인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타락하고 불순종한데서 왔다. 그때 사람의 본성이 심히 부패하여 우리는 모두 죄 가운데 잉태되고 출생한다.
제 8 문: 우리는 선을 전혀 행할 수 없고 모든 악을 향하는 성향을 지닐 정도로 부패하였는가?
그렇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중생하지 않는 한, 전부 부패하여 있다.
1) 풀수 없는 질문들
우리는 우리의 비참에 대한 지식이 “믿음 지식”이라고 불리는 믿음에 의한 지식인 것을 살펴보았다. 즉,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비참에 대해 믿음으로 고백하였다. 우리의 첫째 조상이 죄로 타락하였을 때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오직 믿음으로 알 수 있다. 그 결과는 인간은 아무런 선을 행할 수 없고 모든 악을 향하는 성향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교리 문답의 제 6 문을 보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믿음에 의해서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이 고백은 하나님이 우리를 악하고 부패한 상태로 창조하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한다. 여기서 이 부분을 다루어 보도록 하자.
사람은 믿음이 없이도 하나님은 인간을 그토록 사악하고 부패하게 창조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펼 수 있다. 이러한 논리는 일반인들의 종교 의식 가운데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인간의 실생활에서 적용하여 그들의 논리를 완벽하게 펴는 일은 없다. 만일 믿음이 없다면 (우리가 말하는 믿음이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두 가지를 진지하게 다룰 수 없다. 첫째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와서 그 사랑을 통해 그 사랑에게로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교리 문답이 고백하는 것처럼 인간은 사악하고 부패하였다는 사실이다. 불신자들은 이 두 가지 사실에 대해 하나하나 진지하게 고려해 볼 수 없기 때문에 동시에 이 두 사실을 고려하는 것은 더더욱 가능하지 않다.
첫째 사실에 대해 성경은 우리가 믿음에 의해서만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알며, 따라서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참조, 히 11:3).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의 갈등이 강조되고 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붙든다. 현대인들과 이 세상의 사고 방식으로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을 헤아릴 수 없다. 이는 오직 믿음으로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점에 있어서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이다. 믿음이 없이는 인간은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을 통해 다시 그 사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첫째 사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편 죄의 심각성과 비참과 관련해서도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람은 죄를 하나님께 저지르는 범죄로 알 때에야 죄의 실체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결코 죄를 그렇게 알 수 없다.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우리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대항하며 “그렇게 악하고 패역하게” 된 심각성을 이해하게 된다.
문제는 믿음이 이 두 가지 사실을 받아들일 때 논리적인 어려움이 생긴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그분의 사랑 가운데 이 세상과 사람을 지으셨는데 어떻게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요소인 죄가 인간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두 가지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믿음 안에서만 생겨나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믿음이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것임을 잊지 말자. 이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며 인간 및 이 세상의 기원이 하나님의 사랑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믿음은 언제나 죄의 가능성 및 실체와 씨름한다.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발생한 것이 그렇게 부패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사랑이 만물의 근본이라는 사실은 죄의 모든 가능성을 배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또는 만일 우리가 믿음과 논리로 죄의 실체를 따져본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죄를 뜻하고 의도했다고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갈등의 상태에서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이해하며 동시에 그 사랑은 결코 죄를 뜻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붙든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만물을 지었지만 그럼에도 그 사랑의 의도와 죄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붙든다.
오직 믿음만이 이러한 긴장을 유지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이 그러한 질문을 할 수 있으며 그럼에도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그 질문을 하나님께 맡겨 둔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행사와 그분의 뜻이 우리의 생각을 초월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점에서 믿음은 불신앙보다 더 많은 난제들을 접하지만 하나님으로 인하여 그러한 난제들을 허용할 수 있다. 믿음은 하나님을 불가해하신 분으로 알기 때문에 도리어 이러한 난제들이 존재한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진 우리는 사람이 대답할 수 없는 문제들과 난제들이 이 세상에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불신앙은 문제들에 대해 답을 강요한다. 불신앙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대항하는 죄의 심각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잘난 척할 수 있는 답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불신앙은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거룩과 전능하심을 무너뜨리려고 한다. 불신앙은 문제가 존재하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우리는 해답이 없는 문제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또한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확신을 계속 붙들 수 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2)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짐
우리는 교리 문답의 고백을 통해 최초의 사람과 세상이 임시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세상은 파기되어 버려지기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다. 뭔가 전혀 다른 세상이 지금 세상을 대치할 것이라는 개념으로 구속과 재창조를 이해해서는 안 된다. 만일 이 세상이 파기되기 위해 임시적으로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죄의 기원에 대해 뭔가 설명해 보려는 시도들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죄의 문제를 풀릴 수 없다. 단지 첫번째 세상을 두번째 세상으로 대치하기 위해 죄가 필요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억척 주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죄의 문제를 풀려는 이러한 노력을 거절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처음에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역사의 끝에서 완성될 계획까지 그때에 다 이루셨다고는 보지 않는다. 교리 문답 제 6 문에 대한 답변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도록 이 사실을 분명하게 한다. 우리는 그 답변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선하게 그리고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으며 그 지음을 받은 상태에서 곧바로 “영원한 복락 가운데서 그분과 함께 살면서 그분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최종 상태로 이어질 수 있었음을 들을 수 있다. 사실, 첫째 창조가 재창조에 의해 대치될 것이라는 사상은 성경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구속의 개념도 처음 창조의 회복과 완성이라는 개념 외에 다른 사상을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은 구속으로 그분의 원래 의도를 폐기하신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하여 막혔던 길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회하려 완성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리 문답이 묘사한 것처럼 원래 세상이 고결한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할 때 우리는 믿음에 의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주된 목적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이 형상으로 지어진 목적은 교리 문답이 언급하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사람들은 믿음이 없이도 어느 정도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을 따져볼 수 있겠지만,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 가운데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사람이 하나님과 계속 교제하는 것이 인간이 지어진 가장 중요한 목적인 사실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는가? 믿음이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실제 의미가 무엇인지 거의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교리 문답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과의 교제라고 고백한다. “사람이 그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마음으로 사랑하며 영원한 복락 가운데서 그분과 함께 살면서 그분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것”이 인간이 피조된 목적이라고 설명한다. 이 말을 간략하게 표현하면 사람은 하나님과 영원한 친교를 가지도록 지어졌다는 뜻이다. 우리는 흔히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의 존재 목적을 따지기 때문에 우리의 가장 큰 행복이 나의 존재 목적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즉, 하나님은 친히 지으신 이 세상으로부터 주의 사랑에 대한 반응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세상이 주의 사랑에 반응할 때 영광과 즐거움을 누리신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의 사랑에 대한 세상의 응답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다. 하나님은 세상의 응답에 만족하시며 영광과 즐거움을 누리신다. 하지만 먼지와 재와 같은 우리가 하나님께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어졌다는 사실에서 우리가 감히 다 깨닫지 못하고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어떤 뛰어남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에 자발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을 만들어내셨던 것이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실제로 응답하는 특이한 피조물이었다.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의 장중 안에 거하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피조물이었지만 그는 자신에 대해 책임져야 하는 자발성과 함께 지어졌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자발적으로 응답하거나 거절할 수 있었으며 또한 스스로 내린 선택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결정하고 택하시는 것처럼, 사람 역시 스스로 결정하고 택하여야 했다. 더욱이 이 땅의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사람에게 있었던 이러한 자발성과 책임은 허락되지 않았다. 물론 우리는 후반에서 천사들에 대해 언급하겠다. 아무튼 이러한 인격적 책임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에서 알아낼 수 있는 첫번째 요소이다.
인간의 인격적인 책임은 하나님의 형상의 공식적인 측면이면서 동시에 영구적인 부분이다. 심지어 타락한 인간들이라도 비록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히 거절하는 용도로 자발성을 사용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들 자신에게는 인격적 책임이 있다. 사람은 그 누구나 인격적 책임을 지니고 지어졌다. 이는 사람은 스스로 책임을 져야하는 피조물로 지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는 믿음과 사랑과 공의와 미와 언어와 두뇌와 감정 등을 지닌 피조물이었다. 이 모든 속성들은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에 속하여 있기 때문에 사람이 잃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 이 모든 속성들이 하나님을 대항하는 부정적 측면에서 나타날 수 있었다.
인간 자신의 인격적 책임은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설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사랑의 응답은 자발적이며 독자적인 결정에 의해 내려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자발적인 응답이 될 때만이 하나님은 만족하실 것이다. 그러한 응답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참된 반응이 될 것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피조물의 행위가 되는 것이다. 사람의 반응을 결정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스스로의 책임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기로 택한다면 그는 영원히 하나님과 교제하는 상태에 머물 것이다. 그 이후로 이어지는 그의 모든 삶은 처음에 자발적인 결정을 내릴 때의 특성으로 살아가면서 그 특성에 의해 조정을 받으며 하나님을 충분히 만족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의 공식적인 측면을 다룬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 지닌 속성들이 전부 다 공식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이미 언급한 사람의 모든 기능들, 즉 믿음, 사랑, 공의, 미, 지식, 감정 등에 있어서 사람은 결코 중립적일 수 없으며 순간이라도 중립적인 적이 없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관련하여 선택을 결정하기 이전에도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중립적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양단에 하나를 취하여야 했다. 사람은 선악과를 따먹는 이전에는 하나님께 헌신되어 있었고 그의 의무에 충성하였다. 그는 매우 선하였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은 또한 하나님의 의와 거룩을 아는 지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그릇된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은 “사람을 선하게 그리고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고백한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면서 공의와 미를 느꼈다. 지식과 감정에 있어서도 그는 하나님께 헌신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해 그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자기에게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었다. 이에 사람은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반응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람은 사랑과 친교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으며 그 대화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였다. 또한 그는 하나님이 받아야 마땅할 것을 드림으로써 의를 이루었다. 그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자발적인 헌신이었다. 더욱이 사람은 그가 겪는 모든 사건 가운데 완전한 순결과 거룩함을 보였다. 부적절한 정욕이 그를 삼키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모든 일들 가운데 믿음이 사람을 인도하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의 관계가 처음 상황부터 있었으며 믿음은 아담의 모든 것을 주관하였다. 아담은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의와 거룩에 대한 지식을 가졌다. 사실, 그는 믿음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었다. 사람은 선악과를 택하기 이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에 의해 살았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의로움과 거룩을 말할 때, 우리는 그 양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즉, 아담이 지어질 때 어떤 분량만큼 그에게 지식과 의로움과 거룩이 주어졌는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사람은 지어질 때 하나님을 믿는 성향을 갖도록 지어졌다. 그래야 하나님이 그에게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믿음을 통해 사랑을 알고 사랑을 배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거하며 계속 하나님께 헌신될 필요가 있었다.
사람은 하나님을 향하는 성향을 지닌 마음의 구조를 가지고 지어졌다. 하나님을 향하는 성향은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하기로 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의 자발적인 선택에 달려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지으실 때 그의 삶에 주셨던 것을 끝까지 놓지지 말고 붙들어야 했다. 이처럼 인간 존재의 하나님의 형상은 현실 속에서 구체적인 요소로 실제하였다. 이때 사람은 그가 지음 받은 것에 대해 선택을 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그가 지닌 하나님의 형상은 아직 임시적이며 잠정적으로 제한되어 있던 하나님의 형상이었다. 하나님의 형상의 구체적인 요소 면에서 따질 때는 사람은 자신의 결정에 따라 그러한 요소들을 잃을 가능성도 있었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응답하는 관계에 있어서, 즉 사랑의 반응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말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사람은 이러한 상태로 시작하여 영원한 복락의 친교의 완성까지 계속 끊어지지 않고 발전할 수 있었다. 이것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었다. 하나님은 사람과 친교를 유지하는데서 가장 자신을 영화롭게 하신다. 더욱이 하나님은 역사의 끝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역사의 모든 목적이 달성되는 그 때에 마침내 이 목적을 이루실 것이다. 그리스도가 역사 끝에서 하실 일은 하나님이 과거에 지으신 것들을 폐기하고 다른 새로운 것으로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것을 회복을 하고 그것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3) 아담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실을 고백한 후 그 즉시 하나님이 아담과 맺은 언약을 다룰 필요가 있다. 창세기 2장과 3장에서는 문자적으로 ‘언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곳에서 언약 체결을 본다. 즉, 사람은 생명 나무를 통해 언약의 ‘약속’의 인침(sealing)을 받으며, 반면에 선과 악을 아는 나무를 취할 경우 언약을 깨뜨리게 되면서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된다. 창세기 1장에서 3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1장은 오직 ‘하나님’이 사용되지만 2장과 3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 이는 그 이름에 의해 언약이 체결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성경이 여기서 하나님의 언약 이름을 사용한 것은 그때에 언약이 체결되었음을 우리에게 확신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게 될 때 호세아 6장 7절의 증거가 따로 필요없게 된다. 또한 그 구절은 언약 체결의 근거로 사용하기에 의심적인 부분이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호 6:7)라는 내용이 “일반 사람처럼 언약을 어기고”라고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담과 세운 언약을 믿음으로 알아 그 사실을 말할 필요가 있다. 즉, 우리는 주권적인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예비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언약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가운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시작하셨다. 하나님이 그 언약을 체결할 어떤 의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독립적인 두 양측이 함께 언약을 세운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을 참여시키기 위해 언약을 야기하셨다.
그 언약은 하나님의 호의에서 나온 주권적인 언약이었다. 우리는 먼지와 재 밖에 되지 않는 사람을 위해 하나님이 언약을 준비하셨다는 사실에 또다시 깜짝 놀라게 된다. 한편, 하나님은 사람과 언약하기 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시고 반면에 그를 지극히 높임으로써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수 있는 상대로 삼아주셨다. 따라서 하나님은 언약 안에서 사람을 친구로서 대해 주셨으며 그 둘은 서로 친밀한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인간이 지어진 목적이었다. 하나님은 단지 주권적인 권위로 다스릴 수 있는 피조물을 원하였던 것이 아니었다. 즉, 로보트처럼 완벽하게 조정되는 피조물을 원하였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그러한 피조물을 원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피조물과 이러한 관계를 가지시려면 반드시 언약이 있어야 한다. 언약을 체결함이 없이는 모든 권한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게 되고 사람은 복종만 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께만 공의가 있을 것이고 사람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의존하는 상태로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에게 약속을 주심으로써 인간에게 권리를 허락하셨다. 이에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는 즉시 그 약속으로 하나님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 한편,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이룰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이후로 쌍방은 권리와 의무를 갖게 되었다. 이에 언약의 율법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를 결정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아무렇게나 임의로 대하실 수 없었으며,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직 이러한 상태에서 상호 사랑의 관계가 가능하였다. 이제 쌍방은 그들의 삶의 비밀스러운 일들마저 나눌 수 있었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시 25:14).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가 언약의 율법 아래 있게 된 사실과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게 된 사실은 하나님의 주권을 전혀 약화시키지 않는다. 결국 하나님은 주의 주권적인 결정에 의해 자신과 사람과의 관계를 율법에 묶으셨던 것이다. 하나님 자신은 율법을 초월하시지만, 주의 주권적인 경륜 가운데 사람과의 관계를 율법 안에 가두셨다. 더욱이 하나님이 주권적인 계획 안에서 우리와의 관계를 스스로 율법에 묶으신 후로는 그 관계만이 하나님께 합법적인 관계가 되었따. 우리는 이 관계를 믿음으로 깨닫고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관계에 있을지라도 동시에 언약의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항상 갖게 된다. 이제 하나님은 사람에게 훨씬 더 가까이 내려오셔서 사람과의 관계를 율법에 묶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언약의 발단이 일방적인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 시작되었을지라도 언약은 사람이 하나님이 형상으로 지어진 것과 연결된다. 실제로 우리는 언약과 하나님의 형상을 따로 말해야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실은 언약의 체결과 관련되어 있었다. 물론 사람의 창조가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언약 체결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것은 언약이 하나님의 마음 속에 이미 있었다는 뜻이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에 의해 지어졌기에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로 언약의 율법을 받은 후에 그 율법을 따름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아담과의 언약 체결은 일방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을지라도 그 언약 체결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행위였다. 그럼에도 언약을 통한 관계는 그 언약이 체결되는 순간부터 쌍방이 그 언약에 따라 각각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는 관계가 되었다. 더욱이 쌍방의 언약 관계는 언약의 율법에 의해 서로 묶이게 되었다.
4) 하나님의 호의 언약
사람이 낙원에서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누리며 사는 동안, (물론 그는 이미 영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는 영생을 얻기 위한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아담이 자신과 후손의 영생을 위해 선한 행위를 쌓아야 한다는 그러한 개념으로 ‘행위 언약’을 말해서는 안 된다. 앞에서 확실하게 살펴본 것처럼 언약의 목적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사랑의 친교 및 교통이었다. 사람은 그러한 사랑의 친교 가운데 살고 있었기 때문에 수고를 통해 하나님과의 친교를 보상으로 받는다는 개념은 있을 수 없었다. 상호가 서로 주고 받는 사랑에는 수고로 인한 보상 개념은 제외된다. 이러한 면을 고려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마음에 와닿게 된다.
이제 또 다른 질문은 사람이 언약을 깨뜨림으로써 그 관계가 무너졌을 때 인간의 수고로 하나님과의 친교를 다시 회복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아담은 실제로 언약을 깨뜨렸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수고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켰다. 즉, 우리 때문에 그리스도는 언약 밖에서 수고하여 자신과 자신에게 속한 자들을 위해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를 얻어내셨던 것이다. 그가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에 놓여지면 수고를 통해 하나님과의 친교를 보상으로 받는다는 개념은 사라지게 된다.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의 차이를 설명하려는 의도로 아담이 수고로 영생을 얻어내어야만 우리가 은혜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아담을 행위 언약의 대표로 만드는 반면 그리스도는 은혜 언약의 대표가 아닌 단지 한 명의 사람으로 여기게 된다. 성경은 두 언약의 대표를 대조하여 비교한다. 그러나 아담의 대표성은 그로 인한 저주를, 그리스도의 대표성은 그로 인한 은혜를 강조한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행위 언약은 도리어 그리스도에게 해당하는 것이 맞다. 즉, 그리스도의 공로야말로 모든 언약 관계의 바탕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을 막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언약 관계의 대단함을 보존하기 위해 아담과의 언약을 “하나님의 호의 언약”(the covenant of God’s favor)이라는 언급하는 것이 낫고, 그리스도와의 언약을 “하나님의 은혜 언약”(the covenant of God’s grace)이라고 부르는 것이 낫다. 첫번째 언약에서 사람은 거저 베푸시는 하나님의 호의를 받는다. 즉, 아담이 수고하여 얻어낸 호의가 아니다. 두번째 언약에서 새 인류는 잃었던 호의를 그리스도에 의해 다시 얻어서 누리게 된다. 즉, 은혜이다. 은혜는 잃었던 호의를 다시 찾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호의 언약을 통해 사람을 자기 자녀로 받으셨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를 자녀로 여기시며 그분의 사랑을 주셨다. 이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가 되었다. 사람은 ‘자녀의 신분’(son-ship)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여기서 사람의 ‘자녀 신분’은 하나님에 의해 지음을 받은 사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았음을 의미한다. 한편 천사들도 하나님의 자녀들로 불리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신을 아버지로 나타내셨고 사람에게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베푸셨다. 이에 사람은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그를 자녀로 삼을 것을 정하시고 지으셨다. 하지만 그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으로써 천사들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에서 지으셨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하나님과 함께 하던 교제를 무너뜨리고 그 교제를 잃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아담은 하나님의 호의에 의해 하나님과의 교제 관계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가 수고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오직 그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이 받은 것을 붙드는 것이었다. 즉, 그는 믿음으로 순종함으로써 그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귀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증거해야 했다. 이때 그가 교제 가운데 하나님께 보일 사랑은 전적으로 자발적인 것이어야 했다. 그러므로 아담은 이러한 반응을 나타내 보일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받은 자연적 생명을 언급하면서 낙원의 임시적인 특징을 말한다. 그것과 대조적으로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영적인 생명으로 영원한 기업을 받을 것을 언급한다. 그러면서 육의 삶 또는 자연 생명이 먼저이고 그 다음으로 영의 삶 또는 신령한 생명이 오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다”(고전 15:45)라고 진술한다. 아담이 받은 것은 자연 생명이며 육의 삶이었다. 아담은 그의 자발적인 선택과 오래 참음을 통해 자연 생명과 육의 삶을 영의 삶과 신령한 생명으로 영화롭게 하여야 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것은 다시는 잃을 수 없는 영의 삶과 신령한 생명이다.
우리는 지금 아담이 누렸던 자연 생명과 육의 삶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비록 죄로 인해 부패하였을지라도 지금 우리는 아담이 누렸던 똑같은 종류의 자연 생명과 육의 삶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화롭게 된 신령한 삶과 생명에 대해서는 어떤 개념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 이유는 영화롭게 된 신령한 생명과 삶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세기 2장과 3장을 아담 당시의 실제 사건과 현실에 대한 묘사로 보고 그 때 상황을 생각해 낼 수 있다. 그러나 계시록에 기록된 장래의 영적인 영광에 대해서는 현재의 자연적 삶에서 볼 때 묵시로 밖에는 다르게 언급할 방법이 없다. 미래의 영광스러운 상황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기 때문에 현재의 언어와 표현으로는 정확하게 그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아담의 바른 선택과 오래 참음에 의해, 혹 타락할 수 있는 자연 생명과 육의 삶은 다시는 잃을 수 없는 신령한 삶과 생명으로 영화롭게 될 필요가 있었다. 그럼에도 여기에는 수고와 보상 개념은 전혀 없다. 그가 이미 받은 호의 외에 무슨 보상을 더 받을 수 있겠는가? 사람의 믿음은 단지 그가 이미 받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일 뿐이며, 그가 소유한 것을 붙드는 것이다. 이 믿음은 결코 무엇인가를 더 얻어내는 그러한 요소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믿음을 잃고 자신이 소유한 것을 거절할 때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게 되며 그는 그로 인한 결과를 감당하게 될 것이다. 이때 그는 영원한 ‘말씀’을 통해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사랑의 충만함을 거절한 것이 된다. 이는 참으로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요 1:1), ‘그 말씀’ 안에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생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그러므로 아담은 영원한 말씀이신 하나님의 ‘아들’ 밖에서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하게 된다.
아담은 영원한 말씀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성장하여 힘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할 때 그는 인류의 머리로서 바른 선택을 함으로써 그의 사명을 이루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첫째 언약 가운데 선택을 해야 하는 아담에게 있어서 이미 그에게는 영원한 말씀인 ‘생명 나무’가 아담을 위해 그 중요성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생명 나무’를 통해 아담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욱 강하게 할 수 있었으며 생명력을 계속 부여 받을 수 있었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취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을 때, 영원한 말씀은 친히 둘째 아담이 되셨다. 그분은 첫째 아담이 파괴하여 놓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다시 화목하게 하는 일을 친히 감당하기 시작하셨다.
사람은 영원한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친교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말씀’에 의해 지어진 모든 만물을 통해 그에게 나타났다. 그 때에 희생 제사는 있을 수 없었다. 이는 희생 제사는 모든 만물의 부패와 타락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의 세상은 사도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나는”(롬 1:18) 상태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신 낙원에는 그러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날 수 없었다. 이때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열매를 맺는 생명 나무였다. 그 나무는 성만찬처럼 아담을 향한 하나님의 호의를 의미하고 보증하는 표증(seal)이었다. 그가 생명 나무를 먹는 것은 하나님의 호의를 먹고 마시는 것이며 하나님의 호의를 택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동산 중앙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두 나무가 놓여 있었다. 어떤 나무의 열매를 먹는지에 따라 하나님의 호의를 영원히 붙들 것인지 아니면 그 호의를 버릴 것인지가 결정나게 되어 있었다.
언약 관계를 통해 아담에게 주어졌던 모든 풍요함은 하나님이 정하신 결혼 관계에서 분명하여진다. 그 관계를 통해 인류의 발전은 시작되었다. 역사의 처음뿐만 아니라 역사 전체 가운데 아담 안에 연합되어 있는 인류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지으신 모든 것들은 그 언약과의 교통 가운데 풍성하여지며 또한 반드시 발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
참된 진리 2 (하이델베르크 문답) -S.G. Dgraaf
2014-02-09 00:23:20
5) 하나님의 왕국(나라)
성경은 피조물에 대한 사람의 통치를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실과 직접 연결시킨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분명히 모든 피조물에 대한 사람의 통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목적 중에 하나이다. 사람의 통치를 통하여 하나님의 왕국이 임하였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나라 설립에 대해 언급한다. 한편,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주요 목적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그 교제 가운데 살면서 온 세상의 머리로서 만물을 통치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며 영광을 돌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온 세상은 사람을 위해 준비되었고 사람을 향해 있었다. 이 세상은 그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며 증거하였을 것이고 그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그분의 사랑을 확신하였을 것이다. 성경은 모든 만물이 영원한 ‘말씀’에 의해 지어졌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계시하여 준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교통과 친교는 영원한 ‘말씀’에 의해 유지되었으며 또한 그 ‘말씀’은 이미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주관하면서 사람과 세상의 관계를 정하였다. ‘자연’의 시작과 유지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신 호의에 의해 다스려졌다. 그러므로 그 호의는 자연에 추가된 어떤 것이 아니라 모든 자연 생명의 시작이며 목적이다. 즉, 자연을 주관하는 특징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에 의해 회복된 호의, 즉 은혜 또한 자연을 주관하는 특징을 띈다. 따라서 자연과 은혜 사이의 어떤 이원론적 사고는 허락될 수 없다. 맨처음부터 하나님의 호의가 자연을 주관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분별할 때 우리는 이원론적 사고를 취할 수 없다.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모든 만물 위에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중요한 목적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왜 천사가 아니라 사람만이 만물을 통치하게 되는지를 대답할 수 있다. 천사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요 38:7)로 불리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지 않았다. 더욱이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도록 부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어느날 그들은 사람에게 복종하게 될 것이다. 지금도 이미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히 1:14)을 받았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통치하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형상의 중요한 요소를 형성한다.
사람의 통치는 마치 사람이 제 멋대로 법을 만들어 통치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독자적인 다스림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은 언약의 율법에 따라 통치권을 행사하여야 했다.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만물과의 관계를 지시하였다. 따라서 첫째 언약에서도 선물과 요구가 있었고, 약속과 사명이 있으며, 호의와 율법이 있었다. 하나님의 호의가 모든 만물을 통해 사람에게 나타났던 것처럼, 율법 또한 사람과 모든 만물과의 관계를 지시하였다. 복음이 우리에게 포괄적인 의미를 띄는 것처럼, 율법 또한 우리에게 대단히 포괄적이다. 하나님의 선물이 주어지는 곳에는 그분의 요구도 있다.
6) 시험적인 명령(The Probationary Command)
때때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긴다. 주의 명령에 대한 생각없이 저절로 선을 행하는 것과 율법에 대한 의식적인 순종으로 선을 행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소중할까? 전자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면 아담의 낙원 사건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아담이 시험적인 명령과 관련하여 선택을 하기 이전에는 그의 마음에서는 선만 나왔기 때문에 그는 저절로 선을 행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아직 하나님과 완전한 교통과 연합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가 되어야 온전한 연합 상태에 이른다. 이는 우리가 언약의 율법을 의식적으로 순종함으로서 언약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어야 언약 관계를 통해 온전한 연합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오직 우리 자신의 이해와 하나님의 뜻 사이에 갈등의 가능성이 있어야 자신의 뜻을 접고 의도적으로 순복할 수 있다. 이때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알려진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람이 그러한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순종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시험적인 명령을 주셨다. 그 시험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실 및 그로 인한 인격적 책임과 관련되어 반드시 필요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향하는 성향을 띄고 지어졌기 때문에 명령에 대한 순종을 통해 자발적인 선택을 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그 순종을 통해 율법이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위한 적합한 규칙인 것을 보게 된다. 율법은 복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편에서 요구하는 사랑의 기준이기 때문에 율법과 복음은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친교는 율법에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을 지킴으로 가능하다.
사람의 모든 관계는 율법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시험적인 명령을 주셨다는 사실에서 자명하여졌다. 사람이 시험을 받게 된 나무는 소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다. 그 이름은 사람이 그 열매를 먹음으로 선과 악을 배우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악을 행함으로써 악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악을 행함으로 악에 무디어진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의 빛으로, 즉 하나님의 율법의 빛으로 볼 때, 악에 대한 지식을 알게 된다. 결코 인간의 욕망과 정욕으로 죄를 경험함으로써 악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다. 우리느느 율법의 빛과 죄에 대한 율법의 정죄를 통해 악에 대한 지식을 배울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악을 행함으로 악을 배울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한 후에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창 3:22)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무슨 뜻일까? 우리는 여기서 “우리 중 하나 같이”라는 표현은 문맥상 선택 또는 결정과 관련되는 것을 발견한다. 즉, 사람이 스스로 신이 되려고 독자적으로 결정하는 면에서‘우리(하나님)’와 똑같은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즉, 인간이 선과 악과 관련하여 하나님과 따로 제멋대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는 일’이란 ‘선택 또는 결정하는 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 내용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더불어 아담이 어떻게 선과 악을 결정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결정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 없이 제 멋대로 결정할 것인지가 달려 있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그 나무의 열매와 관련한 결정은 모든 피조물에 대한 결정이 되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그 나무와 관련한 결정은 어떻게 사람이 모든 만물을 대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으라”(창 2:16)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에 따라 인간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 된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취한다는 것은 자연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자신의 것이라는 추정된 권리에서 나온 것이다. 즉, 그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선물로 누리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탈취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하나의 나무에 대한 결정과 관련되어 있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이 금하신 그 나무를 먹지 않으면 그는 모든 세상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로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할 때 사람의 권위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 위에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먹음으로써 죽음에 이르는 일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만물을 즐거워하며 그 안에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더욱 깊어질 것이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을 충분하게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은 그 나무를 먹음으로써 자신에게 죽음을 가져왔고, 우리는 이 세상을 약탈의 대상으로 보게 되었다. 오직 순종하는 믿음만이 모든 만물을 하나님의 선물로 보고 받는다. 그때 우리는 만물을 사용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때 사람을 위해서 생명 나무의 주권적인 영향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것에 이끌렸을 때, 그의 마음은 그 나무에 묶이게 되면서 더 이상 생명 나무를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생명 나무를 먹었다면 온 세상을 사용하는 것이 그의 삶이 되었을 것이며, 그는 맘껏 자유함과 통치권을 행사하였을 것이다.
7) 죄의 기원
죄의 기원에 대한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철저하게 순전한 세상에서 악은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더욱이 거룩한 천사들이 어떻게 악한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죄의 기원은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 안에서 찾으려 할 때 발견될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거룩하였기 때문이며, 거룩한 것은 죄의 원천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죄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려고 시도하지만 내적인 모순을 포함하게 된다. 가톨릭 교회는 인간이 피조될 때 받은 자연적인 욕구 안에 죄의 기원을 둔다. 자연적인 욕구 자체는 죄가 아니었지만 죄의 원천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자연적인 욕구를 은혜보다 낮은 차원으로 생각하는 개념과 연결된다. 차원 낮은 자연적인 것이 특별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은혜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과 관련한 이러한 이원론적 개념을 거절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창조 때에 사람에게 주신 모든 것은 인간의 모든 욕구를 포함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을 통해 주시고자 하셨던 것들이었다.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인간의 모든 욕구는, 소위 낮은 차원이든 더 높은 차원이든 상관없이 주께 바쳐져야 했으며 따라서 모든 것이 실제로 하나님께 거룩하였다. 인간의 모든 욕구는 완벽하게 선하였으며 하나님을 향하는 성향을 띄었다. 따라서 그러한 거룩한 욕구 안에 죄의 원천이 놓여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죄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절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어떤 것에서 죄의 원천을 찾고자 할 때, 결국 언제나 창조주 하나님에게 이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죄의 원인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악이 없으시다. 악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영원히 존재한다는 사상도 받아들일 수 없다. 선과 악이라는 두 개의 원칙이 영원토록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의 원칙, 즉 하나님만이 영원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 특이한 특징을 지닌다. 만일 죄가 설명된다면 인간에게 핑계할 근거를 줄 것이다. 그러한 설명이나 핑계는 모든 이방 종교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죄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지 않으며 단지 사람이 유죄하다고 선언한다. 더욱이 성경은 죄의 기원에 대해 설명이 될 수 없을 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다. 그 이유는 죄는 하나님과 관련하여 대단히 거리가 멀며 또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으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성경은 죄를 참으로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만일 죄의 기원을 하나님 안에서 설명할 수 없다면 과연 다른 어디에서 죄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죄의 기원과 존재는 우리가 풀수 없는 수수께끼라고 받아들인다. 기껏 우리가 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선하고 건설적인 것들은 하나님에 의해 지어졌지만 죄는 건설적이지 않고 부정적이라는 점이다. 악은 하나님이 없이, 또한 하나님과 교제함이 없이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나아가 악에는 단지 부정적인 요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이며 의도적인 뜻이 담겨 있다. 악은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물러나 하나님과 떨어져서 거한다. 더욱이 악은 노골적인 범죄이기도 하다. 악은 피조물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선물을 스스로 내다버리는 행위이다. 따라서 악은 피조물의 범죄 행위이다. 우리는 악에게 범죄를 묻기 위해 피조물의 행위의 원천을 따라갈 필요가 없다. 악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가운데 의도적이고 반역적인 패역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악은 타락이며 불순종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지시키는 율법을 의도적으로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악이다. 결국 죄란 하나님을 향하는 자신의 본성을 거슬러 하나님을 대항하기 위해 전적이며 의도적으로 결정하는 피조물의 선택이다.
우리는 지금도 실제 존재하는 죄의 기원의 수수께끼를 대면하고 있다. 악이 더욱 이 세상에서 극성을 부리고 있기 때문에 그 수수께끼는 매우 부담스럽다. 마치 악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존재하는 부정적이고 독립적인 영원한 원칙처럼 보인다. 그러나 악은 단지 대립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의 원칙의 부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죄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원칙 밖에서 존재하고 있는지는 언제나 수수께끼이다. 또한 부정적인 요소가 어떻게 발전할 수 있는지도 수수께끼이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원칙을 알며 따라서 죄의 수수께끼와 죄로 인한 결과와 씨름하게 된다.
하나님은 친히 우리에게 죄란 매우 이상하고 설명할 수 없고 비정상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기억나게 한다. 성경은 죄의 비정상적인 특성에 대해 계속 질문을 던진다. “왜 너희는 나를 버리고 계속 악을 행하는가?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이 부족한 것이냐? 내가 너희에게 광야가 되었었느냐 캄캄한 땅이 되었었느냐?”(참조, 렘 2:31). 우리의 죄에 대한 설명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발견할 수 없다. 즉, 하나님의 사랑의 부족을 죄의 원인으로 삼을 수 없다. 오히려 우리의 눈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향해 활짝 열렸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한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우습게 대하였는지에 대해 끊임없는 자책을 하게 된다. 죄의 기원에 대한 수수께끼는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 핑계를 할 수 없게 한다. 도리어 지은 죄에 대해 우리 자신을 책망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죄를 단지 추측이라고 여기지 않고 그 수수께끼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반면에 죄에 빠진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간교하고 진실하지 못한지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한다. 참으로 우리는 죄에 있어서 핑계할 수 없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타난 결말들을 볼 때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악을 사용할 수 있다는 신비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승리 안에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며 앞으로도 계속 그러하실 것이다
8) 악의 법칙
바울은 디모데전서 3장 6절에서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라고 언급한다. 우리는 이 구절로부터 천사의 영역에서 있었던 교만이 죄의 법칙의 시작과 본질인 것을 알 수 있다. 분명히 천사는 상상이라는 재능을 사용하여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세상을 그려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세상에서 자신이 신이 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상상의 세계를 실제가 되도록 해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유혹을 통해 자신의 비전을 사람에게 심어주었다. 아담이 죄로 타락함으로 인하여 인간들은 지금도 하나님이 없는 세상이 가능한 것처럼 비현실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날마다 현혹하는 허상이다. 이것 때문에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권하며, 이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계속 상기시킨다. 이러한 깨달음은 오직 믿음을 통해 가능하다. 불신자들은 자신들이야말로 맑은 정신을 가진 현실주의자들인것처럼 여기면서 신자들을 비현실적이고 망상 속에 사는 사람들로 본다. 하지만 성경은 이를 뒤집어 불신자들이야말로 상상의 세계 속에 살고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이를 수 없다. 또 한가지 사실은 믿음이 없이는 이 세상의 실체를 충분히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실제대로 볼 수 없다. 인간들은 의도적으로 허상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들은 상상을 통해 자신을 속이며 계속 그 상상 속에 속으며 살아간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와서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이란 불합리하며 비이성적인 세상으로서 결국 존재할 수 없다. 사실 세상은 그 자체를 둘러싸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세상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그 존재 목적을 제거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하나님 없는 세상은 무의미하고 부조리하게 된다. 이러한 행위를 사탄과 사람이 지금까지 해 왔다. 따라서 모든 만물이 죄로 인하여 헛되게 되었다. 이는 만물의 존재의 의미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주고 받는데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죄와 파멸에 내버려 두실 수 있으셨다. 하나님의 사랑의 공의와 심판을 통해 죄를 처리할 수 있으셨다. 그러나 그러할 경우 창조를 하셨던 본래 의도와 모든 피조물의 존재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단 한가지 계획 속에는 세상을 창조하는 계획도 있었지만, 구속의 계획도 깊게 결부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피조물이 타락하였지만, 다른 편에서는 구속이 예비되어 있었다. 이 둘은 하나님의 하나의 계획에 있던 것이다. 원죄 이전설 또는 원죄 이후설 등, 시간적으로 이 두 가지 요소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계획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창조의 목적이 실패할 경우 구속이 필요하다. 구속은 창조를 전제한다.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가 회복함으로써 하나님은 다시 이 세상에 목적을 주셨다. 비록 지금은 하나님의 사랑이 여전히 죄의 세력과 씨름을 할지라도 이 세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간다.
모든 피조물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과 하나님 간의 친교를 위해 있다. 천사들도 이 교제를 위해 섬기는 목적을 갖고 있다. 주 하나님과의 교통을 거절한 죄의 기원이 사람 안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 놀랍다. 사람과 하나님의 교제를 위해 섬기는 위치에 있던 천사가 맨 처음에 하나님과의 교통을 거절하였다. 천사들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교제를 도와야 하는 자신들의 신분을 더 높이기를 원하였던 것일까?
천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위치에 있었고 사람은 땅에서 믿음으로 행하는 자리에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 볼 때, 천사의 죄의 시작은 교만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인간의 죄의 시작은 불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간에게는 더 놓은 영광으로 올라가는 것이 남아 있었지만, 천사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천사들은 이미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교만을 통한 그들의 타락에 대해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 또한 외부의 유혹이 없이 천사의 영역 내에서 발생한 악은 유혹으로 인하여 죄에 떨어졌던 인간의 경우와는 달랐다. 또한 천사들에게는 그들을 대표하고 대신하면서 그들을 연결시키는 머리가 있지 않았다. 즉, 천사들은 유기체적인 연합체를 이루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의 머리를 통해 구속될 수 없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만군의 여호와, 즉 천사들의 대장(the Commander)으로 언급한다. 더욱이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물론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의 죄악을 속죄한다는 것은 생각조차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구절은 그리스도가 천사들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회복하셨음을 말한다. 이는 천사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친교를 도우면서 그 교통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그들의 존재 목적인데 그 목적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친교가 가능해짐으로서 살아난 것이다. 이사야 6장 3절을 보면 그들은 “여호와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록” 하는 목적을 위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교제가 깨어짐으로써 천사의 존재 목적이 사라졌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교제를 회복할 때, 천사들의 존재 이유가 보존됨으로써 그들은 다시 하나님과 온전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교통을 회복하고 보존하심으로써 그리스도는 천사들의 할 일을 회복시켰던 것이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히 1:14). 이와같이 그리스도는 천사들의 지도자이시며 또한 주이시다.
성경은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을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딤전 5:21)이라고 부른다. 이는 그들이 순종 가운데 인내한 것은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 결정되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천사들은 스스로 책임 하에 선택하였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않고 타락한 천사들에게는 하나님에 의한 심판이 예비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을 때 이 세상을 장악하던 마귀의 세력은 이미 끊어졌다. 그러나 어느날 무저갱의 두껑이 마귀를 가두고 덮을 것이며, 그때 그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와 영원히 접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10). 하지만 그때까지는 그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적자로 큰 영향을 행사할 것이다.
9) 사탄의 유혹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삶의 근본 원리로 삼게 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수요하는 자가 되었다. 만일 사탄이 사람으로 하여금 타락하게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립하는 유사 근본 원리를 취하여야 한다. 그러려면 그러한 목적을 가진 ‘말’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그 말은 부정적인 입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립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거짓의 말이 되어야 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갖게 하고 또한 진리를 증거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어떻게 부정적인 원리와 거짓이 만들어질 수 있는지는 수수께끼이다. 지금 우리는 이 세상에서 거짓의 세력 앞에 서 있다. 어떻게 거짓이 인격적인 관계를 만들어 내고 또한 인격체들의 연합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 죄의 존재처럼 거짓 또한 수수께끼이다. 아무튼 거짓은 놀라운 세력이 있기 때문에 거짓의 사람들은 거짓을 중심으로 하여 서로 연합하며 서로를 이해한다. 특히 거짓말은 그 세력이 점점 커지고 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는 진리의 말씀이 종종 거짓의 말에 밀리는 것처럼 보인다.
낙원에서의 자연은 아직 거짓과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사탄은 먼저 거짓말로 자연과 관계할 필요가 있었다. 더욱이 무엇보다 거짓은 말로 전달되고 말로 변해야 했다. 그 당시 사람과 자연은 사탄에게 도움이 될 수 없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인간들 안에 이미 죄악된 욕구가 있고 인간들은 죄와 사탄에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사탄은 ‘세상을 사용하여’ 우리에게 얼마든지 죄를 짓도록 유혹할 수 있다.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이미 그들 안에 죄악된 정욕이 존재하고 있고 또한 사탄은 여러 자연 수단을 손아귀에 넣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나타나 수고하지 않더라도 우리를 유혹하여 넘겨뜨릴 수 있다. 그러나 낙원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사탄은 철저하게 사람의 외부에서 그에게 다가갈 필요가 있었고 그와 말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그는 어떻게든 사람과 접해야 그 다음에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여러 다양한 방법과 수단을 사용하여 그의 일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낙원에서는 그가 나타나서 말을 할 필요가 있었다.
마귀는 사람에게 나타나기 전에 가장할 필요가 있었다. 하나님과 사람의 본성을 대적하는 불경건한 원리가 마귀를 통해 그대로 노출될 경우 사람은 징그럽게 느끼면서 마귀의 말에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의 적의는 그대로 노출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는 사람에게 친구의 모습으로 나타날 필요가 있었다. 사탄은 사람보다 낮은 등급의 피조물 중에 사람과 가장 가까웠던 뱀을 사용하여 사람에게 접근하기로 하였다. 그때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였다”(창 3:1). 모든 피조물들은 사람의 통치 하에 있었으며 그 중 뱀은 사람과 가장 친하며 가까웠다. 사탄은 뱀을 사용하여 모든 피조물의 머리인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로 결정하였다. 물론 뱀이 질문할 때 아담과 하와는 그때까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원리를 몰랐다. 그러나 그 질문과 함께 그들은 뱀이 말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리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질문은 다정한 친구인 뱀으로부터 오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사탄은 그의 의도를 뱀의 말로 감추었던 것이다.
뱀이 한 말은 사람이 전혀 기대하지 못하였던 내용이었다! 뱀의 말에는 이미 인류에게 낯선 요소가 분명히 담겨 있었다. 그들은 그때까지 전혀 몰랐던 내용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뱀의 말에 경계를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이 몰랐던 내용은 그들 안에 탐구하고 발견하고 싶은 욕구를 만들어내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사탄과 접하게 되면서 유혹에 빠지게 되었고 그들은 사탄과 함께 하나님이 없는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삶을 향해 하나가 되었다. 그 이후로 이 땅의 모든 육체들은 하나님이 없는 세계와 삶을 계속 찾아 헤매고 있다.
뱀이 하와에게 처음에 던진 질문은 정보를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낮은 등급의 피조물이 사람에게 묻기를 하나님이 피조물의 머리에게 완벽한 독립을 주었는지, 또한 이 땅에서 철저하게 궁핍하게 하셨는지를 물었다. 사실, 이 질문은 정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의지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를 얻도록 부추기는 마귀적 충동이었다. 그러므로 사탄은 의도적으로 뱀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을 그릇되게 말하여 그들이 싫어하는 명령으로 만들어 놓았다. 하와는 그릇되게 언급된 하나님의 명령을 바르게 고쳐 놓았지만 그 질문이 담고 있는 충동은 그녀에게 남아 있었다.
우리는 유혹의 순간에 죄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그 과정을 여러 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죄를 짓기 전에 합리화를 한다. 우리에게 죄를 짓도록 하는 중요한 ‘동기’는 하나님을 탓하는 어떤 상상된 불의이다. 즉, 죄를 짓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두신 조건들이 우리를 가둔다는 생각을 한다. 이러한 제한에 대한 못마땅한 마음은 어느새 자신에게 죄를 짓도록 승락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유하고 싶은 자극을 받으면 그 자극은 금지된 것을 향한 정욕으로 이어지고,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을 곁으로 밀쳐낸다.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정확히 되풀이 하면서, 그 명령을 범할 경우 죽음을 당하게 된다는 하나님의 경고를 강조하였다. 이때 사탄은 뱀을 통해 강경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쳤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 이 말에 의해 속이는 영은 하나님을 대항하는 특성을 분명하게 나타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에 의해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사람이 사탄의 거짓말을 택하였을 때 하나님과의 교제는 끊어지게 된다. 믿음의 끈이 잘리자, 언약은 깨어지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오직 믿음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 죄를 거절할 능력을 갖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주관하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 말씀을 붙들 때 죄를 거절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며 믿지 않으면, ‘말씀’을 놓치게 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인간이 죄를 짓기로 하는 결정은 불신앙을 통해 내려진다. 불신앙은 죄의 결정이 내려지기 오래 전부터 있을 수 있다.
이전에 사탄의 마음에 생겨났던 똑같은 동기가 뱀의 말을 통해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이 동기는 유혹을 통해 궁극적으로 나타나는 요소이다. 교만은 하나님이 없는 세상이 가능하다는 망상을 만든다. 그 망상은 우리를 사로잡는다. 그러면 하나님을 대항하거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만 있다면 뭐든 하려고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유하는 것을 동경하며 그러한 상태를 만들어 주는 것들에 대해 기뻐한다. 즉, 하나님을 향한 죄악된 감정을 갖게 된다. 이러한 죄악된 교만은 한 때 인간 안에서 일어나더니 지금도 인간들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목적을 추구하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죄악된 욕구가 인간 안에서 발생하자 우리는 모든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되었다. 무대의 조명등은 색이 바랜 모조품들을 새로운 실제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때 우리의 눈은 조명에 비친 것들에 사로잡힌다. 이와같이 사물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죄악된 욕구로 인하여 착각에 빠진다. 전에 느끼지 못하던 감각을 가지고 만물을 보게 되면서 모든 것이 더욱 탐스러워진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창 3:6). 그녀는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면서 자신의 욕구로 인하여 그녀의 눈이 열렸다고 믿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많은 사람들이 이제 자신들의 눈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는다! 참으로 그들은 이전에 보지 못한 것을 보며 그 관점에서 더 많은 것과 멀리 있는 것을 본다. 그들은 종종 자신들이 보고 듣는 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죄악된 욕구가 그들에게 그러한 관점을 준 것이다.
그 여자는 그 나무가 먹기에 좋았다고 보았다. 이제 그녀는 그 나무의 실과를 먹기 전에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음식으로 준 모든 것으로는 더 이상 만족할 수 없었다. 우리는 하와처럼 종종 자신에게 무엇이 더 필요하다고 상상하곤 한다. 그 나무는 또한 그녀의 눈에 보기 좋았다. 그녀는 하나님이 금지하신 그 나무를 보면서 그 나무야말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만물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 나무는 그녀에게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자유하기만 하면 그녀 스스로 선과 악에 대한 나름대로의 통찰력을 개발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새로운 지식의 세계가 그녀에게 열릴 것만 같았다. 특히 이 부분이 죄의 어리석음을 드러낸다. 죄에 빠진 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 새로운 지식의 세계가 열려서 더욱 행복해질 것으로 착각한다. 마치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장 충만하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막았다고 여긴다!
죄에 떨어지는 이 모든 과정으로부터 우리는 죄의 길은 그 자체가 거짓이며 또한 거짓말이 그 수단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게 된다. 죄는 하나님의 유일한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사람의 삶은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있어야 하는데, 죄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삶을 헛되게 된다
10) 언약의 머리의 타락
아담이 하나님과의 호의의 언약에 있어서 인류의 머리였기 때문에 사탄은 하와가 아니라 아담의 타락을 의도한 것이 분명하다. 모든 인류는 하와가 아니라 아담 안에서 서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할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 중에 하나로 하와를 지으셨기 때문에 하와 역시 아담에게 속해 있었다. 사탄은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직접 받지 않았기 때문에 하와에게 먼저 관심을 가졌다. 더욱이 하와는 아담처럼 언약의 머리로서의 책임을 지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잠시 하와가 범죄할 때 어떤 체험을 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탄이 그녀의 마음 속에 야기했던 자유와 더 큰 행복에 대한 기대는 도리어 실망으로 끝났다. 하나님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도 깨어졌다. 그녀는 극심한 외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녀는 모든 나무들과 피조물들이 자신을 경계하며 주목하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때 그녀의 마음에는 아담이 자기 편에 서기만 하면 다시 자유롭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아담을 자기 편에 서도록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하였을 것이다. 특히 그녀는 사탄이 그녀의 마음 속에 심어 놓은 생각을 아담에게 전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다시 유혹은 절친한 곳으로부터 다가왔다. 뱀이 말을 통해 모든 낮은 등급의 피조물들이 사람 안에서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는 것으로 하와에게 거짓을 말한 것처럼 하와 또한 아담에게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였다. 이제 아담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하나님이 주신 여자와 하나님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관건이 되어 버렸다. 그 여자와 함께 하나님의 명령에서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는 유혹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둘이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지시를 고려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연합은 결코 죄 안에서의 연합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인류의 머리인 아담 안에서 인류 전체가 타락하였다. 이때 아담은 그의 선택을 홀로 한 것이 아니었다. 아담 안에는 인류가 존재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와가 그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아담의 선택은 모든 인류의 선택이었다. 이전에 뱀의 말을 통해 모든 저등한 피조물들이 하와의 선택에 함께 한 것처럼. 아담의 선택을 통해 온 인류는 타락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첫째 부모인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타락하고 불순종한데서 … 사람의 본성이 심히 부패하여 우리는 모두 죄 가운데 잉태되고 출생한다”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호의 언약 안에는 아담과 모든 인류의 친교도 놓여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언약의 교통과 핏줄로 인한 결합을 구분해야 한다. 하나님이 가족을 지으시고 가족이라는 기반 위에 언약의 친교를 세우셨다고 말하는 것은 맞지 않다. 그 이유는 가족(핏줄로 인한 결합)과 언약의 교제 사이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의 교제 또는 교통을 위해 있기 때문에 언약적 관계가 사람 사이의 상호 관계를 결정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언약적 친교가 현실에서 구현되려면 혈통 관계가 필요하다. 특히 언약적인 교제는 가족 관계를 통해 구현되도록 되어 있었다.
아담이 언약의 머리였다는 사실은 그의 공식적인 지위를 뜻한다. 도시를 대표하는 시장(Major)은 그가 공식적으로 행사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 도시의 시민들은 대표한다. 마찬가지로 아담은 그의 결정과 행동에 있어서 인류를 대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담의 지위는 그의 개인적인 특이성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류를 대표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다.
교리 문답은 “우리의 첫째 부모인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타락하고 불순종한데서 왔다”라고 고백함으로써 아담의 행위는 인류를 대표하는 결정적인 행위였음을 시인한다. 사실 이 말은 아담을 유혹한 하와를 기억나게 한다. 하와는 언약 안에서 아담에게 속해 있었고 또한 하와는 아담에게서 지어짐으로서 같은 핏줄로 결합되어 있었다. 그녀는 먼저 죄를 지음으로써 언약적으로 그녀의 머리인 아담으로부터 분리되었지만 여전히 같은 핏줄이었다. 그후 아담은 그녀의 행위를 가려주기 위해 하나님과의 언약적 교제를 무너뜨리고 핏줄의 결합을 택함으로 스스로 죄를 지었다.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서 언약적 친교는 가족이라는 배경을 통해 현실로 구현되도록 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계시는 언약적 교통이 혈통적 관계를 인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부모와 자녀들의 관계에 있어서 언제나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가 그 관계를 인도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자녀들의 혈통적 출생이 언약적 관계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과학 책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다양한 생물학적인 질문들에 답하지 않는다. 교회가 생물학적인 질문들에 대해 하나님의 계시로 답하고자 할 때 성급한 답변을 해서는 안 된다. 신학은 생물학과 관련한 질문들에 대해서도 해답을 찾으려고 시도는 하지만 현재까지 영혼 전이론, 세대적 영혼 발생론, 영혼 창조설 등 다양한 설들이 있을 뿐이다.
11) 원죄
죄는 무엇보다 먼저 범죄를 가져온다. 하나님은 자신을 신원하시고 주의 율법은 모든 위반되는 것을 찾아내기 때문에 범죄는 드러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죄를 다루지 않으신다면 범죄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죄를 다루신다. 범죄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상태로서 반드시 율법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요구가 죄를 지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는 실재한다. 이에 인간 편에서는 잘못 행함에 대한 죄의식이 가능하며 실제 범죄했을 경우 죄책감이 있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실제 심판이 있다. 즉, 범죄는 마땅한 형벌을 요구한다.
범죄의 결과는 오염, 그리고 내적, 고유적인 부패이다. 펠라기안주의는 죄를 실제 행위에만 국한 시킨다. 그들은 죄의 행위가 있은 후에도 인간의 본성은 그대로 있다고 본다. 펠라기안주의는 죄는 단지 행위이기 때문에 결코 일관적 행동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인간의 죄성과 부패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죄 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그릇된 길을 택하였다. 이에 하나님의 사랑의 심판은 그 결정을 범죄로 선포하면서 인간이 그릇된 자리에 계속 머물도록 정죄하셨다. 그러므로 그 이후로 범죄 행위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저주이며 인간은 이제 계속되는 범죄 행위의 길에서 방향을 바꿀 수 없게 되었다. 즉, 부패 또는 죄를 향하는 성향은 범죄의 결과이며 인간은 잘못된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도록 정죄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는 그릇된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도록 하는 어떤 타성이 있다. 그 타성은 범죄의 결과로 나타난 열매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저주인 것이다. 바울은 타성의 법, 또는 인간의 무기력의 법을 말하면서 우리는 더 이상 죄를 향하는 방향을 바꿀 수 없음을 언급한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1, 23). 범죄는 저주와 타성의 법의 요인이기 때문에 먼저 범죄가 속죄되지 않는 한, 죄의 세력은 제거될 수 없다.
아담에게 이 모든 사실이 가장 먼저 적용됨으로써 그가 죄에 떨어졌을 때 범죄와 부패를 낳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결과는 아담이 인류의 머리였고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원죄를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원래의 범죄와 원래의 본성적 부패를 구별해야 한다. 보통 교리적으로 원죄를 의미할 때 원래의 본성적 부패 또는 유전된 부패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죄성만을 원죄라고 할 때 우리는 자신의 범죄에 대해 변명할 수 있고 나아가 하나님을 탓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원죄를 범죄로도 보아야 하며 그 범죄는 아담의 후손인 우리 각자에게 해당한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개인주의에서 벗어날 필요를 느낀다. 우리는 개인주의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 각자가 공동체적인 범죄에 연루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우리 스스로 개인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 죄로 타락한 결과 중에 인류가 서로 나누어지고 갈갈이 찢겨진 점이 있다. 언약의 공동체적인 특성은 인류에게 내려지는 공통적인 저주에서도 나타났다. 인류가 한결 같이 똑같은 저주를 받았는데 그 저주로 인하여 우리는 영적으로 하나가 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 각각 격리된 삶을 산다. 우리는 개인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기 떄문에 홀로 고립적으로 생각한다. 이에 범죄에 있어서도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범죄하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오직 주의 말씀과 성령으로만 우리는 우리 자신이 결코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던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계속 삶 전체를 통해 역사하셔야만 우리는 개인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 공동체적 사고를 갖게 된다. 그때 원래의 범죄에 대한 우리의 사고는 공동체적으로 그 실재를 깨닫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이 임할 때, 우리는 인류의 역사는 오직 하나라는 사실을 인식한다. 즉, 내 개인의 역사는 나의 출생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창조부터 시작된다. 그 때 발생한 모든 사건들은 나를 포함하고 있으며 나는 아담 안에서 그 이후로 발생한 모든 일들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된다. 이 세상의 모든 죄와 비참이 내게 닿으며 나의 범죄를 선포한다. 따라서 나의 어리석은 개인주의적 고립은 산산조각이 나고 나는 더 이상 나의 교만한 격리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이제는 이 세상의 모든 죄악이 나의 책임으로 느껴지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원죄이다. 원죄는 무엇보다 아담의 죄악에 대해 나의 책임을 구체적으로 느끼게 만든다. 그후 아담 안에서 이 세상의 죄악에 대해 책임을 느끼게 한다. 원죄의 결과는 본질적인 부패이다. 끝까지 그릇된 길을 고집하는 완고함과 충동이 원죄의 결과이다.
세미 펠라기안주의는 원래의 본성적 부패를 받아들이지만 원래의 범죄를 인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는 원래의 본성적 부패를 심각하게 다룬 것이 못된다. 우리는 본성적 부패, 즉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말한 죄의 법은 잘못된 방향을 어쩔 수 없이 추구하는 상태로서 죄악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저주라는 사실을 설명하였다. 사람이 이 저주를 부인할 때, 인간이 잘못된 길로 계속 가는 현상을 인정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세미 펠라기안 주의는 언제라도 우리 스스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다고 본다. 즉, 아무때나 하나님의 은혜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는 성경의 내용과 상충된다. 성경은 “허물로 죽은 우리”(엡 2:5)라고 하고,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고 선언한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세미 펠라기안 주의는 스스로 모순된다. 그 사상은 원래의 본성적 부패 때문에 사람을 유전의 희생자로 취하게 된다. 이 사상은 종종 그 부패를 굴복시키거나 죽이는 것이 실제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겪게 된다. 그러나 세미 펠라기안은 이러한 실제를 부인하는 모순에 빠진다. 우리가 소위 ‘유전의 희생자’라는 조건은 공동체적 범죄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 때, 그리고 공동체적 범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그 영향을 입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본성적 부패를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깨달을 때에야 오직 성경의 말씀에 따라 주께 매어달리게 된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시 103:3).
그러므로 우리가 원죄를 본성적 타락 및 공동체적 범죄로 동의할 때, 우리는 “그때 사람의 본성이 심히 부패하여 우리는 모두 죄 가운데 잉태되고 출생한다”고 고백할 수 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잉태할 때부터 시작되는데 바로 그때부터 죄가 우리를 주관하고 다스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으로 죄의 세력으로 치우쳐서 모든 것을 바라본다. 즉, 우리는 잉태될 때부터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는 부패한 죄성에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인생을 주관한다.
더욱이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을 언제나 추상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을 추상적으로 보는 것은 잠시라도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없다. 그들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진노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 우리는 바울처럼 “전에는 우리도 …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엡 2:3)라고 말해야 한다.
이 뜻은 인간은 본질상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며 그분의 사랑의 자녀가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자녀됨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분의 자녀로 양자 삼으심으로 인한 결과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실도 이와 관련된다. 하지만 사람이 인간 편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기하였을 때, 하나님은 사람을 범죄자로 선포하였고 하나님의 저주가 그에게 임하였다. 사람을 자녀로 삼았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관계는 깨어졌다. 따라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가 될 때에야 다시 하나님의 자녀 신분이 회복된다.
자녀 신분을 잃은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은 것과 연관된다. 우리는 위에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언급하였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었다는 것은 본질적 부분에만 국한된다. 사람은 여전히 모든 기능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기능들은 불구가 되었다. 그는 여전히 스스로의 책임 하에 결정하는 피조물이지만 그는 하나님을 향하는 성향을 잃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형상의 주요 부분을 잃은 것이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의와 거룩을 잃었다. 오늘날 사람에게 어느정도의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고려해 볼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정죄의 심판 하에 있음을 말해야 한다. 그들은 죄로 타락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의와 거룩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적 부분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형식적으로만 붙들고 있다. 따라서 인간들은 뭔가를 믿고 윤리적인 삶을 살며 공의에 대한 감각을 갖고 있으며 또한 미에 대한 의식, 언어, 이성, 감정 등을 여전히 갖고 있다. 하지만 인간들은 하나님이 원치 않는 방법으로 그 형상을 사용한다. 따라서 인간들을 더욱 부패하여간다
12) 중생의 필요성
우리는 교리 문답을 통해 “우리는 선을 전혀 행할 수 없고 모든 악을 향하는 성향을 지닐 정도로 부패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중생하지 않는 한, 전부 부패하여 있다”고 고백한다. 이때 여러 질문이 생겨난다. 중생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전적 타락을 말할 수 있는가? 중생하지 못한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를 수 있는가?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도 아직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가? 우리는 이곳에서 중생에 대해 상세하게 다루지는 못하더라도 몇가지 중요한 질문을 답해 보려고 한다.
중생이란 마음의 변화이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이 마음의 변화는 변화된 삶으로 나타나면서 계속 변화를 받는 삶을 추구한다. 교리 문답은 우리가 “성령으로 중생한다”고 언급한다. 이 말은 다음 성경 말씀과 조화를 이룬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베드로전서 1:23, 25). 우리는 성령의 두 가지 활동을 구별한다. 직접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열게 하는 일과, 그 마음이 주를 믿고 의지하도록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는 일이다. 이에 성경은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행 16:14)고 말한다.
성령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역사에 대해 면밀하게 생각해 보자. 사탄은 하나님을 향하던 인간의 마음을 바꾸어낼 수 있었다. 어떻게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사탄의 말을 듣고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섰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설 때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었고,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은 이제 그에게 어리석은 것으로 보였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들을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성령이 직접 그의 마음을 변화시켜 열어놓으셔야 한다. 성령의 이러한 직접적인 역사에 의해 우리는 참으로 다시 하나님께 향하게 될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 가운데 우리의 사정을 하나님께 의탁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거듭남의 사건, 즉 중생 안에 포함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성령으로 사람 안에서 이와같이 역사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사람을 보시고 다시 자기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생을 통해서 기본적으로는 죄악으로 인한 부패와 어쩔 수 없이 그릇된 길에서 옹고집을 부리는 타성인 본성적 부패가 제거된다. 따라서 중생을 통해 원칙적으로는 원죄과 그 결과가 무효가 된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게 되고 하나님의 형상의 근본 부분,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의, 거룩이 본질적으로 회복된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다시 하나님을 알게 되며 믿음을 통해 기본적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를 능가하는 의를 다시 한번 얻게 된다. 이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순전하게 반응하며 하나님의 성령은 다시 그의 소욕을 다스리는 책임을 갖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택함을 받은 자의 중생을 독립된 사건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반드시 그리스도와 연결해서 보아야 한다. 중생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에게 연합하는 것이며, 이 연합은 중생의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고 또한 중생한 자를 계속 영적으로 성장시킨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이 없이는 그 어떤 사람도 회심이 불가능하다. 둘째 아담이며 은혜의 언약의 머리되시는 새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인류에게 새 원칙를 제공하셨다.
인류의 유익을 위한 모든 영향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그분에게서 새롭게 흘러나온다. 이 영향은 특히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해 의도된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더욱 특별하게 나타난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고 그들의 마음은 다시 하나님을 향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구속의 영향이 거듭나지 않은 불택자들에게 어느정도까지 역사하는지는 질문으로 남아있다. 그들이 이 세상에 사는한, 그들은 택자와 어느 정도 유기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즉 그들은 택자와 함께 하나의 인류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까지는 그들에게도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올 만큼 그만한 변화를 나타내는 영향은 아니다. 하지만 불택자들에게 끊임없이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모든 인류의 유대관계가 유지된다.
또한 그리스도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불택자들의 마음에도 어느 정도의 변동이 나타난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울에게 새 마음을 주셨다”(삼상 10:9)고 언급한다. 사울은 자기 중심적이었지만 새마음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신을 주는 법을 배웠다. 이처럼 불택자들도 자신과 관계된 자들을 이해하며 그들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이는 불택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영향력이 다소간 나타나 죄의 세력에 대항하거나 절제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욱이 불택자들도 오직 자신만을 의지하며 철저한 교만 가운데 완전히 격리된 것은 아니다. 인간들끼리 철저하게 격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들 역시 아직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하게 분리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불택자들이 상호 서로 의존하는 것은 그들의 의지 및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어느 정도 하나님을 의존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않는 불택자들에게도 아직은 하나님을 아는 제한된 지식이 있으며 또한 하나님을 의존하는 의식이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불택자들 중에는 나름대로 의를 시행하려고 시도하는 자들이 있다. 즉, 하나님 뿐만 아니라 각 사람에게 해당하는 분깃을 돌려주려고 노력한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을 절제하며 어떤 거룩함을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과정 중에 몇몇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의 잔재를 구체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불신자 중에도 하나님을 아는 어느 정도의 지식 및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을 보이는 자들이 있다. 나아가 종교적인 확신을 갖고 사람들 앞에서 어떤 의로운 행위들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들이 그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불택자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이 하나님을 계속 계시하기 때문에 만물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어떤 의식과 감각과 지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으로는 영생을 얻기에 불충분하다. 이는 성경에 따르면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생의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아는 지식이며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아는 것이다. 불택자들이 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경배는 자기들의 깨달음과 기준을 수단으로 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망가뜨려 놓은 상태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신원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보기에 합당한대로 인간들의 친교를 위해 헌신하지만 그 헌신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조명을 받은 대로 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믿음의 능력에 의한 섬김이 아니며 하나님의 은혜로 섬기는 것도 아니다. 오직 자신을 주장하기 위함이며 자신을 완전하게 하기 위함일 뿐이다. 이와 같이 불택자들 사이에도 그리스도의 특별한 영향력이 있다. 그러나 불택자들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영향을 자신들의 생각과 방법으로 사용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영향을 인정하지만, 한편 우리는 본성적으로 아무런 선을 행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참된 영적인 선을 행할 수 없다. 더욱이 비록 모든 형태의 악이 그리스도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실현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모든 악을 행하려는 성향이 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끝없이 악을 행하여도 결코 만족이 없다.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중생할 때에,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 이에 우리의 마음은 성령에 사로잡혀 완전하게 변화되어 하나님을 바라본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적 속성이 우리 안에 회복되는 것이다.
그때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입양된다. 불택자들이나 거듭나지 않은 자들은 아무리 하나님의 형상의 잔재가 그들에게서 발견되더라도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직 하나님이 자기 자녀로 삼는 자들만이 중생이 허락되며, 중생된 자들만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음을 받을 수 있다
5.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
제 9 문: 하나님께서 사람이 행할 수 없는 것을 그분의 율법으로 요구하신다면 이것은 사람에게 불공평한 것이 아닌가?
답: 아니다. 이는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율법의 요구를 행할 수 있도록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마귀의 꾐에 빠져 고의(故意)로 불순종하였고, 따라서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후손들도 이러한 능력을 잃게 되었다.
제 10 문: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불순종과 반역을 형벌 받지 않도록 허용하실 것인가?
답: 절대 그럴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원죄와 자범죄에 대해 심히 진노하시사 하나님이 선포하셨던 것처럼 원죄와 자범죄를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원히 의로운 심판으로 형벌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갈 3:10)라고 선언하셨다.
제 11 문: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자비하신 분이 아닌가?
답: 하나님은 참으로 자비하신 분이지만 또한 의로우신 분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엄위를 거슬러 짓는 죄를 가장 엄중한 형벌, 즉 몸과 영혼에 영원한 형벌을 내릴 것을 요구한다.
1) 하나님의 사랑의 공의와 죄악된 속성의 고의적 질문들
우리의 육신, 즉 죄성은 질문을 던진다. 지금뿐만 아니라 지난 모든 세기에 걸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하나님께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죄성은 결코 항복하거나 사로잡히지 않고 끝까지 새로운 질문을 던지며 자신을 변론하려고 한다. 죄성은 항상 빠져나갈 길을 찾아내며 패배의 위험이 있을 때는 도망을 친다. 죄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죄의 성향을 이해할 것이다. 교리 문답은 모든 사람의 삶 가운데 발생하는 질문을 묘사하고 있다. 사람마다 하나님께 질문을 던지며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려고 한다. 인류는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께 복잡한 질문을 던지며 더욱 멀어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점점 더 이러한 장애물을 무너뜨리는데에 애를 먹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행할 수 없는 것을 그분의 율법으로 요구하신다면 이것은 사람에게 불공평한 것이 아닌가?” 이 질문은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의 공의는 인간의 능력에 조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즉, 하나님은 인류가 죄로 타락한 사실을 염두하고 주의 공의를 사람의 사정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공의가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고려한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의롭거나 공의로울 수 없으실 것이다. 또한 사람은 감히 이러한 주장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권한을 분명하게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럼에도 이러한 건방진 질문은 현재 이 세상에 가득하며 과거에도 없었던 적이 없었다. 인간이 하나님의 공의가 인간에게 주어진 상황에 맞추어져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따지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무엇이든 싸워서 얻어내는 자가 삶을 살 자격이 있다”는 속담은 인간에게는 어울릴지 모르나 하나님께는 적용될 수 없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러한 고의적 질문으로 하나님의 신성한 공의를 철저하게 없애려고 한다.
혹시 우리의 죄성은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범죄를 인정하고 입을 다물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의 죄성은 다시 하나님의 공의의 주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의 공의는 아무런 제재가 없는 주권적인 하나님의 결정이다. 그 공의는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책임을 지우지 않고 우리에게만 모든 책임을 지운다. 더욱이 하나님은 우리의 범죄에 대해 형벌 여하를 맘대로 결정할 수 있다.” 죄성은 이러한 논리 가운데 다음과 같은 두번째 질문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불순종과 반역을 형벌 받지 않도록 허용하실 수 있지 않으신가?” 이 질문의 의도는 이러하다. 하나님은 범죄에 형벌을 내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육체는 범죄의 부담으로부터 도망쳐 보려고 한다. 이는 형벌이 없는 범죄는 실제로는 범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두번째 육신의 질문도 답변이 되었다고 하자. 그러면 육신은 무분별하게 세번째 질문을 던진다. 육신은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가 서로 상충되는 것으로 알고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한다. “하나님은 자비하신 분이 아니던가?” 이때 죄성은 이 질문을 던지며 하나님의 자비에 항복하고 그 자비의 권리를 인정하기 위해 그 자비를 운운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 안에 내적인 불일치가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하나님의 자비를 운운한다. 그러면서 죄성은 육신의 범죄를 덮어주지 않는 하나님의 행위는 모순이라고 선언한다. 이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는 셈이다.
우리는 이러한 세가지의 육신적 질문에 대해 성경적으로 상고해 보아야 한다.
먼저 이러한 세 가지 질문은 죄성의 논리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과 상관없는 독자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독자적인 입장은 실제로는 존재할 수 없는 거짓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공의와 마찰을 빚게 된다. 인간의 삶 자체가 하나님이 주도하신 공의 위에 서 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공의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처음에 지어질 때 이러한 신성한 권리를 받았다. 하나님은 맨처음부터 우리와 언약하시고 그 언약 안에서 공의를 구할 권리를 허락하셨다. 이에 우리의 존재과 권리는 처음부터 언약을 통해 결정되었다. 이때 우리의 존재와 권리가 언약 조건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언약 조건이 우리의 존재와 권리를 결정하였다. 즉, 공의가 우리의 삶을 다스렸다. 지금 우리는 죄성에 따라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상관이 없이 우리 자신의 관점에서만 생각한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되었다고 선포한 후에 우리 존재의 권리를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배제한 그러한 권리 주장은 설 곳이 없다.
우리는 인간의 죄성을 거부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떠나서는 인간이 하나님과 실제로 어떤 법적인 관계에 있는지 결코 알 수 없다. 하나님의 공의의 대한 성경의 계시는 우리의 죄악된 착각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존재의 바탕이 되는 하나님의 공의를 다시 발견하도록 돕는다. 그러면 우리는 이전의 우리의 사고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후에 우리를 법적 관계에 두셨다. 이때 그 결정은 하나님의 자유롭고 주권적인 결정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이 하나님 편에서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임의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하나님은 언약을 세우시면서 언약 위반에 대한 결과를 선언하셨는데 이는 하나님 자신도 그 언약에 묶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주권 가운데 언약을 초월하실 수 있는 권한을 내려 놓으심으로서 친히 언약의 율법에 따라 사람과의 관계를 갖게 되셨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언약을 통한 관계 외에 또 다른 종류의 관계가 가능한가? 이러한 질문은 인간의 존재와 능력을 벗어나는 쓸모없는 사색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언약의 관계 외에 다른 바탕을 생각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이성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범죄에 대해 형벌을 내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가능하지 않느냐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자신을 언약에 매신 하나님과 그분의 언약에서 벗어나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필수적으로 범죄를 벌하셔야 하는 언약 관계에 계신 하나님은 범죄를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면을 무시하고 하나님은 그분의 주권과 임의성에 따라 범죄를 간과할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은 도리어 사람이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이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어떤 법을 만드는 것이 된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굴복한 어떤 또 다른 법으로 하나님의 행위를 설명하며 하나님을 그 법으로 취급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이 하나님을 조정하며 다스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의 바탕이 되는 하나님의 언약의 공의를 피하거나 넘어설 수 없다. 한편으로 우리는 원래부터 하나님이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어떤 법이 있어서 그 법에 따라 범죄를 형벌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다른 편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이 임의적이라 범죄를 무시할 수 있는 어떤 언약의 법을 만들 수 있다고 보아서도 안 된다.
한가지 더 고려할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논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공의를 다루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교리 문답을 다룰 때도 하나님의 공의가 따로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따로 있는 것처럼 대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그 둘을 구별할 수는 있지만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의 공의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공의의 사랑이라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공의가 인간의 마음에 다가오는 때는 그 공의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정당한 요구인 사실을 알 때이다. 오직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공의를 이해할 때,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거절함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는 영원한 심판을 선포할 수 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 모든 내용은 믿음으로만 알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는 믿음만이 하나님의 사랑의 공의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공의로 인한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이 우주 상에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우리의 죄성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는 타오르지만 동시에 우리를 당기며 놓치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라고 계시한다. 그러나 그 소멸하는 불은 “우리 하나님”이시다(히 12:29).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의 죄성을 소멸하시지만 우리를 놓치 않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공의를 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영은 황폐함 가운데 고통을 당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게 된다.
우리는 세 가지의 죄악된 질문을 다루었다. 그리스도의 몸된 신자들은 교리 문답을 통해 이 질문들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 신자들은 자신들을 죄성을 지닌 죄인들로 인정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자신을 교훈하고 바르게 하도록 마음을 연다
2) 요구하는 사랑
“하나님께서 사람이 행할 수 없는 것을 그분의 율법으로 요구하시는가?” 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요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요구는 정당한가? 사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요구한다.
이미 하나님의 사랑의 요구는 여러 방면에서 거부되어 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은 오직 주기만 하는 가장 숭고한 속성이 있다고 믿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요구’를 반대한다. 그들은 당장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요 13:1)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그의 사랑 가운데 자기 사람들에게 아무 조건도 두지 않고 모든 것을 주셨다고 이해한다. 사실, 인간의 사랑은 아무런 응답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만일 인간적 사랑이 사랑의 응답을 요구하거나 주장할 수 있다면 이는 하나님이 그러한 권리를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면 우리는 특별한 관계 속에서 사랑의 응답을 요구할 수 있다. 인간의 사랑 자체에는 그러한 요구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없지만 하나님의 뜻 때문에 그러한 요구가 가능하다. 우리는 인간의 사랑을 사랑의 패턴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종종 우리들 중에는 그 기준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판단하여 하나님의 상랑도 아무런 요구를 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은 단지 모든 것을 주는 사랑으로 여기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은 요구하는 권리를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에 의해 하나님의 사랑의 정당한 요구를 다시 분명하게 깨닫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참으로 그분의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그 사랑 안에서 심지어 자신까지 주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주신 만큼 또한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 즉 우리의 전심을 요구하신다. 이 사실은 성경이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보다 먼저 자아-사랑이라는 것을 계시할 때 더욱 분명하여진다. 하나님은 자신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신 때문에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다. 이에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모든 것을 드리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주권은 주고 요구하는 이러한 사랑의 관계를 정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의 언약 안에서 이러한 완전한 사랑의 관계를 세우셨다.
심지어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 자신을 다 주신 후 그 언약을 유지시키기 위해 사랑의 응답을 율법 조항으로 넣으셨다. 그 조항은 아담에게 명령으로 요구되었지만 그는 그 조항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아담과는 다른 상황에서도 그 조항을 완벽하게 이루셨다. 이에 그리스도는 자기 사람들에게 조건없는 사랑을 주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한때 언약을 통해 사람에게 하셨던 요구를 이루셨다. 이렇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 언젠가 인간에게 요구되었던 사랑과 순종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렸다.
따라서 처음부터 우리의 삶은 사랑의 요구에 의해 얽매여 있었다. 지금 우리가 더 이상 그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하여 그 명령의 권리나 요구가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그 권리에 기초하여 서 있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요구는 언제나 타당하다. 만일 우리에게 그 요구에 응답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의 응답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권리의 기준을 하나님의 위치와 작정에 두지 않고 인간의 능력 여하에 달려있게 하려는 것과 같다. 아무튼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는 본성을 주시기로 결정하셨으며 그 결정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조화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 말이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의 본성의 능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는 그 반대이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의 공의와 의에 따라 우리의 본성을 정하셨다. 주관주의는 사람의 본성의 능력에서 하나님의 의와 공의의 기준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거짓이며 자가당착이다. 또한 역사주의는 인류의 역사적 발전에 따라 하나님의 요구 권리도 비례한다고 주장한다. 이것도 거짓이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 것도 없으면 황제라도 권리를 잃는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능력이 따르지 못하는 하나님의 공의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조는 하나님의 절대적 공의를 잃는 것이 된다.
하나님은 그분의 의에 따라 주권적인 결정을 통해 우리 삶에 그분의 사랑의 공의를 세우시고 그 관계를 통해 우리가 지속될 수 있도록 하셨다. 이에 각 사람은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하나님의 명령에 응답할 수 있었다. 지금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 이는 과거 한때 인간이 무분별하고 주의없는 결정을 내린 결과이다. 인간은 스스로 책임을 져야하지만 책임을 감당할 능력이 없는 상태로 떨어져 버렸다. 그의 방자한 불순종으로 인하여 그의 존재는 불합리하고 부조리하게 되었다. 현재 우리의 부조리한 상태는 하나님의 탓으로 돌릴 수 없고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불합리한 상태를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려는 생각을 철저하게 버릴 필요가 있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있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사랑의 합당한 요구를 함부로 바꾸려는 욕구가 사라질 것이다.
교리 문답의 답변은 고의적인 불순종을 행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 어떤 사람은 아담이 그 책임을 지는 것은 맞지만 우리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에 반대할 것이다. 이 부분은 이미 앞 과에서 다루었는데, 이러한 반대는 인류가 산산조각이 나면서 우리가 모두 개인주의자로 태어났음을 보여준다. 우리의 생각은 날 때부터 죄성으로 인하여 그릇된 방향으로 발전한다. 그후 우리는 각각 자신의 삶에 대해 개인주의적인 접근을 취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은 전부 전적으로 부패하였을지라도 나의 생각만은 여전히 순수하고 건강하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모두 처음부터 잘못되어 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사람들과 분리된 상태로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자아로부터 생각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내 스스로 내가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생각은 처음부터 전부 잘못되어 간다. 이에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모든 생각의 패턴과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의 생각의 기능과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그릇된 생각으로 형성된 죄악된 관점과 충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이 올바르게 되려면 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이 우리를 사로잡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다시 하나님과 함께 생각하기 시작하며 인류 공동체의 위치에서 생각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개인주의라는 난관을 벗어나게 되면서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가졌던 이의를 내려놓게 된다. 이처럼 우리의 생각은 믿음을 통해 정화되어 하나님을 향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교리 문답의 답변에 동의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또한 이미 주지한 것처럼, 교리 문답의 답변은 죄성이 제시하는 질문을 육신의 차원에서 반박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교리 문답의 답변은 하나님의 계시로 죄성을 대면하여 그 논리를 무너뜨리고 있다. 그러므로 교리 문답은 아담 또는 우리라고 언급하지 않고 아담 안에서 공동 책임을 진 모든 인류를 포함하여 ‘사람’이라고 언급한다. 우리는 육신의 질문을 대할 때 교리 문답의 답변을 본으로 삼아야 한다. 즉, 죄성에서 나오는 그러한 고의적 질문을 대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를 취해야 한다.
사람의 책임은 “마귀의 꾐에 빠졌다”는 이유로 줄어들지 않는다. 즉, 사람의 책임은 온갖 종류의 외부의 요소들을 겪게 된다고 해서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외부의 모든 영향은 우리를 죄로 유인할 수는 있지만 죄의 원인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다. 우리는 외부의 자극을 받았다고 해도 그 자극을 범죄의 요인으로 삼을 수는 없다. 만일 외부의 자극을 범죄의 요인으로 여긴다면 인간은 그 어떤 책임도 부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죄로 유인하는 유혹과 범죄의 요인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둘을 혼동할 경우 엉뚱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교리 문답은 마귀의 꾐을 말할 때 죄성이 사용하는 의도와 전혀 다른 의도로 언급한다. 즉, 변명을 위해서 마귀의 꾐을 언급하지 않고 도리어 죄에 떨어진 범죄를 강력하게 조명하기 위해 언급한다. 사람은 스스로 선택하여 마귀같은 존재에게 이끌리는 것을 허락한다! 그는 신성한 것보다 마귀적인 것을 선호한다. 사람은 신령한 것보다 마귀적인 것에 마음을 더 빼앗겼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분명하게 우리가 스스로 범죄하였음을 큰 소리로 고발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이다. 교리 문답의 답변은 한 숨에 “마귀의 꾐에 빠져 고의(故意)로 불순종하였다”고 말한다. 이는 사람이 마귀의 꾐에 빠지려고 마음을 활짝 열고 고의적으로 불순종하였음을 보여준다.
교리 문답의 답변은 인간의 죄성을 고려하는 차원에서 육신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있다. 그 답변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법적인 결정에 따른 선포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결정은 하나님 자신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그 결정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이 결정하신 공의 앞에 항복하는 자세로 나아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한 눈에 무의식적으로 비참과 구원을 보는 경향이 있다. 만일 그리스도가 내 대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가 우리를 좇아오는 것과 굴복시키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삶 전체를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의 공의를 거부하며 그 공의의 기준을 변경시키려고 할 것이다. 나아가 하나님의 요구 자체를 아는 것이 싫어서 고개를 돌리거나 그 요구를 귀로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에 동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안다는 것과 동의한다는 것은 함께 있어야 하며 서로 상호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리과 공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권리와 공의에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자신 역시 그 공의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는 그 공의에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속죄를 통한 피할 길이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공의에 동의할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그 공의의 충족을 발견한다. 그후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온 맘으로 인정하게 된다.
3) 주권적인 결정
하나님이 세상과 인류를 자신과 묶으시기 위해 만드신 공의의 관계는 참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조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의도에서 모든 것을 시작하고 전개해 나가야 한다. 하나님이 자신과 피조물 사이에 전혀 다른 관계를 설립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는지를 묻는 것은 의미없는 질문이다. 우리의 속성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관계와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를 넘어서는 관계에 대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여져서 죄를 범하지 않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은 친히 일단 주도하신 관계에 있어서 언약의 상호 권리를 지키신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의 임의적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자신을 포함하여 누구든지 상호 권리를 위반하는 경우 징벌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처럼 형벌의 경고는 언약의 설립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하나님은 일단 설립된 언약을 친히 준수하시며 그 언약을 유지하신다.
형벌에 대한 통보는 하나님이 자신과 피조물 사이에 세우신 관계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즉, 그 관계는 언약적 관계로서 언약은 상호 권리와 의무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그 언약 관계는 동시에 공의의 관계였다. 법적인 관계는 약속 위반 또는 침해를 범죄로 정의한다. 범죄가 발생할 경우 범죄한 측은 형벌을 받아야 할 책임이 생기고 상대 측은 형벌을 시행할 의무가 있게 된다. 형벌은 처벌 조항에 따른 것으로써 이 조항에 의해 그 관계의 권리와 공의가 유지된다. 따라서 공의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언약의 시작과 계시는 위반에 대한 형벌 조항이 반드시 있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이 말을 할 때 결코 절대적인 의미로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이 친히 설립하신 관계의 틀 내에서 생각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존재 자체는 공의의 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서 있기 때문에, 만일 공의가 무너지거나 사라지면 우리의 삶은 불가능하다. 언약의 권리가 포함되지 않은 삶이 있다면 그 삶은 구원이 가능하지 않을 뿐더러 또한 필요하지도 않다. 즉, 공의는 인간 존재의 필수 조건이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에는 공의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 세상이 망해도 공의는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맞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하에 영원히 멸할 지라도 공의는 유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공의가 사라진다면 모든 피조물의 존재 가능성도 사라지게 된다. 다행히도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의 공의가 세워짐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는 유지되게 되었고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분의 뜻 가운데서 말씀하시길 “이 세상이 보존되기 위해 공의가 있을지어다”라고 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언약의 공의는 그분의 사랑의 공의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사랑의 공의 관계 속에서 자신 전체를 사람에게 주시고자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아무런 감정없이 제 삼자의 입장에서 내려지는 것이 아니다. 그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이 거절됨으로 나타나는 의로운 심판이다. 더욱이 사랑은 공의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공의는 사랑없이 존재할 수 없다. 사랑이 없는 공의는 공의가 아니라 임의적 심판이 된다.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 하나님 자신도 관련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가장 깊은 감정으로 심판하신다. 따라서 교리 문답은 하나님이 “우리의 원죄와 자범죄에 대해 심히 진노하시사”라고 고백한다. 이 말은 어쩌면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하나님이 죄에 대해 심히 진노하신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언약의 관계를 통해 사람에게 얼마나 많이 자신을 주셨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자신의 속성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피조물을 사랑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이 피조물을 심판하실 때는 그분 안에 있는 모든 감정이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피조물을 향한 사랑 안에서 드러나며, 피조물과 관련한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속성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은 “벌을 면제하지 아니하고 보응하신다”(출 34:7)라고 증거한다. 하나님의 심판이 가장 무서운 이유가 바로 이 사실에 있다. 즉,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유지하는 것이다. 결국 언약 체결과 관련한 모든 것들은 임의적일 수 없으며, 언약 관계는 오직 자신을 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고 있었다.
우리는 형벌을 적절한 처벌 또는 보응이라고 정의한다. 형벌은 모독을 입은 공의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공의가 위반되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은 의로운 요구를 하게 된다. 이때 형벌은 임의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보응을 통해 그분의 사랑의 공의를 세우며 자신을 유지하신다. 우리가 그러한 보응을 부인한다면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찾지 못할 것이다. 형벌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은 공상, 즉 지어난 이야기일 뿐이다. 그 누구도 무너진 마음과 찢겨진 영으로 하나님의 형벌하시는 공의를 인정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랑에 접근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소멸하시는 불”로 알지 않는한 우리는 그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죄로 물든 본성에 따라 알고 생각하는 자세를 버리고 성경을 통해 올바르게 알고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때에야 우리는 더 이상 이기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 없이 제 멋대로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의 공의의 관점에서 모든 것들을 상고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그분의 사랑의 거절에 대한 보응을 마땅하게 주장하려면 그 형벌은 언약을 세울 때 바탕이 되었던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야 한다. 이 원칙에 따르면 형벌은 어긋난 만큼 주어져야 한다. 따라서 형벌은 무한하게 정도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사랑 역시 형벌에 있어서 임의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 누구도 형벌하시는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불평할 수 없다. 사랑은 심판에 있어서 모든 작은 차이와 모든 상황을 고려한다. 이에 성경은 여러 범행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모세의 율법에는 형벌은 범행에 상당하여 주어져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즉,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 21:24, 레 24:20, 신 19:2)고 말한다. 한편 그리스도는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마 5:38-39)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이 말씀이 하나님의 보응을 부인하는 것일까? 그럴 수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 말씀으로 하나님의 보응을 부인한다면, 이미 우리가 그 오류를 지적한 것처럼, 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공의 또는 권리를 인간의 사랑의 공의 또는 권리 기준에 맞추려는 것이 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사랑에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권리가 없다. 인간의 사랑의 권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리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우리 멋대로 자기 자신에게 권리를 허락한다면 우리는 자기 권리가 무시될 때 보응하게 되면서 도리어 불의를 행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불의에 대해 경고하신 것이다. 율법이 말하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계시의 조항은 인간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유지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조항을 오용하여 자기 개인의 권리를 변호하고 주장하는데 사용하여왔다. 따라서 도리어 하나님의 공의를 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오용에 대해 반박하신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모든 관계 가운데 오직 하나님의 공의만이 이 땅에서 시행되고 유지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렇게 이해할 때, 우리의 이해는 산상 수훈의 주제와 조화와 일치를 이루게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관계에 있어서 나는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가르치신다.
4) 죄의 형벌
보편적으로 말하면 죄의 형벌은 죽음이다. 이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빼앗기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서만 살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존재와 삶을 구별해야 한다. 하나님께 영원히 버림 받은 자들도 계속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성경적인 의미로 말하는 ‘삶’이 없다. 이 ‘삶’이 없을 때 그들의 존재는 내적으로 끝없는 모순을 겪게 된다.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 때 그들의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버림 받은 자들은 그들의 존재 목적을 상실한채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원한 내적 갈등 속에 처하게 된다.
이와 같이 죄는 죽음을 가져왔다. 모든 죄는 본질상 지독한 죄악이다. 어떤 죄라도 그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이 담겨 있다. 우리는 자신의 죄에 의해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된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의 공의에 의해 스스로 자신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공의에 따르면 죄에 대한 처벌은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즉, 죄가 있는 곳에서는 자동적으로 보응이 발생한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면 우리는 스스로 삶을 버리는 것이 된다. 이에 우리는 하나님이 율법으로 언약을 세우셨기 때문에 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따라온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형벌에는 인간의 죄로 인해 자연스럽게 스스로에게 가해하는 면이 있고 또한 하나님 측에서 의도하신 요소, 즉 언약의 공의에 따른 하나님의 진노의 행위가 있다. 따라서 형벌은 한편으로는 자연적인 보응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정당한 보응이다.
이 차이를 영원한 형벌과 연결하여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바깥 어두운 곳이란 하나님께 영원토록 버려진 상태이다. 그런데 죄인은 그 상태를 ‘스스로’ 원한다. 그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한번도 원치 않았으며, 이에 자기 소원대로 영원히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자연적인 보응이다. 한편 성경은 영원한 불을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진노가 영원히 타오르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언약의 공의가 훼방된 것에 대해 그분의 영원한 진노를 나타내신다. 지옥의 고통 역시 하나님의 거절된 사랑의 공의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정당한 보응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죽음을 인간의 몸과 영혼에 발생하는 영원한 죽음으로 이해한다. 그 죽음은 하나님의 저주를 보여준다. 근본적으로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은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 및 그분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과의 교제를 잃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저주를 받게 되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대항하여 돌아선다. 따라서 우리는 고립되며 철저하게 외롭게 된다. 하나님은 시험적 명령을 주시던 때에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라고 저주 및 처벌을 선포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죄로 떨어지자 주께서는 당장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언약의 은혜를 통해 그에게 찾아가셨다. 따라서 그 이후로 즉시 추가적인 구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인간이 타락하자 하나님은 형벌을 보류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하나님은 “네가 먹는 날에는”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심으로써 ‘언제’ 형벌이 집행될지 정확하게 언급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의 끈이 죄로 인하여 파괴되었다.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죽음의 형벌이 시행되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빈말이 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심판을 집행하는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는 이 세상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로 당장 언약의 회복을 주도하셨다. 이는 이미 작정되어 있는대로 그리스도가 죽음을 제거하고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친교의 끈은 곧바로 다시 회복되었다.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된 언약 안에서 온 세상과 인류 전체가 구원을 받았다. 이 말은 모든 각 개인이 구속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을 머리로 한 유기적 연합체인 이 세상이 하나님과 다시 교제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많은 것들이 열매없는 가지처럼 잘려나갈 것이다. 이에 성경은 “죄인들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들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시리로다”(시 104:35)라고 말한다.
이 사실이 불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은혜의 언약의 열매인 많은 축복들을 누리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더욱이 하나님과 회복된 교제의 결과들이 신자들에게 당장 최대한으로 다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이 사실이 뜻하는 것은 인간의 타락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은 구별하는 특징을 가진다는 뜻이다. 즉, 추가적인 구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세상과 인류 전체는 하나님과의 친교로 되돌아왔다. 따라서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영생을 얻는다. 그들에게는 영원한 죽음이 제거되었다. 이 사실은 “내가 너(뱀, 사단)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창 3:15)는 말씀에서 표현되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셔서 자기에게 영원토록 있게 하시려는 인류와 사탄의 관계를 끊어놓으셨다. 아담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이 더하여 말씀하신 모든 것들은 보응의 의미로서의 형벌이 아니라 은혜의 언약 내에서의 징계였다. 그 징계는 사람이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는 주님의 말씀이었다. 즉, 육체의 임시적인 죽음은 하나님의 징계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사람은 육체의 죽음이라는 격변을 통과하지 않고는 영원한 영적인 삶으로 변화할 수 없다. 이는 위협적인 자연적 죽음은 하나님의 보응하시는 심판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죽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 사실은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여인의 삶과 남자의 삶에 대해 각각 심판을 선포하실 때 나타난다. 그 심판 안에는 은혜가 있었다. 그 심판을 통해 사람은 더욱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을 염두하게 될 때 영원한 죽음과 일시적 죽음이 구별되어져야 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온 세상에 은혜가 임한 결과로 인하여 불택자들은 당장에 궁극적인 심판을 받지 않는다. 온 세상을 위한 그리스도의 은혜는 오늘날도 존재하기 때문에 불택자들은 여전히 은혜의 날들 가운데 살고 있다. 하지만 불택자들에게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는 연결된 끈이 없다. 그러나 영원한 죽음의 결과들이 당장 그들 안에서 최대한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영원한 죽음에 이르렀다고 말하지 않고 영적으로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 각 개인에게 심판을 선언하실 것이다. 우리는 아직 거듭나지 않는 택자들에 대해서도 그들은 아직 영적으로 죽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차이를 분명하게 하면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은 하나님의 언약의 공의에 따른 영원한 죽음인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붙택자들의 영원한 죽음을 통해 그들에게 거절된 하나님의 사랑의 합당한 요구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와 은혜, 심판과 자비가 상호적으로 역사하고 있다. 따라서 같은 사건들의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영향을 나타낸다.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징계로, 불택자에게는 영원한 죽음을 알리는 일시적인 심판으로 나타난다.
이 사실은 또한 이 세상에 발생하는 온갖 종류의 재난에 적용된다. 주 여호와 하나님은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 안에도 하나님의 심판이 분명히 담겨 있다. 하지만 이 심판의 완전하고 궁극적인 심판 또한 그 당시 당장 간섭하였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와 부딪히게 된다. 지금도 모든 피조물들은 성령을 통해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기를”(롬 8:21) 부르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계속 나타나고 있다(참, 롬 1:18).
5) 영원한 형벌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
영원한 형벌에 대한 많은 반대 관점들이 있다. 사람들은 인간의 관점에서 삶을 보기 때문에 지식과 깨달음에 있어서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계시된 끔찍한 실재들이 그들의 의식(consciousness)에 와닿지 않는다. 더욱이 인간의 마음은 종종 생각하기를 싫어한다. 특히 날마다 계속 성경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다. 사실 성경에는 우리가 소화해낼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있다. 우리는 영원한 형벌 안에서 조롱받고 거절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접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다 헤아릴 수 없듯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도 다 깨달을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주제들처럼 이 주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에 순복해야 한다.
역사 가운데 기본적으로 세가지 개념이 나타나 영원한 형벌을 대치하여 왔다. “가정적만인 구원설”(Hypothetical universalism)은 죽음 후에 회심의 기회가 있을 것을 주장한다.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고 구원 얻을 가능성이 죽음 이후에도 남아 있다고 본다. “절대적 만인 구원설”(Absolute universalism)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마귀까지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결국 다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소위 “조건적 불멸설”은 죽음 및 마지막 심판 이후에는 불신자들은 소멸되어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지만 신자들만은 계속 살아남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 세가지 이론은 인간들의 난제를 피하려는 시도이며 작은 머리로 하나님의 계시의 권위적 능력에 도전하려는 어리석음이다. 이는 인간의 치우친 관점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영역을 다루고자 하는 교만이기도 하다.
성경이 말하는 영원한 형벌에 대해 가장 중요한 관건은 구약과 신약에 나타나는 ‘영원’이라는 단어이다. 물론 구약과 신약은 각각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영원’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영원’이라는 단어가 종종 우리가 정의하는 ‘영원’이라는 의미와 분명하게 다른 예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편 24장 9절은 “영원한 문들아”라고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 뜻은 예루살렘 성의 오랜 성문을 뜻한다. 하지만 우리의 자비하신 대제사장인 그리스도가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 25:46)고 하신 말씀에서 영벌과 영생은 일반적 개념의 ‘영원’이 확실하다. 또한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8)는 말씀과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9)는 말씀은 그 문맥과 함께 시간적으로 ‘영원’한 형벌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다른 의미로 ‘영원’을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가정적 만인구원설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히 9:27)는 성경의 계시를 부정한다. 절대적 만인 구원설은 마지막 심판 때에 그리스도의 오른 편에 있는 자들과 왼편에 있는 자들 사이에 구분이 있을 것이라는 계시를 무시한다. 별로 놀랄 일은 아니지만 이단 계통에 널리 깔려 있는 소위 “조건적 불멸설”은 불신자들이 이 땅에 살면서 그들 마음에 일어나는 갈등을 풀어주려는 인간적 설명이다. 하지만 불신자들의 존재 상태는 하나님과의 삶이 아니기 때문에 이미 ‘사는 것’이라고 부를 수 없다. 이 땅에서의 그들의 내면적 갈등은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린 신자들에게는 승리의 심판을, 그 사랑을 거부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버림의 심판을 이미 의식하고 있는 증거이다.
영원한 형벌에 대한 문제를 다룰 때 인간적인 감상이 하나님의 계시를 대적하도록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어떻게 측량할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의 진노가 얼마나 강렬한지 어찌 알겠는가? 어떤 사람은 인간은 하나님의 ‘상대’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무서운 형벌을 내릴리 없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은 너무 보잘 것없고 작아서 하나님이 그렇게 엄중한 무거운 형벌을 내린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언약 안에서 사람을 얼마나 높이셨는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사람을 친구로 대하셨으며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에 참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주셨다. 만일 누군가가 영원한 형벌을 비난하기를 원한다면 그는 먼저 언약 관계를 이해하고 그 관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알아야 한다.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입장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리고 우리의 죄악이 그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거절하였는지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리에 있지 않고 또한 자질과 능력이 부족하다. 영원한 형벌에 대한 주제는 우리의 이해를 넘어선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계시에 복종하여 배워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영원한 형벌에 대한 계시가 우리로 하여금 회심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정당한 요구에 따르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의 사랑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영원한 형벌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알 수가 없다. 이 문제에 있어서 성경을 무시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계시를 무능하게 만들게 된다.
6) 살아계신 하나님 (하나님은 추상이 아님)
하나님은 언약 관계를 통해 우리를 자신에게 묶으셨다. 하나님께 있어서 언약 관계 외에 다른 관계가 가능하였을지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오직 그 관계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인간은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이는 우리가 그 관계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 관계를 떠난 우리의 존재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친히 우리에게 주신 모든 계시는 우리와의 언약적 관계를 전제하고 있다.
우리는 그 관계로 인해 하나님을 참으로 알 수 있다. 관계 그 자체를 알 뿐만 아니라 그 관계를 통해 하나님을 안다. 즉, 언약의 관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상호 연관되며 인격적 교제를 나눈다. 더욱이 언약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임의적이지 않게 된다. 즉,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 자신을 다 주셨으며, 이에 하나님의 관심과 마음이 그곳에 다 있다. 따라서 언약을 통한 하나님의 뜻이 없이는 아무렇게나 일들이 진행될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이 그 언약을 통해 사람을 머리로 하는 피조물과 얼마나 연관되어 있는지를 말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분노하시고 자비를 나타내시며 오래 참으시고 슬퍼하시고 긍휼과 복을 베푸신다. 따라서 우리는 관계를 통해 하나님을 참으로 안다. 그 언약적 관계는 하나님 자신의 속성과 완전하게 일치하며 또한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교리 문답은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에 대한 답변을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비와 공의 가운데 우리에게 자신을 주신다. 이는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은 결코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데 이는 보통 추상적으로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떼어내어 생각할 수는 없다. 하나님 자신이 바로 그분의 속성이며 성품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비와 공의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은 참으로 자비로운 분이시며 공의로운 분이시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그분의 속성 또는 특성을 통해 겪으며 이는 우리가 친히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의 모든 속성들은 우리와의 언약적 관계를 통해 계시적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구속은 이러한 차원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함한다. 따라서 구속을 얻은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헛된 추상적 개념들을 다 버리고 하나님 그분을 친히 대하게 된다. 즉,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이에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계시를 그분과 상관없는 계시로 보는 것이 불가능하여진다. 만일 하나님의 자비를 하나님과 떼어내어 추상적으로 알면 그것은 치우친 개념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추상적 개념의 하나님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비를 대하게 되면 우리는 동시에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만난다. 즉,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비를 다루게 되면 동시에 의로우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다룰 때 하나님의 공의가 우리를 아무리 두렵게 할지라도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상대하기를 원해야 한다.
우리의 죄성은 하나님을 만나기를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추상적인 개념으로 만들고자 한다. 우리는 종종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가 될까 두려워하곤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 ‘말씀’을 이론이나 추상적 개념으로 만들기를 좋아한다. 이러한 성향은 모든 인류에게 있다. 우리는 이러한 성향을 심각하게 경계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성경은 하나님을 영원한 ‘말씀’으로 지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의 성품과 속성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이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 앞에 서 있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할 수가 없다. 만일 우리가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알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러면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
추상적인 개념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알고 그 개념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거부하고 없앤다. 심지어 하나님의 내면에는 자비와 공의 사이에 갈등이 있으며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공의를 이겼다고 믿는 자들도 있다. 죄성은 이처럼 감히 하나님을 대항하면서 하나님이 스스로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마 12:25)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러한 주장에 일침을 가하신다. 하나님의 하나됨은 그분의 자비와 공의 사이에 끝없는 조화를 가져온다.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고 그분의 자비에 호소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모독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추상적인 개념으로 알 때 사람들은 쉽게 두 신(two gods)을 믿게 된다. 실제로 교회 역사 가운데 공의의 신과 사랑의 신, 두 신을 믿는 적도 있었다. 사랑의 신은 공의에 기초하여 서 있는 이 세상에게 숨겨져 있다. 만일 사랑의 신이 나타나면 공의의 신은 무력하여질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교회 내에서는 아무도 두 신을 믿는 이러한 이단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신 사실을 받아들이고 믿는데 끊임없는 어려움을 겪는다. 분명히 우리에게도 여전히 이 둘 사이에 어떤 긴장을 느낀다. 기독교 교회 중에는 아직 이러한 긴장을 해결하지 못한 교회들이 많다. 교리 문답은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의 공의를 드러내는 것을 강조한다. 교리 문답은 율법의 명령도 감사 표현을 위한 안내의 법으로 다룬다. 이는 율법의 명령은 우리에게 공의를 나타내며 동시에 그분의 사랑의 규례인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계시만이 이러한 긴장의 해답이다. 그 계시 안에서 믿음은 공의와 사랑의 연합을 본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한 화목 안에서 그분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나타내신다. 여호와의 종(The Servant of the Lord)이 오시면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 것이다”(사 42:1). 여호와의 종이신 그리스도는 특별히 그 일을 십자가에서 이루시고 그분의 대속적 고난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공의를 채우셨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우리에게 가져오셨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교리 문답에 따라 “하나님은 참으로 자비하신 분이지만 또한 의로우신 분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엄위를 거슬러 짓는 죄를 가장 엄중한 형벌, 즉 몸과 영혼에 영원한 형벌을 내릴 것을 요구한다”고 고백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내용을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믿음을 말하지 않은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공의를 설득하려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고 그분의 사랑의 위대함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오직 십자가에서만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이 발견된다. 그곳에서 믿음은 하나님의 공의의 판결에 동의하는 것을 배운다. 그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대항하는 죄는 몸과 영혼에 영원한 형벌을 선고 받았다. 이 뜻은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존재 전체를 대항하여 끝이 없이 지속된다는 뜻이다. 믿음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위엄에 대항하는 죄값은 온전히 치러질 수 없으며 자신의 고통을 통해서라도 값을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십자가를 바라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은 자기 자신의 공의로 하나님의 사랑의 공의를 이루어보려고 한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모독을 당할 때 앙갚음을 할 권리가 없다. 성경은 우리에게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고 권한다. 죄성은 이 구절을 읽고는 하나님에게 적용하여 하나님도 보응할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 자신의 뜻에 따라 행하신다고 말한다. 우리의 존재의 기원은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에 내가 나의 원수를 갚은 것은 죄악된 이기심일 뿐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을 위해 행하여야 한다. 오직 자신 안에 영원한 기원과 원인을 가지신 하나님만이 이 세상 모든 사건을 공의와 사랑 가운데 유지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온전하게 처리하실 자격이 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가 스스로 보응하는 것을 금한다. 오직 하나님의 권리만이 보응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권리를 생각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은 친히 보응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이 멸시된 것에 대해서 오직 하나님만이 보응할 자격이 있으시다. 우리는 믿음에 의해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과 공의 가운데 모든 것을 처리하시고 유지하심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마음에 둘 때, 그 즉시 그 사랑의 권리가 유지되어야만 이 세상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공의의 사랑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심판을 인정할 때 그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그 사랑은 그 사랑을 거절하는 모든 자들을 처벌하지 않고는, 분노하지 않고는, 영광을 받지 않으실 것이다.
6. 하나님의 공의를 채우시는 중보자이신 구원자
제 12 문: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따라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원히 형벌을 받아 마땅한데, 어떻게 우리는 이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호의를 입을 수 있는가?
답: 하나님은 그분의 공의가 이루어기를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든 아니면 다른 이에 의해서든 죄값을 완전히 치러야 한다.
제 13 문: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공의를 채울 수 있는가?
답: 결코 그럴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죄책을 증가시킨다.
제 14 문: 어떠한 피조물이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가?
답: 없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은 인간이 저지른 죄를 위해 다른 피조물을 형벌하지 않으실 것이다. 더욱이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짐을 감당할 수 없고, 다른 피조물을 그 진노에서 구원할 수도 없다.
제 15 문: 우리는 어떠한 중보자와 구원자를 찾아야 하는가?
답: 참 인간이며 의로운 사람이어야 하고 동시에 참 하나님이어야 한다. 이는 모든 피조물보다 능력이 뛰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1) 구속의 의도
구속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 세상의 창조와 관련되어 있듯이 구속과도 관련되어 있었다. 즉, 구속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안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이 어떤 강압을 받고 창조를 하신 것이 아닌 것처럼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세상을 다시 구속하신 것도 어떤 강요를 받아서 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인류를 멸망 가운데 버리실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자유로운 주권적 의지 가운데 다시 사랑으로 세상과 인류를 바라보셨다.
하지만 세상의 창조와 구속은 하나님의 하나의 계획 속에 있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수고가 그분의 심판을 통해 철저하게 다 멸망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으셨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 즉 피조물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을 받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달성되어야 했다. 따라서 이 세상의 구속은 하나님의 작정 안에 든든한 닻을 내리고 있다. 즉,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이 세상의 구속을 계획하시고 정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구속을 작정하신 것은 피조물에 의해 어떤 강압을 받으셨기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물 사이에 있던 사랑의 끈은 죄에 의해 완전하게 끊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과 피조물은 서로 철저하게 멀어져 있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기쁘신 주권 안에서 그분의 사랑 가운데 피조물을 찾기 시작하셨다. 태초에 하나님은 그분의 영원한 ‘말씀’에 의해 그분이 바라는 모든 것은 사람을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다시 그 영원한 ‘말씀’ 안에서 피조물에게 똑같이 분이 되고자 하셨다. 피조물이 죄로 타락하였어도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바라시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요한복음 1장은 타락 이전과 이후에 상관없이 영원한 ‘말씀’은 생명이었으며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요 1:4)이었다고 증거한다.
구속은 파기된 언약이 하나님에 의해 회복되었음을 의미하였다. 또한 구속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쁘신 주권 가운데 행하신 하나님의 행위였다. 과거 한때에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언약을 주도하셨던 것 같이, 또한 인간이 파기한 언약을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회복시키셨다. 그러므로 타락 이후의 은혜의 언약은 타락 이전의 호의의 언약의 회복을 의미한다. 이제 하나님은 은혜의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 즉 피조물이 잃었던 호의를 베푸신다.
아담은 하나님의 호의 언약의 머리였지만 자격을 잃었다. 그는 다시 인류의 머리가 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그로 인하여 타락한 인류가 그 깊은 수렁에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하나님은 인류가 다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성육신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인류의 머리로 주셨다. 맨처음에도 사람의 복됨은 영원한 ‘말씀’ 안에 있었고 또한 아담은 ‘말씀’ 안에서 하나님과 친교하였다. 하지만 은혜의 언약 안에서는 사람의 구원은 오직 둘째 아담으로서 인류의 머리로 행하셨던 영원한 ‘말씀’ 안에 놓이게 된다. 인류의 구원은 그 머리를 통해서만 철저하게 보장된다. 그 머리는 구원을 통해 사람이 다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하셨다.
그 머리 아래에서 인류는 연합을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먼저 인류는 하나님의 의해 그 머리에 언약적으로 포함되어야 했고, 그 언약에 포함된 모든 지체들은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통해 그 머리와 연합하여 사는 법을 배워야 했다. 인류의 회복은 구별적으로 발생하였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 언약의 머리와 교제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이 다시 그분의 주권적 사랑 안에서 인류를 향하셨을 때는 그리스도와의 언약을 통해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택한 자들만을 구별하여 사랑하셨다.
구속의 의도는 기본적으로 창세기 3장 15절의 모태 언약에서만 계시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님은 훨씬 많은 것을 계시하셨다. 하나님의 백성은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더욱 많이 받으며 성장하였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 모든 계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는 구속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기 위해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생각하려는 노력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이는 믿음이 초등 원리에 머물러 있으면 더 이상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믿음은 응고된 것처럼 정체되어 있을 수 없다. 믿음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위대함을 보고자 노력한다. 물론 이 의미가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를 계속 새롭게 찾기를 갈구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사랑의 증거들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향해 쉬지 않고 나아간다. 누구든지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들만을 찾으려 할 때 그의 믿음은 결국 새롭고 신선한 특성을 잃게 될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의 두개의 끝을 알기를 원한다. 사랑의 기원이신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며 그 사랑이 임했던 우리의 삶이다. 특히 그 사랑이 어떻게 우리의 삶에 시작되는지를 알기를 원한다. 어거스틴의 말은 이 의도를 갖고 말한 것이 확실하다.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 그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온전하게 깨닫기를 원하였으며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는 길을 알기를 원했다.
따라서 교리 문답은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사랑의 역사를 깊게 생각한다. 이는 믿음에 의해 묵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 중에는 간혹 교리 문답이 스콜라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스콜라주의는 인간의 논리에 하나님을 끼워맞추는 사상이다. 따라서 스콜라주의는 주의 ‘말씀’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믿지 않는다. 그들에게 믿음은 사람이 이해할 수 없을 경우만 사용되는 임시적 수단이다. 그러나 일단 구원이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임하여야 한다고 논리적으로 설명되면 스콜라주의는 그 방법을 받아들인 후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처럼 스콜라주의는 믿음 대신에 이성과 증거를 사용한다.
교리문답의 질문 중에 “우리는 어떠한 중보자와 구원자를 찾아야 하는가?”, “중보자는 왜 참 인간이고 의로운 분이어야 하는가?”, “중보자는 왜 동시에 참 하나님이어야 하는가?”(15-17문)과 같은 질문들은 믿음보다는 스콜라주의 방법으로 어떤 증거를 찾으려는듯한 인상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신앙 고백은 사실은 어거스틴의 마음 자세를 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더 많이 알기를 추구하는 믿음을 취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리 문답이 결코 믿음을 놓친 것이 아니다. 오직 믿음 만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주의 계시를 이해할 수 있으며 끊임없이 그 계시를 연구함으로 믿음을 채운다.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를 자연적인 이성적 증거로 보충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절한다. 그 이유는 순서가 뒤집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로 우리의 자연적인 생각을 우리의 생각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의 자연적인 생각이 기준이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를 가능한 최대로 내 생각에 맞추려고 할 것이다. 이는 거꾸로 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영이 주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생각을 주관하셔야 한다. 이때야 우리는 ‘말씀’의 조명하심과 함께 자연을 이해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교리 문답의 정신을 이해한다면 우리의 자세는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에 충성스럽게 복종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한 자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역사를 이해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교리 문답이 “우리는 어떠한 중보자와 구원자를 찾아야 하는가?”라고 물을 때, 이는 우리 자신 안에서 그 대답을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주 여호와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 조명을 받아 그 대답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중보자는 ‘말씀’과 믿음에 의해 우리에게 계시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 믿음을 통해 ‘말씀’ 안에서 끊임없이 더욱 많이 중보자를 찾아야 한다. 이러한 탐구는 단순한 지적 만족을 위한 안일한 수고가 아니라 우리의 전심을 다하는 탐구를 의미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더욱 온전하게 깨닫고자 할 때, 이는 우리의 개념을 분명하게 할뿐만 아니라(물론 믿음적인 개념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 그분과 더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를 묵상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를 믿음 안에서 묵상할 때 우리의 전심과 삶 전체가 관련된다.
2) 하나님의 사랑의 공의를 만족시킴
우리가 “이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호의를 입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여기서 ‘호의’란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에서 누리던 호의를 의미한다. ‘호의’는 잃었던 호의로 돌아가게 되는 ‘은혜’와는 다른 개념이다. 우리가 죄로 인해 망쳐 놓은 하나님의 호의를 어떻게 다시 받을 수 있을까?
우리는 이 호의가 원래 하나님의 호의의 언약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관건은 그 호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의도가 우선될 때, 성령의 역사의 열매는 언제나 믿음의 원칙을 통해 나타난다. 그때 우리는 믿음을 통해 우리가 잃었던, 그래서 다시 찾기를 원했던 하나님의 호의의 영광을 보게 된다.
이때 자기 보호의 욕구가 완전하게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호의를 입을 수 있는가?” 이 문장을 단숨에 읽으면 자기 보호를 위한 표현만으로 보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죄성은 하나님의 호의의 영광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 호의로 돌아갈 바람이 없다. 자기 보호에 대한 자연적 충동은 하나님의 호의를 바라게 하는 것과는 다른 결과를 낳는다. 오히려 아담이 타락 후에 행한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도록 한다.
하지만 자기 보호를 위한 욕구가 주 하나님을 찾을 때 관련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자기 보호의 욕구를 수단으로 사용할 수는 있다. “당신의 생명이 위험하다”과 강조하는 것은 복음 전파에 어떤 유익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호의로 돌아오는 요인으로 가기 보호를 보게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의 열매이다. 하나님의 호의를 입기 위해 자신의 생명 구원을 바라는 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 가능하다.
구원을 추구하도록 하기 위해 자기 보호를 강조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그러한 방법을 너무 자주 사용하면 도리어 역효과를 가져온다. 즉, 사람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숨기를 원하게 된다. 우리의 생명의 안전이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을 받아들이는데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는 많은 일들이 발생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호의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 호의를 잃은 우리의 불충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이 형벌을 피하고”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다룰 필요가 있다. 즉, 그 부분을 “다시 하나님의 호의를 입을 수 있을까”라는 부분과 떼어내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가 형벌을 피하는 것에만 초점을 둔다면 사람들은 그 형벌이 하나님의 사랑의 정당한 요구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따라서 그 형벌은 하나님의 사랑에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며 나아가 의롭고 공의로운 형벌임을 고려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누구든지 참으로 구원을 원한다면, 즉 참으로 하나님을 다시 찾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의 요구가 만족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형벌을 피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가 화목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형벌을 피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아가 그 심판이 법적으로 공의로운 요구인 것을 인정해야 한다.
“어떻게 우라는 이 형벌을 피하고”라는 말은 그 앞에 주어진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따라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원히 형벌을 받아 마땅한데”라는 말과 상충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또다른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결코 그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세례 요한은 은혜의 왕국이 임하는 심판의 날에 형벌에서 피하려는 무모한 시도에 대해 이미 경고하였다.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는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마 3:7)고 말하였다. 그의 세례는 형벌을 피하는 수단으로 의도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형벌만 피하려는 그러한 의도가 우리의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점이 냉정하고 교만하게 들리는 답변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은 그분의 공의가 충족되기를 요구하신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답변은 믿음이 기대하고 바라는 대답이기 때문에 냉정하거나 교만한 대답이 아니다. 우리는 믿음에 의해 하나님의 호의와 사랑에 돌아간다. 하나님의 사랑이 귀하게 여김을 받고 다시 우리에게 베풀 수 있도록 화목하게 될 때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일이 가능하다. 그러나 속죄없이 그 사랑에 돌아갈 것을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함부로 장난을 치는 것이다. 속죄가 없이는 결코 하나님과의 화목이 가능하지 않다. 이는 냉혹한 사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의 그 방대함과 모든 것을 포함하는 특성을 안다면 결코 속죄없이는 하나님과 화목한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물이 하나님의 사랑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은 그분의 공의가 충족되기를 요구하신다”는 말을 두려움 뿐만 아니라 기쁨으로 고백하게 된다. 우리는 일단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함이 없이는 하나님의 사랑에 결코 접근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공의의 충족을 요구한다. 이 점을 분명하게 할 때, 하나님의 공의를 바리새적으로 충족시키려는 방법을 거절하게 된다. 많은 세상 종교인들처럼 바리새인들은 특별한 행동와 활동으로 하나님의 호의를 사려고 노력하였다. 죄악된 육신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마치 사고 파는 상품처럼 이해한다. 육신은 하나님의 언약의 귀중함을 모르며, 하나님이 그 안에서 먼저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는 그 안에서 그분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림으로 응답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가인은 언약을 통해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내어드리지 않았다. 그는 제사로 하나님의 호의를 사려고 시도하였다. 한편 아벨은 하나님이 그에게 배푸신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써 주 하나님께 자복하는 표시로서 제사를 드렸다.
겉으로 보이는 행동과 관습으로 하나님의 호의를 사려는 자들은 아직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의 공의를 모르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내어주되 완전하게 주는 것이다. 바리새주의는 사랑이 없이 공의를 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바리새주의를 거절하던 어떤 사람들은 공의가 없는 사랑을 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 안에 공의 및 의로운 요구를 담고 있으며 우리는 그 사랑에 상호적인 응답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린다. 이때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회복되는 것은 결코 어떤 몇몇의 행위로 되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의 심판에 철저하게 항복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를 태워야 하는데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셨던 것이다. 아무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화목되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드리며 항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든 아니면 다른 이에 의해서든 죄값을 완전히 치러야 한다”는 표현에서 “치러야 한다”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이 표현은 자칫 어떤 인간적 성취에 의해 그 문제가 해결된다는 생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실수는 우리의 전심과 삶을 다 드리는 것이 하나님과의 화목에 필수 조건이라는 생각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성경과 교리 문답이 의도한 것과는 정반대이다. 우리가 ‘치러야 한다’는 말을 사용한 것은 어떤 영원한 사건을 가르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고 파는 그림의 ‘치른다’라는 개념으로 그 영원한 사건을 다루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사고 파는 그러한 개념에 속하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러한 개념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의미한다면 이는 참으로 섬찟하며 또한 우리의 모든 삶이 끔찍하여질 것이다.
‘치러야 한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호의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에 의해 하나님의 모독받은 사랑의 권리가 회복될 뿐 아니라 우리 또한 사랑의 심판에 우리 자신을 내어주게 될 것이다. 그 후 우리는 다시 하나님 앞에 서서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우리의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요구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단지 형벌을 피하려는 마음을 갖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호의에 돌아가기를 원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타오르게 하는데 있다.
3)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대속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염두해 두지 않으면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든 아니면 다른 이에 의해서든 죄값을 완전히 치러야 한다”는 고백이 틀린 것처럼 들린다. 어떤 사람의 범죄가 다른 사람에게 전가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또한 다른 사람이 범죄자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성경은 또한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 18:4)라고 확증한다. 재무와 관련한 빚은 다른 사람이 책임을 지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도덕적 빚은 다른 사람이 지는 것이 불가능하다. 더욱이 이와 관련한 비유들은 도리어 실제대로 보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우리의 범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될 수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의와 그분의 자기 생명을 맘대로 처리할 수 있는 권리를 답변으로 하는 것은 전혀 부적절하다. 어떤 견해는 그리스도와 일반 모든 사람들의 차이를 말하면서 모든 사람들은 범죄하였기에 다른 사람을 위해 심판을 대신 받을 자격이 되지 않지만 그리스도는 의롭기 때문에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또 다른 견해는 그리스도는 자발적으로 인간의 삶을 택하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지만, 일반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 삶을 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버리거나 또는 다른 사람을 위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들로는 어떤 사람의 범죄가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전가될 수 있다는 사실 및 다른 사람이 어떤 죄수 대신에 형벌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보증적인 특성을 지닌다는 사실에서 그분의 대속을 다루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의 배경을 망각하면 그리스도의 대속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된다. 대속이란 어떤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임의적으로 대신하는 그러한 개념이 아니다. 그러한 개념은 성경의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겔 18:20)는 규례와 어긋난다. 그리스도의 대속은 모든 백성을 대표하는 머리로서의 역할로 이해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공식적인 지위에서 국가의 머리와 대표자로서 행동하는 것은 그 나라를 대표한다. 어떤 도시의 시장은 그의 공식적인 지위에서 그 도시의 시민 모두를 대신하여 말하고 행동한다. 어떤 공동체의 머리는 그 공동체의 빚을 대신 갚을 수 있다. 그리스도는 임의적인 어떤 개인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머리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행하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대속은 가능하며 실행이 가능하다. 이 가능성은 언약의 율법 안에 마련되어 있다.
주 하나님의 언약을 잊을 때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한 고백, 즉 우리의 빚을 그분이 담당하고 속죄하셨다는 사실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 대해 성경적인 여러 내용들을 고려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고난과 죽음을 통해 우리가 있던 음부까지 내려가셔서 우리의 손을 붙들고 다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셨다. 이러한 생각은 철저하게 맞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고난을 우리의 머리로서 당하신 고난으로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신비한 연합을 강조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은 우리의 머리이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라로 말하면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죽었고 주님과 함께 일어났다고 고백한다. 교리 문답은 다른 곳에서 그러한 고백을 여러 차례 말한다. 우리는 성경의 진술과 함께 그리스도는 사탄을 정복하였으며 또한 사망을 이기셨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는 그분의 삶과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삶의 본이 되셨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 모든 고려 사항들이 모두 성경적이다. 그러나 대속의 고백, 즉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담보 또는 보증의 차원에서 우리의 대속이 된다는 고백이 그 중심에 서 있지 않으면 이 모든 내용들은 결국 흔들리게 된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는 머리가 모든 백성을 대신하여 행동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을 놓치면 머리되었던 아담의 범죄가 어떻게 모든 인류의 범죄로 간주되는지, 또한 모든 사람의 죄짐이 어떻게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것으로 간주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여진다.
하나님은 그분의 언약 안에서 각 개인을 먼저 다루지 않으시고 공동체의 머리 안에서 백성 전체를 하나로 다루신다. 그 다음 각 사람은 그 공동체의 지체로서 다루어진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우리가 자신의 죄값을 지불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할 수 있다. 만약에 각 사람이 자신의 죄값을 충족시킨다고 하자. 그럼에도 인류 공동체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타락하여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결국 그 충족은 각 개인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 즉, 인류가 나뉜 것 자체가 타락의 분명한 결과이기 때문에 각 사람은 스스로 꾸려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 10:28)는 요구 앞에 놓인다. 하지만 각 사람이 자신의 죄값을 치른다고 해도 흠없는 공동체를 세우는 것은 여전히 남은 문제가 된다. 그리고 실제로는 각 개인이 자신의 죄값을 치르는 길도 죽음에 의해 차단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 측에서 다른 길을 택하셨다. 즉, 회복된 언약 안에서 머리를 택하셔서 그 머리로 하여금 우리의 빚의 보증이 되게 하셨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대속을 이렇게 이해할 때,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이방 종교의 영역에 나타난 비슷한 것들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이방 종교 안에도 종종 희생 동물이 신의 호의를 사기 위한 노력일 뿐만 아니라 대속적인 의미를 띌 때도 있다. 이 얼마나 부패한 사고인가! 따로 드려지는 하나의 희생 제물이 각 개인을 위해 죄값을 치른다. 이는 그리스도의 대속과 그 어떤 면에서도 전혀 비교될 수 없다. 물론 이스라엘 내에도 각 개인을 위한 희생 제물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제사들이 의미한 바는 속죄일에 백성을 위해 드리는 하나의 제사와 연합되고 연결된다. 이 모든 제사들이라도 죄값을 치르는데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그 제사들은 그 백성의 머리가 그의 죽음을 통해 가져올 참된 희생을 소망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한 희생 제물 안에는 대속의 개념이 담겨 있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그림자였다. 이는 제사를 드릴 때 그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그의 손을 동물의 머리에 안수함으로 상징되었다(레 16:21).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더 많은 계시로 인도하였다. 특히 이사야에게 계시된 여호와의 종에 대한 계시는 그분의 대속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
따라서 우리는 이미 구약 성경에서부터 참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을 대하게 되며 또한 그 대속이 우리의 죄값을 충족시키는 것을 보게 된다. 대속적으로 죄값을 충족시키는 속량은 성경의 특별한 구절로 이곳 저곳에 기록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 구절에서 대속을 끄집어내는 것은 어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성경은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사역의 보증 또는 담보의 특징을 맨 앞에 둔다. 특히 언약과 관련하여 그러하다. 오직 언약의 문맥 하에서만 그러한 대속이 가능한 것이다. 구약은 이사야 53장에서 뿐만 아니라 이미 제사 제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통해 대속을 제시하고 있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대속의 개념은 더욱 분명하여진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인자가 그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었다는 의미는 많은 사람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자기 생명을 주셨다는 뜻이다. 나아가 바울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고 말씀하였다. 이 구절은 우리의 죄악이 그리스도께 놓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이 우리로 인하여 죄가 되셨다고 가장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속량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성경의 몇 구절 정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계속적인 가르침을 저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왜 기독교 교회가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해 흔들리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즉, 교회가 더 이상 언약을 이해하지 못할 때 그리고 성경을 언약의 ‘말씀’으로 받지 않을 때 그리스도의 대속을 놓치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에 의해 우리의 언약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값을 치르신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죄책과 책임을 그분에게 넘기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너무나 비성경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말하길, “내가 죄를 지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나의 죄값을 치르셨으니 이제 나는 자유하다”라고 한다. 그러나 믿음은 결코 수학적인 계산이 아니다. 교리 문답의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든 아니면 다른 이에 의해서든 죄값을 완전히 치러야 한다”는 답변은 수학적인 계산의 문맥에서 답하는 것이 아니다. 이 답변은 다른 사람이 나의 죄값을 지불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통해 나의 죄값을 지불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각 지체와 언약의 머리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을 통해 우리의 죄값을 치렀던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십자가 상에서 팔을 펼치고 있을 때 그분 안에 있었다. 즉, 우리는 그 저주의 고통을 당하시는 주님과 함께 연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자세를 결정한다. 대속이란 우리의 책임이 그리스도에게 넘어가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책임을 지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책임을 지는 일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지체의 관계가 맺어진 후에야 가능하다. 우리가 이 사실을 묵상할 때, 우리는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그 모든 고통을 당하셔야 하셨던 사실 때문에 매일 자신을 심판하게 된다.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통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겪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와 직접적으로 관계된다. 주님은 참으로 우리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셨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분에게 속하여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안에 거한다. 이에 우리의 책임은 가장 심각하게 항상 우리 앞에 놓여있다. 그 책임은 우리의 머리의 심판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책임은 항상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다음 노래로 고백한다.
나의 주여, 당신의 고난은 모든 죄인들을 위한 유익입니다.
나는 죄악을 범하였고, 당신은 지독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하나님과 함께 영구적으로 심판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리스도를 통해 살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가장 큰 책임을 알게 한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져야 할 모든 책임이 얼마나 큰 것인지 다 알지 못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책임을 받아들이기를 계속적으로 두려워하는 가운데 참된 지식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4) 스스로 구원을 도울 수 없음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과 체결하신 언약에 있어서 다른 방법으로 회복의 길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언약을 회복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지만이 세상의 구속을 위해서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유일하신 독생자를 주셨다. 따라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며, 이는 인간의 모든 다른 길이 차단되었음을 의미한다.
인류의 머리였던 아담과의 언약이 그에 의해 파기되었을 때 인류는 그 결과로 하나됨을 잃고 각자 자신을 위해 스스로 속죄해야 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속죄의 요구는 하나님의 사랑의 진노를 충족시키고 그 사랑에 진심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야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통한 친교의 자리로 다시 오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은 사람에게 그렇게 행할 능력과 의지가 없기 때문에 불가능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이 오직 진노와 혐오와 거절을 내뿜을 때 누가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 수 있겠는가? 누가 그 진노를 감당할 능력을 갖고 여전히 계속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능력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더욱이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픈 의지를 잃었다. 죄로 인하여 그의 마음과 삶의 방향은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섰다. 그는 타성의 법칙의 결과로 인하여 계속 하나님과 반대 방향을 고집하였다. 따라서 사람이 하는 모든 행위는 그 의도가 아무리 선하게 보일지라도, 아무리 이상적으로 행할지라도,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멀어졌다. 더욱이 인간 스스로 정한 이상주의는 그 본질에 있어서 언약의 율법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도리어 불경건하였다. 이에 우리는 날마다 죄의 빚을 더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깨끗하고 바르게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한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죄하고 자신을 바르게 고치려고 계속 노력한다. 하지만 우리는 독자적으로 서려는 소욕만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맞추려고 하지 않고 스스로 세운 기준을 충족하려고 한다. 하나님의 공의를 알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주장에 대해 알 수도 없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기를 원하여 자신의 양심을 지켜 살면서 자기의 삶을 가치있게 하려고 한다. 이때 우리는 양심으로 삶의 가치를 측정한다. 하지만 이 방법으로는 본질적으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 또한 그들의 수고는 헛수로로서 끝이 없다. 그 이유는 스스로 자족하려는 격리된 자아를 결코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자신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죄값을 완전히 치를 수 없음을 고백하면서 도리어 “날마다 우리의 죄책을 증가시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교리 문답의 이 고백은 우리의 깊은 진심에서 나오는 고백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려는 시도를 완전히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의 상태는 마치 어떤 사람이 숲을 걸으며 나무와 나무잎에 의해 그 시야가 가려진 것과 같다. 그는 숲을 다 지난 후에야 막히지 않은 시야를 얻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날 때 시야가 열려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다. 즉, 우리의 격리된 독자적인 상태를 포기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게 될 때 하나님의 공의를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주님과 관련하여 내 자신의 독립적인 상태를 포기할 때에만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시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상태에서 하나님의 공의는 만족될 수 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말할 때 종종 대속을 잊는다. 하지만 그리스도란 보증, 즉 우리가 했어야 할 일들을 대신 후원하시는 분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는 대리적 보증자로서 처음부터 우리를 대신하셨다. 하나님의 언약이 은혜의 언약으로 회복되는 바로 그때부터 하나님은 그분의 요구를 우리 각자에게 요구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머리에게 요구하셨다.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은혜의 언약을 체결하신 의도였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는 두 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성경은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충족하심을 선포하며 그 앞에 우리를 둔다. 이때 우리는 자신에게서 아무런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배운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의 이 두가지 역사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의지하기보다 끊임없이 자신을 의지하며 헛된 노력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과 시도가 완전하게 헛되다는 것을 알아야 그리스도를 알 수 있다. 복음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을 초라하게 만드는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충족하심을 증거하면서 인간들의 독자적인 시도와 노력을 부인하며 거절한다. 복음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는 자신을 포기하고 믿음을 취하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자 한다
5) 하나님의 진노의 짐을 감당하심
교리 문답은 일반 피조물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값을 치를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본다. 그 답변으로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은 인간이 저지른 죄를 위해 다른 피조물을 형벌하지 않으실 것이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에는 구분이 있다. 우리는 식물세계와 동물 세계를 구분하여 언급한다. 또한 인간 세계와 동물의 세계를 구분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늘과 땅의 분명한 차이를 알 필요가 있다. 천사의 영역에서의 타락은 이 땅에 저주를 가져오지 않았다. 그 반대로 인류의 타락은 천사의 영역에 영향을 끼쳤다. 그 이유는 천사들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친교를 도움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두 세계를 분명하고 정확하게 구분하여 말한다. 그러나 이 두 세계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본질상 천사의 세계와 사람 세계의 관계에 있어서 사람의 죄가 천사의 세계에 저주를 자져오지는 않는다. 이 두 세계는 상대적으로 독립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천사들과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서로를 보증할 수 없다. 인간이 천사를 위해 보증의 일을 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며 마찬가지로 천사도 사람을 위해 보증하는 일을 할 수 없다. 이는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 가운데 최고의 지위에 있고 천사보다 더 높은 지위로 지음받았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는 사람과 저등 피조물 사이의 관계가 있다.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이 세상의 머리 자리에 놓였다.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의 머리로서 모든 피조물과 유기체적인 관계를 갖는다. 따라서 사람이 다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으로써 저등 피조물에게 덮였던 저주는 걷히게 되었다. 그러나 저등 피조물이 사람의 죄값을 치를 수는 없다. 이는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히 10:4)이기 때문이다. 천사들과 사람은 같은 언약 아래 있지 않는다. 그러나 이 땅의 모든 피조물들은 사람과의 언약에 포함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 언약 안에서는 머리인 사람만이 스스로에 대해 책임질 수 있다.
더욱이 교리 문답은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짐을 감당할 수 없고, 다른 피조물을 그 진노에서 구원할 수도 없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한다는 것은 단지 그 진노를 견디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많은 피조물들과 또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겪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다는 차원에서의 감당이다. 어떤 피조물이 그 진노를 견뎌낼 수 있겠는가? 어떤 피조물이 저주를 제거할만큼 그 진노를 풀어줄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그 진노를 당하면서 하나님을 완전하게 등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분노는 그분을 대항하여 반역을 일으킨 모든 피조물에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이때 피조물의 고통은 속죄의 능력과는 무관하며 속량(redemptive)의 효력이 없다. 따라서 그 어떤 피조물도 다른 피조물을 위해 자신을 효력있는 속죄물로 드릴 수 없다. 이는 어떤 피조물이라도 사랑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머리가 우리를 속죄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분명하게 알 필요가 있다. 우리의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는 아담의 자리를 취하셨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호의를 누리며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그 사랑과 호의를 택하여 붙들라는 소명을 주셨지만, 아담은 범죄하였다. 이때 아담은 우리의 머리였기 때문에 우리도 그와 함께 범죄하였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택하여 믿음 안에서 그 사랑을 붙드셨다. 또한 그리스도는 우리를 속죄하기 위해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시며 완전하게 버림을 받으셨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진노를 감당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사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에 계속 응답하셨다. 그리스도 외에 감히 어떤 다른 피조물이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유지하는 것은 피조물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진노를 감당할 수 있어야 속죄하는 희생 제물이 될 자격이 된다. 그러한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성향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내려 놓으신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유인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불경건한 자들이었으며 진노의 자녀들이었다. 우리 스스로에게는 아무 것도 하나님께 바칠 것이 없었다. 원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었고 나아가 그 사랑을 가볍게 여기고 거부한 우리들이었다. 그러한 우리가 무슨 사랑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겠는가?
또한 우리의 인간적 사랑은 아무런 근거없이 사랑하거나 또는 아무런 기대할 것이 없는 죄인을 위해 죽음까지 줄만큼 사랑할 수 없다. 성경은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롬 5:7)이라고 증거한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간적 사랑과는 완전하게 달랐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롬 5:10). 기껏해야 오직 원수인 대상을 위해 사랑 가운데 자신의 생명을 바친다는 것은 그들에게 뭔가 사랑 받을 만한 요소가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초월하는 사랑이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셨다. 하나님의 호의 언약이 사람에 의해 깨어졌을 때 인류는 하나님의 원수로 선포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에게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가운데서도 다시 사랑 가운데 사람을 바라보셨다. 사람이 다시 사랑으로 하나님께 반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에 의해 재창조될 필요가 있었다. 사랑 가운데 사람을 바라보시던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가운데 모든 것을 사람에게 주실 준비가 된 사랑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그 사랑을 그리스도가 우리가 아직 원수였을 때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확증하셨다. 그러한 사랑을 주는 것은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초월한다.
하지만 그러한 사랑만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격리된 인간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가로 막힌 담을 무너뜨려야 하셨다. 그 일은 인간의 사랑으로는 가능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항하는 우리의 독립성을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포기를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시는 사랑으로 먼저 우리를 구원하셔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키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내어 주셨다. 그후 그리스도는 그 사랑에 의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실 수 있으셨다. 이 모든 일은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들이다. 오직 우리의 대속물이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만 그분이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샘솟는 사랑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오직 진노만을 나타내실 때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이는 모든 것을 무조건적으로 줄 수 있는 사랑이 피조물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값을 대신하여 자신을 바칠 수 있는 피조물은 있을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그리스도 밖에는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분이 없는 것이다.
6) 중보자
중보자라는 용어가 교리 문답의 제 15 문에서 처음 등장하고 있다. “우리는 어떠한 중보자와 구원자를 찾아야 하는가?” 교리 문답이 중보자와 구원자를 함께 연결하여 언급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아마 중보의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중보자를 생각할 때 교리 문답의 의도처럼 당장 구원을 생각해야 한다. 이는 일반적인 중보에 대한 개념은 성경과 교리 문답이 뜻하는 바와 다르기 때문이다. 일반 문화에서는 중보자를 조정자(conciliator) 또는 관계 촉진자(facilitator)로 언급하곤 한다. 우리가 교리 문답의 의도를 따르고자 할 때, 중보자와 조정자의 의미는 별다르지 않다. 언약을 맺은 양 측이 조화롭게 살 때는 중보자 또는 조정자가 필요없다. 서로 대사를 주고 받을 수는 있어도 그들이 중보 기능을 갖지는 않는다. 오직 관계가 깨어졌을 때, 중보자가 필요하며 중보자의 역할은 양 측의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교리 문답의 의도와 중보의 목적을 이해할 때 우리가 ‘아들’을 창조를 위한 중보자라고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실 때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는 중보자가 필요 없었다. 즉, 바르게 고쳐 놓아야 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이미 ‘아들’을 통해 그분의 사랑을 사람에게 주고자 하셨다. 하나님은 영원한 ‘말씀’이신 ‘아들’을 통해 인류를 위하려는 모든 것을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은 특별히 영원한 ‘말씀’에 의해 지어졌다. 하지만 이 역할 때문에 ‘아들’이 중보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혹시 ‘아들’을 대사 또는 사절단으로 언급할 수는 있다. 하지만 ‘아들’을 창조의 중보자로 언급하는 것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대립과 견제가 있었던 것처럼 주장하는 이원론적 사상에게 기독교에 발을 붙일 기회를 줄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리 문답의 용어 사용에 따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자로서 중보자와 구원자를 언급한다.
여기서 중보자의 위치는 유일하다. 보통 중보자의 자격 요건은 양 측에 관련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중보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모든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 편에 있던지 아니면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이 자기 자신 외에 다른 어떤 존재에 의해 다시 사람을 사랑하도록 동기부여를 받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화목은 일방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주도해야만 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세상을 서로 화목하게 하셨다 라고 말하지 않고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고후 5:19)라고 말한다. 즉, 이 중보자는 완전하게 하나님 편에 서 계신 분으로써 하나님 자신이셨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사람을 대표해야 했다. 이 목적을 위해 그분은 사람이 되셨다. 그러므로 교리 문답은 우리는 “참 인간이며 의로운 사람이어야 하고 동시에 참 하나님”이신 중보자를 찾아야 한다고 고백한다.
중보자는 인류의 대표자로서 행동하여야 한다는 사실에서 그분의 중보 역할과 머리 역할은 서로 뗄 수 없게 된다. 오직 인류의 머리만이 중보자로서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은혜의 언약의 머리로써, 또는 하나님에 의해 회복된 언약 안의 머리로서, 또는 둘째 아담으로써 중보자 역할을 감당하셨다.
그리스도의 중보자 역할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따라 영원전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 내에서 특별한 구분을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하나의 경륜 내에는 모든 창조와 재창조의 계획이 담겨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영원전부터 결정된 영원한 구속 또는 구원의 작정이 있었다. 이를 우리는 구별해야 한다. 우리는 영원전부터 정하신 하나님의 작정 안에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세 위격이 각각 하실 일이 정하여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결정 안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주시고, ‘아들’은 화목을 가져오시며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연합시키고 또한 세상을 새롭게 하신다. 이는 세 위격 사이에서 상호적으로 세우신 언약의 형태의 결정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구속의 언약을 언급할 수 있다. 구속의 언약은 세 위격 사이의 언약이다. 이 점에서 구속의 언약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인류 사이의 은혜의 언약과는 다른 것이 된다. 물론, 이 두 언약 사이에는 은혜의 언약이 구속의 언약 위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서로 연결된다. ‘아들’이 구속의 언약 내에서 자신을 우리의 구원자로 자원하셨기에 이 땅의 그리스도로 오셔서 은혜의 언약의 머리로서 행하신 것이다.
우리는 구속의 사역, 즉 재창조의 사역 뒤에 세 위격 사이의 언약이 존재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성경은 많지는 않지만 창조의 경우에 있어서도 세 위격 사이의 역할을 언급한다. 즉, 창조를 위해서도 거룩한 삼위일체의 상호 언약이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잠 8:22-23)라고 계시한다. 여기서 ‘가지셨다’는 의미와 영원한 지혜로서의 아들이 ‘세움을 받았다’는 의미는 ‘아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이었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 가운데 ‘아들’이 영원한 지혜로 지정되었다는 뜻이다. 잠언 8장이 가르치는 것은 모든 것이 ‘지혜’를 통해 지어졌다는 사실이다. 요한복음 1장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따라서 잠언 8장에 의하면 하나님의 하나의 경륜 안에는 세 위격 사이의 언약 또는 결정이 있었으며 그 언약 또는 결정에 따라 각 위격의 역할이 구별되어 있었다. 그 결정에 따르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고자 하셨던 호의와 친교의 모든 복들은 영원한 ‘말씀’ 또는 ‘지혜’를 통하여 사람에게 허락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담과 맺은 하나님의 호의 언약 역시 세 위격의 언약 내에서 결정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차이를 잘 주목해야 한다! 창조과 관련한 하나님의 경륜의 결정에 따르면 영원한 ‘말씀’으로서의 ‘아들’이 하나님의 호의의 언약의 머리인 아담에게 하나님의 호의와 교제를 허락한다. 그러면 아담은 자발적인 선택을 통해 그 교제 안에 머물 수 있었다. 그러나 구원을 가져오는 은혜의 언약에서는 육신이 되신 말씀이신 ‘아들’이 새인류의 머리로서 행동하신다. 창조의 결정에서는 영원한 ‘말씀’과 우리의 머리가 서로 ‘교제’ 하였지만, 구원의 작정에서는 영원한 ‘말씀’과 우리의 머리가 똑같은 분이다. 이에 우리는 ‘아들’이 친히 육신이 되어 우리의 머리로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 앞에 서게 된다. 이것이 바로 교리 문답이 고백하는 기적이다. 즉, 우리의 중보자는 “참 인간이며 의로운 사람이어야 하고 동시에 참 하나님이어야 한다. 이는 모든 피조물보다 능력이 뛰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뒷부분의 다른 과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사이의 연합을 다루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과의 교리 문답에서 중보자의 하나됨 또는 연합의 고백을 잠간 대하게 된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둘째 아담이 되어 은혜의 언약의 머리로 오셨다는 고백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우리의 머리가 되셨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제는 영원한 것이 확실하다. 이는 하나님의 호의 언약에서는 그 언약의 성패가 아담의 선택에 달려 있었지만, 은혜의 언약에서는 그 모든 것이 둘째 아담의 선택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즉, 둘째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을 대항하는 선택을 할 수 없으므로 은혜의 언약은 결코 영원토록 깨어질 수 없다.
우리의 머리가 되신 영원한 ‘말씀’은 우리를 위해 대속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 나타나셨다. 은혜의 언약으로 인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그리스도의 대속하는 고난이 없이는,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자신을 그 언약 안에서 우리에게 영원히 매는 일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다. 이에 그분은 우리의 머리로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을 그분의 피로 값주고 중보자가 되셨다.
이 중보자는 지금까지 논한 모든 조건들을 다 만족시켰다. 그는 사람이었으며, 따라서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였다. 또한 그분은 인간의 마음으로 자신의 소유된 백성을 사랑하셨다. 교리 문답은 그가 먼저 “참 인간이며 의로운 사람”이라고 고백함으로써 중보자의 인간으로서의 사랑을 언급하게 된다. 그는 사람으로써 새인류의 머리가 되어 자기 백성을 대속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그리스도는 자신을 인간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자기 백성에게 동시에 묶으셨다.
우리는 중보자의 인간적 사랑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교리 문답은 이 부분을 먼저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머리로, 즉 둘째 아담으로 여길 수 없다. 그리스도가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우리의’ 중보자가 아닌 것이 된다. 겟세마네에서 시험 받은 것은 그분의 인간적 사랑이었다. 한편, 하나님의 사랑은 유혹에 빠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시험 받을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는 겟세마네에서 끈질기게 하나님과 자기 백성을 붙드셨다. 특히 우리는 그리스도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에서 중보자의 인간적 사랑이 절정에 이르는 것을 보게 된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그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는 그의 마지막 고난의 시작점에서 제자들의 발 앞에서 자신을 낮추시고 그들 가운데 가장 작은 자로 가장 천한 자리에 앉을 수 있으셨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러한 그리스도를 버리고 곧 바로 죄 가운데 빠질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는 이렇게 자신을 낮추심으로써 자신에게 기대되었던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하셨다.
하지만 이미 하나님은 그에게서 얼굴을 돌리시고 그를 향해 진노를 나타내기 시작하셨다. 과연 중보자는 하나님과 자기 백성을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그의 인간적 사랑으로 하나님과 자기 사람들을 붙들 수 있을까? 만일 그리스도 안에 오직 인간의 사랑만이 움직이고 있었다면 그는 자신을 완전히 버려야 하는 마지막 순간에 항복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친히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사랑을 지탱하여 주었다. 즉, 그의 인간적 사랑은 신적인 사랑에 의해 힘을 얻고 끝까지 순종 가운데 결코 쓰러지지 않고 겸손하게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고백하는 최고의 경지의 인간적 사랑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유순한 복종 안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은 대속하는 희생이 되었으며 그리스도는 이를 하나님께 화목 제물로 드렸던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간적 사랑을 먼저 말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구속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인간적 사랑의 안과 뒤에는 맨 처음부터 그분의 신적인 사랑이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것이 철저하게 인간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완벽하게 신적이다. 이에 우리는 중보자의 하나됨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 하나됨 또는 연합은 그분 안에 있는 인간적인 요소와 신적인 요소의 구분을 없애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교회는 그리스도의 인간적 속성과 신적인 속성의 차이를 고백하여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구원 사역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신-인의 동일한 하나의 의지로 그 사역을 마무리하였다는 사상을 거부하여 왔다. 이를 위해 교회는 중보자 안에는 하나님의 의지와 사람의 의지, 이렇게 두 종류의 의지가 있었음을 선언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의해 그분은 두 가지의 의지가 있었고 또한 두 가지 사랑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며 의로운 사람이어야 하고 동시에 참 하나님이어야 한다.” 이 교리 문답은 명확하고 자명한 진리일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진리 없이 그리스도와 연결될 수 있는 살아있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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